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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32)화 (32/130)

32화

“바, 밖은 별일 없는 게지?”

왕은 침전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대공을 제 침실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것이 일국의 왕으로서 수치인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율란이 별일 아닌 걸 확인해 줄 때까지 재차 물었는데, 그 꼴이 꼭 쥐 한 마리가 무서워 숨어 버린 곡식 창고의 관리인 같아 한심해 보였다.

율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충 대답했다.

“거대한 히오칸 세 마리가 궁을 습격했습니다.”

“히익-! 히, 히오칸이면….”

“다리가 1000개 달린 지네형 마물입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욜록도 궁내를 침범했습니다.”

“요, 욜록…. 허억….”

왕은 숫제 덜덜 떨고 있었다.

‘비루먹은 개새끼도 저 꼴보다는 점잖겠군.’

율란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왕을 진정시켰다.

“모두 소탕하고 지금은 사체 처리 중에 있습니다.”

율란의 시큰둥한 대꾸에 왕은 무릎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멀찍이서 이를 보고 있던 시종장이 망극한지, 어서 다가와 왕을 부축하여 침전 한편에 있는 소파에 그를 앉혔다. 금사로 연꽃이 수놓아진 비단 소파였다.

그 사치스러운 것에 주저앉고도 왕은 비루하기 그지없는 꼴이었다.

“왜, 왜 마물이 수도로 들어 온 겐가. 수도에는….”

“법황이 쳐 둔 신성 결계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 그래. 그게 있는데 왜….”

“한번 주교 쪽에 연락을 해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일단은 모두 소탕하였으니 신은 이만 물러 가 보겠습니다.”

율란은 넌지시 주교 쪽으로 책임을 지우고는 묵례했다. 왕은 그가 물러남을 허락지 않았으나 이미 등을 돌린 참이었다.

왕이 더듬더듬 법황의 소싯적 이름을 읊는 것은 듣지도 않았다. 그대로 왕의 침전을 나선 율란의 옆으로 서쪽 숲으로 향했던 베네딕이 따라붙었다.

“히오칸은 이미 투르운 공작께서 처리한 뒤였고 욜록들의 사체는 그리프 후작님의 상단을 통해 처리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지카리가 현장에 있던가.”

“네. 비행 중이셨습니다.”

예민한 지카리는 이 시기에 수도에서 떨어진 숲에서 나오지 않은 채 산새들과 생활한다. 어쩌다 지카리가 궁내에 있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더 묻지 않은 율란은 작게 끄덕였다.

“예상보다 토벌 대회를 앞당겨야 할 것 같으니 각 가문에 소식을 넣어. 준비되는 대로 출발한다.”

“왕께서 윤허를….”

“노인네는 지금 공포에 오락가락 중이니 잘 구슬리면 될 거야. 그건 볼트윅 공이 해 주겠지.”

검은 가시 기사단의 좌장군 베네딕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주군을 바라보았다.

레이먼이 율란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는 수도 내 다섯 살짜리 평민 꼬마도 아는 일인데 때로 저렇게 무섭도록 신뢰하는 것이 웃겼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왕국 내의 딱 네 명, 한 명의 대공과 두 명의 공작, 그리고 또 한 명의 후작만이 서로의 고통과 끊을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이해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원수 사이라고 해도 같은 아픔을 공감한다면 어느 정도의 유대는 생기게 마련이다. 율란이 레이먼을 믿지 못하고 레이먼이 율란을 증오한다고 한들, 마물 토벌이나 나시우의 저주에 있어서 같은 운명을 공유한다는 건 그들 중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베네딕은 이상한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방금 전 만난 니키엘을 떠올리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각 수장들은 백금발과 벽안의 왕족을 차지하기 위해 대대로 사이들이 좋지 않았지.’

한 대의 한 명씩, 그것도 네 가문 중 한 곳에서만 짐승으로 화하는 수장이 태어난다고 한들, 오래도록 권력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 각 가문에서는 자신들의 수장이 짐승으로 화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백금발과 벽안의 오시니스와 결혼하여 대를 잇기를 바랐다.

그래야 그다음 대에 짐승으로 화하는 아이가 또 한 번 더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믿음뿐으로, 짐승으로 화하는 아이는 공평하게 순서를 지켜 태어났다.

그저 인간의 욕심만으로 네 가문의 사이는 대대손손 서로를 적대시해 왔다.

그러나 이번 대의 수장들은 선대왕들의 대를 이어 온 탐욕과 갈라 치기, 또 니키엘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과 혐오 때문에 때아닌 수절을 선언하고 아무도 니키엘의 마음을 얻는 구애 활동을 펼치지 않았다.

니키엘이라는 인간, 또 그의 부왕의 탐욕이 혐오스러웠던 수장들 개개인의 의견이 합을 이룬 것이다.

‘그래도 광증이 견디기 힘들어지실 때가 반드시 올 텐데….’

베네딕은 오직 그것이 걱정이었다.

척박한 북부의 이테렌이 오로지 율란 발트에게만 의지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없으면 이테렌 역시 무너질 것이다.

선대 공작은 영주민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착취했다.

안 그래도 농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는 땅인지라, 과부하된 세금에 허덕이다가 야반도주하는 영주민들이 늘어만 갔다.

율란이 영주 자리에 오른 이후에 이테렌은 눈부신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가 사냥해 온 마물로 각종 공예품을 만들어 오시니스 각지에 납품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율란 발트에게는 안정이 필요했다.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영주민들을 위해서. 율란 역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베네딕은 앞서가는 태산 같은 등을 응시하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 뒤를 따랐다.

***

니키엘의 기본적인 성향은 내향적인 성격이었다. 내향적일 뿐 내성적이지는 않아 할 말은 하고 살지만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먼저 말하지 않는 것도 그의 그런 성향 탓이었다.

낯을 가려 오히려 말이 많아지는 내향형이 있는가 하면 낯을 가리면 극도로 말수가 줄어드는 내향형이 있는 법인데, 니키엘은 이 후자에 속했다.

덕분에 이 분위기에 질식해 죽을 것 같은 건 알레윈뿐이었다.

“그, 전하…. 마물은 진압되었으나 혹시 모르니 궁에 가시면 당분간은 궁내에서만 계시는 것이….”

“알겠네.”

뭐라도 말이나 걸어 볼까 싶어 당부를 한다는 것이 너무 잔소리처럼 튀어나간 걸까 걱정하는 찰나 니키엘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투였다. 때문에 알레윈만 다시금 어정쩡하게 굳어 버렸다. 대체 왕자궁까지 가는 길 동안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타개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웅을 저에게 맡긴 율란조차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알레윈이 기억하는 니키엘은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각하께 무척이나 치근덕거리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의 니키엘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 보였다. 너무도 깔끔하여 말 붙일 구석도 없었다.

율란을 비롯하여 각 수장들에게 추파를 던지던 니키엘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태어나 놓고 마구간지기와 붙어먹는 기상천외한 짓을 저지르던 왕자. 그것이 니키엘에 대한 총평이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마구간지기는커녕 일국의 왕이 와서 말을 붙여도 이렇게 냉기가 뚝뚝 흐르실 것 같은데.’

알레윈 역시 율란을 따라 참석한 연회 등에서 니키엘을 봐 왔었다. 주위 귀족들은 모두 그를 무시했다.

신성력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마땅한 곳에 쓰지 않고 간음과 퇴폐의 길을 스스로 자처하는 오시니스의 후예라니.

귀족들은 그의 아름다운 외모를 찬양하여 누구든 그를 더듬고 싶어 하면서도 뒤로는 그를 신분만 높은 남창이라 폄하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왕자궁을 향해 걷던 중 궁내부 대신 중 하나인 가스파르 백작과 뤼민 자작을 만났다.

“전하, 어찌 이리 하수상한 날에 내궁 산책을 나오셨습니까.”

가스파르 백작은 왕족 앞에서 인사도 하지 않고 제 신분을 밝히지도 않은 채 니키엘에게 말을 걸었다.

걱정을 가장했지만 그의 말투에서는 니키엘을 향한 무시가 들끓었다. 상황에 미묘하게 맞지 않는 현학적인 말투를 사용하여 니키엘에게 ‘이 정도도 모르는 바보 왕족’이라는 꼬리표를 씌우고 싶은 듯했다.

그의 옆자리에서 빙글빙글 웃어 대는 뤼민 자작은 가스파르 백작이 데리고 다니는 하수인으로, 지금도 좋은 구경을 시켜 주겠다며 끌고 온 것이 분명했다.

귀족답지 않은 졸렬한 행동이었다. 알레윈은 순간 울컥했으나 제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니키엘에 귀족들 사이에서 그런 취급을 받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데다가 그는 솔직히 말해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귀족들의 모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 다행인 건 감이 좋아 자신에 대한 말투와 표정에 어린 멸시는 잘 눈치채고는 했는데, 이마저도 요령을 깨달은 귀족들이 사근사근한 말투와 봄바람 같은 미소로 모욕하자 긴가민가하면서 저도 마주 웃어 주는 바람에 그 좋다는 감조차 쓸모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니키엘의 부왕은 막내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도 귀족들을 나무란다거나 아들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지 않았다.

부왕의 방치와 귀족들의 따돌림 속에서 니키엘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완전히 알아차리지는 못한 채 열등감을 키워 왔다.

알레윈은 지금도 그럴 거라 여겼다. 그러나 그 생각이 보란 듯 깨어진 것은 니키엘의 또렷한 발음이 직조한 서릿발 같은 호통 때문이었다.

“그대는 대체 누군데 왕족의 앞길을 막고 본인이 누군지 밝히지도 않는가. 내가 얼굴을 기억 못 하는 걸 봐서는 나의 하나뿐인 부왕도, 법황 성하도 아닐진데 어디서 내 앞을 막냐는 말이야.”

“…네?”

“여봐라, 얼라리! 왕족의 앞길을 막은 이 자를 불경죄로 다스리겠다. 추포하라!”

알레윈은 그제야 ‘얼라리’라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말이 저를 부르는 것임을 깨닫고 부랴부랴 움직여 가스파르 백작의 살찐 팔을 꺾어 뒤로 잡았다.

“허억! 저, 전하-!”

놀란 모양인지 소용돌이 모양으로 꽈 둔 그의 콧수염이 파르르 볼품없이 떨렸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지 당황과 모욕, 팔을 구속당한 옅은 공포가 가스파르 백작의 투실한 얼굴 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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