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33)화 (33/130)

33화

빙하처럼 차가워 보이는 벽안이 그런 백작을 바라보다가 돌연 풀어졌다. 한순간에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느낌이었다.

니키엘은 봄날을 맞이하여 망울이 툭 터진 꽃처럼 웃으며 알레윈을 만류했다.

“예끼, 이 사람아. 충성심이 너무 강한 거 아닌가. 그만하면 됐네. 놔드리게.”

“네? 예, 전하.”

알레윈은 두 번 묻는 일이 드문 사람이었다. 그가 뼛속까지 군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늘 상관을 향한 ‘존명’의 두 글자를 몸에 새기고 사는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니키엘의 말에는 저도 모르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순간 바로 백작을 진압했던 팔을 풀기는 했지만 얼라리, 아니 알레윈은 완전 얼라리요 상태였다.

지금 펼쳐진 상황이 무엇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레윈에게는 너무도 빠른 변화였다.

그것은 가스파르 백작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멋으로 기른 콧수염은 곱슬인 탓에 끝이 화살촉처럼 말려 있었는데 그자가 형편없이 입가를 떨어 대니, 그 끄트머리까지 미관상 좋지 못하게 파들거렸다.

여느 때처럼 왕족인 니키엘을 능멸하여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싶었던 가스파르는 팔이 풀어진 뒤에도 충격에 다소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평소 가스파르 백작은 니키엘에게 불만이 아주 많았다. 정확히는 니키엘과 연관된 네 명의 수장들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네 명의 수장들은 귀족 사회에 어울리지 않은 채 저들끼리 뭉쳐 다른 귀족들에게 배타적이었다.

고고한 학처럼 도도하기 이루 말할 것 없는 행동을 하고는 했다. 오시니스의 귀족이라면 누구든 그들을 동경하는 것도 별로였다.

오만한 작자들. 어쩌다 말을 걸면 서늘한 눈빛을 돌려주기 일쑤이니, 오래도록 대를 이어 온 귀족임에도 근래 들어 이상하게 입지가 좁아진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한 가스파르로서는 아니꼽기 그지없었다.

오시니스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해 1년 내내 연회가 있는 편인데도 왕이 직접 주최한 궁중 연회가 아니면 참석하지 않았다. 작은 소모임은 물론이거니와, 사교 클럽에도 나오지 않고 직접 연회를 주최하는 일도 없었다.

귀족들이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궁중 회의에는 참석률이 높았지만, 그마저도 파회 후 바람 같이 사라져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를 사교의 장으로 여기는 다른 귀족들이 회의가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 살롱 등으로 향하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지난번 겨울 연회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가.

‘대공 각하, 격조하셨습니다. 주신의 은혜가 창창하여 올해도 겨울 연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지 않았습니까. 오늘만큼은 마물에 대한 근심을 내려놓고 연회를 즐기시는 건 어떨지….’

간만에 발트 대공까지 참석했길래 친한 척 말을 걸었었다. 당시 가스파르는 오늘처럼 뤼민 자작에게 자신이 구상 중이던 여러 사업에 대해 설명하던 중이었다.

뤼민 자작은 이제 막 수도에 발을 들인 지방 영주로 돈은 많아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위인이었다. 잘 구슬려 사업 투자를 구실로 주머니를 열게 할 속셈이었다.

시골 촌놈의 신임을 얻기 위해 가스파르는 대범하게 율란 발트를 공략했던 것이다. 그와 그저 작은 인사말 한마디라도 나누는 모습을 자작에게 보인다면 그것이 계약의 초석이 될 것이었다.

백작은 율란이 자신의 인사를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도 내에서 생활하는, 자각을 갖은 인간이라면 인사 정도는 받아 주겠지.’

그것이 궁중에 출석하는 귀족들이라면 당연한 예의였기 때문에 백작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싸늘한 냉대였다.

율란은 제게 말을 거는 가스파르를 금광서 막 캐낸 황금덩이가 박힌 듯한 금안으로 서늘하게 내려 보더니 그대로 걸음을 옮겨 맥아로 만든 증류주를 입에 털어 넣고는 연회장을 떠나 버렸다.

백작은 당황했다. 뤼민 자작에게 뭐라도 선보여야 촌놈이 저를 우러러봐 주머니를 열 텐데 낭패다 싶어졌다.

‘하하…. 대공 각하께서 오늘은 피곤하신가 보오.’

댈 수 있는 핑계는 그것이 다였다. 가스파르 백작은 수치에 몸을 떨었다.

개국 공신 정도는 아니더라도 오시니스 왕국이 건국된 후로 쭉 명맥을 유지 중인 대(大) 가스파르가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 말을 거는 저를 그런 식으로 지나친다는 말인가.

차라리 레이먼 볼트윅 공작을 찾아가 말을 걸 것을 그랬다며 후회하기도 했었다.

레이먼 역시 콧대 높기는 해도 율란처럼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뤼민 자작 앞에서 잘난 척을 할 거면 상대를 레이먼으로 고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그러나 가스파르의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만회하기 위해 레이먼에게 말을 건 순간, 늘 봄바람을 머금은 듯 산뜻하게 웃던 얼굴을 내팽개치고 잔뜩 인상을 구긴 채 가스파르가 내민 잔을 어깨로 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덕분에 가스파르는 그날, 과실주를 얼굴로 받아 마셔야 했다. 애써 기른 콧수염이 푹 젖을 정도였다.

나중에야 당시의 레이먼이 그런 식으로 자신을 무시한 이유가 니키엘로부터 공개적으로 ‘레이먼 자지는 말자지다!’라는 폭탄선언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미 그해 풍년이 든 포도로 만든 와인이 제 콧수염에 잔뜩 스며든 후였다. 두 번 망신을 당한 가스파르는 치욕에 몸을 떨었다.

‘제까짓 것들이 대체 뭐가 그리 잘났기에.’

그래봤자 짐승의 터럭을 프록코트에 매번 묻히고 다녀야만 하는 천한 인생들이 아니겠는가.

귀족이라면 귀족답게 소작을 부리고 영지의 세금을 받음이 옳은 일이지, 직접 나서서 마물을 처리하고 그 마물의 뼈를 판 값으로 재산을 늘리는 짓은 안연 거리에 있는 푸줏간 주인이나 하는 일이었다.

가스파르는 같은 귀족 주제에 콧대가 높은 그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대놓고 그들을 배척할 수는 없었다. 각 가문이 갖고 있는 상징성도 그러하지만, 개개인으로 보더라도 대단한 인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율란 발트 대공은 오시니스의 제1방어선인 군사 총독, 레이먼 볼트윅은 수도를 수호하는 방어 벽력, 마법학의 천재로 불리는 루시안 투르운과 오시니스의 창공을 책임지는 지카리 그리프까지.

가스파르의 깜냥으로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한낱 저주받은 짐승들일 뿐. 그들의 저주를 해주할 수 있는 것은 왕의 아둔한 아들, 니키엘 오시니스가 유일했다.

찬란한 백금발, 시린 호수와 같은 벽안을 타고 태어난 지고의 미인. 그러나 니키엘 오시니스는 완벽한 사람이 없게 하겠다는 신의 미명에 비호받아 외모에 한참 떨어지는 행동거지를 갖고 있었다.

넘치는 신성력에도 불구하고, 걸레도 그런 대걸레가 없을 정도로 난잡하게 노는 니키엘은 수도 귀족들 사이 경멸의 대상이었다.

모두들 니키엘과 한 번이라도 잠자리에 들기를 원했지만, 그와 잠을 잔 뒤로는 함께 침대에 올랐다는 사실이 영원히 비밀로 지켜지길 원했다.

천한 이도 아니고 오시니스 왕국의 왕자이자, 해주의 운명을 타고난 백금발에 벽안임에도 그런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아무도 니키엘을 존경하지 않았다. 그의 신성력이 법황보다 높다고 해도, 그가 아무리 초대 왕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왕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가스파르는 뤼민 자작과 함께 궁정을 걷던 중 굉음과 함께 마물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혼비백산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궁 안에는 네 명의 수장들이 모두 입궁해 있었다고 했다. 난리는 빨리 안정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안심이 되지 않아 어디 숨어 있을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가스파르는 궁정 안을 걷던 니키엘을 발견했다.

가스파르의 커다란 머리통 속 작은 뇌가 열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작고 불쌍한 뇌가 한 가지 되도 않는 개책을 마련한 것이다.

지난겨울 연회 이후로 뤼민 자작을 온갖 곳에 끌고 다니며 혼을 쏙 빼놓아 율란과 레이먼이 제게 준 치욕들을 망각하게 만들었으니, 우연히 마주친 니키엘을 무시함으로써 자작 앞에서 제 입지를 다시 한번 다져야겠다는 결심이 바로 그 얼토당토않은 개책이었다.

성격이 포악하여 곁에 있으면 피곤한 성격이지만 묘하게 멍청한 구석이 있어 저를 조롱하는 말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니키엘을 골려, 지난번 일들을 보상받을 계획이었다.

왕족을 우롱하고도 멀쩡한 저를 보면 뤼민 자작 역시 저를 우러러볼 것이 자명했다.

그래서 그런 인사를 건넸던 것인데….

‘내 팔을 꺾었어…? 그것도 아프게?!’

실제 팔을 꺾은 것은 알레윈이었지만 가스파르는 분노를 느꼈다.

백치와 다름없던 이가 조목조목 내뱉은 말들 역시 타당하기 이를 곳이 없었다.

니키엘 앞에서 신분을 밝히지 않고 앞길을 막은 채 왕족인 니키엘의 신성한 걸음을 지탄하는 듯한 인사말을 건넸던 걸 완벽하게 지적해 온 것이다.

‘저 백치가 동대륙에서 유행한다는 총명탕을 먹었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빨리, 그리고 단호하게 가스파르의 잘못을 명백히 밝힐 리가 없었다.

뤼민 자작은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눈만 꿈뻑거리고 있었다. 니키엘의 눈앞에서 그를 망신 줄 때는 좋다고 희희낙락하다가 갑자기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 오히려 모든 걸 알고 있는 자 같기도 했다.

가스파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이대로 왕족 능멸죄로 처벌받으면 바보 니키엘에게 벌을 받았다는 오명을 쓰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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