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오늘 아침 일찍, 율란은 지카리 그리프를 찾았다. 그는 예의 그 무감한 목소리로 툭 내뱉듯이 말했다.
“새 새끼더러 나 좀 보자고 해.”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십니까. 그리프 후가 어디 있는지 저도 모릅니다.”
루시안의 연구실을 노크 없이 열어젖혔던 율란을 보며, 루시안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빛이 들어오자 안 그래도 햇빛에 약한 눈이 잘 보이지 않는지 이리저리 부딪히고 있었다.
그 꼴을 무심하게 보던 율란은 그대로 대꾸 없이 루시안의 연구실을 나섰다.
말을 해 놨으니 루시안이 어떻게든 지카리를 찾아 보내 줄 것이다. 정작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율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철이 덜 든 새 새끼가 며칠째 깃털 하나 비추지 않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반드시 사고를 칠 놈인데 연무장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걸 보면 어딘가에서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토벌 대회가 코 앞인데 갑자기 인간의 언어를 잊은 채 철새들과 함께 남쪽으로 날아오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직 야생성을 버리지 못한 지카리는 철새도 아닌 주제에 남쪽에서 겨울을 보내는 새들 사이에 섞여 남녘으로 향하고는 했다. 맹금류 주제에 어이가 없는 짓거리였지만 말이다.
다른 세 명의 수장들의 경우, 오히려 짐승으로 변하지 않은 것이 오래되어 이성을 잃고는 했지만 지카리는 달랐다.
늘 검독수리로 변해 있는 탓에 이성이 희미해져 정말 자신이 인간이었던 걸 잊고는 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가 새들과 짝짓기를 하든 둥지를 틀든 상관하지 않고 두었겠지만, 토벌 대회가 코앞이니 공중에서 정찰을 맡는 지카리의 역할이 중요했다.
사흘에 하루 정도는 인간의 모습으로 있어 이성을 유지하라고 말하려 했는데 이른 아침부터 어디를 간 건지 보이지가 않았다.
매년 토벌 대회 시기가 오면 각 가문의 수장들은 수도에 모여 왕의 독려를 받은 뒤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
초기에는 각 가문의 충성심이 드높아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토벌 대회를 기념하는 궁중 연회란 그저 정치적 사교와 싸움의 장이 되어 버렸다.
때문에 수도가 거점인 레이먼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른 지역에 영지를 둔 수장들도 왕궁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지카리는 나머지보다 유독 그것을 못 견뎌 했다. 가뜩이나 야생성이 발달한 지카리에게, 수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이 시기만 되면 매번 새로 변해 있기 일쑤였다.
평소 같으면 아무리 정찰에 중요 직책을 맡겼다 해도 그냥 두었겠지만, 올해는 뭔가 심상치 않았다. 오랜 시간 짐승으로 살아온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금년은 예년과 같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갑작스런 마물의 수도 출현과 새롭게 내려진 신탁이 그 증거였다. 율란은 동물적인 직감과 그 신탁의 예언적인 성격을 종합해 볼 때, 이번 토벌 대회는 유달리 느낌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연무장에서 새벽 훈련 후 지카리를 찾아 나섰던 것인데 가는 곳마다 허탕이라 짜증이 났다.
요즘 들어 왕자궁이 있는 숲에서 자주 발견되었다길래 혹시 몰라 마지막으로 그곳을 살펴보러 가는 길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미묘한 신음성이 들려왔다. 율란은 단 한 번도 그런 신음을 직접 들은 적도 없으면서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깨달았다.
순식간에 열이 뻗쳤다. 광룡의 저주에 휩싸여 빌어먹을 늑대로 돌아가는 감각과 비슷했다. 단전에 치받은 분노가 금세 정수리까지 치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율란은 반사적으로 풀숲으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뻔뻔한 걸레를 비웃으며 일국의 왕자 주제에 아무 데서나 노상 방뇨를 하듯 관계를 맺는구나, 하며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돈 뒤로는 꽤 정돈된 생활을 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니키엘이 있었다.
햇빛 아래서 더욱 빛나는 벌꿀색 백금발을 흐트러트린 채, 뺨을 붉게 물들이고 다리를 벌리고 당황한 벽안을 깜빡이는.
뱃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레이먼은 짐승으로 화하는 욕구를 풀기 위해 귀부인들을 애인으로 삼는 모양이지만 율란 같은 경우에는 검술로 욕구를 승화시키는 편이었다.
체술로 신체의 모든 걸 조절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때문에 율란은 그런 제가 낯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니키엘에게 정말 일을 치른 흔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5월의 장미처럼 뺨이 붉게 물들었다 뿐이지 입술이 젖은 채 부풀어 올라와 있거나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성적인 매력을 내뿜고 있었다. 그를 그렇게 만들고 풀 더미 위로 넘어트린 뒤, 율란의 인기척이 들리자마자 득달같이 도망친 어느 개자식의 목을 조르고 싶을 만큼.
그러니까 왜? 왜 자신이 그 개자식의 목을 조르고 싶냐 이 말이다. 율란은 이해 가지 않았다.
니키엘은 넘어진 것에 대해 시원찮은 변명을 했다. 검독수리가 저를 덮친 채 크기가 커졌다고 했는데, 율란이 알기로 그런 새는 오시니스에 딱 한 마리, 지카리 그리프뿐이었다.
‘새 새끼가 걸레한테 덤볐다고?’
수장들 중 가장 감이 민감한 지카리가 벌써 두 번이나 니키엘에게 먼저 다가간 듯했다. 율란은 생각에 잠겼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니키엘에게 동물들이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지카리가 먼저 니키엘에게 다가갔다는 사실에 기분이 더러웠었다.
작은 동물들이 니키엘에게 다가간 것을 보며, 율란은 신성력에 이끌린 동물들이 저도 모르게 주위에 몰려들었다고 생각했다.
지카리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결론을 내린다고 해도 더러웠던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니키엘은 그런 율란의 속마음 따위는 알지 못한다는 듯 꽥꽥거리더니 검술 선생을 붙여 달라고 했다. 율란도 그가 호신술을 배우려 한다는 점이 나쁘지 않았다.
정말 기억을 잃은 뒤로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건전하게 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꽤 나쁘지 않다 여기며, 그날 오후 훈련 시 율란은 니키엘의 검술 선생을 구해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2인 1조를 이뤄 대련한다.”
“네에?!”
이제 막 훈련을 마친 뒤, 무기를 점검하고 있던 검은 가시 기사단의 단원들이 곡소리를 했다.
일어설 힘도 없어 연무장 흙바닥에 누워 배 위에 올려 둔 검을 닦고 있던 놈들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그들은 방금 전 오후 훈련을 끝마치고 왕궁의 시동들이 끓여 둔 물로 뜨거운 샤워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가려던 참이었다.
북부의 요리는 투박하고 자극적인 맛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기사단원들은 수도처럼 섬세한 맛을 지닌 요리를 먹을 기회를 놓치기 싫어했다.
과실주들이 일품이라 포도주 외에는 구경할 수 없는 척박한 북부에서 온 기사단들은 매 끼니 마다 정성을 다해 식사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식사를 미뤄 두고 대련을 하라니. 가뜩이나 오늘 오후 훈련은 부단장이 아닌 단장이 직접 지휘하지 않았는가.
단장의 격한 훈련 방식에 지칠 대로 지친 기사단 단원들의 얼굴이 퀭했다.
그러나 율란은 그쪽은 보지도 않고 부단장이자 좌장군인 베네딕 솜즈에게서 기사 단원들의 명단을 받아 대략적으로 조를 짠 뒤, 한 조에 소속된 사람들끼리 대련할 수 있게끔 준비하라 명했다.
“부단장님, 저희 진짜 다리가 후들거려서 대련은커녕 감자도 못 썹니다. 단장께 말씀 좀 해 주세요!”
단원들이 울상을 지었다. 흙먼지가 가득한 그들은 같이 연무장을 굴렀음에도 멀쩡한 얼굴로 제 칼을 닦고 있는 단장, 율란 발트 대공을 흘끗거리며 앓는 소리를 했다.
베네딕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난들 방법이 있겠냐. 근위대 새끼들 와서 연무장 비우라고 하기 전에 얼른 대련 준비들이나 해.”
왕궁에 연무장이 이곳 하나뿐인 것은 아니었다. 왕궁은 매 해 마다 토벌 대회를 준비해야 했고, 그때마다 각 수장들을 수도로 초청해야 했기 때문에 기사들이 머물 숙소나 마구간 시설들이 풍부하게 갖춰진 편이었다.
지지난해 왕이 동대륙 황제와 함께 투전인지 튜젼인지하는 동대륙 특유의 패놀이로 도박을 하는 바람에 내기에서 진 값을 충당하기 위해 시설을 허물어 땔감으로 팔았다는 소리가 있었다.
차고 넘치는 사고에서 돈을 마련한 것이 아니라 왕궁에 있던 걸 떼어다 판 왕 덕분에 검은 가시 기사단은 지난해부터 왕궁의 근위대들이 사용하는 숙소와 연무장을 함께 사용해야 했다.
물론 근위대의 숙소와 시설들이 좁은 것은 아니었으나, 수도인들 특유의 잘난 척들이 심해서 검은 가시 기사단 단원들은 텃세를 당해야 했다.
지난번 시타타 시합에서도 그동안의 울분을 갚을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갑자기 벼락같이 분노한 대공이 기사단과 근위대 모두를 기합 주는 바람에 그 염원을 이루지 못했었다.
풀리지 않은 그들 사이의 응어리는 연무장 사용을 두고 번번이 마찰이 일고는 했다. 기사단 단원들이 보기에, 근위대들은 죽어라 훈련을 하지 않으려는 머저리 집단 같아 보였다.
왕궁을 지킨다는 새끼들이 배에 기름이 껴서 포커나 뒤적거리고 있는 것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차피 그렇게 빈둥거리는 동안 저들이 연무장을 사용하는 걸 봐주면 될 텐데, 아침 훈련 시 기상 점호를 하지도 않으면서 기사단이 연무장을 사용하고 있으면 득달같이 나타나 시비를 걸어 댔다.
몇 번은 자리를 비켜 주었지만, 그때마다 근위대들은 짜기라도 한 듯 훈련을 하지 않고 또다시 그늘에서 수다나 떨다가 아침을 먹으러 궁내 군인 식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