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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46)화 (46/130)

46화

그 때문에 하루라도 연마하지 않으면 성격 나쁜 단장으로부터 얼차려를 당하는 검은 가시 기사단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들의 단장은 사사로운 인간사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그들이 어떤 이유로 훈련을 건너뛰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기사단원들의 그날 훈련 참석 유무였다.

근위대들의 텃세로 인해 연무장을 사용할 수 없어 훈련을 하지 못한 사정 같은 건, 그들의 단장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이었다.

성실함을 기사의 가장 큰 자질로 치는 단장의 신념에 반하여, 우린 못 해! 하고 소리칠 수도 없었다.

싫은 놈은 나가면 그만이란 태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국 최고의 기사단인 검은 가시 기사단을 제 발로 나갈 멍청이는 없었다.

훈련을 하지 않으면 지옥 같은 얼차려가 기다리고 있는데, 당장 사용하는 것도 아닌 연무장을 오로지 텃세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니 기사단원들로서는 열이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던 두 집단 사이에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 식사 시간을 넘어서까지 연무장을 사용하여 대련하라니 솔직히 훈련이 죽을 만큼 힘들어 근위대 놈들과 싸울 힘도 없는 기사단원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얘기였다.

단원들은 퀭한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분명 그 새끼들이 또 시비 걸 텐데.”

단원들의 불평에 베네딕도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다. 그러나 단장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다.

서열을 중시하는 기사단의 성격 때문만 아니라, 그의 명령을 어기면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율란 발트는 괴물이었다. 항간에서 그를 두고 인두겁을 뒤집어쓴 괴물이라는 소리를 우스갯거리 삼아 하는 듯싶었지만, 그건 정말 율란 발트가 괴물임을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그는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괴물이 아니라, 정말로 괴물 그 자체였다.

율란의 모든 것은 인간과 남달랐다. 그의 비약적인 신체 능력, 어린 나이에 경지에 이르러 소드마스터로서의 검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될 정도로 우월한 검술, 책략에 능한 지력과 완벽하여 도리어 스산해 보일 지경인 외향까지.

수도에서나 조용히 지내는 것이지 북부 이테렌 영지에서의 율란은 또 달랐다. 그는 언제 침몰해 올지 모르는 마물들을 위해 호위도 없이 뛰쳐나가 피칠갑을 한 채 귀성하고는 했다.

어느 때는 말을 타고 나가 말을 타고 돌아왔지만, 매번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네 발로 달리는 집채만 한 늑대로 변모하여 온몸에 마물의 피를 뒤집어쓴 채 발견되기도 했다.

이테렌 영지민들은 영주가 잡아온 마물 등에서 가죽을 벗겨 겨울을 날 옷가지를 만들기도 하고, 마물들의 쓰임에 따라 분류하여 그들의 사체로 기름을 만들어 값비싼 초를 생산하는 등, 풍족하게 살 수 있게 해 준 대공에게 감사해했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서 대공과 함께 생활하는 기사단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진정 짐승이다. 그것도 인간의 법과 사회를 꿰뚫고 있는 짐승.

이성을 가진 짐승처럼 무서운 것도 없었다. 오시니스 최고의 기사단인 검은 가시 기사단의 단원들도 매일 같이 하면서 힘들어 토악질이 나오는 훈련 과정을 단 하루도 빼지 않고 산책처럼 가볍게 해치우는 이가 바로 율란 발트였다.

그런 그의 말을 어기고 저녁 식사나 하러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단원들은 찜찜한 얼굴로 2인이 1조를 이루어 대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아직 저녁 훈련도 하지 않았는데 퇴근을 준비하기 위해 들어오던 근위대원들이 그 다가왔다.

저녁 식사를 위해 연무장이 비워져야 하는 시간인데 아직까지 흙먼지가 일자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온 듯했다. 기사단원들은 그 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근위대 대장인 퍼시벨 호프만이 거들먹거리며 다가왔다.

“저녁 연무장 사용은 근위대원들이 먼저일 텐데 다들 무슨 일인가.”

단원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근위대 대장이 직접 나선 경우는 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퍼시벨 호프만은 군인 주제에 불뚝 튀어나온 배를 하고 검은 가시 기사단을 둘러보았다. 베네딕은 또 시작이군, 싶어 작게 한숨을 쉰 뒤 입을 열었다.

“대대장님, 좋은 저녁입니다.”

“오, 솜즈 좌장군. 좋은 저녁이군요.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저녁에는 분명 우리 근위대들이 연무장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분명은 무슨 분명이야. 이 시간에는 보리로 만든 술을 처먹고 한껏 늘어져 연무장은커녕 남창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 가기 바쁘면서.

그러나 베네딕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말했다.

“대공께서 2인 1조로 대련을 하라 하셔서 준비 중입니다.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호오, 대련은 왜 갑자기….”

호프만은 자작위를 갖고 있는 수도 귀족으로, 대공가의 가신이라고는 하나 그 유서가 깊은 백작가인 베네딕에게 늘 저렇게 말 어미를 흐려 반말을 하고는 했다.

율란에게 개길 급은 못 되니 저에게라도 엉겨 붙는 꼬락서니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베네딕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대답은 그게 끝이었다. 부연 설명 없는 마무리에 호프만의 살찐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콧수염을 씰룩거리더니 마침 이쪽으로 오고 있던 율란에게 말했다.

“좋은 저녁입니다, 대공 각하.”

율란은 그 인사를 무시하고 베네딕의 손에 들려있던 대련표를 받아 갔다.

그러나 호프만은 굴하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왕이 버티고 있었고, 왕은 늘 네 개의 가문 수장들의 불화를 좋아했다.

대공쯤 되는 인물에게 고작 자작위인 호프만이 개겨도 될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각하, 어떤 이유에서 대련을 준비하는 겐지….”

호프만은 슬쩍 웃으며 다시금 물었다. 수도식 언어로는,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길래 남의 연무장에서 행패냐, 라는 뜻이 되겠지만 북부인인 율란은 그를 흘끗 보고 저 할 말만 했다.

“내가 물으면 다 답해 주는 사람으로 보여?”

거기서 네, 라고 대답할 수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어 잠시 망설였던 호프만은 다시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지만…. 일단 제가 이유에 대해 알아야 저희 근위대원들의 저녁 훈련을 취소할 것 아니겠습니까. 훈련일지에도 기록해야 하는데, 정당한 이유 없이 훈련을 취소할 수는 없으니 말이죠.”

“과식해서라고 써. 자작의 배가 타우수스 산만 하니 아무도 의심치 않을 걸세.”

타우수스 산은 북부의 어머니 산으로 불리는 가장 큰 산맥이었다. 눈앞에서 모욕을 들은 호프만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각하! 어찌 부하들 앞에서 왕의 충신인 저를 모욕하시나이까!”

“밥 많이 처먹었다는 게 모욕처럼 들렸으면 덜 처먹으면 될 일 아닌가.”

율란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기사단의 종자가 가져온 의자에 앉으며 율란은 하품을 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하품을 하는 귀족은 처음 본 호프만의 얇실한 두 눈이 한없이 커졌다.

“이유를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수도놈치고 꽤 강경하게 말 한다는 생각을 하며, 율란은 의자 손잡이 부근에 팔꿈치를 얹었다. 방자한 꼴은 왕을 뒤에 업었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듯한데, 율란이 턱을 괴며 대답했다.

“막내 왕자님의 호신술 선생을 뽑는 자리야.”

“네에-?!”

이번에 놀란 것은 검은 가시 기사단의 단원들이었다. 막내 왕자라 함은 그 걸레 니키엘 오시니스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손목 굵어진다고 책 한 권 들기를 꺼린다는 소문이 타우수스 산맥을 넘어 북부까지 퍼졌는데 호신술을 가르칠 선생을 뽑는다니.

고생길이 훤한 탓에 안 그래도 죽을 맛이던 단원들의 얼굴이 더욱 죽상으로 변했다.

반면, 근위대원들은 히죽 기분 나쁘게 웃으며 낄낄대기 시작했다.

“막내 왕자님 호신술 선생이면, 왕자님 침실 탕파 자리랑 다름이 없지 않는가?”

“마구간지기랑도 붙어 드시니 신체 멀쩡한 호신술 선생이야 낮, 밤 가릴 것 없이 부르시지 않겠는가.”

“아, 그럼 내가 가고 싶은걸?”

누구의 불행인지 모르게, 그 말은 소드마스터에 등극하여 청각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율란 발트의 귀로 들어가고야 말았다.

“방금 말한 세 놈, 왕족 모독죄로 바로 추포한다.”

“네, 네-?”

호프만은 니키엘을 희롱하는 제 부하들의 말을 듣고 낄낄 웃다가 율란의 말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율란은 서늘한 얼굴을 하고 베네딕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때까지 죽을상을 하고 있던 단원들이 곧바로 니키엘을 말로 희롱한 세 명의 근위대원들을 무릎 꿇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왕은 친애하는 퍼시벨 호프만 근위대장을 불러 이렇게 말했었다.

‘북부의 개가 설치고 다니게 놔두지 말게.’

왕의 엄중한 명령을 받잡은 호프만 근위대장은 간만에 건수를 잡은 기분이었다. 감히 왕궁에서 근위대를 추포하다니 반역과 다름없었다.

물론 그 근위대 놈들이 먼저 왕족인 니키엘의 품위를 희롱했지만, 그깟 수도 공식 걸레 따위야 호프만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율란과 그의 검은 가시 기사단이 가십에 시달리게끔 하라고 했다. 딱 적절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호프만은 건수 잡았다는 생각을 하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감히 왕궁에서 근위대원을 무릎 꿇리다니! 이는 왕실에 대한 모욕이오!”

수도에서는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싸움이 일어나고는 했다. 지금이 그때였다. 호프만은 최선을 다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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