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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48)화 (48/130)

48화

니키엘은 일단 사람 좋게 웃으며 응접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율란은 혼자 오지 않았다.

그의 기사단 좌장군인 베네딕 솜즈가 니키엘을 향해 예를 올리고 있었다. 마주 인사해 주며 싱긋 웃자, 율란이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의상 치러야 할 인사조차 나누지 않은 상태였다.

“드디어 실성하셨나이까.”

“아, 그래. 나도 강녕하오, 대공.”

버르장머리라고는 없는 늑대에게 열이 받았다. 너 임마 몇 살이야, 내가 네 또래 놈들 모아 놓은 강의실에 들어가서 강의까지 했었는데 이게 감히 조교수뻘을 무시해?

그러나 그의 학위 증명서는 머나먼 저쪽 세계에 있었다. 앓느니 죽지란 생각으로 이마에 솟은 핏대를 꾹꾹 누르며 니키엘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왜 혼자 온 거야. 검술 선생을 보내라니까. 그러나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왕자궁의 응접실에는 그와 율란 발트, 베네딕과 폴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단한 검은 가시 기사단의 좌장군이 고작 제 검술 스승으로 올 리는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율란 본인이 니키엘을 가르칠 것도 아니지 않는가.

결국 직접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부탁한 검술 선생이 왔다고 했는데…?”

마지막 물음은 폴을 향한 것이었다. 검술 선생이 왔다며 왜 이 염병할 응접실에 저 망할 늑대 자식과 좌장군뿐이야.

율란의 등 뒤에서, 폴이 억울한 얼굴로 손짓, 발짓을 했다.

‘뭐라는 거야, 저 바보.’

그러나 폴의 메시지는 수신 실패했다. 니키엘은 하는 수 없이 다시금 율란을 바라보았다. 베네딕은 입을 꾹 다물고 소파에 앉은 율란의 뒤에 기립해 있을 뿐이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율란은 멀끔한 얼굴을 한 채 시종이 내어 왔을 차를 검지로 툭 건드렸다.

‘차는 왜 건드려. 왕자궁 차는 시궁창 물이라 마시기 싫다 이거야?’

하나하나가 다 고깝게 보이는지라 눈을 비죽 뜬 니키엘은 그의 앞에 털썩 앉았다.

예법이라고는 없는 태도였지만, 그러는 율란이야 말로 니키엘이 등장하거나 말거나 아까부터 쭉 소파에 앉아 몸을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

대공인 율란의 서열이 살짝 높기는 하지만, 이건 서열 문제가 아니었다.

친구를 맞이할 때도 자리에서 일어나 반기는 법이지 않는가. 제 집 소파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싸가지가 바가지라는 생각 밖에 들지않았다.

다시 한번 너 몇 살이야! 를 외치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니키엘은 차분히 율란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드디어 입을 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인지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왔습니다. 검술 선생.”

“오, 그렇소?!”

웬일로 제 말을 다 들어주었을까. 게다가 기사단에서 검술 선생을 뽑는 대련을 펼쳤다는 것이 어제였다.

니키엘은 율란이 이토록 빠른 일처리를 해 줄 거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화색을 하고 물었다.

“어디에 있소, 나의 검술 스승께서는!”

스승님 제가 깍듯이 모시겠습니다. 어려서부터 공교육, 사교육 양면을 구르며 수많은 스승님들을 만나 학위까지 딴 유교 나라 출신의 박사가 스승에 대한 제자의 공경이 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없던 공경까지 끌어모아 스승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때였다.

율란이 티 테이블에 놓인 비스킷 하나를 입에 털어 넣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달기 그지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누가 억지로 먹인 것도 아니고 상을 내온 주인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짓다니. 뭐 하는 놈일까? 그보다 얼른 대답이나 했으면 좋겠어서 율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율란은 그런 니키엘을 흘끗 보더니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니키엘은 한 번 더 빈정이 상했다.

누군 너랑 눈 마주치는 게 좋냐. 스승님 어디 계신지나 불어라.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율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제가 전하의 검술 스승입니다.”

“그분 성함이 ‘제가’요?”

니키엘은 알아듣지 못하고 한 번 더 물었다. 시선을 돌렸었던 율란이 아주 머저리를 쳐다보듯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저절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니키엘은 놀라 천천히 입을 벌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잠깐, 뭬라…? 그럼 정말 대공께서 나의….”

차마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검술 스승 구해준다며.

니키엘이 지금 당장 남쪽 오랑캐를 쓸어 나라를 일으키고 마왕을 무찔러 대검의 칭호를 받을 예정인 것도 아닌데 고작 호신술에 쓸 검술 스승으로 소드마스터가 오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니키엘의 기색을 읽은 건지 율란이 그를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

“안색이 어찌 그러시나이까, 전하. 아무나 스승으로 뫼셔도 상관없다면 왕국 제일 검이 스승이 되어도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니키엘은 펄쩍 뛰며 말했다.

“당연히 되지!”

율란은 니키엘의 대답에 살짝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대공께서 내 검술 스승이 되어 주신다니! 횡재가 아니오!”

니키엘은 진심으로 말했다.

과학고를 나왔지만 과학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안 겪어 본 사교육이 없었다.

소규모 공부방부터 시작하여 대규모 기숙 학원까지.

좋은 강사가 있다면 물불 안 가리고 서울로 상경하던 학구열 넘치는 소년은 커서 연구 교수가 될 뻔하다가, 별안간 죽다 살아났다.

그러나 아무리 이세계에 떨어졌다고 해도 그의 학구열을 막을 수는 없었다.

소드마스터라니, 검술계의 1타 강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항시 무슨 과목이든 업계 최고의 강사의 강의를 듣고 싶었던 니키엘이 진심으로 기뻐하자, 시큰둥하거나 무표정 아니면 그다지 표정이 없던 율란의 얼굴 위로 미묘한 기색이 떠올랐다.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베네딕은 살짝 착잡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율란 발트와 베네딕은 대공이 직접 왕자의 검술 스승이 되었노라 알리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니키엘의 완만한 거절을 기대했다. 아니, 적어도 베네딕은 그렇게 생각했다.

왕태자도 아니고, 다른 왕손들처럼 군인이 될 수도 없는 백금발 왕자의 검술 스승이라니. 심한 재능 낭비였다.

베네딕의 상관은 한낱 왕자의 검술 선생을 하기에는 무척이나 바빴다. 그럼에도 이곳에 온 이유가 있었다.

기사단 단원들을 대련시켜 얼추 여섯 명쯤을 추려 놨을 때였다. 한 놈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연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근데 저는 왕자님 호신술 스승으로 가도 상관없습니다.’

울상으로 다음 대련을 준비하던 승리자들의 눈이 금화만큼 커다래져 방금 말을 뱉은 리베스를 바라보았다.

‘뭐?’

‘네가 드디어 고된 훈련에 마귀가 씌웠구나, 리베스야!’

리베스는 오슐리츠 남작 가문의 장남으로, 키가 훤칠하고 호남형에다가 성격 또한 좋았다. 니키엘만큼 밝은 금발은 아니지만 간신히 금발로 쳐줄 만한 볏짚색 머리에 시원시원한 생김을 갖고 있었다.

이제 막 기사 서임을 한 젊은 피 리베스는 기사단원들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주근깨 있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싱그럽게 웃었다.

‘지난번에 순찰을 돌다가 왕자궁 근처에서 왕자님을 뵈었는데, 하루종일 뒤뜰에서 운동만 하시다가 남는 시간엔 책을 읽으시더라구요. 뫼시기 편해 보이던데요? 저를 발견하지는 못하셨는데, 시종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여름 햇빛에 피부가 탄다고 궁시렁거리는 시종에게 네 말이 맞다며 부드럽게 대답하시곤 책을 덮은 채 일어나시는데, 무척 상냥해 보이셨습니다. 시종과의 사이도 막역해 보였구요.’

리베스의 말에 연속된 연무와 대련까지 겪었던 기사단원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니키엘 오시니스가 뫼시기 편해 보인다니? 그는 오시니스 사교계의 이름난 까탈의 대명사였다.

‘나는 이푸스 산맥의 만년설을 녹인 물이 아니면 안 먹어! 장미수라도 내와야지, 이 걸레 빤 물은 대체 무엇이냐!’

그가 기로이트 백작 부인의 무도회에서 물 한 모금을 머금자마자 내뱉은 말이었다.

늘 창백하여 병약한 인상의 기로이트 백작 부인은 그날 드물게 혈색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니키엘 덕분에 무도회 내내 분노에 얼굴을 붉혔기 때문이다.

마시는 물도 가릴 정도로 까다로운 양반인데 리베스의 눈이 삐어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단원들이 모두 리베스에게 더위 먹은 것이 아니냐며 술렁거릴 때였다.

‘무엇보다, 미인이시잖아요.’

그제야 좌중에서 그러면 그렇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니키엘 오시니스는 그 성격에 가려져서 그렇지 오시니스 왕국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미인이었다.

타우수스 산맥만큼 높다란 콧날, 벌꿀색의 총천연색의 블론드, 히피바울 강의 푸르른 물결보다 더욱 파란 벽안, 만년설처럼 백옥 같은 피부까지.

이목구비의 조화조차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니키엘의 어린 시절, 왕궁에 온 이국의 사절단이 막내 왕자를 보고 오시니스 왕국의 가장 큰 절경은 왕자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푸른 물결이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어려서 예쁜 아이는 자라서는 더욱 미인이 된다. 니키엘은 역변이라는 것을 모르는 케이스였다. 그의 미모는 날이 갈수록 만개한 장미와 같아졌다.

다문 꽃봉오리도 어여쁘다 여겼더니 아침에 피어난 장미에 이슬이 맺힌 것에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다들 리베스의 그 말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미인이시지.’

‘암, 얼굴로는 라시리스 전역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으시지.’

‘장난하나? 라시리스가 아니라 오시니스 전 왕국에 그보다 아름다운 꽃은 없을 걸세.’

승리자들이 저마다 낄낄 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살기를 느낀 것이다.

그들은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돌려 살기가 넘실거리는 곳을 돌아보았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 자리에는 그들의 수장인 율란 발트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들을 응시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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