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율란은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짙게 베어 나오는 짐승의 페로몬이 그의 현재 기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단원들은 율란의 그 흉포한 기세에 눌려 서로의 눈치만 봤다. 그러고 보니 걸레 전하, 아니 니키엘 전하께서는 단장의 예비 약혼자와 다름없었다.
그런 사람을 두고 미인이니, 더 없을 꽃이니 한 발언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적당히들 떠들게 두다가 중재해야겠다 싶어 옆에서 틈만 노리고 있던 베네딕도 쯧 혀를 찼다.
아무리 그들의 단장이 니키엘을 싫어한다고 해도 니키엘의 위치가 율란의 예비 약혼자인 이상 할 말과 못할 말을 구분해야 함이 옳았다.
얼른 제가 먼저 나서서 단원들의 경거망동을 꾸짖어 일을 키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세 놈씩 나와. 이긴 놈이 왕자궁에 검술 스승으로 간다.’
율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제 검집을 풀어 베네딕에게 건네더니 연무장 한쪽에 배치되어 있던 목검을 집어 휙 휘둘렀다.
폭발적인 어깨 힘에 의해 검이 허공을 가르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렸다. 단원들은 믿기지 않다는 듯 반문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단장….’
‘말 그대로야. 세 놈씩 상대할 테니까 내게서 한 합이라도 가져간 놈이 왕자궁에 검술 스승으로 간다.’
율란은 표정 없는 얼굴로 말한 뒤 연무장 중앙으로 향했다. 세 명씩 율란과 붙어 이긴 쪽이 검술 스승으로 간다는 얘기였다. 3:1로 붙어 단 한 번이라도 율란에게 공격을 성공한 사람이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단원들은 꿀꺽, 침을 삼켰다. 아무리 3:1라고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모처럼 소드마스터와 대련을 할 기회를 날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진검인 반면 율란이 들고 있는 것은 목검이었다.
율란 같은 소드마스터들은 목검에 검기를 실어 진검처럼 날카롭게 만들 수 있겠지만, 어쨌든 3:1에 진검과 목검의 대결인 건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여섯 명의 단원들은 3인 1조로 율란을 상대했다. 그러나 베네딕이 보기에 그것은 대련이라고 볼 수 없었다.
굳이 표현을 찾자면, 일방적인 구타? 여섯 명의 승자들은 율란에게 목검으로 신나게 얻어맞아야 했다. 완승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거인과 어린아이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베네딕은 웬만해서는 이성을 잃지 않는 상관이 어째서 이유 없이 단원들을 갈구는지 궁금해졌다. 설마 니키엘을 희롱해서? 가능성이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율란 발트를 비롯한 수장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니키엘 오시니스를 싫어하지만, 어쨌든 니키엘은 그들의 예비 배우자였다.
니키엘이 태어난 뒤로부터는 늘 그가 자신들 중 한 사람과 결혼할 거라는 걸 당연시 여기고 살아왔던 수장들 앞에서 니키엘을 희롱한다는 건, 니키엘의 인간성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도 이상했다. 베네딕의 상관은 니키엘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해 왔다.
듣기 싫은 말을 그만하게 시킬지언정, 이런 식으로 유감을 표시할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불쾌해 보이는 것이 이상했다.
베네딕의 추측에 한 번 더 불을 지피듯, 율란이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쓸 만한 놈들이 없군.’
베네딕이 상념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그의 발치에는 리베스를 포함하여 나가떨어진 6명의 기사 단원들이 목검에 얻어맞아 떼굴떼굴 구르고 있었다.
단 한 명의 단원도 율란에게서 합을 빼앗지 못했다. 대련의 승자는 자연스레 율란 발트 대공이 된 것이다.
그렇게 대련에서 이긴 승자와 함께 왕자궁에 오게 된 베네딕은 니키엘의 응접실에 들어온 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율란이 정말로 왕자의 검술 스승을 자처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상관을 지켜본 결과, 미세한 표정의 차이를 읽을 수 있게 된 베네딕이 보기에 율란 역시 이 상황을 완전히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아닌 듯했다.
베네딕은 쉽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니키엘이 율란 발트가 그의 스승이 될 거란 말을 들으면 검술을 배우는 걸 포기하거나, 다른 사람을 스승으로 불러 달라고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자의 반응은 독특했다.
“왕국, 아니 서대륙 최고의 검사가 내 검술 스승이라니. 이력서에 쓰면 서류는 프리 패스라고.”
이려크써? 플희팻? 이국의 발음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고대 언어인 산스브리어 같지도 않았고 동대륙의 언어 같지도 않았다.
막내 왕자 전하가 어문 계열에 관심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쨌든, 베네딕은 니키엘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정말로 율란이 그의 검술 스승이 되어 버릴까 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날씨가 초가을에 가까워졌으니 이제는 정말 마물 토벌 대회가 코앞이란 뜻이었다.
매년 이맘때만 되면 검은 가시 기사단은 무척이나 바빠졌다. 토벌 대회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기는 물론이거니와, 마구, 야영용 천막, 하다못해 천막까지. 토벌 대회에 참가하는 기사 수만 해도 천을 넘었다. 거기에 그들을 따르는 종자와 허드렛일을 도와줄 인력까지.
소드마스터라고 하면 마물을 베어 죽이는 것에만 총력을 기울이는 줄 알겠지만, 사실상 율란 발트가 맡아야 하는 행정 업무 양도 어마어마했다.
한가하게 군인이 될 것도 아닌 왕자의 검술 스승 노릇까지 할 시간이 없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베네딕이 아찔해진 것과는 상관없이, 이미 니키엘에게 스승 자리는 율란이 차지할 것이라고 말한 이상 번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체 왜 그런 결정을 하셨을까. 아니, 애초에 왜 그 여섯 명을 쥐어 패셨냔 말이야. …리베스의 말이 열받으셨던 걸까?’
베네딕은 속을 알 수 없는 상사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질끈 눈을 감았다. 니키엘이 저렇게 기뻐하는 이상, 검술 스승 자리는 완전히 율란의 차지가 된 것 같았다.
‘두 분 사이에 사이가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건만, 왜 왕자 전하께서는 대공 각하를 거부하지 않으실까.’
그것도 의문이었다. 만약 니키엘이 율란을 놀릴 작정으로 진심은 그렇지 않은데 불구하고 거짓된 기쁨을 표했다면, 후각이 뛰어나 기만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맞는 율란으로서는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율란이 니키엘의 반응에 그저 의외란 듯 한쪽 눈썹만 슬며시 치켜들고 아무런 말 없이 있는 걸 보면 니키엘의 그 반응이 진심인 것 같았다. 베네딕의 상관은 타인의 거짓을 오차 없이 판별할 줄 알았다.
그가 북부에 침투한 이국의 간첩을 잡은 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간첩은 모피 장수로 위장했었고, 얼음의 계절이 혹독하기만 한 이테렌에서 모피 장수는 밀가루 장수보다 흔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데도 그랬다.
그런 율란이 아무 말 없이 있는 걸 보면 니키엘의 저 반응은 진짜인 것이다.
베네딕은 그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두 분 각하의 사이에 대해서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베네딕이 볼 때마다 율란은 니키엘에게 비웃음과 경멸 외에는 보여 준 것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신뢰를 받을 만큼 뛰어난 것을 보여 준 적이 없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베네딕의 그 생각은 적중했다. 율란은 지금 아주 약간 놀란 참이었다. 베네딕이 생각했던 것처럼 율란은 단 한 번도 니키엘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것은 니키엘이 그래도 되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니키엘은 왕의 적자로 태어나 법황에 버금가는 신성력을 갖게 된 주제에 의무를 지니고 태어난 고귀한 혈통, 즉 왕족과 귀족의 명예에 맞지 않는 오입질들을 취미로 삼았다.
율란은 니키엘이 오늘은 이 백작 부인과 연애를 즐기고, 내일은 저 남작의 침실을 데워 주든 말든 상관없었다. 문제는 그가 신성력을 타고났다는 것이었다.
힘이 있는 자들은 의무를 다해야 한다. 율란과 나머지 수장들은 그것을 철칙으로 알았다. 그런데 니키엘은 가장 고귀한 자로 태어난 주제에 너무도 막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억을 잃은 뒤의 니키엘은 인간이 제도 개선 된 것처럼 달라졌다.
검술 스승을 청하질 않나, 그렇게 저를 갈구던 율란이 스승을 하게 되었다는데도 대륙 제일 검에게 사사받을 수 있다며 아이처럼 기뻐하지 않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 기뻐하는 순수한 얼굴이 길가에 핀 은방울꽃처럼 수수하고 맑아 보였다. 율란은 짧게 인상을 찌푸렸다.
‘은방울꽃…?’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비유를 해본 적이 없던 율란은 갑자기 든 생각에 대해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언제부터 제가 길가의 은방울꽃 따위에 관심을 가졌었나.
들판에 꽃을 보고 날짜를 유추한 적은 있어도 그 꽃이 수수하고 맑아 보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니키엘은 그런 율란의 생각 따위는 모르는지 밝게 지껄였다.
“자, 대공. 그럼 수업은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지?”
“…언제부터 가능하신지요.”
율란의 그런 마음은 목소리의 끝을 누그러트리게 만들었다.
그동안 경멸해 마지않던 남편감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놈팡이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끝이 둥글어진 것이다.
남중, 남고, 공대 루트를 타 의도치 않게 남자들의 심리에 대해서는 꽉 잡고 있는 육군 병장 출신 니키엘은 그런 율란의 미묘한 변화를 바로 캐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