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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51)화 (51/130)

51화

치리리, 치와왕-. 니키엘의 침대 위에 있던 새가 그의 무릎으로 올라와 가슴팍에 부리를 문질렀다. 가빴던 숨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니키엘은 손을 뻗어 새를 껴안았다. 자다 말고 과호흡이 오다니. 게다가 이 눈물은 또 뭐란 말인가.

푹 젖은 뺨을 새의 어깻죽지에 비비며 니키엘은 중얼거렸다.

“아, 너무 슬픈 꿈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

꿈속에서 니키엘은 깊은 절망을 겪었다.

그는 무언가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고, 그 상실감은 이루어 말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 소중한 것을 함께 지켜 나가자 맹세한 상대를 실망시켰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도 했었다.

그는 니키엘을 힘 있게 비난하지는 않았다. 원망하는 듯한 말을 했으나 사실 그것이 원망이 아닌 저를 봐 달라는 애원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상대에게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어떻게 위로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니키엘은 그것이 슬펐다. 그리고 두 눈을 깜빡인 동시에, 그 절망적일 정도로 깊던 미안함과 애틋함들이 모두 사라졌다.

내가 왜 울었더라? 니키엘은 멍한 가슴을 부여잡고 두 눈을 깜빡였다.

방금 뭔가 아주 소중한 걸 잊어 먹은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니키엘은 두어 번 더 눈을 깜빡였다.

새는 니키엘을 위로하듯 제 부리를 연신 니키엘에게 비비적거렸다. 그 작고 따뜻한 체온에 의지하여 니키엘은 그 밤을 버텼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니키엘은 다시금 안정을 찾았다.

다행히, 꿈은 두 번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의 단단한 품이 니키엘을 껴안고 있음은 확실했다. 맨살의 감촉이 좋아 그 품 안에 안겨 이마를 박고 고로롱 숨을 내쉬었다.

새벽 무렵, 자신을 안고 있던 누군가가 떠나려는 것 같았다.

“가지 마….”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애원했다. 그 누군가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때다 싶어 그 품에 더욱 안겼다. 허리를 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단단한 대흉근이 이마에 닿아 오며 안정감을 주었다.

그를 강제로 껴안게 된 누군가가 흠칫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니키엘은 그래도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정말 어릴 때도 부모님에게도 부리지 않던 응석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품이 너무 따뜻해 나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새벽이 지나갔다. 여명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동쪽에서부터 또 다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

“눈이 왜 이렇게 부으셨어요?”

“그러게….”

폴이 의아하게 묻는 말에 니키엘 역시 어깨를 으쓱였다. 밤새 내 울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다 깨서 별안간 울어 버린 이유를 저 자신 또한 모르는데 왜 울었냐 묻는다면 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 제 옆을 지켰던 새는 떠난 뒤였다.

검은색으로 빛나는 깃털 하나가 남아 있었는데, 그게 꽤 예뻐 폴에게 건네 깃털 펜으로 쓸 수 있게 끝을 다듬어 펜촉처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폴은 부어 버린 눈두덩과 얼굴을 가라앉혀야 한다며 수선을 떨었다.

더운물과 찬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들어와 니키엘의 얼굴 위에 번갈아 얹어준 뒤 목의 뒷부분과 앞부분을 연신 마사지하기도 했다.

평소 같으면 유난이라고 도망쳐 운동이나 하러 갔을 텐데,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가라앉아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폴도 그것을 느꼈는지 의아하게 니키엘을 바라보더니 기분을 풀어 줄 한마디를 건넸다.

“그래도 오후에는 첫 검술 수업 시작하시잖아요. 몸 좀 움직이시면 붓기가 가라앉을 거예요.”

아, 그렇지. 검술 수업. 니키엘의 벽안이 살짝 반짝였다.

밤사이 꾼 꿈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당장 오늘 저녁부터 검술 수업이 시작이었다.

물론 폴은 니키엘이 부은 얼굴 때문에 우울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위로해 주기 위해 꺼낸 말인 듯했지만, 어쨌든 니키엘의 기분이 많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무언가 새로운 걸 배운다고 생각하니 설레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니키엘은 가볍게 기분을 환기하여 아침 겸 점심으로 주방장 벤디의 특제 소스가 들어간 사슴 고기 로스트를 먹은 뒤 검술 수업이 있을 때까지 마물에 대한 자료를 정리했다.

그렇게 해가 서산에 걸릴 때쯤 되자, 율란을 통해 전갈이 왔다. 왕자궁에는 따로 연무장이 없으니 근위대 연무장으로 오라는 말이었다. 니키엘은 움직이기 쉽게 통이 큰 브레와 튜닉을 입고 가볍게 나섰다.

“정말 그러고만 가실 겁니까?”

“그럼 검술 배우는데 다이아몬드라도 두르랴? 됐으니까 얼른 가자. 스승님께서 기다리실라.”

왕자궁을 통해 검술 수업 참가를 정식으로 초청 받은 터라 혼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후에는 어떨지 몰라도 첫날에는 시종을 대동하고 가는 것이 맞았다. 시간이 늦을까 초조한데 폴이 잔소리를 하며 투덜거리니 니키엘이 드물게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첫 수업부터 지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도 대치동 유명 학원에 가면 학부모들이 강의 시작 전 새벽부터 나서 줄을 서는 일이 태반인데 그런 전쟁 같은 수업에서 첫날에 지각을 한다?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폴은 눈을 희번덕 빛내는 니키엘을 보며 혀를 찼다.

‘아니, 아프고 일어나신 다음부터는 뭔가를 배우는 일이라면 저렇게 좋아하시니….’

폴은 기억을 잃기 전 니키엘이 어린 시절 예법을 배우기 싫다며 예법 선생의 발에 걸려 일부러 넘어진 뒤, 그를 왕족 시해죄로 넘길 것이다 길길이 날뛰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예법 선생만 당한 것도 아니었다. 역사 지리 선생과 산수 선생, 법과 정치 선생 역시 한 번씩은 꼭 니키엘에게 골탕을 먹었었다.

‘근데 꼭 다 잊은 사람처럼 심술도 안 부리시고 말이야.’

그렇다. 지금의 니키엘에게는 심술이라는 것이 없었다.

기억을 잃기 전 니키엘은 소년 같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 종일 사과 반쪽, 비둘기 알 두 개만 먹었었다. 덕분에 신경이 날카로워 시종들에게 애먼 짜증을 내거나 트집을 잡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의 니키엘은 심술은커녕 사람이 무척이나 유해져 왕자궁 시종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 지경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아무리 율란 발트라고 할지라도 전이었다면 니키엘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가면 싸구려로 보여. 목욕물이나 받아 와. 느긋하게 목욕 후 가야겠으니까.’

그린 것처럼 자세히 상상할 수도 있었다. 니키엘이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서두르는 니키엘을 두고 종 주제에 노닥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폴도 냉큼 짐을 챙겼다. 니키엘에 한 번 더 확인하듯 폴에게 물었다.

“먹을거리는 빠짐없이 준비했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주방장님이 아침부터 부단히 애를 쓰셨어요. 이것뿐만 아니라 검은 가시 기사단의 숙소로도 야참 거리가 갈 겁니다.”

니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폴이 들고 있는 커다란 피크닉 바스켓을 슬쩍 들여다보며 더 챙길 걸 그랬다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폴이 보기에 바스켓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차고 넘쳤다.

꿀에 절인 살구와 복숭아, 서양 모과을 비스켓에 얹어 먹을 수 있도록 소분하여 담은 것들과 지난해 유달리 가을이 추워 당도가 올라간 포도로 담근 포도주, 향신료와 함께 마늘, 양파와 구워 낸 돼지고기 베이컨 등을 빵에 끼워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간단하게만 보여도 주방장 벤디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로,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오래도록 훈연한 베이컨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역작이었다.

니키엘은 율란의 입맛이 어떨지 모르니 향신료를 많이 한 것과 적게 한 것을 따로 준비하라고 했었다.

율란에게 들고 갈 것들은 이 정도로, 검은 가시 기사단 쪽으로 보낼 야참들도 어마어마했다.

인원이 많으니 아예 사슴 뒷다리 통구이를 준비하느라 주방이 무척 바빴다고 전해 들었다. 그쪽으로는 과실주와 맥주가 갈 것이라고 했다.

첫날부터 먹거리를 싸가는 이유야 명확했다.

‘자고로 촌지란 선생과 학생 사이에 원활한 강습의 흐름을 끌어올 수 있도록 하는 윤활유인 법이지.’

촌지를 돈으로 주자니 발트가야 말로 대를 이어 가며 오랫동안 부를 축적한 대공 가문이 아니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니키엘의 사재보다 몇 백 배는 많을 것이었다.

작은 왕국 하나는 통째로 살 수 있는 것이 대공가였다. 그런 경우에는 금전으로 촌지를 내는 것이야 말로 하수 중에 하수였다.

율란 같은 타입은 정성에 더 약할 것이다. 상대의 진심을 아주 내치지는 못할 거라는 것이 니키엘의 계산이었다.

챙길 것은 다 챙겼으니 제시간에 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니키엘과 폴은 부지런히 궁을 나섰다. 정식 방문이니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이 좋다고 하여 왕자궁 전용 마차를 올라탔다.

짐을 들고 가야기는 했기 때문에 고작 1km 남짓한 거리를 마차 타고 간다는 게 번거로웠던 니키엘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가 문을 열어 준 마차는 꽤 호화로워 보였다. 금은 아니더라도 은장식이 군데군데 있었고 문손잡이 역시 은을 조각한 것으로 끄트머리에 꽤 큰 사파이어가 달려 있었다.

그렇게 마차에 올라탄 니키엘과 폴은 왕궁의 여러 일들을 도맡아 하는 관리부처 건물과 나란히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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