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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52)화 (52/130)

52화

약속된 시간으로부터 딱 10분 전이었다. 니키엘은 잘됐다는 생각과 함께 폴에게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주인에게 짐을 직접 들게 한 종이 되어 버린 폴이 기겁했다. 외치는 목소리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전하! 제가 들어야 합니다!”

니키엘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바구니를 들지 못할 정도로 무거운 것도 아닌데 유난이라는 투였다.

“이걸 다 들기엔 네가 너무 작아.”

“키와 힘은 상관없습니다!”

니키엘의 말에 얼굴이 벌게진 폴이 앵알거렸다. 가뿐히 무시한 니키엘은 시종의 짐인 것도 상관 않고 묵직한 바구니를 들고 걸었다.

‘자고로 먹을 것 앞에 장사 없는 법.’

사람의 환심을 사는 것에는 혀를 공략하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는 한국인답게, 니키엘은 흥얼거리며 돔 형태의 연무장 건물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실 니키엘 역시 첫술에 배부를 생각은 없었다.

일단 진짜 니키엘이 지난날 율란에게 해 놓은 일들이 너무도 많았고, 또한 두 사람 사이가 극에 달해 있다는 걸 잘 아는데 고작 음식 몇 가지로 무마시키기에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일에는 늘 정성이 중요했다. 경계심이 강한 야생 동물들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하면 제게 악의를 품지 않은 사람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니키엘은 율란을 야생 짐승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 상대는 거대한 늑대인걸.’

늑대라고 생각하니 동물을 좋아하는 니키엘로서는 약간의 애정이 샘솟은 참이었다. 오늘이 실패하더라도 토벌 대회를 떠나기까지 시간이 좀 있는 편이었다.

이왕 검술을 배우게 되었으니 친해져 더욱 양질의 수업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니키엘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듯, 니키엘의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다. 좌장군 베네딕이 송구함을 담은 얼굴로 바스켓의 반입을 금지한 것이었다.

바스켓을 연무장 안으로 들고 들어가지도 못했다. 니키엘은 입구컷을 당해야 했다.

“이보게, 경. 이건 평범한 음식물들이야. 무기 같은 게 아니라고.”

니키엘은 다소 황당한 심정으로 반론했다. 묵직한 바구니를 든 채로 애처롭게 말했다.

연무장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회심의 촌지가 그의 부하에게 가로막힌 것이 어이없었다.

베네딕도 비슷한 얼굴을 했다. 그 역시 난감한 얼굴로 니키엘에게 사죄하며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예, 전하.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기사단 숙소 쪽으로도 왕자궁의 산해진미로 만든 야참을 보내 주셨다지요. 그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다만, 일전에 저희 각하께서 명하신 바가 있어서….”

베네딕은 말을 흐렸다. 니키엘은 빨간 머리의 좌장군이 난감한 기색을 하고 있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옆에는 기사단의 단원들이 나란히 서, 니키엘의 안색을 살피며 피크닉 바스켓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니키엘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래. 상관의 명이니 자네들도 그 말을 지켜야 하는 건 내 이해를 할 수 있네. 대신 그 명령이란 게 뭔지 정확히 알려 줘야 나도 납득할 것이 아닌가.”

입구에서부터 폴과 니키엘이 들고 있던 짐을 넘겨받아야 했던 베네딕이 끙, 하고 앓는 시늉을 했다.

대공의 서열이 막내 왕자보다 우위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대공의 부관까지 그 서열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왕족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만으로도 황송할 지경인데 이유를 묻는 것에 대답을 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면 베네딕은 당장 불경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었다. 니키엘의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니키엘은 전에 없이 고분한 태도로 베네딕의 요청에 협조 중이었다.

사실, 베네딕에게 왕족인 니키엘을 막을 수 있는 권리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키엘은 베네딕에게 무례하다 말하지 않고 자세한 사정을 얘기해 달라 차분히 요구하고 있었다. 그 어떤 패악을 부리지도 않고 말이다.

너무도 차분한 니키엘의 태도가 오히려 베네딕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는 처음에 니키엘에게 가방을 보여 달라고 말한 즉시 뺨 정도는 맞을 각오를 했었다. 그런데 니키엘은 별다른 말 없이 들고 있던 바스켓을 기사단원들에게 건네주었다.

아니, 그것도 이상했다. 왜 그의 시종이 모든 짐을 들지 않고 그와 짐을 나눠 들고 있단 말인가.

높은 신분들도 짐을 들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장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왕족 및 귀족들은 평소에 부리는 수족이 차고 넘치는 만큼 굳이 제가 짐을 들 필요가 없었다.

따라다니는 놈들이 수없이 많으니 들어야 할 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거나 이사를 가지 않는 이상 높은 신분이 직접 들어야 할 짐은 끽해야 저 자신뿐이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온 시종은 폴인지 풀인지 하는 남자 시종 한 명뿐이었다.

베네딕은 처음에 그들의 뒤를 따라서 누군가 또 들어오나 싶어서 고개를 쭉 빼고 바라보기까지 했었다.

시종 한 명만 데리고 돌아다니는 니키엘 오시니스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열댓 명 넘게 끌고 들어와 연무장 현관이 시종들로만 꽉 찼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알레윈으로부터 왕자 전하가 풀숲을 혼자 걷고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알레윈이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천하의 니키엘이 왕궁 안을 혼자 돌아다닌다니.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 레이디들보다 니키엘 한 명에게 딸린 시종이 월등히 많다는 것은 사교계에 소문난 웃음거리였다.

니키엘은 부채를 부쳐 주는 시종, 그 부채를 들어 줄 시종, 물을 먹여 주는 시종, 그 물을 가져 올 시종, 그가 물을 마시는 동안 입 아래 냅킨을 받쳐 줄 시종과 그 냅킨을 보관하고 있을 시종까지 따로 두어 끌고 다니는 유난을 보이고는 했다.

그런데 궁 안을 홀로 돌아다니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바로 지금, 니키엘이 시종 한 명만 대동한 채 연무장으로 찾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베네딕이 상념에 빠진 사이, 니키엘이 다시 한번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경, 내게 말을 해 줄 수 없겠는가.”

베네딕은 결국 탄복하고야 말았다. 저렇게까지 정중하게 부탁해 오는데 명분도 없이 왕족의 짐을 뒤지는 놈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것이…. 혹 재작년 성혈 축일 기념행사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할 리가 있나. 그러나 대놓고 티 낼 수는 없었던 니키엘은 골몰하는 척을 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생각을 더듬는 표정을 흉내 내며 말이다. 나름 회심의 연기였다.

성혈 축일이라면 주신인 솔리우스가 마물이 물러가지 않자 직접 신의 성체에 피를 내어 그 피를 마물에게 먹이로 하사하고, 그 은혜에 탄복한 마물들이 저절로 물러간 날을 기념하는 행사로 마물 토벌 대회가 끝난 얼음의 계절에 끝자락에 열리는 행사였다.

‘종교에 관한 상식 모음집 같은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네.’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는 설정이었지만 활자 중독인 니키엘이 쉬는 시간에 가볍게 볼까 싶어서 빼온 종교 관련 서적에 적혀 있던 것이었다.

니키엘이 무언가 생각날 듯 말 듯한 얼굴로 가만히 있자 베네딕이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축일 기념 무도회에서 전하께서 대공 각하에게 건넨 한 잔 술을 기억하십니까?”

기억 못 한다니까. 니키엘은 이번에도 애매한 미소를 지어야 했다.

그냥 쭉쭉 얘기해 줬으면 좋겠는 것이 성격 급한 한국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베네딕도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버찌를 발효시킨 증류주였는데 향이 무척 좋다며 대공 각하께 권하셨습니다. …불행히도 그 잔에 투견장 수캐들에게 먹이는 발정제가 들어 있어….”

“그만.”

니키엘은 창백한 얼굴로 베네딕의 말을 잘랐다. 수캐들을 위한 발정제라니. 니키엘은 기가 막혔다.

인체가 복용할 만한 최음제도 아니고 개들에게 쓰이는 약물을 술에 타 권하다니. 진짜 니키엘은 또라이 자식이 틀림없었다.

제가 다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니키엘이 한 일이 아님에도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짓을 하고도 수치를 모르고 계속 나대고 다니다니. 대체 진짜 니키엘이란 어떤 놈이란 말인가.

그것의 정체가 개들을 위한 발정제였음을 알게 된 율란은 모욕당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광룡의 저주를 받아 이성을 잃으면 괴물 늑대로 변하게 되는 율란에게 개의 발정제를 쓰다니.

율란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도 니키엘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니키엘은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말했다.

“그만 됐으니 내 짐을 마음껏 조사하게. 아니면, 내가 음식들을 직접 기미 해 봐도 좋네.”

“망극하옵니다, 전하.”

“망극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야.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그대들 역시 나를 믿지 못할 테니, 내 몸으로 직접 기미 하여 시험하겠다는 말이지.”

이번에는 베네딕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왕족이 직접 기미를 하다니.

물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독은 아니겠지만, 니키엘을 의심한 것도 모자라 그가 직접 기미 한다고 하니 이번에야말로 망극해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니키엘은 진심이라는 듯 담겨 있던 포도주의 병목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율란 발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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