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아, 아아-!”
돌란은 바닥에 주저앉아 피투성이의 머리를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이제 곧, 자신을 무시하던 아들이 제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판단이 어리석었노라고 말하는 미래가 눈앞에서 무너져 버렸다.
항상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자라며 손가락질하던 자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건만 그의 노력은 제가 끌어안은 고깃덩어리로 결말이 나고 말았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펠티온은 돌란의 절규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일갈했다.
“황태자 베오란츠 디트로드 다이달론츠는 황제 암살 죄와 황족 살인 미수죄로 즉결 처분. 황후는 그의 공범으로 황후궁에 폐위. 재판을 진행키로 한다. 그리고….”
항상 다정하게만 빛나던 그의 적갈색 눈이 날카로운 칼처럼 주변의 인물들을 훑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황제 폐하의 암살에 가담했다는 심증이 충분한 바. 구금하여 심문을 진행한다.”
“저, 저희는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무죄를 호소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넘쳤으나 회색 갑옷의 기사들은 마치 연약한 짐승들을 몰듯 그들을 낚아채어 무릎 꿇리기 시작했다.
녹스는 그 혼란의 도가니 가운데에서 현실감 없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망치려 테라스로 향하는 자들이 많아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 먼저 손을 뻗는 자는 없었다.
초연히 주변을 둘러보던 녹스는 문득 펠티온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 연한 혐오감이 어렸다. 녹스는 순간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강하게 들어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암살에 손을 보탰다는 정확한 증거가 있는 자.”
녹스의 뒤로 두 명의 기사가 다가와 팔을 낚아챘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색 정장지가 순식간에 구겨졌다.
녹스는 그대로 끌려가 곧바로 펠티온의 앞에 무릎 꿇려졌다. 그 옆엔 아직도 황태자의 머리를 끌어안은 제 아비가 있었다. 녹스는 자비를 구걸하는 대신 고개를 쳐들고 적갈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녹스는 이를 악물었다. 황제는 황태자가 아닌 제2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녹스는 그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주인 아버지부터 가문의 어리석은 원로들 모두가 눈앞의 것만을 보며 황태자에게 힘을 실었다.
황제는 육체적으론 심약했지만 결코 머리가 나쁜 자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뒤집을 거라고 여겼다. 애초 2황자 그 자체가 황태자의 기량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으니. 그래서 녹스는 2황자가 라이네리오 가문에 심어 둔 가문의 첩자에게 꾸준히 정보를 넘겨 왔다.
‘황제의 암살 건은 몰랐지만 2황자를 습격할 거라는 정보를 넘긴 게 나였음에도….’
가문을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지금, 녹스는 펠티온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녹스는 펠티온이 제게 보냈던 마지막 편지를 떠올렸다.
[이제 곧 새로운 해가 뜰 것이다. 조금만 더 인내하라. 비록 가짜 해가 떠오를 것이나 이는 활에 맞아 추락하리라. 새가 되어 전해 준 것은 잘 받았다.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그사이 펠티온의 단호한 목소리가 칼처럼 내려쳤다.
“제국의 태양을 지게 만든 죄가 크니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한다.”
녹스의 미간이 와작 구겨졌다. 설마, 쓰고 버릴 생각이었나? 어리석은 것은 제 아비뿐일 거라 믿었거늘.
하지만 그럼에도 목숨을 구걸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냥,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허무한 감상뿐.
펠티온은 검은색에 가까운 암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찌르듯 바라봄에도 무감한 표정을 짓곤 손을 들어 올렸다.
돌란과 녹스의 양옆에 서 있던 기사들이 망설임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내리칠 곳을 가늠하듯 잠시 닿았다 떨어지는 칼날의 감촉이 서늘하다. 그리고 그때.
“전하 청할 것이 있습니다.”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녹스는 시선을 들어 제2황자의 옆을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머리를 들고 온, 회색 갑옷의 기사가 펠티온의 곁에서 녹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녹스는 그 낯선 목소리를 들으며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살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임에도 어딘가 익숙했다.
“말해.”
제2황자의 명을 받들어 직접 황태자의 목을 잘라 온 기사는 그의 총애를 받는 듯 황족의 말을 중간에 가로막았음에도 짧은 타박 한 번 듣지 않았다.
투구의 얇은 틈으로 보이는 푸른 눈이 자꾸만 녹스의 불안감을 들쑤셨다. 목에 칼날이 대어졌을 때도 조용했던 심장이 쿵, 쿵, 쿵. 울리기 시작했다.
“저것을 제게 주십시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그가 투구를 벗었다. 녹스는 터질 듯 울리던 심장이 한순간 저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펠티온의 수락 아닌 수락이 이어졌다.
“그래, 예상은 하고 있었어.”
녹스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물건처럼 넘겨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그의 회색 섞인 금발과 시리게 벼려진 푸른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펠티온은 들고 있던 손을 빠르게 내리쳤고 비명 하나 없이 옆에서 뺨을 적실 만큼의 피가 튀었다.
툭, 떨어진 것은 황태자의 머리를 품에 안고 있던 아버지의 머리였다.
“왜, 왜. 네가…….”
녹스의 말을 끊고 펠티온이 말했다.
“나를 위해 가장 큰 위협을 무릅쓴 기사에게 주지 못할 것은 없지. 그래, 전리품은 마음에 드나? 할리드.”
이제 곧 황제가 될 자의 기사, 할리드 비아는 제 발치에 무릎 꿇은 녹스를 시선으로 훑었다. 단단한 눈매와 형형히 빛나는 그 눈에 담긴 감정은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마치 여러 물감을 푼 물처럼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기사들이 들이댄 칼날보다도 날카로워 녹스는 잠시 숨을 멈췄다. 역겨운 꼬리들의 파티와 그들을 사냥하는 회색 갑옷의 물결에도 명확히 느껴지지 않았던 현실감이 스멀스멀 그의 몸을 차지해 가고 있었다.
할리드…. 차마, 감히. 십여 년 만에 만난 이름을 발음하지 못하고 고작 입 모양으로만 속삭였다.
할리드의 미간이 불쾌함을 표하며 움푹 패는 것을 보고 나서야 손발에 저릿하니 감각이 돌아온다. 펠티온이 어째서 첩자 노릇을 한 저를 모르는 척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처음부터 그에게 선사 될 전리품이었을 테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아주 오래전 제가 버렸던 아이가 검이 되어 나타나 저를 추락시켰다.
* * *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며 새파랗게 돋아난 나뭇잎들은 따스한 바람을 사이사이에 품고 흔들렸다. 당시의 녹스는 열다섯이었다. 그리고 할리드는, 제게 버려진 할리드는 고작 열두 살이었다.
그래, 그 어린아이를 녹스가 내쳤다. 정확히는 비열한 방법으로 쫓아냈다. 녹스는 그때를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었다. 어린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단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했던 어리석었을 때. 너를 지키기 위해서 저질렀던 최악의 방법 한 가지.
“도련님.”
그때의 할리드는 녹스의 전담 하인이었다. 평범하다고 하기엔 너무나 예뻤고 반짝이는 푸른 눈은 커다랬다. 그와 전혀 다르게 생긴 녹스는 그런 할리드를 퍽 예뻐했다.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때의 사랑스러웠던 너를.
“오늘도 기사단 훈련에 나가시지요?”
“그래.”
“저도 갈래요.”
할리드는 먹고 사는 게 어려워 또래보다 훨씬 작은 감이 있었다. 녹스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할리드를 부려 먹는 걸 퍽 어려워했다. 겉으로 보기엔 가차 없이 일을 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할리드는 알았다. 도련님께선 제게 힘든 일은 맡기지 않으신다는 걸.
“오늘도 따라와서 그늘에 서 있어. 내가 부를 때만 오면 돼.”
“예!”
그래, 지금처럼 이렇게. 할리드는 자신과 전혀 다르게 키가 크고 날카롭게 빠진 눈매를 가진 도련님을 몰래 훔쳐보곤 했다.
자신과는 태생부터가 다른 사람.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옆이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걸을 수 있는 그 여유. 빛을 받으면 희미하게 녹빛이 도는 검은 머리에 어둠 속에서는 검게 보이는 암녹색 눈동자. 하지만 할리드는 저 암녹색 눈동자가 햇볕을 받으면 얼마나 예쁜 색으로 빛나는지 알고 있었다.
녹스와 할리드는 아침 훈련을 위해 훈련장으로 나가고 있었다. 붉고 긴 복도를 걷다 보면 자신의 뒤에서 타박타박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녹스는 가끔 그 발소리에 제 발걸음을 맞추곤 했다. 혹여 아이가 저를 놓칠까 봐. 하지만 가끔, 그 평화로운 장면에 끼어드는 작자가 있었다.
“아침부터 어딜 가느냐.”
돌란 라이네리오. 역겨운 자신의 아버지. 그는 황족 출신의 어머니로 인해 집안에서 기 한번 펴지 못하는 나약한 자였다. 어머니는 그를 경멸했고 그건 녹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그 애는 봐도 봐도 어여쁘구나.”
할리드는 저도 모르게 녹스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녹스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할리드 사이에 껴 그의 방패 노릇을 해 주었다.
“아침 훈련을 가고 있었습니다.”
“필요 없는 하인은 두고 가지 않고서.”
“필요합니다.”
“그래?”
“예, 어머니께서 훈련 시 늘 데리고 다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