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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60화 (60/158)

제60화

“이런!”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녹스가 기사의 품으로 파고들어 검을 가로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카득, 카각-.

그대로 기사의 목을 쳤다.

푸확, 잘린 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쳐 올랐다.

“꺄아아악-!”

목 앞에서 검이 멈출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녹스는 순간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자신과 비슷한 색의 눈동자를 한 자의 눈이 반짝이는 것에. 자신은 이렇게 죽어 버린 눈동자를 하고 있는데.

무너지는 기사의 눈에서 반짝임이 사라졌다. 녹스는 그것이 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순간 역겨움을 느꼈다.

자기 자신이 언제 이렇게까지 바닥으로 추락했나. 그는 죽은 기사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까맣게 가라앉아 버린 눈동자. 곧장 쓰러지는 몸. 녹스는 그의 목에서 나온 피를 뒤집어쓰고 쓰러져 버린 기사의 몸에 다시 칼을 세웠다. 죽어 버린 몸뚱이 안으로 다시금 날카로운 칼이 쑤셔져 들어갔다. 푹, 끄득, 까드득. 뼈와 검날이 부딪혀 나는 소리가 선명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홀의 바닥을 한껏 더럽혔다. 기사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녹스는 지독한 자기 혐오에 빠져 그의 몸을 찌르고, 찌르고 또 찔렀다. 주변에서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현장을 바라보았다.

녹스는 그의 시신을 베고 찌를 때마다 무언가 해방감을 느꼈다. 아, 저치는 이제 해방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으로부터? 나는 아직 갚지 못해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녹스는 이제 완전히 자신의 얼굴로 보이는 기사의 시신을 찌르다가.

“그만, 그만!”

그만하라 외치는 제 주인의 목소리에 손을 우뚝 멈추었다.

“그만, 녹스.”

녹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본 자들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았다.

“예, 주인님.”

검은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휘어져 있었다. 그가 있었다. 고요하게, 방금 사람을 죽인 자처럼 보이지 않는 그런 얼굴로.

그것은 원하던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취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감각. 자신이 원하던, 생각지도 못했던 욕망. 녹스는 오늘 처음으로 그것을 알았다.

“이리 와.”

철컹.

녹스는 검을 떨어뜨리고 할리드에게 다가갔다. 예의 그 미소는 검을 손에서 놓는 순간 사라졌다. 할리드는 제 곁으로 다가온 녹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가 피에 흠뻑 젖어 있어도 상관없다는 사람처럼.

할리드는 녹스의 몸을 안아 들었다. 녹스는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그의 품에 안겼다. 방금까지만 해도 검을 들고 날아다니던 자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모습이었다.

“폐하, 저흰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궁에 방을 마련해 주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세인더스 발레리안은 제 기사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듯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왕국 최고의 기사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손쉬운 죽음을 맞을 줄이야. 황제는 할리드와 녹스가 자리를 피하자 뒷짐을 지고 재미없다는 듯 말했다.

“결투는 끝이 났네. 결투의 결과에 따라 그대는 책임을 물을 수 없어.”

“…….”

귀족들이 혀를 차며 흩어졌다.

“시신을 치우거라.”

“예, 폐하.”

“장례는 치를 수 있도록 수습하여 가는 길에 돌려주지.”

“…이럴, 이럴 수는.”

“이럴 수 없는 일은 없어. 추하게 굴지 말고 그대로 퇴장하도록.”

곧 세인더스의 시종들이 그를 부축한 채 다급히 홀에서 사라졌다. 귀족들은 그의 뒤에서 속삭였다.

‘기사만 불쌍하게 되었지.’

‘그러게 왜 분별없이 공작님의 노예에 손을 댄답니까.’

‘그자가 그런 기량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공작가의 자제일 적에도 밝혀지지 않은 실력이지 않습니까.’

발레리안이 사라지고 나서도 홀의 분위기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하인들이 급하게 시신을 치우고 핏자국을 닦아 내도 홀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듯했다.

황제는 쯧쯧 혀를 차면서도 즐겁다는 듯 웃으며 연회를 파했다. 어차피 오늘 하루만 있는 연회도 아니었으니. 황제는 그대로 홀을 나와 복도를 걸으며 물었다.

“공작은 어느 방으로 안내했지?”

“황제 궁의 손님방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잘했네.”

황제는 곧장 황제 궁의 손님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방에 닿았을 때 웬일로 녹스 혼자 욕실에 들어가 씻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할리드는 녹스의 몸을 안아 드느라 피에 젖은 채로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었다. 황제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그가 웃는 얼굴은 내 처음 봤어.”

“……저는.”

“봤겠지. 아주 어렸을 적에.”

“…예.”

“지금으로서는 웃을 수가 없겠지. 노예로 전락한 마당에 웃음이 나오겠나? 다만 내가 이상하게 여겨지는 건 왜 하필 지금 웃었냐는 거야.”

“…이상한데. 무엇이 이상한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나도 그래. 대체 거기서 왜 웃은 거지? 웃을 일이 뭐가 있다고.”

승리에 취한 얼굴도 아니었다. 그의 미소는 당연한 것을 대하듯 잔잔했고 또 자연스러웠다. 할리드로서 그리고 황제로서도 처음 보는 미소였다. 그들에게 녹스의 얼굴이란 찡그리고 우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그들이 아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미소라는 얼굴을 본 지금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본디 검 쥐는 것을 좋아했나?”

“아마도.”

“검을 그리 중히 여겼다면 그렇게 웃을 수도 있겠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 녹스, 그러니까 도련님이었을 적의 녹스는 의무로 인해 검을 휘둘렀다. 자신이 없는 사이 검에서 뜻이라도 찾은 걸까. 그로선 영원히 모를 일이다.

“아는 것이 없군.”

그리고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자. 그것이 녹스 라이네리오였다. 노예가 된 지금도. 아무도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런 무위를 갖췄다는 것부터. 왜 그때, 그렇게 웃었는지에 대해서까지. 모조리 다.

달칵.

그때 녹스가 목욕을 끝내고 가운을 걸친 채 나왔다. 녹스는 두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보더니 자연히 가운 끈을 풀어내려 했다. 그때 할리드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

녹스는 가운 끈을 풀려다 말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에게 다가갔다. 할리드는 의자에 앉은 채로 녹스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었다. 녹스는 잠시 그런 그를 내려다보다가 할리드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황제는 그런 그들의 상황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제 시종을 물리고 할리드의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녹스.”

“예, 폐하.”

“그때 왜 웃었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사를 죽였을 때, 아니. 난도질했을 때.”

그 말에 녹스가 물었다.

“제가 웃었습니까?”

“…….”

황제는 할 말을 잃었다. 녹스가 그때 제 자신이 웃은 것을 인식조차 못 했다니. 그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본인이 웃은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 상대에게 뭐라 물어볼 수 있단 말인가. 황제는 허탈하게 웃으며 할리드에게 말했다.

“그런데 할리드, 그대는 왜 위로가 필요해 보이지?”

“제가, 그랬습니까?”

“그래. 넌 뭐가 마음에 걸리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아는 게 뭔가.”

“다만, 무언가…. 불안해서.”

할리드는 녹스를 올려다보았다. 녹스는 잠시 그와 시선을 맞추고는 물었다.

“저 때문에 말입니까?”

“그래.”

녹스는 잠시간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검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예전처럼 암녹색으로 반짝이지 않는 눈. 마치 죽어 버린 자의 것처럼. 그 검은 눈을 한 채로 웃었던 그 얼굴이 할리드를 이상하게 불안케 했다.

녹스는 그의 불안을 긍정하지 않았다, 그렇다 하여 부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녹스는 그때 자신이 느낀 감정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아, 너는 네가 할 일을 마치고 결국 안식으로 돌아갔구나. 아직 할 일이 남은 나와는 다르게. 그것이 끝나기 전까진 이 목숨조차 억지로 붙들고 있어야 하는 나와는 다르게.

그것은 부러움이었나 아니면 질투였나. 녹스는 그것조차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제가 웃었는지조차 몰랐던 것처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녹스는 아직도 제 가슴 안쪽을 꽉 메우고 있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털어 버리고 싶은데, 할리드에게 네가 걱정할 것 따위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은데 목구멍까지 꽉 차오른 이 검은 감정은 이름 따위 알려 주지 않고서 계속해서 차올랐다. 속이 욱신거렸다. 점점 더 차올라 제 머리를 지배할 것 같았다.

“…….”

두 남자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녹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희미하게 켜져 있는 방의 불빛으론 그 눈을 밝힐 수 없을 것 같았다.

녹스는 검은 눈으로 할리드가 아닌 허공 어느 곳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인님.”

“그래.”

녹스는 제 감정을 외면하기를 택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감정이니 이대로 묻어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에겐 자신을 위한 고뇌 따윈 필요치 않았다. 할리드가 침묵했다. 녹스는 가운의 끈을 천천히 풀었다. 울혈 가득한 몸이 드러나며 할리드의 시각을 자극했다.

“당장, 주인님의 생각으로만 머리가 가득하도록….”

그 검은 감정이 꾸역꾸역 머리 위로 올라오고 있음을 느끼며 녹스는 잔잔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 꼴을 지켜보던 황제 펠티온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런 거라면 좋은 게 하나 있지.”

할리드가 황제를 바라보았다.

“어째, 그대가 어여쁘게 여기는 노예가 부탁하는 건데 이왕이면 제대로 해 줘야 하지 않겠어?”

할리드가 미간을 찡그렸다. 녹스는 천천히 할리드의 머리카락에 제 뺨을 비볐다. 그리고 속삭였다. 어서요, 주인님. 빨리.

이 검은 것이 나를 집어삼켜 버리기 전에.

“…이번뿐입니다.”

할리드가 으르렁거렸다. 황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렴, 이라는 듯 표시를 해 보이곤 자신의 시종들을 불러들였다.

“여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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