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연회가 시작되기 전. 궁으로 안내된 손님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 남색가면 뭐 어때. 그렇다 한들 후사는 필요할 텐데. 어차피 귀족들의 결혼은 정치적 결합이다. 그 사이에 사랑이나 애정 따위는 없어도 괜찮았다.
그들은 내일 있을 사냥제에 대해서도 떠들기 시작했다.
“이번엔 강력한 우승 후보가 있지 않나요?”
“할리드 비아 공작님 말씀이시지요?”
“예, 황제 폐하께서도 사냥으론 비아 공작을 못 따라간다고 말씀하셨대요.”
“아마 이변이 없다면 그분이 우승하시겠죠.”
“우승 후의 영광은 누구에게 바칠까요?”
“글쎄요. 비아 공작가와 교류하는 집안 어디에 딸이 있더라.”
그때 누군가 설마 하는 말씨로 물었다.
“설마 거기서 라이네리오 공작을 지목하진 않겠죠?”
순간 사람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조용히 시선만이 오갔다. 그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거짓을 뱉었다.
“그럴 리가요. 그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마 그렇게 한다면 라이네리오 공작이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그럼요.”
그들은 애써 그 가능성을 무시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각자 다른 생각을 했다. 라이네리오 공작의 혼담을 성사시켜야 비아 공작이 포기 비슷한 걸 할 거라는 결론. 그들은 금세 웃으며 부채를 살살 부쳤다.
햇볕이 뜨거웠다. 해가 길었으나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각 나라별로 모여 은근슬쩍 정보를 나누며 제국의 정황을 파악했다.
그렇게 사냥제의 날이 밝고 귀족들은 말과 마차를 타고 황궁 밖에 있는 제국 남쪽 숲으로 향했다.
이는 황궁과 바로 등을 맞대고 있는 숲으로 황궁에서 열리는 사냥제는 매번 이 숲에서 열렸다.
“우승자는 아무래도 역시….”
사람들은 저마다 우승자를 점쳤다. 이름이 가장 많이 언급된 자는 당연히도 할리드였으나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몰려 있었다.
그가 정말 우승의 영광을 라이네리오 공작에게 바칠까? 우승의 영광을 같은 공작에게 바치는 공작이라니. 그러면 꼴이 꼭.
“가신 가문 같은 꼴이잖아요.”
“비아 공작께서도 생각이 있으시면 위신을 깎아 먹을 생각은 안 하시겠죠.”
한쪽에 세워진 막사 아래론 마담과 레이디들이 자리를 잡았다. 남자들은 말을 한 마리씩 끌고 나와 제 약혼녀에게 손수건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것이 할리드였다. 그가 나타나자 주변이 일순 술렁였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회금색 머리카락, 새파랗게 벼린 것 같은 눈동자. 매끄러운 생김새는 아무리 보아도 용병 출신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
몇몇의 여인들이 그런 그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쉽사리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용기를 내는 자는 있는 법.
계절에 맞추어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후들거리는 다리로 할리드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할리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금발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에 고동색 눈을 한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리고 말을 더듬으며 손수건을 불쑥 내밀었다.
“여, 여기….”
“…뭡니까.”
할리드가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 여인은 어느 후작가의 영애였다. 그러니까 이름이 어떻게 되더라. 할리드는 그녀를 떠올리려 애썼다. 어디서 본 것도 같은 얼굴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녀를 떠올리는 데 실패하곤 애매하게 답했다.
“아, 안전을 기원하고자 수를 놓은 손수건입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레이디.”
할리드의 답에 여인의 얼굴이 확 펴졌다. 하지만 그 뒤 돌아온 답은 여전히 억지로 내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의 거절이었다.
“하지만 제가 아닌 다른 분께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더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모두의 앞에서 당하는 거절이란 수치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녀는 알겠다는 자그마한 대답과 함께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자리로 돌아가자 그녀의 친구들로 보이는 영애들이 위로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용기를 낸 자가 거절당하자 남몰래 그에게 손수건을 전달하려던 여인들은 마음을 접었다. 그래, 저 얼굴에 속지 말자. 저놈은 남색가다. 그녀들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왜 저런 얼굴로 남색가인 거야.
그들이 몰래 숨긴 손수건을 슬쩍 쥐어뜯을 때, 다시 한번 일대가 술렁였다. 누군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님이에요.”
“아, 이번에 참가하실까 했는데.”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는 마치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혀 사각거리는 것과 비슷했다. 녹스는 자신의 흑마를 이끌고 적당히 막사와 먼 곳에 자리를 잡았다. 굳이 별로 좋지도 않은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좋은 말을 구하셨군요.”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녹스가 고개를 들자 디미트리가 보였다. 디미트리 역시 사냥제에 참가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녹스는 그를 확인하곤 조금 편안한 얼굴이 되어 답했다.
“이번 사냥제 우승은 어려울 것 같던데.”
“아, 할리드 비아 공작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이런 사냥제에서 우승하는 자는 거의, 아니 항상 라이네리오 기사단에 몸담고 있는 기사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높은 우승 확률을 가지고 있는 자는 디미트리였고.
“아쉽겠어.”
“별로 아쉽진 않습니다. 그리고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죠.”
“그래?”
“일찍부터 포기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서.”
그 말에 녹스가 설핏 웃었다. 원래 이런 통나무 같은 사람이었지. 녹스는 웃는 모습 그대로 제 흑마의 콧잔등을 쓸었다. 사람의 손을 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말은 녹스의 손바닥 안에 콧잔등을 비볐다.
녹스가 디미트리와 대화하는 사이, 할리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두 사람을 살펴보고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표정, 설핏 짓는 미소. 자신이 보기엔 너무나 어려운 것들.
상대가 누군지는 잘 알고 있었다. 디미트리. 라이네리오 기사단의 부단장이던 자. 그리고 한 번 바쳤던 충성의 맹세를 지키고자 그의 곁으로 돌아간 자. 할리드는 말고삐를 꽉 쥐었다.
‘…아냐, 오늘은 내가 할 일이 있으니까.’
기분에 취해 그것을 그르치면 안 되었다. 녹스, 도련님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할리드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그때쯤,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마차가 숲 입구에 섰다.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귀해 보이는 시종이 마차의 문을 열자 그 안에서 가벼운 사냥복을 챙겨입은 황제, 펠티온과….
“기어코 절 여기에 끌고 나오시는군요.”
“가끔은 햇빛도 봐야지.”
엘러딘 바이스가 보였다. 황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하, 다들 낯빛이 좋군.”
“감사합니다. 폐하.”
모두가 한 입이 된 것처럼 답했다. 황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순간 멈칫했다. 막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서 있는 녹스를 본 탓이다. 녹스는 황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리곤 디미트리를 바라보았다. 황제도 소문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펠티온은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지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디미트리, 잠시만.”
“예.”
녹스가 손을 뻗어 디미트리의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디미트리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설핏 웃으며 답했다.
“민들레 홀씨 같은 게 붙어 있어서.”
“아, 그랬습니까. 감사합니다.”
황제의 시선이 순간 녹스 라이네리오에게 붙박였다. 사람들은 황제의 시선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했다. 황제는 입 안의 살을 가볍게 씹고선 곧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할리드에게 다가갔다.
“그래, 비아 공작. 오늘 자네에 대한 기대가 커.”
“제게 기대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야 모두가 자네를 우승자로 점치고 있지 않나.”
“그건 모를 일이죠.”
현재 황제와 할리드의 사이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한 남자를 욕망하는 두 남자. 둘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황제는 아무도 자신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할리드를 조금, 얕봤고 할리드는 그것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가 자신을 얕본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득이 있을 테니까. 믿던 자에게 물리는 것만큼 아픈 건 없는 법이다.
황제는 곧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고 곧 자신의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은 손짓을 보고는 크게 외쳤다.
“사냥 시작 시간은 11시 정각입니다. 이후 오후 4시까지 다시 이곳으로 모여 주시면 됩니다! 각 가문의 활의 개수에 따라 우승자가 정해질 겁니다!”
“드디어 시작하나요?”
“이번엔 쟁쟁하네요. 기대해 봐도 좋겠어요.”
여인들은 기대감을 품었고 남자들은 각자 말에 휙 올라탔다. 황제와 할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장신의 두 남자가 손쉽게 말에 올라타자 사람들이 작게 감탄했다. 하지만 두 남자의 시선은 검은 말에 올라탄 녹스에게 붙어 있었다.
“그럼 이번 사냥제에서 우승하길 빌어 주지.”
“꼭 우승을 차지해서 그 영광을 바치도록 하죠.”
녹스가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내게?”
“당연히 모시는 주군에게 바쳐야지요.”
“아니지. 디미트리. 자네 아직도 약혼을 하지 않았나?”
“제 약혼자는 검입니다.”
“그래, 그런 사람이었지.”
녹스는 알아서 하라는 듯 말을 차 먼저 숲으로 내달렸다. 디미트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다른 방향으로 떠났고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다른 참가자들도 섞이지 않게끔 각자 흩어졌다. 할리드는 녹스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다른 방향으로 말머리를 틀었고 황제는….
“…그럼 끝나고 보지. 바이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적당히 시간 때우고 있을 테니 제게 사냥감을 바라지는 마십시오.”
“그러지.”
펠티온은 녹스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 말을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