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펠티온은 저도 모르게 녹스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편지를 주고받은 뒤 그를 계속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펠티온은 녹스가 자신에게 나가라 일갈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분노와 절망 그리고 모욕을 당한 사람의 눈이었다. 지금 자신이 그의 눈앞에 나타나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욕망을 이길 수 없었다.
녹스 라이네리오. 제 손아귀에 올려놓고 멋대로 쥐락펴락했던 남자. 그리고 이젠…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남자.
몸을 섞으면서 만들어진 욕망과 죄책감이 한데 섞여 일그러진 감정을 만들어 내는 건 정말 한순간이었다.
펠티온도 자신이 녹스에게 가진 비뚤어진 욕망을 잘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거둘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는 황제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살아남게 해 준 것은 녹스였다. 그렇기에 녹스 라이네리오라는 남자가 제 곁에 있어야 함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영광을 누려야지. 그가 가지고 싶다는 건 전부 안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그 누구보다 녹스 라이네리오가 원하지 않았다.
펠티온은 느리게 말을 몰며 저 멀리 보이는 녹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사냥을 온 건지 산책을 온 건지 모를 속도로 천천히 말을 몰고 있었다.
그건 펠티온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황제파의 기상은 할리드 비아가 올려 줄 것이다.
자신은 그저 한동안 눈에 담지 못했던 그를 바라만 보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바라만 보고 싶은가?
펠티온은 곧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가 눈앞에 있으면 그와 이야기하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제 손끝이 뺨에 닿았을 때 설핏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이다. 겁쟁이처럼.
그리고 녹스는 자신의 뒤를 누군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람이 바로 황제라는 것 역시도. 녹스는 서늘한 표정으로 앞만 보며 말을 몰았다. 그는 점점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로 사그락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뒤쫓는 자가 풀을 밟는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그리고 하나 더.
녹스는 순간 말을 돌렸다.
형식상 가지고 온 활이었지만 메고 있던 활을 들었다. 녹스는 화살을 꺼내 들고 활시위를 세게 당겼다.
순간적으로 녹스의 뒤를 따라오고 있던 펠티온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녹스는 아무런 감상도 없는 표정으로 활시위를 놓았다.
핑!
소리가 나며 화살이 빠르게 펠티온을 향해 날아갔다. 펠티온은 그것을 멍청하게 보고 있었다.
화살은 펠티온의 귓가를 스쳤다. 쉭, 무언가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가 귓가를 때리고 그 뒤로 꽥 소리가 났다.
끄윽.
목에 활을 맞은 사슴은 몇 걸음 더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펠티온은 고개를 돌려 활에 맞은 사슴을 바라보았다. 활이 스친 귓가엔 상처 하나 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저런.”
녹스가 느긋하게 말을 몰고 오며 말했다. 펠티온은 쓰러진 사슴을 바라보다 다시 녹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녹스가 활을 쏘는 순간 움직일 수 없었다. 순간 마주친 눈에 꼼짝없이 잡힌 듯했다.
아니, 만약 움직일 수 있었다 해도 자신은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것으로 그의 분노가 조금이라도 풀어진다면, 활 따위는 얼마든지 맞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녹스가 자신의 심장을 노리지 않을 거라 여기는 오만한 확신이기도 했다.
녹스는 펠티온의 오만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표정으로 펠티온을 바라보았다.
“실례를 했군요.”
“…괜찮네.”
녹스가 다시 말 머리를 돌렸다. 펠티온은 그의 곁으로 바짝 말을 몰았다. 녹스의 시선을 한 번이라도 더 받고 싶었으나 녹스는 그가 따라붙는 것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펠티온은 애가 탔다. 녹스 라이네리오의 안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까 봐. 그는 차라리, 그가 끝까지 자신을 미워하길 바랐다.
펠티온이 가지고 있는 뒤틀린 욕망이란, 마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펠티온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기대하고 있어.”
녹스의 시선이 스윽, 그를 향했다.
“그대가 내게 올 날을.”
결국 네 스스로 내게 올 날을. 녹스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가운데 옴폭 팬 자국이 좋았다. 펠티온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품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이 숲에서 아무도 모르게. 그의 몸을 눌러 잡고, 입술에 입술을 찍어누르고…. 자신을 경멸하든 혹은 눈물 젖은 눈으로 보든. 그가 제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녹스는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간을 찡그린 채 여전히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녹스의 시선은 펠티온의 눈동자 옆을 지나고 있었다.
‘어딜 보는 거지?’
그때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옴폭 팬 미간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녹스는 순식간에 말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검을 뽑아 들었다.
화악. 그때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것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눈 깜빡할 새였다.
카앙!
커다랗고 날카로운 이빨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펠티온은 눈을 크게 떴다. 갈색의 늑대였다.
“저런 게 왜…!”
수도 안엔 맹수 따윈 없다. 그러니 이곳에 저런 크기의 늑대가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늑대는 훌쩍 뒤로 몸을 물리고 으르렁댔다. 그 몸집이 2m는 족히 넘어 보였다.
푸른 잎사귀와 대비되는 짙은 갈색 털.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색과 흙바닥 색이 똑 닮아 있었다. 그들이 왜 여태껏 발견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녹스가 기민하게 대응하지 않았다면 아마 둘 중 하나에게 달려들었겠지. 펠티온은 말에서 뛰어내려 똑같이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그 소리에 녹스가 흘깃 펠티온을 바라보았다.
“가십시오. 사람을 불러오는 게 좋겠습니다.”
“어떻게 자네를 혼자 두고 가나.”
“얕보였나 보군요.”
“얕보는 게 아니야.”
그 말에 녹스가 답했다.
“걱정이란 말은 하지 마십시오. 웃기지도 않으니까.”
펠티온의 입이 다물렸다. 늑대는 날카로운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며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 몸을 낮췄다.
두 남자는 왼쪽 발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 둘이 움직이는 순간, 늑대가 튀어 올랐다.
녹스가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늑대는 위로 크게 뛰어오르며 검을 피했다. 꽤 똑똑한 놈인 듯했다.
녹스는 허리를 틀어 늑대의 옆구리를 베어 냈다. 제법 털가죽이 단단했지만 촤악, 소리와 동시에 피가 튀었다.
늑대는 옆구리를 피로 적신 채 으르렁거리며 순식간에 다시 한번 더 달려들었다.
녹스의 검이 가로로 휘둘러졌다.
카앙!
늑대가 대항하듯 녹스의 칼날을 물었다. 까각, 까득. 물어 당기는 힘이 적잖이 강했다. 녹스는 검 손잡이를 쥔 채 늑대와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펠티온은 그 틈을 노려 늑대의 목을 노렸다. 그가 몸을 돌려 목 옆으로 검을 쑤셔 넣으려 하자 늑대는 힘겨루기를 포기한 듯 고개를 크게 돌려 녹스의 검을 떨쳐냈다.
힘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어 녹스가 잠시 비틀거리는 사이, 늑대는 성큼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가 뒷발에 힘을 줬다. 그러고는 갑자기 비어버린 공간에 검을 찔러넣느라 중심을 잃은 펠티온에게 달려들었다.
‘아, 젠장!’
펠티온은 급하게 다리를 물려 방향을 틀었으나 너무나 급한 움직임에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했다. 결국 그는 기우뚱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눈앞으로 커다랗게 벌어진 아가리가 보인다. 아, 날카로운 송곳니가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바로 그때. 풀밭으로 쓰러지는 황제와 늑대 사이에 팔 하나가 끼어들었다.
방향을 잃었던 녹스가 빠르게 달려와 늑대의 아가리에 제 손을 끼워 넣은 것이다.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콱, 아가리가 닫히며 날카로운 이가 녹스의 팔을 관통했다.
“큭…!”
“녹스!”
뚝, 피가 흘렀다. 펠티온은 풀밭에 쓰러진 몸을 튕기듯 일으켰다. 녹스는 파고드는 이빨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팔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펠티온은 녹스가 늑대를 붙잡고 있는 사이 다시 한번 검을 쥐고 깊게 찔렀다. 이번엔 그가 쥔 검이 단단한 털가죽을 뚫고 늑대의 목을 정확히 관통했다.
늑대가 피를 토하며 끄륵, 소리를 냈다. 늑대는 녹스의 팔을 놓고 자신을 공격한 펠티온에게 달려들려 했으나 다치지 않은 손으로 검을 든 녹스가 늑대의 머리를 노리고 검을 찍어 내렸다.
꽈득. 콱!
순식간에 머리뼈를 관통한 검은, 턱 아래를 꿰뚫으며 피와 함께 떨어졌다.
허억, 헉. 다급한 숨이 떨어졌다. 쿵, 거대한 늑대의 몸이 바닥에 스르르 쓰러지자 녹스는 검을 빼냈다.
그의 왼팔은 늑대에게 물린 상처로 피투성이였다.
펠티온이 다급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팔을 보자는 듯 손을 뻗었지만 녹스가 몸을 물렸다. 순간, 펠티온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손대지 말라는 그의 뜻이 너무도 확고했다.
왜? 방금까지만 해도 나를 지켰잖아.
녹스의 팔은 너덜너덜했다. 당장이라도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해 보일 정도로. 펠티온은 팔을 다친 채 홀로 말을 타는 건 위험하다고 여겨 입을 열었다.
“…일단 막사로 함께 돌아가는 게 좋겠군.”
“아니오.”
녹스가 딱딱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을, 불러다 주십시오.”
“…….”
펠티온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의 팔에선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으며 여전히 가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고집부리지 마.”
“압니다.”
녹스가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칼과 같이 단호하게 잘랐다.
“그래도 폐하와 닿는 건 싫습니다.”
그 거절에 펠티온이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