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신랑 도둑
혼례 준비가 한창인 마을에 외지인이 나타난 것은 정오 즈음의 일이었다.
평소라면 채 반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온 동네 사람들이 이 방문객의 등장을 알아챘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옷이며 음식, 패물 따위를 나르고 마을을 꾸미느라 드나드는 일꾼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객, 염승한은 자신의 질문에 답해 줄 만한 마을 거주민을 찾아냈다.
“거기 가는 대장부, 잠시 시간 되시는가?”
온통 번다한 가운데 하릴없이 나비 꽁무니를 뒤쫓던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제법 강렬한 인상의 미남자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아이의 입이 와, 하고 벌어졌다. 살면서 저렇게 독특한 분위기가 흐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신부를 찾아오신 손님이라면 촌장님 마을에 계세요!”
뭐든 물어보라며 재잘대는 음성이 퍽 경쾌했다. 어리다지만 대장부 소리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신부? 어쩐지 홍등이 주렁주렁 걸려 있더라니.”
승한은 희미하게 웃으며 턱을 긁적였다. 아무리 가는 날이 장날이라지만 재미있는 우연이다.
“누가 혼례를 올리는 것이지?”
“금화 소저와 유운 선생님의 혼례가 있어요!”
금화 소저라는 말까지만 해도 별 표정이 없던 사내의 눈썹이 유운이라는 이름에 움찔했다.
이 외딴 마을에서 소일거리 삼아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쳐서 선생 소리를 듣고 있다는 건 알았다. 하나 혼례를 올릴 정도로 가까이 둔 여인이 있다는 건 또 처음 듣는 소리다.
막내가 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젠 대사형의 차례라니…….
“다들 나만 쏙 빼고 재미가 좋군.”
한숨 사이로 섞여 나오는 혼잣말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특히 반짝이는 눈은 승한이 섭섭해한다기보다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혼례 때문에 오신 거 아닌가요?”
소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야속하게도 이런 경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거든.”
“와,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다 아는데!”
아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비범해 보이는 사내가 저를 대장부라 높여 부르는 것도 좋을뿐더러 저런 어른보다 자신이 아는 게 더 많은 일은 흔치 않아서 흥이 났다.
“신부 쪽 손님이세요?”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원하는 정보를 얻은 승한은 소년을 뒤로한 채 마을 안쪽으로 움직였다. 그의 발은 가벼웠으나 방정맞지는 않았다. 외려 사냥감을 쫓는 짐승처럼 사뿐사뿐하여 거의 기척이 없었다.
그의 사형, 모용유운이 이 외딴곳으로 유배된 것도 벌써 일 년이나 된 일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대사형이 혼례를 결심할 정도의 여인을 만났다니, 의외였다.
‘흑천에서는 찬바람만 쌩쌩 풍기던 사람이…….’
사부님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대사형에게는 유혹도 많았다. 그럼에도 유운이 염문에 휘말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략혼을 염두에 두고 만나던 소저만 두엇 있었을 뿐이다. 그나마도 어느 세력과 손을 잡아야 할지 저울질하느라 성사되진 않았다.
어쩌면 여태 집착하던 지위며 명예 따위를 전부 내려놓고 마음이 편해진 후라 월하노인이 엮어놓은 인연이 닿은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흑천에 한 마디 연통도 주지 않으시다니. 우리 대사형은 매정도 하셔라.”
대사형답긴 했다. 죄를 지어 쫓겨난 마당에 사부님 보기 민망하여 혼례를 올린다고 말하기 어려웠을 테지.
아무리 그래도 도둑장가라니!
막내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대사형까지 남의 집 말뚝에 절하게 생겼으니 사부님이 아시면 뒤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불손한 제자는 무엄한 생각을 하면서도 킬킬 웃었다.
아직까지는 즐거웠다. 아직은.
느슨하기 짝이 없는 승한의 낯에 의아함이 스친 것은 촌장의 집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제법 무림인 소리를 들을 법한 자들이 마을 안팎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엔 깊이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그 수가 두셋을 넘은 데다 제법 전략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의 입가에 모호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것 봐라…….’
승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필 막내의 혼사 때문에 사부님의 주의가 분산되어 있을 때 대사형이 유배된 마을에 찾아온 무림인이라니…….
각 무인이 서 있는 방위를 보면 일종의 포위진이 형성되어 있었다. 저 안의 누군가를 감시하는 동시에 달아나는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유기적인 배치로 미루어 짐작건대 설계자는 추적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이 한적한 산골 마을에 저렇게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할 귀한 것이라곤 단 하나뿐이다.
좁아터진 마을에는 숨을 곳조차 변변치 않아 승한은 숨죽여 때를 기다렸다.
한 사내의 부축을 받아 나타난 사형은 붉은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이염이 된 비단으로 사형의 옷을, 그것도 혼례복을.’
처음 혼사에 대해 알게 된 순간처럼 마냥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저런 누더기를 걸치게 하다니, 만약 자신이 아니라 사부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태워 버리셨을 게 분명하다.
신부와 합환주를 마신 유운이 휘청이는 순간까지도 승한은 냉정한 시선으로 그를 관찰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러곤 지팡이처럼 유운의 곁에 서 있다가 그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지탱하는 무인의 낯을 찬찬히 머리에 담았다. 그는 신랑이 쓰러질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일반적인 혼례도, 평범한 신부도 아니다.
처음 마을 아이로부터 이 사실을 알아냈을 때까지만 해도 승한은 구경이나 할 작정이었다.
그의 대사형이 여기에서 제 짝을 만난 거라면 축하해 줄 의향도 있었다. 그게 아마도 보통의 사형제가 하는 일일 테니까.
하지만.
“신부가 아무리 좋아도 저렇게 웃을 사람이 아닌데?”
승한은 담벼락 뒤의 어둠에 스며든 승한은 무성한 나뭇가지를 타고 지붕 뒤로 넘어갔다. 그 은밀한 움직임을 알아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방 안에 유운을 데려다 놓고 나온 무인이 밖에서 문을 잠그는 게 보였다. 가볍게 착지한 승한은 그의 뒤에 섰다.
기척이 아닌 그림자로 제삼자의 등장을 파악한 남자가 검을 뽑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승한이 그의 손목을 꺾고 아혈을 짚는 게 먼저였다. 그 채로 무릎으로 등을 찍어누르며 바닥에 밀어붙이자 사내가 갓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펄떡였다. 승한은 상대를 호되게 걷어찼다.
내공을 끌어 올려 저항한 겨를조차 없이 얼굴부터 바닥에 처박히는 이를 무심하게 내려다봤다. 마혈까지 짚은 승한은 잠시 고민했다.
‘분명, 사형을 부축할 때 옷이 제법 구겨졌더랬지.’
일부러 거칠게 쥔 눈치였다.
승한은 제압한 사내의 왼팔이 마치 길이라도 되는 양 찬찬히 지르밟으며 신방의 문으로 향했다.
발밑에 깔린 자가 미미하게 꿈틀거리긴 했으나 승한의 관심은 이미 저 방문 너머로 옮겨간 뒤였다.
문을 슬쩍 열어 안을 살피는 섬세함도 없이, 이 무도한 사내는 벌컥 안에 들어섰다.
붉은 혼례복에 몸을 꿴 채 비단 금침 위에 몸을 늘어뜨린 신랑이 보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식은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허락조차 없이 문을 열어젖혔는데 노성이 돌아오지 않아 무엇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승한은 한달음에 유운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사형, 사형.”
신랑은 반응 없이 숨만 쌕쌕 내쉬었다. 독한 열병에 걸린 어린아이 같았다.
“이거 곤란하네요.”
턱을 긁적이던 승한이 주섬주섬 유운의 몸을 일으켰다. 거의 멱살을 잡다시피 당기는 손길은 섬세하다기보다는 투박했다.
“저는 사람 죽이는 법은 알아도 살리는 법은 모르는데 이 마을엔 제대로 된 의원도 없고……. 만약 여기에서 대사형이 큰일이라도 나면 사부님도 뒤로 넘어가실 거란 말입니다. 제가 아무리 불측한 제자라지만 사부님은 살려둬야 할 거 아닙니까? 어휴. 사형이 유배당할 때만 해도 이런 부득이한 상황 같은 건 예상에 없었는데 말이지요.”
이런저런 핑계를 주워섬기는 승한의 낯은 퍽 즐거워 보였다.
“그러니까 대사형을 좀 모시고 가겠습니다?”
설렁설렁 유운을 제 어깨에 둘러메며 승한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형이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이 아우의 뺨을 때리면 없는 일로 하겠습니다.”
어차피 유운이 반응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럼, 허락받은 셈 치고, 실례하겠습니다.”
승한은 보무도 당당하게 신랑을 들쳐멘 채 신방을 나섰다. 나오는 길에 또 문을 지키던 사내를 밟아 버렸으나 그저 혀를 찬 게 전부였다.
“음. 왼팔만 밟아 놓으려고 했는데 주변이 어두워서 오른팔도 밟아버렸군. 네 운이 없음을 탓하거라.”
슬쩍 쪼그려 앉은 승한은 히죽 웃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아, 내 정신 좀 봐. 신부께 의가지락(宜家之樂)1) 누리시라고 전하고.”
신랑을 어깨에 들쳐 메고 달아나는 이가 그런 말을 입에 담아봤자 조롱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발걸음은 조용해도 입은 시끄러운 양상군자는 신랑을 도둑질해 저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안…… 돼…….’
금화 소저의 호위무사 무진은 필사적으로 염승한의 뒷모습을 눈에 아로새겼다.
***
‘여긴…….’
사위가 어두웠다. 아니, 모든 게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아래가 뜨거웠다.
원인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난 며칠간 먹은 약과 제 목구멍으로 넘어간 합환주.
휘청일 때만 해도 장작 한 개비를 태우던 불꽃이 이제 온 산으로 번지고 말았다.
유운은 손에 닿는 것을 반사적으로 콱 움켜쥐었다. 야금 같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수음의 충동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시야도 흐릿하고, 이명은 없으나 온통 고요하기만 하여 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린다.
모든 감각이 멀어지고 점점 고조되는 성감에만 신경이 집중되고 있었다.
안 좋은 현상이다.
유운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풀썩 쓰러졌다. 동시에 몸이 기우뚱 기울더니 확 무너졌다.
어깨와 등에서 느껴지는 둔한 감각에 침상 밖으로 굴러떨어졌다는 것은 알았다. 하나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팔을 뻗었다. 기어서라도 나가야 한다. 이런 약을 먹였으니 신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여기가 신방이 맞긴 한가?’
촌장의 집에 마련된 신방이라기엔 문까지의 거리가 지나치게 멀었다.
혼몽한 가운데 밤바람이 뺨을 때린 것도 같았으나 약 기운 때문에 천지 분간도 안 되던 때라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하긴 어려웠다.
더듬더듬 기어가며 유운은 흐, 하고 낮게 흐느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의 울음 같았다.
참으로 비참하고 추레한 꼴이다.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자초했다는 것이 가장 우습다. 이 너른 세상에 저 혼자만 똑똑하고 잘난 척, 그렇게 모두를 오시하며 살았는데 지금 제 처지를 보라.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신부가 문지방을 넘어 들어올 것이 두려워 바닥을 기며 도망치는 중이 아닌가?
“이런.”
삐걱, 하고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섰다. 신부인가? 하고 귀를 기울였으나 그 소리가 윙윙거렸다.
한 벌의 옷을 여러 겹의 천을 겹쳐 만든 양 상대의 목소리도 그렇게 여러 결로 나뉘어 들렸다. 낯선 듯 친숙하고 평이한 듯 독특한.
그저 남자라는 것만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금화 소저의 호위무사, 무진이었나? 그 남자가 왜 신방에 들어오지?
“벌써 깨어나셨을 줄은 몰랐는데.”
한숨처럼 속삭이는 음성에 유운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어쩐지 그가 가까이 오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잘 보이지도 않아 바닥을 더듬더듬 짚으며 뒤로 물러나는데 벽에 턱 하고 부딪혔다.
“금방 끝낼 테니 가만히 있어요.”
상냥하다면 상냥한 투였다. 하나 목소리가 동시에 세 명, 네 명의 것으로도 들리는 통에 악의 어린 협박처럼 들리기도 했고 조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없는 일로 하겠소.”
신음을 참으려 하는 통에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 나왔다.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지끈거림을 모르는 척, 유운은 어깨를 폈다.
“음?”
엄포를 놓으면서도 이게 먹힐 거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말뿐인 협박이 얼마나 빈약한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한껏 몸을 부풀려 봤자 지금의 그는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왜 자꾸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사내의 그림자가 제 몸 위로 기울었다. 등은 이미 벽에 부딪힌 뒤라 물러날 곳도 없었다. 바지만 끌어 내리는 무도한 손길에 유운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상대의 손이 옷자락을 헤집고 안으로 들어와 살덩이를 그러쥐었다.
“악!”
조심스럽다기보다는 거칠고 투박하다. 하나 그마저도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제 몸뚱이에 유운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하나 샅을 가르고 들어선 침입자는 안쓰러움이 무언지도 모르는지 무자비하게 유운의 성기를 탐했다.
“히, 으흑! 읍!”
바둥거리는 유운의 몸을 찍어 누르는 손길은 단호했다. 아무리 밀어내고 걷어차도 한 손으로 그를 제압한 채 살기둥을 비벼왔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이라서일까, 저를 누르고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어둠 같았다.
생경한 공포에 유운의 등허리가 떨렸다.
“악, 아흐, 읏!”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아냈으나 저를 주무르는 손아귀는 사뭇 흉포했다. 가진 것을 다 털어 내놓으라는 듯 쥐어짜는 손길이 어찌나 투박한지, 만약 약이 없다면 고통만 느끼지 않았을까 싶었다.
문제는 하필 그 자극이 가해질 때가 제 몸이 약에 절어 있는 지금이라는 점이었다.
강렬함은 그와 비등한 쾌감으로 치환되어 유운을 괴롭혔다.
“무, 무……진. 하지, 하지 마―”
“무진? 그건 또 어느 놈팡이입니까?”
너 말이다. 너!
유운은 속으로 악을 썼다. 그러나 그는 아래를 적시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심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교우관계까지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알아 오라 할 수도 없고. 이거 참.”
해명이랄 것이 돌아오지 않으니 남자는 저 좋은 대로 떠들어댔다.
“금화, 흐윽…… 금화 소저가 시키―”
“제가 이렇게 힘을 쓰고 있는데 신부만 애달프게 찾으시면 어떡합니까?”
남자가 투덜거렸다. 하나 그 말은 유운에게 그저 희롱으로 와닿을 뿐이었다.
이젠 옷이 들썩이며 살에 닿기만 해도 그것이 자극으로 느껴졌다. 달콤하고 저릿저릿한 감각이 아랫배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으…… 으……. 흐읏…….”
당장에라도 인내의 고삐를 놓칠 것 같았다. 부옇기만 한 머릿속은 맑게 개기는커녕 더 흐려지기만 할 뿐, 본능은 저를 희롱하는 무도한 이에게 몸을 내주라 속삭였다.
욕망으로 헐거워진 이성 사이로 위기감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흔들흔들 이지러지는 시야며 제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어서 추스르지 않았다가는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게 자명했다.
납치를 당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납치 때 느낀 공포가 이 순간을 덮어씌우듯 생생하게 살아났다.
“……놓아, 놔!”
유운은 발악하듯 덜덜 떨리는 손을 휘둘렀다. 철썩, 하고 힘없이 무언가를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실수였다. 납치범이 무얼 원하든 살고자 한다면 순응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약 기운 탓인지 그는 충동을 전혀 걸러내지 못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몸에 닿던 자극이 한순간에 멎었다. 훅 치밀어 오른 열기도, 거칠어진 숨소리와 온몸을 기어 다니는 듯 근지러운 감각은 여전했으나 저를 희롱하던 괴한이 손을 뗀 것만은 분명했다.
순간 겁이 치밀어 올랐다.
‘노한 걸까?’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유운은 일찍이 그 문턱까지 다녀온 일이 있었다. 하나 자신이 저지른 잘못 중 무엇도 용서받지 못한 채 죽고 싶진 않았다.
“……제가 시커먼 사내라 마음에 안 드시는 건 알지만, 이대로면 죽습니다. 응?”
사내가 어린아이를 달래듯 차근히 설명했다.
“의원이 그랬습니다. 제때 열기를 풀어내지 않으면 머리까지 약 기운이 미쳐서 최소한 광인이 되거나 절명할 거라고. 저에게 몸을 맡기면 금방 끝내드리겠습니다.”
그 간곡한 설득이 유운을 움직였다.
‘날 강제로 어떻게 해 보려는 게 아니었나?’
조금이라도 정신을 되찾기 위해 유운은 제 입술을 콰직 깨물었다. 고통에 흐릿하던 시야가 돌아온 것 같기도 했다. 가까스로 상대의 피부가 까무잡잡한 편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금화 소저나 그녀의 호위무사 중 누구도 저런 색을 가지진 않았다. 오히려―.
‘미쳤군. 이 상황에 사제를 떠올린다니.’
자신의 죄로 인해 끊어지고 만 옛 인연을 떠올린 유운은 눈을 감았다. 그는 해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지는 산 제물처럼 결연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손을 늘어뜨렸다.
안도의 숨을 내뱉은 이가 그의 위로 몸을 기울였다. 그 그림자는 처음처럼 마냥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부터 둥글게 문지르며 내려온 손길이 유운의 아랫배 쪽으로 미끄러지더니 이내 음모를 헤집었다. 공깃돌이라도 만난 어린아이처럼 고환을 조몰락거리는 손에는 음심보다는 호기심이 느껴졌으나 유운은 제 살에 닿는 호흡에도 발정하고 있었다.
“흣…….”
달짝지근한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결벽증 탓에 기루는 문턱도 밟지 않았으니 남의 손에 국부를 맡긴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급소를 내어주고 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오싹하면서도 더한 자극을 원했다.
자신의 거부 후 처음보다 조심스러워진 손길에 애가 탔다. 허리를 들썩이며 허벅지를 조이니 상대가 호응하듯 기둥을 문지르며 귀두갓을 비벼왔다.
“흐읏, 읏!”
입 안에 침이 고이고 숨이 가빠졌다.
왜 이렇게 아찔하고, 또 좋은 건지. 이게 온전히 약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몸이 민감해서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정말, 뼈밖에 안 남았군.”
남자가 혼잣말처럼 혀를 찼다. 이게 꼭 필요한 일이라 받아들이긴 했으나 상대가 제 몸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수치스럽다.
왜 저 입은 그냥 닥치고 있으면 안 되는 걸까?
“대체 뭘 먹고 지내셨습니까? 응?”
기둥을 감싼 손아귀가 마치 만년한철로 된 족쇄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으.”
눈앞에 불꽃이 튀고 식은땀이 흘렀다.
“피죽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것처럼, 이게 뭡니까. 속상하게.”
자신이 굶든 말든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제 양친도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사부님도 더는 만날 수 없게 된 지금 상대의 투덜거림이 과한 참견처럼 느껴졌다.
생면부지의 타인치고는 오지랖이 참으로 넓다.
‘예전이었다면 저 사내의 혀를 묶어놓고 손만 움직이게 할 텐데.’
과격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된 걸 보면 정말 머릿속이 쾌감에 뭉개진 것이 분명했다.
“흐, 흐윽……!”
심술궂게 요도의 끝을 틀어막고 꾸욱 압박하는 손길에 유운이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채 갈무리하기도 전에 타액이 흘러내렸다.
도리질을 치니 뺨에 와 닿는 야금의 감촉이, 그리고 부드러운 한숨 소리 따위가 그를 진창으로 처박았다가 다시 절정으로 끌어 올렸다.
“……아!”
발가락 끝까지 뻣뻣하게 세운 채로 그는 토정했다. 달아날 길 없이 한 구석으로 몰이 당한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신음조차 나오지 않은 채 멎어 있는 그의 뺨을 젖어 있는 손이 툭 건드렸다.
“잘하셨습니다.”
처음보다 덜 윙윙거리는 음성이 생각보다 낮았다. 그리고 어쩐지 익숙했다.
유운은 기시감을 털어내며 몸을 웅크렸다.
온통 감각이 왜곡된 가운데 아랫도리가 흥건해진 것만은 퍽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릴 적에도 잠자리에 실례 한번 해 본 적 없었기에 수치심이 절로 치밀어 올랐다.
그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야금을 끌어당겼다. 몸이 제대로 가려지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으면서 입술만 달싹여 물었다.
“이, 이제 된 건가?”
“제 손이 몇 개로 보이십니까?”
“셋…… 아니, 둘.”
웅얼웅얼 답한 유운은 고개를 숙였다. 낙담해서라기보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동요했다는 걸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직이네요.”
보다 또렷해진 상대의 음성에 유운은 흠칫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호흡도 평이했다. 이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헐떡이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끝 간 데 없이 고조되었던 흥분과 별개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빨리 끝내겠습니다.”
새삼 이것이 말 그대로의 도움이었음을 실감하며 유운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와 별개로 엄습하는 수치심을 애써 무시했다.
세 번이나 더 절정에 도달하고서야, 유운의 머리를 부옇게 하던 열기가 물러났다. 거의 탈진하다시피 한 유운은 숨을 골랐다.
“이제 좀 제가 보이십니까?”
그저 하나의 그림자 덩어리처럼 보이던 형상이 짓궂은 소년처럼 웃으며 눈을 맞춰왔다.
“사형.”
그 부름에 벼락같은 충격이 유운을 사로잡았다. 머리로 종을 들이박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염승한.
흑천을 떠나기, 전 자신의 사제(師弟)였던 남자다.
***
당금 무림을 양분하는 두 세력, 백라궁과 흑천은 각각 정파무림과 사파무림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강호의 질서를 주도하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혈교와의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은 후였기에 신흥 문파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그중 흑천의 전신(前身)은 사파무림의 종주라 할 수 있는 사마련이었으며 천마신교가 혈교와의 충돌 후 멸문한 까닭에 흑도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흑천을 세운 장본인이자 마도제일인 예진랑은 한 번도 그의 권좌를 남에게 넘기지 않았다. 예진랑의 휘하에는 세 제자가 있었으며 하나같이 빼어난 실력을 지닌 고수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그의 첫 제자는 정파무림의 오대세가 중 일익을 담당하던 모용세가 출신이라 여러모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첫 제자가 파문당하는 날이다.
“……단전은 봉했다. 기억을 지우기 전,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느냐.”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사락궁의 대전에 꿇어앉은 유운은 여느 때보다도 초췌한 모습이었다. 겉모습이야 단정하다고 한들 그의 거뭇한 눈가와 버석하게 마른 입술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감춰지진 않았다.
유운은 자신을 굽어보는 사부를 올려다봤다.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아름답고 무정하며 지나치게 완벽하여 인간을 초월한 양 보이는 사내.
하나 예전과는 달리, 유운은 그의 눈에서 깊은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
‘마지막…….’
항상 고고하게만 느껴지던 사부님이 마지막으로 들인 제자에게 성까지 내려 주며 귀애하는 모습에 질투를 느꼈다. 혈교의 손에 가족을 전부 잃은 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나타나 자신을 구원하였던 사부님의 시선이 막내 제자에게 닿을 때마다 몸서리치는 질투에 시달렸다. 부모를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불안감이 치밀었다.
‘차라리 저 아이가 흑천에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운은 결국 그 생각을 지워내지 못했다.
마침내는 사제를 죽이기 위해 손을 잡아선 안 되는 자들에게 협력하고 말았다.
‘내가 왜 그랬을까.’
유운은 고개를 툭 떨궜다.
사부님의 비호 아래 있는 예강오를 죽일 수 있다며 호언장담했던 이들의 손을 잡고, 실패한 암살의 증거 때문에 목줄이 메여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종래에는 놈들의 본거지로 납치당했다.
그들은 혈교의 잔당이었다. 유운의 가문을 멸문시킨 원수였으며 강호를 도탄에 빠트린 무림공적. 혈교의 잔당이 흑천에 똬리를 틀고 부화할 때까지 품을 내어줬음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절망했던가?
혈마를 위해 바쳐질 제물로 살해당하기 전, 시기적절하게 찾아든 구원마저도 원망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흑천의 정예를 이끌고 나타난 사부님이 함께 납치당한 막내 사제 때문에 온 거라 생각한 탓이었다.
못난 생각이었다.
“……정녕 마지막이라면,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유운은 입을 열었다.
“이 죄인의 기억을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죄인이라는 말에 진랑의 눈에 깊은 고통이 배어들었다.
자신이 언제나 갈구하던 애정은 이미 그 자리에 존재했다는 걸, 죄를 범한 후에야 알게 되고 말았다.
“망각한 자에게는 반성도 없습니다. 다시는 같은 우(愚)를 범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이 부족한 죄인이 마지막 가르침을 청합니다.”
유운은 몸을 깊이 숙였다. 처음 구배지례를 올리던 날과 달리 단 한 번의 절이었다.
이별과 회한이 모두 새겨진 얼굴을 숨긴 채 유운은 진랑의 허락을 기다렸다. 침묵은 길었다.
‘역시 배신자 따위가 흑천 내의 사정을 꿰뚫고 있는 걸 용인하실 분이 아니지.’
그의 사부님은 단전을 폐하지 않고 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비를 베풀었다. 보통 단전이 파괴당한 무인은 폐인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는 까닭에 사부님은 일주야 동안 대법을 펼쳐 유운의 내공을 묶었다.
혈교와 내통한 제자에게 내리는 벌치고는 지나치게 자비로웠다.
하나 기억은 그와 다른 문제다. 유운은 예진랑의 대제자였고 그의 대리로 흑천의 온갖 일을 도맡아 처리하곤 했다. 그가 알고 있는 흑천 내의 기밀이 한둘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사부님의 거처로 향하는 길에 펼쳐진 절진의 파훼법도 알고 있었다.
“평생을 감시당해도 좋습니다.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곳에 갇혀도―”
“운아.”
행여라도 거절당할세라 유운이 다급히 덧붙이던 말이 그 부름 한 번에 잘려 나갔다.
유운은 순간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예진랑이 저를 부르는 음성에는 경멸이나 불신이 묻어나지 않았다.
“네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곱씹는 건 괴로운 일이다.”
내심 기대한 호된 비난이나 매서운 채찍질 같은 것은 없었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느냐는 원망조차도 없다.
그 고요함이 외려 유운을 무겁게 짓눌러왔다.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살거라.”
“새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염치를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참아온 감정이 툭 터지고 말았다.
“제자는 사부님을 잊고 싶지 않습니다…….”
눈물이 뺨을 적시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깨라도 들썩이지 않으려 납작 엎드렸으나 현경의 고수인 사부님의 기감에는 전부 들통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비참했다.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혀서가 아니라, 그 잘난 자존심을 땅바닥에 내팽개쳐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너무 늦었다.
섧은 마음을 사리무는 그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풀썩 내려앉았다.
유운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어깨를 움츠렸다. 사부님의 겉옷에서 탁한 연기와 주향 따위가 뒤섞여 나고 있었다.
“……축시에 떠나거라.”
그리고 진랑의 발걸음이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미련 따윈 없는 척 시늉하는 사부님의 작별 인사에 유운은 자신을 감춰 주는 사부님의 마지막 위로 속에서 목놓아 울었다.
그날, 그 늦은 밤. 한 인영이 흑천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배웅하는 이 하나 없어 적막한 밤이었으나 아주 높은 곳에서 그림자 하나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사형이라니요.”
파리한 입술을 달싹여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유운 자신이 듣기에도 그리 힘 있는 투는 아니었다.
그리 나약한 성격도 아니건만 충격을 갈무리하기 어려웠다.
어찌 사제의 손에 제 몸을 맡기고 절정에 올랐단 말인가? 아무리 약 기운 때문이라 해도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본시 무림의 사형제 간이 친혈육만큼이나 공고할진대 유운이나 승한이나 사부님 손에서 자란 사이다.
이젠 기억에서 희미한 모용세가의 혈육보다도 더 친동기 같은 사내의 손에서 신음하고 애원하며 매달리다가 마침내 토정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유운을 아찔하게 했다.
그러나 유운은 자신의 동요를 갈무리해야만 했다. 한 터럭의 틈도 내보여서는 안 된다.
떠나오기 전, 그리 약속하지 않았던가.
유운은 여전히 그날을 기억한다. 자신이 엎드려 빌던 바닥의 차가운 냉기도, 사부님의 향이 어슴푸레 묻어나던 옷도.
살을 저미고 심장을 발라내던 뼈저리는 후회까지.
“역시…… 날 모르나?”
승한이 혀를 차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촛불의 너울거리는 빛에 그의 손이 번들거리는 게 얼핏 보였다.
유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애써 무시한 수치심이 재차 유운을 엄습했다. 차라리 금화 소저의 호위무사에게 희롱당하는 편이 나을 뻔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사제의 손에 몇 번이나 절정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유운의 머리는 필사적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제는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모를 터였다. 속내를 알 수 없이 빙글거리는 낯에 대고 거짓말을 내뱉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나 유운은 승한이 얼마나 뻔뻔하고 성격 나쁜 인간인지 잘 알았다.
가장 방심한 순간에 충격적인 말을 건네 상대의 속을 휘젓고 원하는 사실을 알아내는 건 저 요령 좋은 사내에게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은공은 누구십니까?”
희게 질린 얼굴로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남을 기만하는 거야 그렇게 어렵지도 않게 해냈던 일인데 지금은 벅차기만 했다.
하지만 이대로 승한이 나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이토록 당혹스러운 상황에 부닥친 백면서생이라면 상대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할 거였다.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문 채 경계할 것이 아니라.
“아, 내 정신 좀 봐.”
문을 열고 나가려 했던 납치범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사형께서는 전부 잊으셨으니 제 소개를 해야겠군요.”
손이 젖어서 번들거리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멀끔한 낯이다.
“염승한이라 합니다.”
“염 공자셨군요.”
“예전에는 승한아, 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셨지요. 기억이 없으시다니 강권하지는 않겠습니다.”
유운은 기가 찼다. 다정하게 부른 적 없다. 하나 기억이 없다고 말했으니 반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작 이름만 말하고 소개가 끝일 거라고 예상하진 않았으나 승한의 입은 재잘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조실부모했으며 지금은 돌아가신 흑룡방주 염왕길의 양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제 신분을 만들어 주시는 김에 그의 밑으로 입적시켰지요. 인성, 외모, 재력, 명예 아무것도 안 보고 딱 성만 보고 골라주신 양아버지입니다. 서로 정은 없었으니 위로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능청스러운 투로 무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져 놓는 승한은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그러나 유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할 줄 아는 것이 많으나 그중에서 금과 검을 가장 오래 익혔습니다. 탄주하는 소리가 마음에 든다며 사형께서 저를 얼마나 혹사시켰는지 모릅니다.”
이건 거짓말이다. 승한은 금을 수년 동안 배웠으나 어설픈 수준을 간신히 면했고 내킬 때마다 탄주하는 선율은 항상 엉망진창이었다.
새 노래를 배울 때마다 승한은 유운의 거처에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열에 한 번 정도는 들어오는 것을 허락해 주긴 했으나 정작 승한이 줄을 뜯기 시작하면 유운의 인내심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몇 마디 말로 면박을 주고 그의 손에서 금을 뺏는 대신 찻잔을 쥐여주면 승한은 특유의 짓궂은 낯으로 씨익 웃곤 했다.
처음부터 그 차 한 잔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자신이 사부님을 배신하기 전, 그들은 그런 관계였다.
“그리 말씀하셔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유운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승한이 늘어놓는 말에 옳다 그르다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지금이야말로 정말 사제와 타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괜찮습니다. 뭔가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을 때까지 제가 계속 말씀드릴 테니까요. 또 궁금하신 건 없습니까?”
승한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유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무어라 더 말을 붙이거나 그를 슬쩍 떠보기엔 지나치게 혼곤했다. 몸도 한달음에 천 리 길을 내달린 양 축축 늘어졌다.
억지 혼례를 올릴 뻔했고 이상한 약을 먹었으며 납치까지 당했는데 어둠 속의 괴인은 과거의 인연이기까지 했다. 하루가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몰아친 태풍이 유운의 신경을 갉작갉작 먹어 치웠다.
“내 정신 좀 봐.”
갑자기 승한이 혀를 찼다.
“고된 하루를 보낸 사형을 계속 붙들고 있었군요.”
유운이 자신은 그의 사형이 아니라고 입 아프게 부정하려는데 승한의 손이 그의 시야를 덮었다.
약을 먹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의 어둠이다.
내내 느끼고 있던 치욕스러움과 당혹감, 진실을 은폐해야 한다는 필사적인 사명감 너머에 있던 안도가 그에게 찾아들었다. 여기엔 그에게 혼인을 강요하던 금화 소저도 없고 자신을 억압하던 그녀의 호위무사도 없다. 속내를 알 도리 없는 편이긴 해도 승한은 그치들이 문턱을 넘는 걸 두고 보진 않으리라.
경직되어 있던 어깨가 풀리고 두 팔을 늘어뜨린 유운은 순순히 승한의 손에 몸을 맡겨 침대에 누웠다.
묵직하게 몰려든 피로 너머로 그의 옛 사제가 속삭였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 * *
1) 부부 사이의 화목한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