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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가이드로 살아남기 (63)화 (63/115)

63화

거의 공황에 빠진 순간이었다.

다시금 발밑이 훅, 까마득한 곳까지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

휘이이. 찬 바람이 피부를 할퀴었다.

질끈 감았던 눈이 저절로 떠졌다.

시야가 도시의 풍경으로 꽉 찼다. 까만 밤 속에서 무수히 많은 불빛이 반짝였다. 나는 내가 다녔던 회사의 옥상에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다른 기억인가.

나는 문득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뽀얀 입김이 허공에 번졌다. 근무 도중 답답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곧잘 이곳에 올라와 바람을 쐬고는 했었다.

이내 나는 자리를 뜨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멀찍이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을 마주했다.

“시, 아,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나는 겨우겨우 욕설을 삼켰다.

체격이 무척 큰 성인 남성이었다. 바지는 그렇다 쳐도, 달랑 몸에 달라붙는 셔츠 한 장만 입은 모습이…… 절대 날씨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외투도 두 겹은 입어야 될 것처럼 추운 이 날씨에 말이다.

그래서인지 추위에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거리가 있어서 생김새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얼굴을 보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

“옷을 너무 얇게 입고 계신 것 같은데.”

이 겨울에.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을 때였다.

남자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뭔가 싶어서 물끄러미 지켜보는데…….

너무 똑바로 나를 향해 직진해 온다. 누구라도 이상히 여기고 당황할 법한 행동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등에 난간이 닿았다. 흠칫하고서 황급히 뒤와 상대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그리고, 시발.

가까워진 상대의 외모가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몸속에서 상황을 지켜만 보던 나는 넋이 나갔다.

말도 안 돼.

……장희강.

장희강이었다.

그러잖아도 혼란에 잠겨 렉이라도 걸린 것처럼 버벅거리던 뇌가 아예 작동을 멈추었다.

어떻게 장희강이 전생에서……?

“…….”

장희강은 긴 다리로 금세 지척까지 다가왔다. 코앞에서 대면하게 된 그의 얼굴은…….

울면서 웃고 있었다.

내면에서 들끓는 복합적인 감정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듯, 눈물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입꼬리를 올린 모습. 흥분과 환희만큼은 분명히 드러난다. 함부로 시선을 뗄 수 없는 미치광이 같은 분위기였다.

장희강은 당혹스러운 표정의 내 몸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처럼 옭아맨 채로, 숨도 못 쉴 만큼 강하게.

“……!”

상대방의 기세에 압도되어 굳어 있던 나는, 뒤늦게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

엄청난 근력 차이가 느껴졌다. 장희강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쉽사리 내 목에 얼굴을 묻으며 체취를 맡기까지 했다.

노출된 피부로 내려앉는 콧날과 차가운 입술의 감촉에, 내가 숨을 헉 들이켠 찰나였다.

몸이 살짝 떨어지더니, 곧장 가슴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꽂혔다.

“아윽……!”

육체가 느끼는 격통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다. 한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고개가 절로 꺾이고, 두 눈은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벌벌 떨리는 고개를 내렸다. 장희강이 내게 박아 넣은 단도에서 기묘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으, 아.”

비현실적인 현상이건 뭐건, 당장 나에게는 난데없이 칼을 맞은 내 사정이 더 중요했다. 자상에서부터 퍼지는 고통에 바르작거리면서도 장희강의 품을 벗어나려 애를 썼다.

물론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손으로 내 허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칼의 손잡이를 굳게 쥔 장희강을 떨쳐 낼 힘도, 방법도 없었다.

“사……. 살…….”

본능적으로 살려 달라는 애원이 입 밖에 튀어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딱딱거리며 맞부딪치는 이 때문에 제대로 된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맞아.

전생의 내가 괴한한테 이렇게 죽었다.

근데 그 괴한이, 장희강이었다고?

시발……. 뭐가 어떻게 된 일이야.

“다시 시작한다면.”

여태 한마디도 꺼내지 않던 장희강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땐 정말 함께니까.”

“…….”

무슨 헛소리인지 물어봐야 하는데.

입을 벙긋거리던 나는 점점 혀가 굳는 것을 느꼈다.

손발이 차게 식어 가는 반면, 칼이 깊숙하게 꽂힌 가슴은 너무 뜨거웠다.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더욱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뻣뻣하게 경직된 내 몸이 뒤로 쓰러졌다.

난간을 넘어서서 추락하는 아찔한 감각이 들었다. 떨어지는 순간에도 집착적으로 나를 붙든 장희강의 품, 아득하게 들려오는 소음, 캄캄한 밤하늘. 죽음의 순간에 느껴지는 모든 부분이 꿈만 같았다.

쏴아아. 문득 장희강이, 그가 쥐고 있던 무기가 눈부시게 빛났다. 그러더니 곧 하얗게 부서지듯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마주친 그의 눈에는 여전히 광기가 번들거렸다.

홀로 남은 내가 땅에 닿기 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주변이 무척 조용해진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의지로 눈을 떴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내 몸은 공중에서 떨어지던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아래에서 달리던 차들도, 나를 제외한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았다.

띠링!

[혼란스러우리라는 걸 압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은 그저, 그쪽 세계 시스템에게 속아 희생양이 되었던 겁니다.]

눈앞의 허공에 창들이 연달아 떴다.

말투로 보아하니 전생의 시스템인 듯했다.

어째서 지금은 이제까지와 다르게 활자 오류가 나지 않는지 의문이 스쳤다.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이곳은 당신의 기억 속이기 때문에, 제 권능을 행사하는 데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충격이 크겠지요. 억지로 기억을 되찾게 만든 건 미안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진실을 알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진실.

[예. 그 사기꾼 시스템이 당신에게 뭐라고 했는지 전부 들었습니다.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교묘히 거짓을 섞었더군요.]
[그쪽 세계에 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고, 당신의 공략 대상이었던 S급 에스퍼들이 핵이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가 멸망한다는 점 또한 맞지요.]
[그러나.]
[핵들이 가이딩을 받지 못해 사망에 이르러 세계가 멸망하는 것은, 그 세계의 운명입니다. 이미 정해진 운명.]
[모든 시스템은 자신이 관장하는 세계의 운명을 겸허히 수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기꾼 시스템은 다가올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운명대로라면 자기 세계에서는 절대 핵들의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을 테니, 다른 세계들에 숨어들어 핵들의 가이드가 될 만한 존재를 찾았지요.]
[그러던 중 적합자일 확률이 높아 보이는 영혼을 지닌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자기 세계로 데려가기에는 저에게 걸릴 위험이 컸기에, 감히 자기 세계와 연결된 게임을 제 세계에 심고 당신이 플레이하게 만들었더군요.]

뭐?

혼미하던 정신이 번쩍 깨었다.

[당신은 게임을 통해 본인도 모르는 새에 실제로 가이딩을 해 주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그럼……. 그쪽 사람들은 현실로, 저는 게임의 형태로 서로를 만나고 있었다는, 그런 거라고요?”

기가 막혀서 더듬더듬 물었다.

‘웹 소설 보는 게 취미거든. 아, 게임을 소재로 쓴 것도 꽤 많더라고.’

‘아하.’

‘즐겁게 하던 게임이 알고 보니 다른 세계라는……. 뭐 그런 설정의 작품도 있고. 흥미롭더라.’

내심 시큰둥하게 흘려들었던 직장 동료의 말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습니다.]

시스템의 긍정에, 순간적으로 전율이 일었다.

어쩐지, 시발. 게임하는 기간 내내 지나칠 정도로 피로하더라니. 몸은 물론 정신의 이상까지 느끼고 그만두었더랬다.

[하지만 게임의 형태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겠지요. 당신은 공략이 끝난 이후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으니까요.]
[그쪽 세계에서는 사라진 당신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겁니다.]
[결국 사기꾼 시스템은 당신을 자기 세계로 납치했습니다. 그 과정이 바로 방금 겪은 기억과 같이 핵 하나를 이쪽 세계로 보내 당신을 죽이는 겁니다. 당신의 심장을 찔러 그 칼에 영혼을 담고, 그대로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었지요.]

나는 분명 단도가 꽂혔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왜 굳이…… 장희강을 보내서.”

[사기꾼 시스템도 소중한 핵 하나를 다른 세계에 다녀오게 하는 건 위험 부담이 크니 원치 않았겠지요. 그렇지만 당신의 영혼을 가지고 자기 세계로 복귀할 만한 인물은 핵들뿐이었을 겁니다. 그들의 정신력과 육체는 세계를 넘나들 만큼 강인하니까요.]

“…….”

그에 더해 어쩌면 네 명 중 장희강만이 내게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 테니, 그쪽 시스템이 그에게 나를 죽이는 역할을 맡긴 건 아닐까.

[저는 바로 그 순간에 다른 세계가 침입한 사실을 인지했고, 황급히 당신 육체의 사망을 막았습니다. 이미 당신의 영혼과 핵은 사라진 상태였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후에야 사기꾼 시스템이 벌인 짓들을 조사하며 이 모든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뒤늦게 알아챈 제 잘못도 명백히 존재합니다.]

“잠시, 잠시만요.”

이렇게 떨어졌는데, 사망을 막았다고……?

[보여 드리겠습니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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