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단 한 명의 환자만이 존재하는 병실.
작은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전신이 붕대에 감긴 채 온갖 기계로 둘러싸여 있는 환자는 멀리서도 상태가 몹시 심각해 보였다.
문가에 서 있던 나는 양쪽 손을 들어 보았다. 질리게 보아 온, 차은수로서의 내 손이었다.
아마 전생의 몸은…….
고개를 들어 병상을 바라보았다.
멘털이 나간 탓에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삐. 삐. 환자에게 접근할수록 기계음이 크게 들려왔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얼굴 역시 점차 선명히 보였다.
침대 근처에 선 나는, 낯설지 않은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진짜다.
전생의 나였다.
죽은 게, 아니었어.
“어떻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따뜻한 피부가 닿았다.
헛웃음이 나온다. 가슴을 찔리고 옥상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는데, 목숨이 붙어 있다.
시스템의 권능이란 실로 경이로웠다.
난, 시발, 이제 더 놀랄 여력이 없었다.
“…….”
‘다시 시작한다면.’
문득, 나를 찌르고 내뱉었던 장희강의 중얼거림이 환청처럼 다시 들려온다.
‘그땐 정말 함께니까.’
그건 무슨 의미였던 거야?
띠링!
[당신의 영혼을 납치한 시스템은 그쪽 세계의 시간을 되돌렸습니다. 당시 핵들의 폭주가 머지않았었기 때문에, 훨씬 과거 시점에 차은수라는 존재를 출생시키기 위함이었지요.] [아마 핵은 당신을 납치하기 전, 시스템으로부터 미리 그 계획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을 겁니다.] |
……그랬던 건가.
나는 지친 기분으로 정보를 받아들였다.
[그곳에서 차은수로 태어난 당신은 성년이 되기까지 가이드로 발현하지 못했습니다. 엄연히 제 세계의 소속이었던 영혼이니, 다른 세계, 다른 육체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였던 겁니다.] [이에 그쪽 시스템은 당신을 강제로 발현시켰습니다.] [이미 그 시스템은 제 세계에 침입하고, 당신의 영혼을 빼돌려 멋대로 자기 세계에 심었으며, 시간을 되돌리기까지 했죠.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여러 금기를 어겼던 상태에서 또 한 번 힘을 썼으니……. 그 부작용으로 시스템의 권능은 약해졌고, 그가 관장하는 세계에는 버그가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데려간 시스템을 추적한 저는, 그 틈을 타 그쪽 세계에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퀘스트 포기를 권하고, 과거의 기억들 또한 꿈으로 보여 주었지요. 오늘 보여 드린 기억들과 동일한 두 가지를 말입니다.] [게임에 관한 기억과, 당신을 찌른 자에 관한 기억. 애초에 당신은 왜 그 두 가지 기억만 잃었을까요.] |
“……!”
[잊은 게 아니라, 잊게 된 겁니다.] [그쪽 시스템이 해당 기억들을 지웠기 때문에.] |
시발.
소름이 쭉 끼쳤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내 기억을 삭제했던 시스템의 속셈이 바로 짐작이 갔다.
그 누구라도 자신이 새롭게 태어난 세상이 게임 속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기괴함과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정신이 붕괴될 수도 있겠지. 그러니 게임으로 접했던 세계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하게 만든 거고.
장희강의 얼굴을 잊게 한 건…….
그도 공략 대상이니까.
나를 죽인 게 분명한 인물을 어떻게 공략하겠어. 그러잖아도 아버질 죽였대서 찜찜한 상대를.
“…….”
근데 장희강을 떠올리다가 과호흡이 올 뻔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딱 한 번 잠깐 겪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머리로는 기억을 못 해도 몸으로 기억해 낸 오류였나 싶다. 버그가 판을 쳤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기분이 더럽긴 아직 이르다는 듯.
띠링, 알림음이 울렸다.
[그뿐 아니라 그쪽 시스템은 당신의 감정 역시 좌우했습니다.] |
“뭐…….”
[호텔 테러로 인해 수많은 주변 사람을 잃었을 때. 장희강이 당신의 부친을 살해한 범인임을 알아차렸을 때.] |
장례식장의 검은 물결이 눈앞을 스쳤다.
장희강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당시도.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었다.
[본래 당신은 퀘스트를 수행할 의지를 잃을 만큼 큰 감정 변화를 겪었습니다. 에스퍼들이나 퀘스트, 나아가 그 세계 자체에 대한 환멸과 회의감을 느꼈지요.] [하지만 그쪽 시스템은 그 감정을 잘라 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처한 상황에 거부감을 느낄 만한 요소를 배제하고자 한 겁니다. 완벽히는 막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
기억을 잃게 한 것과 같은 의도로, 일부지만 정신적으로도 건드렸다는 의미다.
“……미쳤나.”
인간으로서 가장 침해되어서는 안 될 부분들까지 침해되었음을 깨닫자, 몸속의 피가 싸하게 식는 것만 같았다.
속이 뒤집힐 듯 울렁거렸다.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알겠습니까.] [당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세계는 이곳입니다.] [이곳으로, 이 육신으로 돌아오는 것이 순리이자……. 당신을 속이고 휘두른 시스템에게 복수하는 방법입니다.] |
시스템이 종지부를 찍듯 이야기했다.
“…….”
내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음이 스스로도 느껴진다.
놀랍게도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죽음부터 새로운 시작까지, 모든 것이 시스템의 기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기억과 감정이 통제되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약 그 세계가 진짜 게임 속이었더라면, 그랬다면 망설임 없이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살아 숨 쉬던 이들이 가상의 인간들에 불과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내가 차은수로 태어나 살아온 그곳도 분명한 현실이다.
퀘스트를 포기함으로써 발생하는 결과는, 그들 모두의 죽음.
여기 누워 있는 원래의 나, 이은수는 가지지 못했던 가족다운 가족 역시도 예외가 아니다.
표현에 서투르지만 누구보다 나를 아꼈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말과 행동으로 넘치는 애정을 퍼부어 주었던 누나.
늘 나를 우선순위로 여기고 사랑했던 형.
모두가.
띠링!
[그쪽 시스템이 당신에게 한 짓을 용서할 생각입니까.] [잘못된 선택을 해서는 안 됩니다.] |
내 생각을 모두 읽은 시스템이 창을 띄웠다.
……시발, 진짜.
선택이 종용되는 이 상황에 울컥 분노가 차올랐다.
존나 열받아. 내가 왜 이딴 상황에 부딪혀야 하는데.
이 시스템도 그래. 애당초 지 세계 관리도 못 해선……. 내 영혼이 납치되기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거잖아.
물론 명백히 나쁜 쪽은, 나를 납치한 저쪽 시스템 새끼지만 말이다.
“저는.”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분노 덕에 확실히 결단이 섰다.
“저한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택할 거고, 그게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차은수의 삶을 선택할 시, 그쪽 시스템에게 다시는 내 머리에 손대지 말라고 경고한다 한들 그걸 들어 먹을지는 미지수다. 또다시 나 모르게 내게 무슨 짓을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모든 위험성과 찝찝함을 감내하고서라도…….
“……제 선택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원래 세계가 멸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세계는, 내가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멸망한다.
아무리 기분이 엿같고, 화가 나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해도, 나 자신의 기분이 중요하다고 후자를 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먹을 꽉 쥔 채 병상의 나를 응시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놀랍군요.] |
시스템이 짤막하게 말했다.
[누군가를 속이는 것에 능하다고 해서, 헌신적이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나 봅니다. 인간의 내면이란 참 다채로워요.] |
“…….”
[그리고 상당히 유감스럽습니다.] [당신이 퀘스트를 포기하겠다고 당위성만 부여해 주면 될 일인데.] [강제로 데려가게 되면 이쪽에도 리스크가 생깁니다만……. 어쩔 수 없겠네요.] |
“……!”
뭐라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창을 쳐다보았다.
[감히 자신의 근원을 거부하다니.] |
남성과 여성, 노인과 아이의 것이 겹친 듯 기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숨이 턱 멈추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머리 위부터 온몸을 무겁게 짓눌러 왔다. 무릎이 저절로 털썩 꿇렸다.
부들부들 떨리며 숙여지는 고개 역시 막을 도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처지가 가여워, 기껏 모든 진실을 알려 주었건만.] |
“읏, 으…….”
하얀 병실 바닥이 시야에 들어찼다. 차갑고 매끈한 바닥을 짚은 채 손톱을 세웠지만, 계속해서 가까워져만 갔다.
[당신은 차은수로서의 삶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
두려움마저 자아내는 음성이 형벌처럼 내리꽂힌다.
[두 번째 삶의 그 어떠한 부분도 기억하지 못한 채, 이탈했던 곳으로 돌아와…….] [원래대로 내 세계의 일부로서 살아갈 것입니다.] |
아니, 미친.
이를 악물었다.
핵으로 유지되는 세계면 몰라.
원래 세계는 그렇지가 않은데……. 핵 같은 것도 아닌 나한테 왜 이토록 집착하는 건지, 그게 굉장히 의문스러웠다.
‘자기 세계의 일부라면 풀 한 포기에도 집착하는 시스템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얼마 전에 저쪽 시스템에게 그런 소리를 듣기는 했었지만…….
고작 그 이유가 전부라면, 한낱 인간인 나로서는 이해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아윽!”
그러잖아도 엄청나던 중압이 더욱 강해지며 나를 지배했다. 눈알이 터질 것 같았다. 호흡이 불가능해 온몸에 열이 오르고, 식은땀 또한 후드득 쏟아졌다.
고통스럽다.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이 힘이, 어쩌면 신격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영혼 상태인 내게 이런 생리적인 반응이 나타난다는 건…… 그 외의 이유를 찾기가 힘들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눈앞의 육체를 확인했으니 알겠지만, 핵이 당신을 데려간 날로부터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니.] [당신을 되찾아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기에……. 시간을 늦추는 일은, 금기임에도 저 역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습니다.] |
시스템이 통보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잘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
아.
안 돼, 시발.
띄엄띄엄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그것이 입 밖으로 나왔는지 인지조차 되지 않았다.
바닥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이윽고, 생각이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