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카렌!”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헤더가 식당으로 들어오며 벌컥 소리쳤다.
“자기들끼리 과자 먹고!”
“아, 아니야.”
얼른 부정한 카렌이 들고 있던 과자를 억지로 입에 쑤셔 넣었다. 딱딱한 과자는 바로 씹을 수 없어 뺨이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가까이 온 헤더가 카렌의 뺨을 찌르자 이번엔 반대편 뺨이 튀어나왔다.
우스꽝스러운 꼴이라 새틴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는데 헤더는 눈을 치떴다.
“물 마시러 간대 놓고!”
“미, 미안.”
“빨리 와! 애들 기다려!”
화를 내면서도 헤더는 카렌을 두고 혼자 가지 않았다. 밖에서 뭘 하며 놀다 왔는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인원이 더 필요한 놀이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카렌은 정말 하나밖에 안 먹었다고 변명하며 헤더를 쫓아 나갔다. 주머니에 넣어 둔 과자를 들키면 뭐라 변명할 셈일까.
두 아이가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멀어졌다. 새틴도 식당을 나와 서고로 향했다. 이 시간이면 아마 케인은 서고에 있을 것이다.
서고의 문을 열려다 말고 새틴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일자형 건물이라 반대편 복도의 끝이 여기서도 보였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는 문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저쪽으로 가지 않았다.
새틴은 그 이유를 짐작했다.
아이들은 다들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아무 이유 없이 아이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다는 건, 아무 이유 없이 그 친절을 거둘 수도 있단 뜻이니.
이곳을 떠나기 싫은 아이들이 선생님의 뜻을 거스를 리 없었다. 참회실 근처에 가지 말라는 말도 당연히 잘 지켰다. 화를 잘 내지 않는 선생님에게 혼이 났을 때에만 가는 곳이니 꺼림칙하기도 했을 테고.
세 개의 방. 그중 마지막 방. 그 아래 조그만 공간이 있다는 걸 케인은 알고 있을까.
‘모른다면 알려 줘야지.’
∞ ∞ ∞
서고로 들어서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새틴은 당황하지 않고 더 안으로 들어가 봤다. 구석에서 로저스가 책을 읽고 있었다. 집중한 모습이라 말 붙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다른 쪽에서 케인을 발견했다. 로저스와 달리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케인은 금세 새틴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케인이 뭐라 말하기 전에 새틴은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알아듣고 케인은 인상을 썼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새틴은 밖으로 나가자고 손짓하고 먼저 서고를 나섰다.
곧 케인이 따라 나왔다. 새틴은 입을 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부엌과 식당을 지나쳤다.
이 시간에 아무도 없을 만한 곳을 찾다 보니 목욕탕에 생각이 미쳤다. 아이들은 목욕하기를 싫어해 해가 떨어지고도 한참이 지나 잠들기 전에나 씻으러 가곤 했다.
“뭐야.”
따라오던 케인은 새틴의 목적지가 어딘지 알아챘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황당해하는 표정을 봤지만 새틴은 목욕탕에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을 닫고 나서야 새틴은 물었다.
“너는 왜 선생님을 싫어해?”
“겨우 그걸 물어보려고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왔어?”
기가 차는지 케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곧바로 돌아나갈 기세라 새틴은 얼른 케인의 팔을 붙잡았다. 케인이 화들짝 놀라 뿌리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너 뭐 알고 있었던 거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젯밤의 일을 말하려 하니 가슴이 묵직해졌다. 새틴은 느리게 숨을 들이마셨다. 케인은 심상찮은 분위기를 깨달았는지 재촉하지 않았다.
“팀이, 없어졌잖아. 알고 있지?”
“알지. 도망쳤다고 다들 수군거리던데.”
새틴은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케인의 표정을 살폈다. 다른 아이들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기색이다.
“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
“당연하지. 그 녀석 어제까지만 해도.”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케인이 입을 다물었다. 눈을 가늘게 뜨더니 새틴을 올려다본다. 고양이처럼 새초롬한 눈이다.
“너야말로 뭔가 아는구나.”
의심이 역력한 어조였다. 새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팀을 봤어.”
“밤?”
늦게까지 깨어 있던 케인이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케인도 같은 것을 보았으리라.
“문 열리는 소리가 났어. 네가 요즘 계속 밤에 뭘 기다리는 것 같길래…….”
“이유는 됐어. 팀이 어딜 가는지 봤어?”
“선생님 연구실로 들어갔어.”
“그래서.”
케인은 밤중에 팀이 선생님의 연구실로 향할 거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안에서 나누는 얘기를 엿들었어. 마법 이야기를 했는데 자세히는 못 들었어. 잘 안 들려서.”
“그 늙은이 방은 방음이 잘돼.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겠지.”
“응, 그런 거 같더라…….”
“그래서.”
“내 얘기를 하는 것도 같았는데, 아무튼 빛이 새어 나왔어.”
마력을 보게 되었단 이야기를 해도 될까. 선생님은 새틴에게 생긴 능력을 아주 신기하고 희한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케인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새틴은 잠깐 머뭇거리다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이 세계에 관해 새틴은 무지했다. 이야기를 아는 것과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다. 새틴에게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조력자가 어른이라면 더 좋겠지만, 여긴 아이들뿐이지.’
루퍼스는 어른이지만 선생님과 무슨 관계인지 모르니 섣불리 신뢰할 수 없다. 반면 케인은 겨우 열여섯 살이긴 해도 여기 있는 아이들 중엔 가장 나이가 많다. 이 세계에서는 어쩌면 이미 어른 취급을 받는 나이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주인공이고.
‘누나가 쓴 주인공이 어리석을 리 없어.’
새틴은 생각을 마치고 고백했다.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 능력이 생겼어.”
“갑자기 뭔 소리야.”
“마력을 보는 능력인데, 선생님 말로는 흔한 능력은 아닌.”
“마력을 본다고?”
케인이 말을 끊고 눈을 치떴다. 새틴은 한숨을 쉬고 케인의 어깨를 밀었다. 케인이 고개를 너무 바짝 들이대고 있었다.
“내 말의 진위는 나중에 가리기로 하고 어젯밤 이야기부터 할게.”
“……그래.”
“선생님이 굉장히 큰, 마법을 쓴 것 같았어. 바깥까지 마력이 새어 나올 정도였으니까.”
두어 걸음 떨어진 데서 케인은 팔짱을 낀 채 새틴의 이야기를 들었다. 반신반의하는 표정이다. 새틴은 일단 이야기를 이었다.
“조금 기다리니까 선생님이 팀을 어깨에 짊어지고 나왔어.”
“정신을 잃었단 거야?”
“모르겠어.”
정신을 잃었던 건지, 아니면 이미 그때 죽어 있었는지.
새틴은 저도 모르게 명치를 꾹 눌렀다. 속이 서서히 타들어 가는 느낌이다.
“뭔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선생님이 나오기 전에 화나서 소리를 쳤거든.”
“그리고?”
“팀을 짊어지고 지하실로 갔어.”
“지하실? 참회실 말이야?”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마치 어젯밤으로 돌아간 듯 몸이 긴장해 입이 말랐다. 혀로 입술을 축였다. 어젯밤에도 새틴은 이곳에 숨어 선생님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여기 숨어서 선생님이 나오기를 기다렸어. 시간을 못 재서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모르겠는데, 꽤 오래 걸렸던 거 같아.”
10분? 30분? 1시간? 그보다 오래 걸렸나. 짧진 않았다. 긴장 탓에 길게 느껴졌을까.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선생님이 혼자 나왔어.”
“혼자? 팀은?”
“지하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생각했다고.”
“내려가니까 아무도 없었어. 탄 냄새가 나고, 바닥에 문이 있었는데.”
인체의 70%는 물이라고 한다. 물이 모두 말라 버린 몸은 얼마나 가벼울까.
새틴은 손을 쥐었다 폈다. 바싹 마른 흙을 더듬었을 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흙도 돌도 아닌 무언가의 잔해가 손끝에서 바스러졌다.
“야, 왜 그래?”
돌연 케인이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새틴은 제가 호흡을 멈추고 있었음을 불현듯 깨닫고 숨을 들이마셨다.
ㅇㅇ는 누나가 쓴 소설 속에는 어떤 불행도 역경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나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운명을 거스르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이야기라고 했으니까.
누나가 쓴 글이 오래된 판타지 소설임을 알고 나서도 별걱정 안 했다. 다크에이지는 주인공이 동료들과 모험을 하고, 악을 무찌르고, 끝내 행복해지는 이야기였다. 누나의 말대로.
아니, 사실은 누나의 말이 아니라 그저 누나를 믿었는지도 모른다.
누나는 좋은 사람이었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ㅇㅇ가 살아가며 단 한 사람을 믿어야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누나였다.
그러나 다크에이지는 소설이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작가이지만 이야기는 작가가 혼자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작가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누나가 구태여 묘사하지 않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 부분들. 그중 하나가 지난밤 모습을 드러냈다. 새틴이 미처 짐작하지 못한 형태로.
“선생님이 팀을 죽였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새틴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았다. 정황이 이미 모든 걸 말해 주는데 선생님을 감싸려 희망적인 가능성을 찾아 헤맬 이유가 뭔가.
“이제 네가 말할 차례야. 넌 왜 선생님을 싫어했어? 뭘 알고 있어서?”
물끄러미 새틴을 바라보던 케인은 작게 혀를 차고 말문을 열었다.
“여기 오기 전에 저 늙은이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소문?”
“어느 괴짜 마법사가 갈 데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보살펴 준다는 소문.”
“너는 클로버랜드에서 왔지?”
“알고 있네.”
“……응.”
로저스에게 듣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크에이지에 나온 내용이니까.
새틴은 그동안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반성했다.
새틴은 케인이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삶을 다 안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케인이 악랄한 흑마법사에게 붙잡혀 실험체가 될 뻔했다는 과거도 가볍게 여겼다. 그저 설정일 뿐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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