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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91화 (91/139)

91화

리타는 아주 조심스레 용을 불렀다. 마을 사람에게 말을 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이 용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무례한 말투로 성질을 돋울 필요는 없었다.

용의 시선이 리타에게 향했다. 리타가 움찔했지만 다행히 용은 당장 입을 벌려 리타를 삼킬 의지는 없어 보였다.

안심했는지 리타의 목소리가 좀 더 또렷해졌다.

“뭐라고 좀 하시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옆에 있던 에드워드가 핀잔하자 리타가 멋쩍어하며 목을 긁었다.

“아니, 할 말이 없는걸.”

“우리가 여기 온 이유는.”

에드워드가 뭐라 타박을 더 하려는 차 용이 고개를 들었다. 리타와 에드워드는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용은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러다 천장에 닿지 않을까. 새틴이 무심코 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용은 천장을 밀어 올리며 계속해서 일어났다.

“저러다 무너지면…….”

리타가 중얼거린 순간 사방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피해야 합니다!”

“여기 피할 데가 어디 있어!”

에드워드의 다급한 외침에 리타가 볼멘소리를 했다. 새틴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으앗!”

케인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새틴은 눈을 한 번 깜빡였더니 케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다. 단단한 어깨에 배가 짓눌려 아팠지만 지금 그런 불만을 얘기할 때가 아니었다.

“케인, 나는, 억!”

새틴은 내려 달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바닥이 크게 덜컹여 실패했다. 자칫 혀를 씹었으면 반 토막이 날 뻔했다.

‘죽을 뻔했네. 아니, 이미 죽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새틴은 케인의 어깨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주위를 살폈다. 케인은 피할 곳을 찾는 듯했지만 리타의 말마따나 피할 데가 없었다. 천장에 이어 벽과 바닥까지 허물어 내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에드워드가 리타를 붙잡아 당기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서로를 지탱하는 모습은 퍽 낭만적이다.

‘무사히 나가면 쟤네 진짜 결혼하는 거 아니야?’

위기 상황에서도 머리는 쓸데없는 생각을 잘만 했다.

본격적으로 몸이 떨어져 내리자 케인이 새틴을 단단히 붙들어 안고서 속삭였다.

“이 악물어.”

다른 때 들었더라면 케인이 저를 한 대 때리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추락할 때 잘못 부딪쳐 턱이 나가거나 혀가 떨어져 나가는 일을 방지하라는 조언이었다.

새틴은 케인을 단단히 붙들고 이를 꽉 물었다. 위로 펄럭이는 로브 자락을 실눈으로 쳐다보다 문득 깨달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나 보네.’

죽을 거라 생각했다면 유언을 했을 텐데.

‘이건 믿음일까?’

이 상황이 절대 나쁘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대신관이 말하길 이는 그저 신이 선택한 용사를 위한 피로연일 뿐이니까?

그럴 리 없다. 케인은 신자가 아니다. 케인이 믿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신이 아닐 거다.

‘나를 믿겠지.’

정확히는 사라져 버린 진짜 새틴.

케인의 의연한 태도는 의지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허무하게 죽지 않겠다는 의지, 새틴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의지, 함께 살아남겠다는 의지.

이윽고 새틴은 바닥에 닿았다. 케인과 뒤엉킨 채 땅 위를 굴렀다. 당장은 정신이 없어 부딪치는 데가 아프단 생각도 못 했다.

‘여기가 어디지?’

부옇게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로 보이는 풍경으로 위치를 파악했다. 분명 바위산에서 아래를 향해 내려갔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다시 처음의 위치로 돌아왔다. 아까 배웅한 남서문 출입소장과 그 부하 직원들이 놀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위화감이…….’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은 후에야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사람들이 너무 멀었다.

“산이, 산 어디 갔어?”

리타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새틴은 반대쪽을 보았다. 바위산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었다. 대신 거대한 용이 공중에서 새틴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이 허물어진 것 같습니다…….”

에드워드의 어조에는 자신이 없었다. 잔해가 없는 탓이다. 없는 것은 산의 잔해만이 아니었다. 벽과 천장, 바닥이 무너지는 광경을 일행 모두가 보았는데 그 흔적 또한 없었다.

공터였다. 새틴이 보고 넋을 놓았던 대신전이 너끈히 들어갈 만큼 거대한 공터. 노을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공터를 비추고 있었다.

새틴은 실없이 중얼거렸다.

“꼭, 경기장 같네…….”

멀리서 바라보는 남서문 출입소의 사람들. 가만 보니 다른 쪽에도 사람들이 보인다. 대피했다던 마을 사람들일까. 역광 탓에 얼굴의 표정까진 분간되지 않지만 다들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말로 용과 함께 경기장에 오른 기분이다. 축구 경기장이 아니라 콜로세움. 이번에야말로 무대 공포증이 스멀스멀 올라오려 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저걸 공격할 방법을 찾아야지.”

새틴이 황당한 상황에 적응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리타는 정신을 차렸다. 하늘을 나는 용을 공격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리타의 목소리를 듣고 에드워드도 일어났다.

“다들 무사합니까?”

새틴이 괜찮다고 대답하려는 차 케인이 어깨를 붙잡았다. 검문이라도 하듯 새틴의 얼굴과 팔다리를 만져 본 케인이 대신 대답했다.

“무사해.”

“다행입니다.”

용은 구경하는 먼 곳의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는지 계속해서 새틴 일행만을 주시했다. 먼저 공격할 낌새는 없다.

조심스럽게 뒤로 움직이며 리타가 불화살을 만들었다. 용은 불화살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아, 이게 닿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리타는 고개를 앞뒤로 까닥이며 용과의 거리를 쟀다. 워낙 커다랗다 보니 원근감이 조금 이상해질 지경이지만 차분히 거리를 따져 보면 용은 그리 높은 곳에 있지 않았다.

가장 아래쪽에 있는 배와 앞발의 위치는 2, 3층 건물 높이 정도다. 무언가를 던져서 충분히 맞힐 수 있다.

“던져서 맞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타격을 입힐 수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래.”

에드워드의 지적에 리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용이 지금까지 만난 괴물들과 같은 종류의 생명체라고 하면 불 마법이 통할지 안 통할지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 불 마법의 성공률은 대충 50%다. 마왕성에서 본 원숭이들에게는 불 마법이 통했다. 그러나 같은 장소에 있던 괴물 뱀에게는 바로 통하지 않았다. 약점이었던 꼬리에 상처를 낸 후에야 통했다. 늑대 인간들에게는 통했고, 말 머리 괴물들에게는 안 통했다.

“다른 마법은 없습니까? 여러 가지를 시험해 본다면 한 가지쯤은 통할지도 모릅니다.”

“어, 우박 마법?”

“그리고요?”

“마법의 흔적을 찾는 마법…….”

“다음.”

“물속 회오리 마법.”

“이름은 강해 보이는군요. 어떤 마법이죠?”

“가루차를 섞을 때 써…….”

리타가 아는 마법 중 지금 쓸 만한 마법은 불화살과 우박 정도였다. 물론 통한다는 전제하에.

에드워드는 케인에게도 물었다.

“케인 씨는 불 마법 말고 또 뭘 쓸 줄 압니까?”

“시체를 일으키는 마법. 3초 정도 움직일 수 있어.”

“……다른 건요.”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 사람에게 써 본 적은 없지만.”

“…….”

“제물을 바쳐 마왕을 소환하는 마법도 아는데.”

“됐습니다.”

아군의 전력 파악이 끝났다. 아무 성과도 없었다. 에드워드는 섭섭하게도 새틴에게는 무얼 할 줄 아느냐고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 봐야 아무것도 내세우지 못했을 테지만.

착잡해하는 에드워드와 달리 리타는 여느 때처럼 기운찼다. 앞으로 나서며 모두를 격려했다.

“일단 공격을 해 보기나 하자. 어차피 죽지 않을 거야. 나는 대신관님을 믿어!”

리타가 그리 외치며 불화살을 날려 보내려던 순간, 용이 드디어 움직였다. 리타는 물론 다른 사람 모두 긴장했다.

용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 자세가 이상했다. 꼬리는 하늘에 둔 채 머리만 내려오고 있었다. 구부러진 등은 거대한 미끄럼틀 같은 모양이 되었다.

“뭘 하려는 거지?”

리타가 중얼거렸다. 새틴도 같은 의문을 품었다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앗…….”

“왜 그래?”

케인은 아직 새틴이 본 것을 보지 못한 듯했다. 새틴은 손을 들어 용의 꼬리를 가리켰다.

“저기 뭔가 있어.”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확인한 케인이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사람?”

과연 케인의 말마따나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말 사람일 리는 없다. 사람이라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수 없고, 또한 용의 등 위를 저리 유유자적하게 걸을 리 없다.

곧 리타와 에드워드도 용 위의 사람을 눈치챘다. 얼마나 놀랐는지 리타가 만든 불화살이 사라져 버렸다.

“뭐, 뭐야, 저 사람은.”

마치 리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용이 말했다.

―악의 주인께서, 너희 인간, 들을, 벌하러 오셨다.

새틴 일행뿐 아니라 멀리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였다. 기묘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산한 기분이 들게 했다.

새틴은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속으로 생각했다.

‘국어책 읽기도 정도가 있지.’

용이 무서운 목소리로 무서운 말을 하는데 어째 그 어조가 너무나 딱딱했다. 재능 없는 배우보다 못했다. 어설픈 인공 지능 스피커 같았다.

그러나 용의 어설픈 연기 때문에 상황에 대한 몰입이 깨진 사람은 새틴뿐이었다. 리타도 에드워드도, 심지어 케인마저 심각한 표정이다. 인공 지능 스피커를 몰라서일까.

새틴이 당황했건 말건 상황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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