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너희가 바로 신이 보낸 사자로구나.
용이 말한 악의 주인은 다행히 용보다 연기가 능숙했다.
‘연기가 아닌가?’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훨씬 컸다. 용이 워낙 거대해 두드러지지 않을 뿐 주인의 키도 족히 2미터가 넘어 보였다. 2미터 50센티? 60센티? 새틴은 약간 얼이 빠진 채 디테일을 따졌다.
―나는 너희가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 것, 그러나 결코 떨쳐 낼 수 없는 모든 것의 신.
악의 주인은 용의 코끝을 밟고 사뿐히 뛰어올랐다. 검고 긴 머리칼이 연기처럼 느리게 휘날렸다. 옷자락 또한 번진 먹물처럼 기묘하게 나풀거린다.
새틴은 그 모습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좀, 무서운데.’
저자에게서는 기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리 과장해 행동하지 않는데도 모든 움직임이 실제보다 크게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일행을 긴장하게 한 용이 지금은 그저 저자를 위해 깔린 푸른 융단 같다.
―미움과 혐오, 공포와 두려움, 불안과 우울, 절망과 좌초…….
새틴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늘어놓는 단어들이 실체가 되기라도 한 양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모두 아는 감정이었다. 심장 박동 수가 올라가고 손이 차가워졌다.
‘이런 것도 마법일까.’
새틴은 조심스레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봤다.
리타의 얼굴이 창백했다. 한 번도 뭔가를 무서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겁에 질렸다. 에드워드 역시 마찬가지다. 표정은 굳었지만 검을 쥔 손이 떨렸다. 아마도 두 사람 모두 새틴처럼 무언가를 감지한 듯했다.
‘케인은?’
케인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새틴은 뒤로 끌려갔다. 늘 그렇듯 케인은 새틴을 붙잡아 자신의 뒤로 숨겼다. 표정은 미처 보지 못했다.
“나서지 마.”
“나서지 않아도 위험할 거 같지 않아?”
“……그래도 나서지 마.”
늘 단호하던 케인의 목소리에서 지금은 망설임이 느껴졌다.
‘아니야.’
망설임보다는 불안에 가깝다. 수상한 자의 말은 케인 역시 두렵게 만든 모양이다.
새틴은 케인의 옆에 섰다. 케인이 곧바로 눈살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새틴이 더 빠르게 말했다.
“옆이나 뒤나 별반 차이 없잖아.”
“하…….”
케인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앞을 보았다.
그사이 악의 주인은 흙먼지 이는 땅을 디뎠다.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알 수 없는 권위가 느껴지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자신에 관해 읊었다.
―인간들은 나를 신의 대적자가 되지 못하는 자, 그렇기에 결코 숭배할 수 없는 자라고 부르지만.
과연 연기인가, 아닌가. 대신관은 정말로 신탁을 받았을까.
―너무 긴 이름이니 간단하게.
악의 주인이 살며시 웃더니 가장 앞에 서 있던 리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신이라 부르게.
마신이 나타난다는 소문은 이로써 진실임이 확인되었다. 저 수상하고 괴이쩍은 자가 진짜 마신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았다. 저자의 목소리는 멀리까지 퍼져 나갔고 차마 다가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귀에도 닿았다. 그 점만이 중요했다.
“마왕하고 너무, 급이 다른 거 아니에요?”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도 리타는 배짱 좋게 말을 붙였다.
―당연하지. 왕과 신이 비교될 리 있는가?
맞는 말이다. 왕은 인간이고, 하나가 아니다. 나라의 수만큼, 역사가 오래된 만큼 왕이 존재했다. 그저 왕이라는 단어만 보고 모두가 같은 사람을 떠올릴 수는 없다.
반면 신은 하나뿐이다. 이 세계의 종교에 관해서는 모르나 적어도 이 나라에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 종교는 다신교가 아니었다. 과거에도 신은 하나였고, 현재도 하나이며, 아마 앞으로도 하나일 터. 그리고 그 하나는 모두 같고.
그렇게 생각하면 마왕이 별 볼 일 없던 것도 이해가 간다.
―그대들이 신의 사자라면 내가 신에게 대적할 수 없음을 증명하고 싶겠지.
이 말은 전투의 시작을 의미했다.
친절하게도 마신은 용을 이용하지 않고 스스로 싸움에 나섰다. 마신이 팔을 쭉 뻗자 검은 옷자락이 펄럭였다. 창백한 손끝에서부터 검은 안개와 수상한 연기를 닮은 기운이 물씬 피어올랐다.
그 안에서 희미한 빛의 입자를 발견한 새틴은 황급히 소리쳤다.
“피해!”
리타가 옆으로 구르듯 몸을 피했다.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가 꽁꽁 얼어붙었다. 에드워드 역시 간발의 차로 몸을 피했다. 마신이 있는 위치에서부터 방사형으로 뻗어 나온 얼음을 피하느라 리타와 에드워드는 양쪽으로 흩어졌다.
위급하기로는 케인과 새틴도 예외가 아니었다. 케인이 거세게 밀치는 바람에 새틴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윽…….”
거친 땅에 쓸린 피부가 아프지만 얼음 기둥이 되느니보단 나았다. 새틴은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확인했다.
비죽비죽 솟은 얼음 때문에 다른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없었다. 얼음 창살 너머에서 케인이 소리쳤다.
“새틴, 괜찮아?”
“난 괜찮아! 그쪽은 어때!”
“물러나!”
케인이 대답 대신 외쳤다. 반사적으로 새틴이 뒤로 물러나자 곧바로 불길이 치솟았다. 일행을 갈라놓은 얼음이 불 마법 한 번에 모두 녹지는 않았으나 시야는 확보되었다.
리타도 에드워드도 무사했다. 리타가 케인의 위치를 확인한 후 소리쳤다.
“엄호해 줘!”
대답도 듣지 않고 리타가 앞으로 뛰쳐나가려 하자 에드워드가 곧바로 쫓아가 붙잡았다. 그리고 거의 내던지다시피 리타를 뒤로 밀쳤다.
“왜 그래!”
“마법사가 왜 앞으로 나갑니까!”
짧게 훈계한 에드워드는 리타가 더 말할 새를 주지 않고 곧장 검을 뽑아 달려 나갔다.
‘힐러는 왜 앞으로 나가는데…….’
새틴은 당황해 눈만 껌벅이고 있었지만 케인은 눈치 빠르게 불의 벽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모여든 마력의 빛이 시뻘건 벽으로 화해 에드워드와 함께 달렸다.
마신은 불의 방패를 두른 에드워드가 코앞에 달려들 때까지 피하지 않았다. 느긋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불 마법은 인간에게 어울리는 마법이야. 열정도 충동도 불을 닮았지. 제가 있는 공간을 불사르고,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고, 끝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하아압!”
에드워드가 검을 높이 든 채 뛰어올랐다. 마신은 그 자리에 선 채 주문도 외우지 않고 다시금 얼음을 불러냈다. 빠르게 솟구치는 얼음은 불에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고 녹기를 반복했다.
승자는 얼음이었다. 케인의 불은 끝내 사그라지고 에드워드의 공격은 얼음 창살에 막혔다. 와중 에드워드가 얼음에 몸 어딘가를 꿰뚫리지 않고 뒤로 나동그라졌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 번의 공격 시도로 전투가 끝날 리 없었다. 에드워드의 등이 막 바닥에 닿는 순간 리타가 내던진 불화살이 마신을 향했다.
―그에 비하면 얼음이란 얼마나 구질구질한지. 녹아도 다시 얼고, 또 녹아도 다시 언단 말이지.
“아, 그럼 증발하든가!”
리타가 성질을 부리며 연달아 불화살을 내던졌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안 통할 거야.’
리타의 불화살은 케인이 만드는 불의 벽에 비하면 아주 조그맣다. 큰 것이 통하지 않는데 작은 것이 통할 거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예상대로 되었다. 마신은 옷소매를 펄럭이는 것만으로 불화살을 막아 냈다. 불화살이 사라지고 얼음이 녹은 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그럼 이제 나의 차례인가?
마신의 시선이 여유롭게 도전자들의 얼굴을 살피다 새틴에게서 멈췄다.
―아직 한 명이 남아 있군. 왜 그대는 도전하지 않지?
지금 다 함께 턴제 RPG 게임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새틴은 기가 막혔지만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셈이었다면 왜 여기에 있는가. 남의 자리를 차지한 듯해 부끄럽다면 왜 여태 달아나지 않았는가.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케인이 멍하니 서 있는 새틴을 끌어다 뒤로 감추며 마법을 일으켰다. 아까보다 더 높은 불의 벽이 솟구쳤다.
―통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텐데.
마신은 이미 한 번 막은 적이 있는 마법을 경계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꽃 벽의 뒤에서 달리는 에드워드의 존재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가만히 두면 알게 될 거라 판단했는지 반대편에서 리타가 크게 소리쳐 이목을 끌었다.
“내 친구한테 헛바람을 넣어서 꼬드길 생각이지!”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며 리타가 마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상태로 무어라 입을 뻐끔거리자 녹은 얼음에서 흘러나와 고여 있던 물들이 위로 솟구쳤다.
―오.
마신의 입에서 작은 감탄이 나왔다. 위기를 느낀 기색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솟구친 소용돌이의 규모는 대단치 않았다.
‘스프링클러쯤 되나…….’
타격을 입힐 요량으로 저 마법을 썼다면 분명 잘못된 판단이었다 할 테다. 그러나 리타의 목표는 마신의 육체가 아닌 의식. 마신이 조그만 소용돌이를 보며 비웃는 사이 에드워드는 벽의 끝에 닿았다. 마신의 등 뒤다.
에드워드가 마왕의 등을 향해 검을 내지르는 순간 불꽃이 확 사그라졌다. 그 순간에는 마신도 뒤에 누군가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이런.
마신이 작게 탄식하며 몸을 물렸다. 동시에 얼음이 솟구쳤다.
과연 신은 신이다.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을 참칭하는 괴물일 뿐이겠지만 어쨌든 보통의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분명 에드워드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챘다 생각했는데 결과는 예상 밖이다. 아니, 예상대로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커흑…….”
에드워드는 눈 깜짝할 새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 얼음 칼날이 허리를 꿰뚫었다. 왼쪽 옆구리였다. 갑옷이 가리지 못하는 작은 틈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복부 한가운데를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럼에도 저리 피를 흘리는 걸 보면 재수가 없었다 해야 할지.
“에드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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