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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96화 (96/139)

96화

4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나는 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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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오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여자는 멋쩍어하는 기색도 없이 웃으며 문을 밀고 들어왔다.

“많이 컸네. 예전엔 누나 허리까지밖에 안 왔는데. 누나 기억나?”

원오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채근 없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신발을 벗었다. 굽이 낮은 구두는 오래 신은 티가 났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일을 하는 모양이라고 원오는 짐작했다.

영업 사원? 방문 교사? 측량 기술자? 원오는 몇몇 직업을 떠올렸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들을 하는지는 모른다. 그냥 들어 본 적이 있을 뿐이다.

아무튼 그런 일을 한다면 낮은 구두를 신을 만하다. 차라리 운동화를 신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지만.

‘쓸데없는 생각.’

원오는 여자가 모르게 제 뺨을 문질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하면 무심코 딴생각을 하고 만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외면하고 싶어서인지.

대강 주변을 살핀 여자가 원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는데 길이 헷갈려서 한참 돌았지 뭐니. 동네가 많이 바뀌었더라. 물 좀 줄래?”

붙임성이 좋은 사람은 대체로 대하기 어렵다. 원오는 조용히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내왔다.

그사이 여자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컵을 받자마자 물을 쭉 들이켜더니 소파 손잡이를 문지르며 작게 감탄했다.

“이걸 아직도 쓰고 있었네. 동네는 많이 변했는데 집은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옛날하고 똑같아.”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반가워하는 기색은 아니다. 익숙하다 해서 반드시 향수를 느끼진 않는 법이다.

원오는 쭈뼛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일부러 말꼬리를 흐리려던 게 아닌데. 혹시 여자가 불쾌해할까 봐 원오는 눈치를 봤다.

여자는 그런 부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밝은 어조로 대답했다.

“무슨 일은. 너 데리러 왔지.”

여자의 말은 아주 이상하게 들렸다.

원오는 남인 듯 여자라 칭하고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은 남이 아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같은 친남매다. 하지만 원오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부모님이 이혼하며 누나와도 헤어졌다. 벌써 십 년 가까이 된 일이다.

원오가 기억하는 누나는 늘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 눈앞의 여자는 편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래도 얼굴은 예전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엉뚱한 사람이 사기를 치러 온 것 같진 않다. 하기야 그럴 이유도 없지만.

여자가 빈 컵을 내밀었다. 원오가 받으려 하자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간 제대로 먹지 못해 기력이 없던 터라 그대로 끌려가 여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원오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허벅지를 꾹 누르며 말했다.

“학교도 안 나간다며 지금. 원래 안 가려던 건 아니지? 하긴 그렇게 정신이 없으면 학교 생각도 안 나겠다.”

꼭 걱정이라도 하는 선생님 같은 얼굴이다.

아버지가 죽은 것은 중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몇 안 되는 아버지의 친인척들은 모두 아버지의 장례에 관여하기를 꺼렸다. 졸업 후였기에 그간 원오에게 잘 대해 주었던 중학교 선생님들도 끼어들지 않았다.

결국 장례며 수습은 아버지의 전 동료들이 해 주었는데 그들도 달갑게 그 일을 하진 않았다. 경찰이라는 직업이 아니었더라면 모른 체하지 않았을까.

여하튼 그런 상황이다 보니 원오는 고등학교에 간다는 생각도 못 했다. 문밖으로 나서기도 어려웠다.

동네 사람들은 행여 원오가 무슨 짓을 할까 무서운지 길에서 마주치면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원오를 가리키며 한참이나 수군거렸다. 가끔은 유튜버라는 사람들이 와서 집 주변을 찍고 가기도 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굶어 죽더라도 그냥 집에 틀어박히는 편이 나았다.

여자는 침묵하는 원오를 타박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누나가 이번에 이사를 했거든. 방이 두 개야. 고등학교도 가까워.”

“왜 저를, 전 아무 상관도.”

마지막으로 사람과 말을 한 게 언제였지. 분명 며칠은 되었다. 그래서인지 말이 매끄럽게 나오지 않았다.

불안하게 쳐다보며 입술만 달싹이고 있으니 여자가 씩 웃었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뻗은 자리는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죽은 자리였다. 아버지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여자가 발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왜는 왜야. 가족이니까 당연히 데리러 오는 거지.”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들을 두고 가족이라 부른다면 여자와 원오는 가족이 맞는다. 하지만 원오에게는 여자보다 더 가까운 가족이 아직 남아 있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왜 누나가 왔을까. 지금 이 일을 어머니도 알고 있을까.

원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여자가 멋쩍어하며 뺨을 긁적였다.

“사실 엄마는 반대했거든. 섭섭하겠지만 이해해 줘. 전부터 엄마가 아버지를 얼마나 무서워했니. 기억하려나?”

기억한다. 어머니와 누나가 이 집에 살던 시절에도 아버지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언성을 높이거나 욕설을 한 적은 없지만 닫힌 안방 문 안에서는 종종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늘 소매가 긴 옷을 입었고 때로는 얼굴에도…….

그때는 의미를 알 수 없던 일들이 이제는 무엇이었는지 알겠다.

원오가 오래된 기억에 매몰되기 직전 여자의 목소리가 그를 건져 올렸다.

“아무튼 사람 마음이 그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엄마는 이 집에 오기가 싫었을 거야.”

원오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열없이 웃었다.

“나도 안 무서웠던 건 아닌데 이제 돌아가셨으니까 뭐. 일단 간단하게 네 물건만 챙겨. 나가서 밥도 좀 먹고, 처리할 일 있으면 해치우자.”

여자의 명랑한 제안에 원오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더듬더듬 거절했다.

“나, 나는, 전 그냥 여기 있어도…….”

원오는 생각지 못한 행운에 기댈 자격이 없었다. 닫힌 문 안에서 홀로 죽어야 했다. 구하지 못한 사람들처럼.

“여기서 혼자 어떻게 지내. 누나가 어색해서 그래?”

여자가 얼굴을 바짝 가까이 하더니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오래되어 흐릿한 누나의 기억 위로 완전히 새로운 데이터가 덧씌워졌다. 낯설고, 지나치게 눈부셨다. 원오는 빛을 피해 달아나는 그림자처럼 움츠러들었다.

“그게 아니라, 나는, 흐읍……!”

돌연 숨이 콱 막히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원오가 몸을 둥그렇게 말고 헐떡이자 여자의 손이 등을 토닥였다. 여자는 원오에게 닿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행여 옷깃이라도 스칠까 겁내던 동네 사람들과 달랐다.

“천천히 숨 쉬어.”

여자가 시키는 대로 원오는 느리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시고 내쉬고, 다시 마시고 다시 내쉬고. 꽉 막힌 듯하던 숨통이 서서히 트였다.

“잘했어.”

원오는 간신히 허리를 폈으나 여자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불편하게 숨 쉬며 자백했다.

“아버지가, 죽은 건 내가 신고를, 제때 하지 않아서…….”

“신고?”

“내가, 늦어서.”

“아, 구급차.”

아버지는 갑자기 쓰러졌다. 심근 경색이었다. 원오의 신고를 받고 온 구급대원이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끝내 사망했다. 너무 늦었다고 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냥 아버지 명줄이 그때까지였던 거지. 심근 경색을 어떻게 예상하고 대처하니.”

“그래도.”

“너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 같아?”

원오가 대답하지 않자 여자가 흠, 하며 한숨을 쉬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하자.”

눈치를 보려고 원오가 살짝 고개를 들자 여자가 양 뺨을 감쌌다. 얼결에 원오는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가까이서 들여다본 여자의 얼굴에는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눈은 반짝이고 입매는 조금 고집스럽다. 시선에 온도가 있을 리 없건만 여자의 눈길은 아주 따스하게 느껴졌다.

“나쁜 사람이 죽은 것뿐이야.”

“나쁜 사람…….”

아버지가 몇이나 되는 사람을 죽이는 동안 그 사실을 알던 사람은 오직 원오뿐이었다.

전직 경찰. 혼자 아들을 키우는 홀아비. 눈 쌓인 날이면 가장 먼저 나와 길을 치우고, 독거노인을 위한 봉사 활동 모임에 종종 얼굴을 비쳤다. 좀 재미는 없지만 누가 봐도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아버지를 의심하지 않았다. 거구의 연쇄 살인범은 소탈하고 수더분한 가면을 쓰고 모두를 감쪽같이 속였다.

아버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좋은 사람이라 하던 사람들 모두 그렇게 말했다. 죗값을 치르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죗값으로 죽은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죽어 마땅하다는 데는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나쁜 사람이 죽었을 뿐이니까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잖아.”

여자가 원오의 눈 아래를 문질렀다. 눈 아래의 희미한 흉터는 어릴 때부터 있던 것이다. 원오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갓난아기일 때 아버지가 내던진 적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에 관해서는 다 잊어버리고 사는 거야. 이제 아버지는 너한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해. 넌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어.”

“좋은 사람으로.”

“그래, 좋은 사람.”

“난, 아무도 구하지 못했는데…….”

원오가 중얼거리자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원오의 뺨이 얼얼해졌다.

“넌 아이였잖아. 아니, 지금도 어려. 너한텐 도움이 필요해. 약자는 도움을 받아도 괜찮아.”

“그래도.”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구하면 되지. 어른이 돼서, 좋은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구해 주자. 원오야, 그러면 돼.”

말을 마친 여자는 곧장 원오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챙겼다. 몇 벌 안 되는 옷, 아마도 쓰지 않을 잡동사니 따위를 낡은 책가방에 쑤셔 넣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며 원오는 또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아버지 생각은 하지 마. 나쁜 사람이 죽었을 뿐이야.”

“정말로 그렇게.”

“괜찮아. 이제 아버지는 널 쫓아오지 못해.”

원오는 누나를 따라 집을 나왔다.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는데도 누나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거대한 배의 선장처럼 오직 앞을 향했다. 거친 풍랑도 등을 떠미는 추력일 뿐이다.

점차 원오의 발에도 힘이 실렸다. 내디딜 때마다 끔찍한 기억들이 멀어졌다.

아버지가 모르게 파출소에 갔던 일, 그곳에서 아버지의 지인을 보고 놀라서 도망쳐 나왔던 일, 그 일을 들켜 지하실에 갇혔던 일, 제발 구해 달라고 애걸하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던 일, 결국 도망치지 못한 일, 끌려가는 사람을 바라본 일.

원오의 걸음이 빨라졌다. 어느새 누나를 앞질러 걸었다. 오래된 기억들을 아직 생생한 기억들이 뒤쫓아 갔다.

한 걸음, 아버지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두 걸음, 아버지를 발견했다. 세 걸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네 걸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섯 걸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섯 걸음, 119에 신고했다. 일곱 걸음, 너무 늦었다고 했다.

‘내가 정말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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