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1
「사흘 후에 뵙지요.」
대신관의 말이 새틴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사흘 안에 대책을 강구하시죠. 사흘 후 당신의 거짓말이 모두 까발려질 테니!
심지어 사흘도 온전히 새틴이 유용할 수 없었다. 왕궁에서 주최한 연회와 신전의 저녁놀 기도회(예약제 기도회로 꽤 비싸다.) 때문에 이틀이 홀랑 날아갔다.
이제 내일이면 대신관과 함께 말씀의 방에 들어가야 한다. 정확히는 열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어서 대책을 강구해야 해.’
새틴은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의자 손잡이를 문지르다 입을 뗐다.
“케인, 그 있잖아.”
케인은 침대에 누워서 절인 살구를 집어 먹으며 새틴을 쳐다보았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누워서 음식을 먹으면 안 좋아.”
“그 말 하려던 거 아니지 않아?”
“어, 아니지…….”
새틴은 어물쩍거리며 또 의자 손잡이를 문질렀다.
새틴과 케인은 현재 수도 관청에서 제공한 영빈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원래는 수도에서 좀 떨어진 위치에 있던 왕실 별장이었는데 인구가 늘며 도시가 커지다 보니 어느샌가 수도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고 한다. 왕실로서는 굳이 수도 안에 별장을 둘 필요가 없어 관청에 넘겼다는데.
‘아마 공짜로 넘기진 않았겠지.’
여하튼 왕실 별장이었던 까닭으로 영빈관은 아주 화려했다. 벽이며 바닥, 심지어 천장에도 여백이 없었다. 얼핏 밋밋해 보이는 구석도 가까이서 보면 조밀한 무늬가 들어차 있었다. 커튼이며 침구도 마찬가지다.
이 화려한 방에서 케인은 태연히 잠을 자고 간식을 먹었다. 잘생긴 얼굴 때문인지 전혀 존재감이 묻히지 않았다. 칙칙한 검은 로브를 벗고 잘 차려입으니 외국 왕족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그걸 본인도 아는 눈치고.
간혹 드나드는 하녀들이 케인을 흘끔거리며 저희끼리 눈짓하는 모습을 새틴은 여러 번 봤다. 약간 뿌듯해지는 한편 복잡한 기분도 들었다.
‘나는 좀 시종 같지 않을까.’
아니, 다시 생각하니 그도 아니다. 왕실 연회에서 본 시종들은 모두 고급 인력 같았다. 새틴은 얼결에 용사는 될 수 있었지만 아마 시종은 되지 못할 것이다.
맥 빠지는 상상을 잠깐 한 후에야 새틴은 하려던 말을 꺼냈다.
“소원 말이야.”
“응.”
“내일 소원 빌 거지?”
제가 한 질문이지만 역시 바보 같았다고 새틴은 생각했다.
케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새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새틴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실이 어찌나 넓은지 운동장만 한 침대가 있는데도 공간이 많이 남았다. 창가에도 의자가 있고 가운데에도 의자가 있고 저쪽 벽에도 의자가 있었다.
새틴은 의자 앉기 놀이를 하는 사람처럼 방 안을 빙빙 돌아다니다 변명하듯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전에 그랬잖아. 내 기억을 되찾을 거라고. 나로서는 그게.”
“기억을 찾는 게 싫어?”
케인이 새틴의 말을 끊고 물었다.
“……싫다기보다는.”
대놓고 물으니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기억을 찾기 싫다고 말하면 분명 이상해 보일 테니까.
새틴은 벽 쪽 의자에 앉았다. 침대에서 제일 먼 자리였다. 새틴은 바닥의 국화 무늬를 보며 이어 말했다.
“내가 기억을 찾아도 달라지는 게 없을지도 모르잖아. 괜히 그런 소원을 빌었다고 생각하게 되면 좀 아깝고. 네가 받을 보상이 나 때문에 날아간 거 같고.”
다소 횡설수설했으나 케인은 대강 의미를 알아들은 듯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새틴은 곁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다른 데를 보았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은 케인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이는 거야?”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그냥 네가 실망할까 봐 걱정이 돼서 그래.”
“기억을 찾은 네가 전과 다를까 봐?”
새틴이 침묵하자 케인이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새틴이 진짜 기억 상실이었다면 이 순간 케인을 따라 멋쩍게 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니기에 새틴은 땀이 뻘뻘 났다. 순식간에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그럴 수도 있잖아. 내 말은, 네가 나한테 도움을 받은 일 때문에 나를 너무 좋은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으니까.”
“그게 왜 오해야?”
불쑥 케인이 말을 끊고 물었다. 새틴은 손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내 말은, 내가 나쁜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네 생각만큼 좋은 사람은 아니란 거지. 그럴 수도 있잖아. 예전 기억을 찾았는데 막, 내가 그냥 지금하고 똑같다든지, 전의 일을 잘 기억 못 한다든지. 그럼 네가 느끼기엔.”
새틴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새틴이 슬쩍 눈치를 보니 케인이 뒤로 몸을 젖혔다. 제집처럼 편히 앉은 케인과 달리 새틴은 벌 받으러 온 사람처럼 몸을 굳히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꽤 되는데도 새틴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가만히 새틴을 바라보던 케인이 입을 열었다.
“지금의 네가 예전하고 다르다고 생각해?”
케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평소와 달랐다. 어쩐지 부드럽게 느껴지는데, 착각일까. 새틴은 흘끔 또 눈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걱정할 필요 없어. 예전이나 지금이나 넌 똑같으니까.”
“아니, 그게 네 착각일지도 모른다니까. 오래 못 만났잖아. 기억이란 게 원래 시간이 지나면.”
케인은 지그시 미소 지은 채 새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새틴은 말을 멈췄다. 아마도 케인은 새틴이 무슨 말을 하든 진지하게 듣지 않을 것이다. 그 맹목적인 믿음이 새틴을 갑갑하게 했다.
그러나 갑갑한 한편 기묘한 충족감도 들었다. 소원을 빌지 않는다면, 그래서 지금의 상태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럼 저 믿음은 새틴의 것인데.
‘꼴사나워.’
스스로의 욕심이 부끄러워서 새틴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리 와.”
“어?”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라고.”
케인이 고갯짓했다. 침대는 하도 넓어서 케인이 편히 걸터앉아 있어도 그 옆에 몇 명 더 앉을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남았다.
왜 부르는지도 모르면서 새틴은 쭈뼛쭈뼛 침대로 다가갔다. 세 뼘 정도 거리를 두고 앉으니 케인이 손을 뻗어 아까 먹다 내려놓은 간식 접시를 가져왔다. 절인 살구가 예쁘게도 담겨 있었다. 케인은 그중 하나를 포크로 쿡 찍어 내밀었다.
“쓸데없는 생각 관두고 살구나 먹어.”
“지금 살구가 중요한 게.”
“좋아하잖아.”
살구는 혀가 아리도록 달았다. 그러나 새틴은 독을 먹은 듯 입이 썼다.
∞ ∞ ∞
“생각보다 얼굴이 안 좋군요. 여기서 지내면서 불편한 거라도 있었습니까?”
저녁놀 기도회에서 만났던 에드워드가 찾아왔다. 기도회 후에 대신전에서 신관들만의 일정이 있다더니 이제 다 끝난 모양이다.
“아니, 내가 불편한 게 뭐가 있겠어.”
새틴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아까도 봤고 내일도 볼 예정이다. 굳이 이 밤에 찾아온 이유가 뭘까.
에드워드는 가지고 온 꾸러미를 내밀었다. 크기가 제법 되었다. 3kg짜리 귤 한 박스 정도다.
“이걸 전해 드리려고요.”
“이게 뭔데?”
받지 않고 멀뚱히 쳐다보니 에드워드가 꾸러미를 풀었다.
“내일 입으실 옷입니다. 시간이 촉박해 이제야 완성이 됐다더군요.”
“옷?”
“케인 씨 것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케인 씨는 어디 갔습니까?”
“아, 목욕하러 갔어. 대욕탕이 있으니 같이 해도 된다는데 그건 좀 그래서.”
새틴은 쑥스러워서 뺨을 긁적였다. 에드워드는 “네에.” 하더니 묘한 표정으로 새틴을 쳐다봤다.
“왜 그런 눈으로…….”
“두 분 관계가 참 신기하다 싶어서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새틴은 되묻지 않았다. 몰라도 될 것 같다. 실은 이미 아는 것도 같고.
에드워드는 짓궂게 물고 늘어지지 않고 꾸러미에서 옷을 꺼내 테이블 위로 펼쳤다.
“신전 측에서 마련한 옷입니다. 듣자 하니 대신관님 옷을 짓는 재단사가 만들었다더군요.”
확실히 장인이 만든 옷처럼 보였다. 그리 화려하지 않은데도 소매나 옷깃 같은 데서 솜씨가 느껴졌다. 가까이서 보면 곳곳에 숨은 자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감탄하며 옷자락을 만지던 새틴은 뒤늦게 말했다.
“뭘 이런 걸 다 준비했을까. 옷이라면 여기서도 많이 받았는데.”
영빈관에는 다들 눈썰미가 좋은 사람만 있는지 지난 이틀간 입은 옷 모두 맞춤옷처럼 새틴의 몸에 딱 맞았다. 아직 입어 보지 않은 옷도 여러 벌인데 하나같이 훌륭했다. 내일 뭘 입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에드워드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행여 입을 옷이 없을까 봐 걱정돼 찾아온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일 들어갈 곳은 대신전에서도 가장 깊은 곳입니다. 신께서 직접 말씀을 내리시는 곳이니 그에 걸맞은 복장을 갖춰야지요.”
뒤늦게야 새틴은 에드워드가 말하는 바를 이해했다. 드레스 코드가 따로 있다는 뜻이다.
“아, 복장 규정이 있을 줄은 몰랐어.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큰일이네.”
새틴이 멋쩍어하자 에드워드가 픽 웃었다.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절차에 따라서 움직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실수한다고 해도 새틴 씨한테 뭐라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에드워드의 농담에도 새틴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에드워드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다른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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