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케인은 지도도 보지 않고 길을 찾았다. 수도에는 다양한 시대의 흔적이 혼재했다. 어느 곳은 아주 고풍스럽지만 어느 곳은 아주 새로웠다. 특히 영빈관 주변의 건물과 길은 죄다 새것이라 해도 무방했다. 꼬인 데 없이 매끈한 길은 술을 마시고 걸어도 헤맬 성싶지 않았다.
‘이 주변에는 숨을 곳이 없어.’
도망치는 사람들이 으레 어떤 곳을 찾는지는 케인이 누구보다 잘 안다. 미친 늙은이의 학교에 가기 전까지 케인은 거리에서 살았다. 재수 없게 소매치기를 하다 경관에게 쫓기기도 했고 가끔은 승산 없는 싸움에 휘말려 도망치기도 했다. 일상이 숨바꼭질이었다.
새틴도 바보는 아니니 이 근방이 숨을 만한 곳이 아니라 금세 판단했으리라.
‘좀 오래된 티가 나는 데가 좋지.’
볕이 잘 안 들거나 고약한 냄새가 나는 싼 셋방들이 모인 골목. 그런 데는 외지인과 토박이, 이주민이 뒤죽박죽 섞여 있기 마련이라 어떤 꼴을 하고 있어도 어지간해선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난 며칠간 왕궁과 대신전을 오가느라 마차를 타고 수도를 여러 번 가로질렀다. 케인은 마차 안에서 본 풍경을 떠올리며 몇 군데를 추렸다.
∞ ∞ ∞
‘이제 내가 없어진 걸 알았으려나.’
새틴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거리의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슬슬 일어나 활동할 시간이다. 영빈관의 누군가가 창밖으로 늘어진 로프를 발견할 때도 됐다.
“먹을 것 좀 줄까요?”
새틴을 여기까지 데려온 남자는 밤을 새운 사람 같지 않게 활력이 넘쳤다. 새틴의 다리를 간단히 처치해 주고는 좁은 부엌에서 덜그럭거리며 뭔가를 찾았다.
새틴은 슬쩍 집을 훑어보고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요.”
허기가 좀 느껴지긴 하지만 뭘 먹고 싶진 않았다. 남자는 붕대 감는 솜씨는 제법 그럴듯하더니 집안일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수선한 집안 꼴을 봐선 먹을 만한 음식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대답을 들은 남자는 하던 일을 멈추고 새틴의 맞은편에 와 앉았다. 작은 식탁은 팔꿈치를 짚을 때마다 기우뚱거렸다. 왠지 신경이 쓰여 새틴은 식탁 아래로 팔을 내렸다.
남자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이제 내 계획을 말해 줄게요.”
새틴을 데려온 남자는 어딘지 범상치 않았다. 인상은 나쁘지 않은데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기묘할 정도로 반짝이는 눈 때문인지, 아니면 현실감이 없을 만큼 명랑한 표정 때문인지.
‘그러니까 이게, 광기라는 거지?’
어두울 때는 그저 좀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밝은 데서 보니 약간 오싹하기까지 했다.
새틴은 남자가 하는 일에 별 관심 없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어물쩍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전에 용사님이 대신전에 방문해요. 용사님과 동료들이 말씀의 방에 들어가는 아주 중요한 일정이죠.”
여기까지는 딱히 비밀스러운 일정이 아니기에 남자가 알고 있어도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다만 이어지는 얘기는 새틴을 당황케 했다.
“오늘이 마지막 일정일 가능성이 커요. 용사님은 말씀의 방에 들어갔다 나오면 수도를 떠날 거예요.”
마음이 바뀌어 지금 여기에 있긴 하나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다. 왕궁 연회 때 초대장을 보내도 되냐고 묻는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새틴은 전부 에둘러 거절했다. 별달리 한 일도 없이 칭송을 받고 있자면 사기꾼이 된 기분이었다.
‘사기꾼이 맞긴 한데 일부러 대접받고 다닐 필요는 없잖아.’
사람들에게는 언제까지 수도에서 지낼지 얘기하지 않았다. 앞으로 무얼 할 예정이냐 묻는 말에도 아직 모르겠다며 두루뭉술하게만 대답했다. 오늘 이후 새틴의 계획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남자는 마치 새틴을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술술 떠들었다.
“용사님은 친절하지만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중요한 일정만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용사님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데, 레드우드보다 남쪽일 가능성이 커요.”
“그렇군요.”
스토커인가?
그리 생각하면서도 새틴은 일단 호응하는 체했다. 너무 얼빠진 모습을 보여 주면 의심을 살지 모르니.
“가장 가능성이 큰 곳은 클로버랜드예요. 마왕을 무찔렀다는 사람은 용사님이 아니지만 분명 용사님도 모습을 감추고 그 일에 관여했을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형씨, 생각을 해 봐요. 용사님한테도 서사가 있어야지. 분명 용사님을 성장시킨 사건들이 있을 거예요. 영웅담은 대부분 그런 식이니까.”
남자가 히죽 웃어서 새틴도 엉겁결에 따라서 웃었다.
“용사님이 떠나기 전에 얼굴을 보려면 이제 시간이 별로 없어요. 오늘이 지나면 클로버랜드까지 가야 할 텐데 거기까진 쫓아가긴 좀 그렇잖아. 거기서 모습을 감춰 버리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니까.”
갑자기 떠날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새틴은 며칠 내로 클로버랜드로 돌아갔을 것이다. 남자의 추측대로. 이제는 행선지가 바뀌었지만 누군가 뒤를 쫓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영 껄끄러웠다.
새틴은 조심스레 물었다.
“용사님 얼굴을 꼭 봐야 돼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자의 눈이 번뜩였다. 사실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반사되었을 뿐이지만 새틴은 움찔 놀랐다.
“아니, 내 말은 이제 용사가 할 일도 없고…….”
“업적은 한 번이면 충분하지 뭘 더 바라요? 아하, 형씨는 용사님 얼굴 봤구나. 그래서 그렇게 태연한 거지? 나도 행진 때 봤으면 이렇게까지 안 했어!”
뭔가 치밀어 오르기라도 하는지 남자가 돌연 언성을 높였다.
“너무 멀리서 봐서 머리털밖에 알아볼 수가 없더라니까요. 검은 곱슬머리였는데, 꼭 형씨처럼.”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새틴은 당황하지 않은 척 응수했다.
“……염색했어요. 용사님처럼.”
“잘 어울리네요.”
다행히 남자는 별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아무튼 형씨, 내 계획은 이래요. 용사님은 영빈관에서 대신전까지 마차로 이동할 거예요.”
“네에.”
“중간에 기다리고 있다가 마차를 세우는 거예요. 길이 좁아지는 다리쯤에서. 분명 용사님은 내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비키라고 하겠죠? 그래도 일단 마차는 멈춰 있으니까 공격하긴 쉬워요.”
“……공격?”
새틴은 저도 모르게 눈을 치떴다.
이 광인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남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소 흥분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두 명이 필요한 거예요. 형씨는 다리를 다쳤으니까 마차를 세우는 역할을 맡아요. 다친 다리 때문에 길을 늦게 건너는 척하면 되겠네. 그사이에 내가 마차 바퀴를 망가뜨려서 대열을.”
“아니, 아니,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 마차를 못 쓰게 만들면 분명 벌을 받을 텐데.”
“하핫, 그런 게 겁나요? 영빈관 담도 넘은 사람이.”
“나는 담을 넘다 다친 게 아니라.”
남자는 새틴이 핑곗거리를 떠올릴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슬슬 갑시다. 좀 이르긴 한데 늦는 것보단 빨리 가는 게 낫지. 망치가 어디 있더라?”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지.
새틴의 고민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 덕이었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나누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보니 집주인 같았다. 월세가 어쩌고, 소음이 어쩌고. 집주인은 남자의 눈에 서린 광기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한참을 잔소리했다.
그사이 새틴은 달아날 틈을 찾았다. 창문으로 나가면 될 듯했다. 다행히 1층이라 무리해 뛰어내릴 필요는 없었다.
새틴은 남자의 방에 어수선하게 걸려 있던 로브를 한 장 훔쳐 창문을 넘었다.
‘치료는 고마웠어요.’
좀 이상한 사람이긴 했지만 도움은 되었다. 붕대로 잘 고정한 발목은 아까보다 훨씬 상태가 나았다. 새틴은 절뚝이며 걸음을 서둘렀다.
걸으며 길을 살피니 어째 풍경이 눈에 익었다. 바로 주변은 주택뿐이지만 그 너머에 어디서 본 듯한 큰 건물들이 보였다. 대신전에 갈 때나 왕궁에 갈 때 이 근처를 마차로 지나간 적이 있는 모양이다. 짐작이 맞는다면 예상보다 멀리까지 왔다.
‘혼자였으면 여기까지 오는 데도 한참 걸렸겠는데.’
평소의 몸 상태였다면 모를까 지금은 다리를 다쳤다. 남자의 부축 덕에 시간을 아꼈다. 황당한 범죄 계획을 듣느라 날린 시간을 감안해도 손해는 아니었다.
새틴은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부지런히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 슬그머니 섞여들었다. 주택가라 그런지 외지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맘 편히 어기적거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빨리 다른 데로 가야겠는걸.’
로브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렸지만 유심히 보면 누군지 알아차리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
마신을 무찌르고 돌아왔을 때 행진을 보러 모여든 사람이 족히 수백은 되어 보였다. 어쩌면 수천일지도.
그중엔 오늘 만난 남자처럼 멀리서 본 사람도 있겠지만 가까이서 본 사람도 분명 있다. 그런 사람이 바로 근처에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괜히 이목을 끌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새틴은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바닥을 보며 걸었다. 한참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큰길이었다. 확실히 지난 적이 있는 길인지 상점의 간판이나 가로수의 수종이 눈에 익었다.
이 근처에 몸을 숨길 생각은 당연히 없다. 새틴은 주위를 둘러보며 마차 승강장을 찾았다.
‘도시 밖으로 나가는 건 당장은 불가능해. 여비도 부족하고, 들키기 쉽지.’
곧 마차가 올 시간인지 두어 사람이 승강장 앞에 서 있었다. 새틴도 그 옆에 가 섰다.
‘좀 오래된 동네가 좋겠어. 뜨내기들이 먹고 자는 데라면 나 하나 숨어 있어도 티도 안 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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