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케인은 탐문 중인 경관과 시민의 대화를 엿들었다. 사실 비밀스러운 대화도 아니어서 케인 말고도 주변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들렸다.
“선생님, 실례지만 어디 가시는 길이죠?”
“가죽 공방이요. 저쪽 13번가에 있는데…….”
“집에서 나오셨습니까?”
“그런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케인은 두 사람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방금 시민이 말한 가죽 공방이 있는 13번가가 코앞이었다.
오기 전까진 몰랐던 사실인데 수도에는 가죽 공방이 많았다. 제일 번화한 데다 사람이 많이 살아서 장신구의 수요가 큰 모양이었다.
골목에 빽빽하도록 늘어선 공방은 저마다 규모도 달랐다. 누가 봐도 명장의 공방으로 보일 만큼 으리으리한 곳이 있는가 하면 간신히 구멍가게를 면한 곳도 있었다. 간판의 크기도 전부 다르다.
오가는 사람들의 행색 또한 가지각색이었다. 이른 시간부터 자재를 옮기느라 정신없는 일꾼도 있고,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연초를 태우러 나온 기술자, 일을 배울 곳을 찾아다니는 뜨내기에 심지어 외국인까지.
‘광대 옷을 입고 춤추면서 돌아다녀도 누구 한 사람 신경 안 쓰겠어.’
케인은 속으로만 생각하며 공방과 공방 사이,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틈새를 살폈다. 도시는 볕 한 줌 안 드는 땅에도 주인이 있고, 사람이 사는 법이다.
‘어디 보자.’
비좁은 틈으로 한 발을 들이자 난간도 없는 계단들이 보였다. 그 위로는 작은 문짝들이 전단지처럼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다. 분위기는 좀 다르지만 클로버랜드에도 이런 곳이 몇 군데 있다. 다만.
‘너무 많은데.’
긴 골목의 셋방을 죄다 뒤지려면 날이 새도 부족할 판이다.
케인은 차분히 생각했다. 새틴이 미리 지낼 곳을 준비했을 리는 없고, 지낼 방을 얻으려거든 일단 돈부터 구해야 할 텐데.
케인은 다시 골목으로 나왔다. 점점 사람이 많아지는 골목을 천천히 거닐며 지저분한 벽들을 자세히 살폈다.
[방 있습니다/3개월 이상 우대]
[침대 있음/창문 있음/목욕탕 5분 거리]
[단기 있음/바로 입주 가능]
방을 빌려준다는 벽보가 눈 닿는 데마다 붙어 있었다. 별 특색 없이 엇비슷한 벽보가 계속 이어졌다. 슬슬 답답하다고 느낄 때쯤, 케인의 눈에 아주 특별한 구인 공고가 들어왔다.
[간병인 구함/숙식 제공]
∞ ∞ ∞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안경 낀 노부인이 새틴의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안경을 꼈음에도 잘 보이지 않는지 눈썹 사이에 깊게 주름이 팼다. 새틴은 긴장하지 않은 척 벙싯벙싯 웃었다.
끝내 부인은 새틴이 누군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나이를 먹으니까 기억력이 나빠지더라고.”
“하하.”
“아까는 영 음침해 보이더니 웃으니까 또 사람이 실없어 보이네.”
웃고 있지만 새틴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깐깐했다. 새틴은 얼른 얼굴 근육을 당겼다. 실없어 보인다는 말은 처음 들었지만 아무튼 좋은 의미 같진 않았다.
부인이 새틴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팔에 힘을 주었다.
“이런 일 해 본 적은 있어?”
“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치매셨어요. 4년 정도 제가 돌봐 드렸어요.”
사실은 치매가 아니었지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새틴의 말이 진짠지 아닌지 부인이 확인할 방법도 없다.
부인의 눈빛이 확 누그러졌다.
“어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고생 많았겠네.”
“별로 안 힘들었어요. 적성에 맞았나 봐요.”
“그래? 안에서 마저 얘기할까, 그럼.”
이제야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볼 마음이 들었는지 부인이 안쪽 소파를 가리켰다. 여태 새틴은 문간에 서 있던 참이다.
새틴이 재빨리 소파에 가 앉자 부인이 맞은편에 앉으며 멋쩍게 웃었다.
“서 있느라 불편했지?”
“아뇨, 잠깐인데요.”
“엉뚱한 사람들이 올 때가 많아서 그랬어. 보니까 자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거 같은데.”
“……그, 벽보가 좀 찢어져 있었는데.”
새틴은 여기 오기 전에 본 구인 공고를 떠올렸다. 숙식 간병인을 구하는 내용이었는데 아랫부분이 좀 찢어져 있었다. 어쩌면 그 부분에 중요한 내용이 적혀 있었을지도.
새틴이 눈치를 보자 부인이 웃었다.
“진짜 모르는 얼굴이네. 우리 어르신이 아주 유명한 가죽 상인이야. 이 골목에서 어르신이 파는 가죽을 안 사 본 공방은 한 군데도 없을걸.”
“네에.”
이게 중요한 정보인가.
새틴이 눈을 껌벅이자 부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간병을 해 본 적도 없으면서 어르신한테 잘 보이겠다고 오는 놈이 한둘이 아니었다니까.”
“아하…….”
새틴은 오는 길에 본 수많은 공방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만들든 재료가 좋아야 결과물도 잘 나온다. 가죽을 쓰는 장인이라면 당연히 좋은 가죽을 파는 상인과 잘 지내고 싶을 만도 했다. 생산자와 손을 잡으면 더 좋겠지만 아무래도 이런 대도시에서는 유통자가 더 힘이 세겠지.
“사실 우리 어르신이 좀 괴팍해. 지금은 다치기까지 해서 더 괴팍해. 잘 보이러 온 놈들이 죄다 사흘을 못 버티고 그만뒀어.”
“그랬군요.”
“자네도 막상 일 시작하면 도망가고 싶을 수도 있어.”
“해 봐야 아는 거죠.”
“실없이 생겼는데 의외로 강단이 있네.”
부인이 또 실없이 생겼다고 말했다.
‘내가 인상이 그렇게 안 좋나?’
어쨌든 일은 하게 되었다.
부인이 쪽지에 주소를 하나 적어 줬다. 새틴이 받아서 보니 이 근처였다.
“지낼 숙소야. 가서 짐 풀고 다시 와. 어르신 계신 데까지 안내해 줄 테니.”
“네.”
딱히 풀어야 할 짐은 없다. 그래도 숙소의 위치는 알아 두는 편이 좋을 듯해 새틴은 알겠노라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려는 새틴을 부인이 급히 불러 세웠다.
“잠깐, 잠깐!”
“네?”
“내 정신 좀 봐. 이름도 안 물어봤네. 자네 이름이 뭐야?”
“아, 저는.”
새틴은 웃으며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여기서 새틴이라고 해도 될까. 몸을 숨기는 중에 본명을 쓰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새틴은 잠깐 눈을 굴리다 둘러댔다.
“……벨벳이라고 부르세요.”
“희한한 이름이네.”
새틴이나 벨벳이나 비슷하지 않나.
어쨌든 이로써 지낼 곳도, 일할 곳도 해결되었다.
새틴은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 아래 공방에서 들리는 쿵쿵 소리에 맞춰 절뚝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부인의 앞에서 다리가 멀쩡한 척하느라 진땀을 뺐다.
‘골목으로 나와서 왼쪽…….’
계단을 모두 내려와 골목을 앞두고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용사님.
새틴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중 누구도 새틴을 보고 있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그리 생각한 순간 또 목소리가 들렸다.
―용사님, 오른쪽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목소리는 새틴의 품 안에서 들려왔다. 새틴은 황급히 로브를 들쳤다. 여태 베스트 안주머니에 처박혀 있던 성물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멋쩍게 웃었다.
―하하,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정정, 성물이 아니라 성물에 깃든 마신이다.
“이 사기꾼 새끼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새틴이 곧바로 성을 내려 하자 마신이 재빨리 말렸다.
―일단 자리를 옮기시죠, 용사님. 친구분이 오고 있습니다.
“친구?”
―항상 같이 다니시는 친구분 말입니다.
새틴의 표정이 굳었다. 아까 마신이 뭐라고 했더라. 오른쪽으로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쪽지에는 왼쪽으로 가라고 적혀 있지만.
“케인이 근처에 있어?”
―예, 지금 용사님을 기준으로 왼쪽에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얼른 가지 않으면 마주치겠어요.
마신에게 왜 남의 소지품에 함부로 똬리를 틀고 있느냐 따지는 것은 이후에 해도 된다. 새틴은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 ∞ ∞
“벨벳?”
케인은 노부인이 말한 이름을 듣자마자 픽 웃었다. 아주 성의 없는 가명이었다. 하기야 새틴은 특별히 미적 감각이 세련된 편은 아니었다. 작명이라고 잘할 턱이 없다.
“조금 있으면 다시 올 거야. 그런데 무슨 일로 찾는 거야?”
새틴의 행방을 알려 준 부인이 뒤늦게 이유를 물었다.
“개인적인 일입니다.”
“나쁜 일은 아니지? 그 청년이 좀 실없어 보이긴 했지만 나쁜 짓 할 것 같진 않았는데.”
오늘 처음 만났을 텐데 부인은 새틴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기야 새틴은 전부터 사람들의 호감을 잘 샀다. 이 부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새틴의 선량한 분위기에 홀랑 넘어갔을 뿐이다.
케인은 나름대로 친절한 체 웃으며 대답했다.
“네, 개인적인 일이니까요.”
케인은 부인의 어깨 너머로 작은 사무실을 훑어봤다. 아래층의 공방에 딸린 사무실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아니다.
‘수입상인가 보네.’
견본품이며 전표로 책상이 어지러웠다. 사무실을 지키는 부인의 차림새도 직공 같지 않고.
아무튼 여기가 뭘 하는 곳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새틴의 뒤를 제대로 쫓아 왔다는 점이 중요할 뿐.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찾았다.
“들어가서 기다려도 됩니까?”
케인이 물으니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인은 케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손대지 말고.”
“네.”
그리 말하지 않아도 뭘 만질 생각은 없다. 부인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케인은 얼른 따라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행여 새틴이 왔다가 문 앞에 선 케인을 보고 달아나기라도 하면 안 되니.
부인이 책상 앞에 앉아 하던 일을 마저 하는 동안 케인은 새틴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생각했다.
‘왜 도망쳤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까.’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아서?
‘그럼 굳이 되찾지 않아도 된다고 할까.’
그런다고 안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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