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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의 한마디가 들렸다. 옆에서 가만히 몸을 말고 있던 키르가 말했다. 에이든이 내 옆에 있으면 진정된다고 말한 것은 역시 같은 기운에 이끌려서다. 물기둥에 집중하는 에이든의 귀에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키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맞아……?”
[그래, 아이들의 기운이다. 저 아이가 먹었나 보군…….]
“뱀들을??”
[그렇지 않다면 저 아이에게서 기운이 흘러나올 리가 없지.]
“저거 큰 문제는 없는 거야?”
키르는 답답한 소리를 한다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 네가 알기 쉽게 설명할 때는 신성력이라 칭했지만, 염연히 신성력과 우리들의 힘은 다른 힘이다. 애초에 우리들의 힘은 인간들의 몸에 맞지 않아. 그렇기에 인간들의 몸에 해가 가지 않게 파생된 힘이 신성력이다.]
하긴 신의 힘이 인간의 몸에 맞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이야기였다. 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에이든은?”
[……인간의 욕심이란.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탐했으니……. 둘 중에 하나지. 죽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힘을 빼내거나. 늦기 전에 빼내지 못한다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럼 빨리 빼내야지!”
[그게 말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겠냐.]
키르도 답이 없는지 암담하게 말했고 어조에 초조함이 보였다. 나는 안달이 나서 키르에게 답을 요구했다.
“야, 어떻게 해 봐. 숲의 관리자라며, 이런 일에 대비한 대책 없어??”
[애초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겠냐??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다!]
그는 체념하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렇다면 에이든은……. 키르의 한숨 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키르도 마찬가지였다. 키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말했다.
[……중요한 건 아이들의 감정이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렸어…….]
키르가 말하는 아이들이라는 건 뱀들을 뜻하겠지.
“…….”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에이든의 몸이 좋아진 이유가 뱀들의 피 덕분이라면?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뱀들을 죽여서 약으로 만든 건가?
“설마…… 그 뱀들로 인해서 에이든의 몸이 건강해졌다고?”
[……애초에 몸이 약한 아이였나. 그렇다면 빼내어도 문제군.]
“그 힘으로 유지된 생명이라서?”
키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분노가 느껴지겠지. 늦든 빠르든 저 아이가 힘에 집어삼켜지는 것도 멀지 않았다……. 그 끝은 죽음이다. 결국 살기 위해서는 힘을 뽑아야 하지. 그런데 힘으로 생명이 유지가 되었다면 그 반동을 견딜 수 없을 거다. 보통 사람도 견디지 못하는 걸 아픈 아이가 견딜 수 있겠느냐?]
“방법을 찾아야지.”
키르는 내 말을 듣더니 생각이 많은 듯 아무 말 하지 않고 혀만 날름거렸다. 나는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애가 타서 에이든을 불렀다.
“에이든.”
“네?”
“아직도 먹는 약이 있어? 몸이 약하다고 했잖아.”
에이든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내 질문이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네. 방심은 금물이라고 어머니께서 꾸준히 약을 보내 주세요.”
“어떤 약이야?”
“어…… 잘은 모르지만 구하기 힘든 약이라고 들었어요.”
에이든도 자신이 먹는 약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듯했다. 그렇다고 에이든에게 솔직하게 혹시 약이 뱀의 피니? 라고 물을 수도 없고……. 건강해져서 기쁜 아이에게…… 에이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숨만 내쉬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내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는지 에이든이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갸우뚱하는 에이든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을 지우고 웃었다.
“아니, 네가 걱정돼서 그렇지.”
에이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약을 못 먹게 막아야 하지만 내가 먹지 말라고 소리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주인한테 말해야겠다. 정 안되면 수신한테 찾아가지 뭐. 설마 계속 잠만 자겠어? 안 일어나면 두들겨 깨워야지.
에이든은 내 얼굴색이 어두워진 이유가 자신의 병세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건강하다며 방방 뛰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는 완전히 건강해졌어요. 약도 가끔 먹어요.”
“다행이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니? 시중 인들이 걱정하겠다.”
이 소식을 얼른 제르펠에게 말해야 했다.
“네! 저…….”
에이든은 나에게 전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렸다.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지 연신 내 눈치를 살폈다.
“왜?”
“여기에 오면 형을 만날 수 있을까요?”
난 눈을 깜빡였다. 힘든 일도 아니었다. 키르가 있어서 요즘은 방 안에서 연습했다지만 그전에는 호수에서 연습했다. 에이든의 상태가 신경 쓰이기도 하고…… 제르펠에게 말해서 호수로 자주 나와야겠다. 난 에이든과 다음을 기약했다.
“타이밍 좋게 도착한다면? 난 대부분 여기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 이 시간대쯤 오면 여기 있을 수도 있지.”
“저도 자주 올게요!”
“그래, 다음에 보자.”
에이든이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며 가려고 한 순간이었다. 멀리서 에이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든과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어머니?”
에이든은 약간 놀란 듯 주춤거렸다. 황후라는 말에 얼른 두리번거렸다. 한눈에 황후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꼿꼿하게 세운 자세로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듣기로는 황후는 몸이 약하다고 했지만 겉모습을 본다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에 달린 큰 장신구들과 옷에 붙어 있는 보석들로 몸이 휘청일 것 같았다. 나 같으면 무거워서 안 할 것 같은데…….
그녀의 뒤에는 사람이 아주 득실했다. 기사는 5명이 넘었고, 시중드는 시녀들이 떼를 지어 다녔다. 그중엔 에이든의 시녀가 있다는 것을 고려해도 많은 숫자였다.
그들은 에이든을 발견했는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황후는 에이든을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고 찾던 아이를 발견했음에도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사라진 아이가 발견되면 보통은 뛰어오지 않나? 아니면 그게 귀족이라는 건지……. 그녀는 걱정의 말보다는 바로 에이든을 다그쳤다.
“에이든.”
“……네.”
“황자로서의 자각이 아직도 부족하구나.”
그녀는 에이든의 옆에 있던 나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들겠지. 황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녀는 엄격한 사람처럼 보였다. 에이든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꼼지락대었다. 황후는 이제야 나를 보았다는 듯 고개를 약간 숙였다.
“사자님, 처음 뵙겠습니다. 전 네리아 아이펠트라 합니다. 이 제국의 황후이지요. 첫 만남에서 보기 흉한 꼴을 보여 드렸네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지만 네리아는 황후라는 말에 강조했다. 살짝 고개를 들어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이 번뜩인 것을 보았다.
“에이든이 폐를 끼친 것은 아닐까요? 물론, 사자님이라면 너그러이 봐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괜찮아.”
약간 심기에 거슬렸지만 그녀의 말처럼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시녀가 발끈하며 나서는 것을 네리아가 손으로 막았다.
“아직 법도에 익숙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해 주자꾸나.”
내 반말이 거슬렸겠지. 제르펠에게 하던 것처럼 툭 튀어 나간 걸 어떡하겠는가? 난 누구에게든 반말을 했다. 교황에게도 반말을 했으니 아마 황후도 진작 알고 있지 않을까? 그들의 관계는 꽤 긴밀해 보였으니까.
“사자님의 자비로움에 감사드립니다.”
“…….”
네리아의 미소는 그림에 그린 듯한 자애로운 미소였다. 남들이 보면 따뜻해 보이는 미소였지만 나에게는 가식적으로 보였다. 특히 사건의 전말을 잘 알고 있는 나에게는. 살살 속을 긁는 말투도 한몫을 했다.
이게 바로 귀족들의 예법인가. 절대 티를 내지 않으면서 비꼬았다. 피곤하게 사네. 에이든은 떨리는 눈동자로 나와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저희는 이만 가 봐요. 사자님. 오늘 고마웠습니다.”
나와의 친분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호칭을 바꾸면서 말했다. 에이든이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그녀는 마주 잡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에이든을 슬쩍 보다가 말했다.
“에이든의 상처가 다 나았군요. 혹, 사자님께서 치유해 준 것일까요?”
“뭐,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에이든의 뺨에 상처를 낸 것 같아서 보기 안쓰러워 치유해 준 거뿐이야.”
그녀의 어조가 미심쩍었지만 에이든의 상처를 치유해 준 것은 내가 맞았다. 난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는 어딘가 소름 끼쳐 보였다.
“역시 사자님이시네요. 신성력도 다룰 수 있으시다니 대단하십니다.”
“…….”
갑자기 돋은 소름에 뭔가 잘못했나 싶었다. 이내 귀부인 같았던 그녀는 쾌활한 소녀처럼 좋은 생각이 났다며 손뼉을 쳤다.
“에이든의 상처를 치유해 주셨는데 지나갈 수 없지요. 고마움의 표시로 저와 차를 한잔하는 것은 어떠십니까? 이번에 좋은 차가 들어왔습니다.”
“아니…… 나는 좀…….”
“그리 시간을 빼앗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녀와 겸상을 하는 것은 부담스러웠기에 나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좁혀진 미간이 뻔히 보일 텐데 그녀는 계속 나에게 권유했다.
뒤를 보니까 호위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라도 황후에게 대들 수는 없는 노릇. 난 갑작스러운 상황에 좀 당황했다. 제르펠이 화낼 것 같았지만 싫다는 사람을 데리고 가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어차피 연회 때 부딪칠 사람이었다. 차 한잔 마시는 것 가지고 죽겠나 싶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요. 다행히 여기서 제 궁은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너는 에이든을 똑바로 보살피도록.”
“네. 마마.”
그녀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유모인지 그녀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에이든을 데려갔다. 에이든은 내가 걱정되는지 궁으로 가면서도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난 에이든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네리아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사와 시녀들은 자연스럽게 내 뒤에서 걷기 시작했다. 뒤가 따가웠다. 이 많은 사람은 왜 데리고 다니는 거야? 뒤통수에 땀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녀는 그들이 부담스럽지도 않은 지 태연하게 걸어갔다.
“사자님. 여기가 제 궁입니다.”
입을 떡 벌리는 걸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막았다. 제르펠의 궁도 한 화려함을 하였지만 그녀의 궁은 뭐……. 금으로 도배를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붉은 장미를 좋아하는지 정원에는 장미들이 잔뜩 피어 있었다. 진한 장미 향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황후의 뒤를 따라 궁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문지기가 정확히 카사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외부인은 검을 들고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뱀입니까? 뱀은 여차하면 위험합니다. 죄송하지만 궁에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초대한 손님에 대한 태도인지 의심스러웠다. 내 언짢은 기분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문지기는 단호했다. 폴은 안절부절못했고, 카사와 월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황후는 문지기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뒤에 있던 시녀들이 카사 일행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을 달라는 재촉과 같았다. 난 시녀들 뒤에 있던 황후의 기사들도 보았다. 그들은 떡하니 옆에 검을 차고 있었다.
귀찮게 돌아가는 상황에 미간을 좁혔다. 그냥 땡깡으로 안 온다고 해야 했나……. 문지기는 나를 등지고 있었다. 나는 약간 짜증 난 투로 말했다.
“내 호위 기사인데?”
내 말에 문지기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나와 마주치지 않았고 살짝 엇나갔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슬쩍 그 시선을 따라갔고 뒤에서 있던 네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싱긋 웃어 보였다.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것들이…… 성질대로 엎어 버릴 수도 없고 난감하네. 문지기는 황후의 허락을 받은 건지 물러서지 않았다.
“혹시나 마마께 위해를 가할 수도 있습니다. 검들은 모두 수거하고 돌아가실 때 드리겠습니다. 사자님,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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