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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91화 (9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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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말라며 손을 내밀고 뒤로 뒷걸음질 치는 슈이렌이 제르펠의 눈에 이상하게 보였다. 그 이유는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슈이렌의 눈이 달달 떨렸기 때문이다.

제르펠은 최대한 슈이렌의 마음을 어루만지듯이 천천히 다가갔지만 그의 동요는 점점 심해졌고, 제르펠의 눈에 희미한 푸른빛들이 포착됐다. 그 빛은 점점 선명하게 보이더니 슈이렌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 빛들의 색은 맑지 않고 탁했으며 온화하게 품어 주는 것이 아닌, 마치 기다란 줄이 그를 꽁꽁 묶어 옭아매는 것처럼 보였다.

“주, 주인아. 나 좀 이상한 것…….”

도움을 요청하던 슈이렌이 풀썩 쓰러졌다. 다행히 뛰어난 제르펠의 반사 신경 덕분에 부서진 파편이 가득한 바닥에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슈이렌은 끙끙 신음을 냈고, 얼굴은 고통스럽게 찌푸려져 있었다.

“무슨 짓을 당한 건가…….”

으르렁거리는 제르펠의 목소리가 성대를 통해 흘러나왔다. 움찔거리는 귀족들의 반응에 제르펠의 살기는 형태를 가지고 귀족들을 짓눌렸다.

“어, 어찌 전하가 이곳에…….”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전하!”

제 발 저린 귀족이 제 탓이 아니라며 발뺌을 했다.

하지만 제르펠에게는 슈이렌이 쓰러진 이유는 입만 열었다 하면 변명을 일삼는 귀족들 탓으로 느껴졌다. 실제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카지노라는, 노예 매매라는 짓을 벌이지만 않았어도 슈이렌이 납치당할 일도, 힘을 다하는 바람에 쓰러질 일도 없었다.

그를 안아 드는 제르펠의 눈에 빨갛게 부어오른 슈이렌의 손목이 보였다.

“…….”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손목의 붉은 자국은 족쇄의 흔적이었다. 영상을 보았던 제르펠은 그 자국이 족쇄라는 걸 바로 파악했다. 제르펠은 즉시 슈이렌의 발목도 확인했고 선명한 붉은 흔적이 보였다. 그의 이빨이 빠드득 갈렸다.

잘못했다면 영상에서 봤던 그 상황을 슈이렌이 당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제르펠은 괜히 늦장을 부리다가 이 사태가 일어난 것 같아 스스로 자책을 했다.

슈이렌이 들었다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매우 바쁘지 않았냐고 달랬을 테지만 그는 한없이 우물을 파고 있었다.

“전하…… 이것을.”

월이 뒤에서 제르펠에게 상자를 주었다. 그 상자 안에는 슈이렌이 발견했던 자료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자료를 훑어보기 위해 슈이렌을 한쪽 팔로 번쩍 들어 안은 그는 다른 손으로 서류를 뒤적거렸다. 서류를 향한 제르펠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너에겐 항상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되는구나.”

종이는 나풀거리며 상자 안으로 들어갔고, 제르펠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슈이렌의 이마에 입술을 짓눌렀다. 다시 뜬 그의 황금색 눈빛은 주위를 압도했다.

“사태를 빨리 정리하고 귀환해라! 명을 거부하는 귀족에게 무력을 행사해도 좋다.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철저하게 해라.”

“네!”

“세드릭, 넌 남아서 기사들을 지휘해라. 자료들은 훼손되지 않게 정리하고 이안에게 건네주거라.”

그의 시리게 빛나는 눈빛에 기세가 눌린 귀족들은 한껏 움츠린 자세로 기사들을 따라갔다. 제르펠이 우렁찬 기사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길을 나서려는 찰나 슈이렌의 몸이 작아졌다. 한번 경험을 했던 제르펠은 차분했다. 그가 뱀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예감은 했다.

제르펠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중충하게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비가 싫어질 정도로군.”

제르펠은 익숙하게 슈이렌을 품 안쪽에 넣은 채 말에 올라탔다. 그는 다시 한번 세드릭에게 당부하고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황궁을 향해 달려갔다.

* * *

“비가 그치질 않네…….”

이쪽도 애가 탔다. 비를 내리는 건 슈이렌이었고, 혹시 그에게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시중인들의 만류에도 이안은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오지 않는 기사들을 기다리며 서성거렸다. 그때 저 멀리서 달려오는 말이 보였다. 이안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제르펠임을 알아봤다.

“전하께서 오신다. 따뜻한 목욕물과 마른 수건을!”

이안이 큰 소리로 시종,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비에 흠뻑 젖은 제르펠이 말에서 내렸지만 이안의 눈에 보여야 할 중요한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전하……. 설마, 슈이렌 님이…….”

“어설픈 소리 하지 마라. 여기 있다.”

이안은 혹시 찾지 못해 돌아왔다는 생각에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르펠은 헛소리하는 이안을 매섭게 타박했다. 제르펠은 건네는 수건을 받고 비를 맞지 않게 품 안에 안았던 슈이렌을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감쌌다.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을 갈무리한 이안이 정중하게 말했다.

“전하,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안, 일이 쉽게 풀릴 것 같군.”

“네?”

“세드릭이 자료를 들고 너를 찾아갈 것이다. 정리해서 내일 보도록 하지.”

상황을 모르는 이안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제르펠은 슈이렌을 위해 따듯한 온기를 찾아 걸어갔다. 이안은 시중을 들기 위해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아갔다.

* * *

사람들의 충격을 알려 주듯이 수도에서 이루어진 노예 경매장은 널리 널리 사람의 입을 통해서 소문이 퍼졌다. 오히려 기사가 한발 늦었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목격담으로 이루어진 기사에 따르면 귀족들이 국민을 납치해 노예로 만들었고 비밀리에 경매를 진행했지만, 슈이렌이 제지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슈이렌과 같이 노예로 잡힌 이도 있었다.

생생한 목격담에 사람들은 믿게 되었고, 이 기사는 눈을 깜빡하는 찰나 지방까지 알려졌다.

이번 일로 국민은 더욱 분개했다. 당연했다. 행방불명 된 가족들이 노예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경매에 참여한 귀족들이 많았고 거기에 프란시아 후작 가가 주동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처벌을 원한다며 황궁 앞에서 항의하기도 했다.

전쟁, 기근, 과한 세금. 푹퐁전야 같았던 상황에서 이번 일이 기폭제가 된 것이다. 그 덕에 가뜩이나 안 좋았던 황제의 위신은 바닥끝까지 내려갔다.

이 일로 황제는 물론, 제르펠과 베르트 공작도 바빠졌다. 영상 증거를 확보했으니 프란시아 후작을 찾기만 하면 됐다.

안쪽에서도 밖에서도, 어느 쪽이든 제르펠에게 유리하게 일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제르펠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하루빨리 이 사건을 끝내야 한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제르펠이 그 결의를 하게 한 대상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신문을 뒤적였고 슈이렌이 힘을 쓴 여파의 사진을 보았다.

이번에도 슈이렌은 백성을 위해 많은 힘을 소모했기에 뱀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빨리 일어나렴.”

제르펠은 새근새근 자는 슈이렌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저번 일을 계기로 경각심이 생긴 제르펠은 슈이렌을 한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사람이었다면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뱀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슈이렌은 제르펠의 목에 둘러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가끔 눈을 뜨고 쉭쉭거리지만 곧 기절한 것처럼 잠에 빠져드는 것을 반복했다.

그의 행각을 잠자코 지켜보던 이안과 공작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면서 대화했다.

집무실 안에는 제르펠과 베르트 공작, 이안이 자료를 보며 대화하는 중이었다. 경매장에서 회수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귀족들을 물색했다. 노예를 찾는 일에 힘쓰며 처벌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일로 확실히 매듭을 지을 생각이었기에 신중히 처리하였다.

“전하 이제 시작인데 벌써 수용할 감옥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본래 귀족들이 수용되는 감옥은 따로 있다. 그래도 귀족이라고 그 나름의 대우를 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귀족이 관여되었는지 그 수용소가 부족할 지경에 이르렀다.

제르펠은 그런 자에게 베풀어 줄 배려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법도가 그랬다. 제르펠은 법을 싹 갈아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베르트 공작에게 물었다.

“쯧. 수를 써야겠군. 감옥에 대해서는 생각한 수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공작은 죄인들을 잡아들이는 것에 열중하도록.”

“네.”

“이안 자료를.”

“네. 여기 있습니다.”

이안이 정리된 자료를 각 제르펠과 베르트 공작 앞에 두었다. 한동안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이안은 품 안에서 반듯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계약서 원본이었다.

제르펠에게 넘어간 계약서의 원본은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이 프란시아 후작 가의 문양이 떡 하니 찍혀 있었다.

“발뺌은 못 하겠군.”

“네, 문서로 남기는 습관이 독이 된 거죠. 상인의 입단속을 위해 쓴 계약서 같습니다만 저희에게는 좋은 자료가 아닙니까.”

노예 상인의 족쇄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오히려 후작의 발목을 잡게 했다. 이안의 미소가 진해졌다. 오랫동안 고생한 결과가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증거가 확보되자 맨 먼저 주동자를 잡으러 갔지만 후작은 홀로 쏙 사라진 것이다. 그 와중에 귀중품은 다 챙기고 간 행각이 우스웠다.

저택에 남아 있던 시종과 시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기사들을 대동하여 곳곳을 뒤졌지만 나오지 않았다. 탁자를 조용히 두드리던 제르펠이 베르트 공작에게 물었다.

“프란시아 후작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나?”

“네, 죄송합니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나오지 않더군요. 목격자도 없습니다. 빠져나오기 위해서라면 마차를 끌고 갔을 텐데…… 그 누구도 보지 못했으니. 어떤 방법으로 빠져나갔는지 궁금할 지경입니다.”

“딱 봐도 마법이군. 이안, 갈 준비는 되었나?”

“……정말 가야 합니까?”

“감쪽같이 사라졌다면 마법사가 후작을 도와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료상으로는 마탑 전부가 개입한 것은 아니다. 일의 정도가 있으니 쉽게 외면하지 못하겠지. 노예 금지라는 제국의 법을 무시했지. 이안 너는 마탑에 가서 증인을 해 줄 마법사를 데려오너라. 빠져나갈 수 없게. 친분이 있는 자도 괜찮다. 난 재판의 일로 움직이지 못한다.”

실제로 마탑 전부가 개입했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당할 리가 없었다. 개인이기에 손이 갈 곳은 한정됐고 빈틈이 생겼다는 논리가 맞았다.

제르펠의 진중한 눈빛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날이 오고 말았다며 침을 삼켰다. 썩 좋은 일이 있지 않았던 곳이긴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죽을 만큼 가기 싫은 곳은 아니었다. 거기에 자신이 보필해 온 제르펠이 황제가 되는 날을 위해서였다.

“알겠습니다. 전하를 위해 마탑의 도움을 받아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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