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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92화 (9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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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트 공작은 이안이 준 자료를 살펴보다가 의문점을 발견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키고 말했다.

“자금의 이동이 마탑과 신전이네요. 마탑은 마법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왜 신전까지…….”

기부금이라는 명목이지만 액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안은 흘끗 제르펠을 보았다. 교황의 건은 아직 공작에게 말하지 않았기에 그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제르펠도 그 금액을 보며 말했다.

“거의 확신은 했다만.”

제르펠은 미간을 부여잡았다. 성역에 대한 일은 슈이렌과 카사에게 전해 들었다. 하지만 마법으로 증거를 없애고 목격했다는 말만 존재하지 증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에이든의 약을 검사할 수도 없었다. 그저 ‘조금 특이한 약이다’ 정도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백성들이 믿을 것인가가 문제군.”

아이러니하게도 슈이렌의 등장으로 교황의 인지도는 비례적으로 상승했다. 신앙이 깊은 자들은 이 사건에 교황이 연루되었고, 설마 신전의 일인자인 그가 성역을 침범하고 뱀들을 죽이고 비가 말라 버린 이유라는 것을 쉬이 믿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역시 신전의 일은 슈이렌에게 맡겨야 하는지 고민이 들었다. 신의 사자인 그의 말이라면 모두가 귀를 기울일 가능성이 컸다.

백성의 마음을 잡는 것도 정치의 일종이나 다름없었다. 비이상적으로 기부금이 많긴 하지만 에이든은 신관이 궁 안에서 대기를 하고 있을 정도로 몸이 약했고 교황이 직접 에이든의 상태를 보기도 했다. 그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한 기부금이라고 하면 구실로는 충분했다.

베르트 공작은 심각해 보이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신전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습니까?”

교황이 황제파와 한패라는 걸 공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애초에 교황은 신전 내부에서 뽑기 때문에 신성력만 뒷받침이 되어 준다면 그 당시 권력이 가장 높은 자가 교황이었다.

“그래, 공작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원래 신전은 건드릴 생각은 없었지만……. 걸러낼 자는 걸러내야지.”

비를 내리라고 슈이렌에게 강조했던 교황의 모습과 그의 음흉한 계략이 떠올랐다. 교황은 분명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다. 몇 건의 사건으로 신중해져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그가 모습 드러낼 때 일이 터질 게 분명했다.

“슈이렌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들이 성역을 침범해 뱀들을 죽이고 약을 만들어 에이든에게 먹이고 있다 하더군.”

“네? 성역을 침해하는 그것만으로 사형감인데…… 하물며 침입자가 신전이라니. 어이가 없군요.”

베르트 공작은 헛웃음만 지었다. 신을 기만한 행동이었다.

오랜 세월 속에서 아이펠트 제국은 수신 이외의 신은 존재하지도, 믿지도 않았다. 그만큼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신이었다. 교황이라는 자가, 신의 대리인이라는 자가 발 벗고 성역인 곳을 침범했으니 어이가 없을 만했다. 거기에 살생까지. 베르트 공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저하께 먹였다니 그건 무슨 말입니까?”

“에이든의 건강이 급격히 좋아진 일이 가뭄과 관련이 있다고만 말해 두지.”

베르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제르펠의 말을 듣고 보니 에이든의 건강이 좋아진 시기와 비가 점점 줄어든 시기가 일치했다. 1년 전부터라면 전쟁이 끝나갈 시점이었다. 제르펠이 죽지 않자 조급해져 물불 가리지 않고 저질렀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말이 1년이지 그 전부터 계획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프란시아 후작의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이 이해가 됐다. 귀족 수장의 자리를 고작 사업을 이유로 포기할 인물이 아니었기에 의심을 했었다.

“그래서 여유로웠군요. 저희가 귀족들을 숙청했을 때…… 황제의 태도가 이해가 됩니다. 비가 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군요. 그리고 교황이 말을 보탠다면 균열을 조장하기에는 충분했을 테니까요.”

“그런 셈이지. 재판은 언제지?”

“5일 뒤입니다.”

“그때 동안 뽑을 수 있을 만큼 뽑아야지. 귀족들을 심문하러 가지.”

“직접 하시겠다는 말입니까?”

베르트 공작이 깜짝 놀라고 말했다. 제르펠은 한쪽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말했다.

“내가 심문을 한두 번 하는 것 같나? 예전에는 수도 없이 했지……. 그리고 그런 자들은 다루기 쉽다. 결국, 자신들이 가장 소중하고 권력 앞에는 약해지는 자들이지.”

제르펠은 비소를 지으면서 일어섰다. 그때 똑똑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안이 문을 열자 세드릭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심각했다. 세드릭의 표정을 본 제르펠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귀족들이 폐하를 찾아갔습니다.”

제르펠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세워졌다.

“귀족이?”

“아마 죄를 용서해 달라는 청을 하러 간 듯합니다. 심지어 몇 명은 제압 대상이었는데 풀려나 있더군요. 예상대로 황실 기사단 중 누군가가 풀어 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자들로만 가득 찼군. 황제에게 부탁하면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일 것입니다.”

“잡아 온 귀족들은?”

“빈방에 모아 두었습니다. 빠져나갈 수 없도록 기사들을 배치했습니다.”

세드릭은 귀족들의 저택을 수사하고 죄를 범한 귀족들을 구속해 왔지만 이미 감옥에는 다른 귀족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커다란 방에 모아 두고 기사들을 배치해서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르펠은 세드릭의 말을 듣더니 방도가 있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친 귀족부터 잡아야겠군. 먼저 황제를 찾아간다. 수고했다. 공작은 계속해서 후작을 찾아라.”

“네. 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공작은 후작을 찾기 위해, 세드릭은 기사단을 지휘하러, 이안과 제르펠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알현실에 도착하자 황실 기사가 서 있었다. 문 앞에 있던 기사는 제르펠을 보자 사색이 되었다.

제르펠은 벌써부터 아픈 귓가에 눈썹을 찌푸렸다. 대체 얼마나 크게 울부짖는지 복도에서부터 귀족들이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께 재판에 관해 알현을 요청한다. 알려라.”

제르펠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기사가 우물쭈물하다가 제르펠의 날 선 기세에 재빨리 문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재빠르게 문 안으로 들어간 것과 다르게 미적거리는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쩌렁쩌렁한 호통 소리가 들렸다.

“누구 마음대로 알현을 요청하는 것이냐? 지금 다른 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태자에게 물러나라 해라!!”

“네!!”

문이 열리더니 기가 죽은 기사가 조심히 나왔다. 슬쩍 제르펠의 눈치를 보고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하께서 알현을 거부하여 어려울 듯합니다.”

제르펠이 작게 혀를 차는 소리에 기사가 움찔했다.

“비켜라. 내가 책임지지.”

기사가 어물쩍 비키자, 이안이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제르펠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분명히…….”

문이 열리는 소리에 얼굴을 돌린 황제의 눈앞에 제르펠이 들어왔다. 황제의 인상이 찡그려지고 울고 있었던 귀족들은 화들짝 놀라 눈물이 쏙 들어갔다.

“태자 여기는 무슨 일이지? 내 분명 들어오지 말라고 한 것 같은데. 내 명을 무시하는 것이냐?”

황제는 잔뜩 화가 나 있었지만 제르펠은 여유로웠다. 황제는 그 여유로움에 더욱 화가 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제르펠은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던 귀족들이 그 자세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할 자가 폐하를 귀찮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죄인이 탈출했다니……. 저의 불찰입니다.”

“…….”

“폐하, 저들이 감언이라도 하였습니까?”

살벌한 목소리와 함께 제르펠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 웃음을 본 귀족들은 소름이 끼쳤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황제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분노를 최대한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대해 말이 있다. 귀족들의 죄는 재판을 통해 확정이 나지 않았다. 귀족을 무자비하게 잡아 수용하는 것은 세간의 눈도 있으니 그만두거라. 귀족의 지위를 침해할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라는 듯이 제르펠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황제의 눈을 마주 보며 띄엄띄엄 말했다. 하나씩 끊어서 강조하는 듯했다.

“세간의 눈을 신경 쓴다면 그렇다면 더욱 그래야지요. 귀족 지위의 침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귀족의 의무를 보여야 합니다. 귀족들이 노예 경매장에 참석한 장면을 본 백성의 눈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내치지 않으신다면 황궁의 지위까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황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르펠은 황궁의 지위가 떨어진다고 말했지만 황궁의 지위가 아닌 황제의 지위였다. 후작의 등장으로 황제와 관계를 유지했던 귀족들이 등을 돌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후작과 관련된 귀족들은 대부분이 카지노 건과 긴밀한 끈이 있었기에 하나둘씩 감옥으로 연행되고 있는 참이었다.

“황궁의 지위가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제르펠은 능청스럽게 황제의 말에 대꾸했다.

“수많은 백성이 노예가 거래되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그 분노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행방불명된 가족이 노예로 팔린 것이 아니냐며 격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분노를 잠재우지 않는다면 후폭풍이 거셀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제르펠은 눈물 자국을 달고 있는 귀족을 노려보며 말했다. 귀족은 제르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고, 호기롭게 황제를 알현했지만 당장에라도 빠져나가고 싶은지 주춤거리며 뒤로 빠지고 있었다.

“실제로 여기 있는 귀족들의 저택을 뒤지니 노예가 나오더군요. 폐하께서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실 테지요.”

살벌하게 이가 갈리는 으드득 소리가 울렸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여봐라, 당장 이놈들을 끌어내거라!!”

황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알현실을 울렸다. 제르펠의 목 주위에서 꿈틀대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제르펠은 눈썹을 찌푸렸다. 슈이렌이 꿈틀거리며 잠에서 깨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황제의 큰소리에 잠이 어설프게 깨어나 버렸다. 그는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슈이렌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다시 움직임이 멈추었고 편안한 숨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앉은 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힘든가.’

제르펠은 속으로 황제를 비웃었다.

황제는 제 손으로 귀족들을 쳐냈다. 대기하던 기사들이 귀족들을 끌어내리기 바빴다. 귀족은 찍소리도 못하고 기사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황제는 골치가 아픈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옳으신 결정입니다. 뿌리째 뽑도록 철저하게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르펠은 허리를 숙여 황제에게 예의를 표했지만 황제는 비꼬는 것으로 느껴졌다. 결국 황제나 귀족이나 똑같았다. 자신들의 권위가 침해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

제르펠은 알현실에서 나오고는 혀를 찼다.

“시간 낭비했군. 가자.”

“어디로 가실 건가요?”

“감옥에. 멋대로 귀족을 풀어 준 자에게 경고하러 가야지. 그리고 상인에게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상인에게 정보를 얻을 수는…….”

이미 이안이 상인을 만나서 정보를 캐물으려고 했지만 상인의 입에서 말이 뛰어나오지 않았다. 다른 말은 잘하지만 유독 카지노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말이 매끄럽게 나오지 못하고 뚝뚝 끊겼다.

‘분명 전하께 고했었는데…….’

제르펠이 보고를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안은 한 번 더 언급했다.

“전하, 상인에게 금언이…….”

“알고 있다.”

“네? 그렇다면 어떤 수로…….”

잘 가던 제르펠이 우뚝 멈추자 하마터면 그의 등에 이안이 부딪칠 뻔했다. 제르펠은 고개를 돌리더니, 이안에게 무엇을 들고 오라고 일렀다. 그의 명령을 들은 이안의 고개가 갸우뚱했지만 제르펠의 명령이었다. 고개를 숙이며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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