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포이즌 허니
“으악! 여기 출구가 도대체 어디야!”
지금 이 모든 상황의 원인 제공자께서는 정말 어찌나 염치가 없으신지 지 내키는 대로 성질을 부려대고 있었다. 파오 놈은 자기 뒤통수를 표적 삼아 주변에서 푹푹 꽂혀오는 일행들의 화살표 같은 시선에도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하기야 불알 두 쪽이랑 철면피 하나로 이날 이때껏 여기까지 버텨온 인간이 아니던가.
벌써 일주일째였다.
맨 처음에 우리가 들어왔던 그 입구를 기억하거나 혹은 찾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발품을 팔아봤지만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아니, 들어왔었던 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보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유리구슬 안에 박제된 이 죽은 도시 안에서 혹시 영원히 갇혀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마음이 차츰 불안해져간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코 옳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더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지, 한번 나쁜 생각에 물꼬가 트이게 되면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끝도 없는 개미지옥에 빠지게 된다.
기실 사람의 마음가짐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말이다, 아주 오래된 옛말에도 사람 일은 모두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격언이 있다. 그 말은 얼핏 듣기로는 그저 입에 발린 그럴듯한 얘기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 말에는 아주 수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종단에서 무상으로 배포하는 불교 입문자 초급 주술서에는 ‘나’ 와 ‘참나’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설명이 첨부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주술과 마법이라는 기예가 작동하는 원리이자 불교의 대표적 사상 중 하나였다.
‘나’를 버리고 진짜 나인 ‘참나’를 찾아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초기 불교의 가르침이었다면, 현 환영제야단의 불교적 가르침은 바로 그 ‘참나’를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쉽게 얻어내는 방법들을 알려주고 있었다.
쉽게 말해 ‘나’라고 불리는 것은 우리의 ‘현재의식’을 뜻했고, ‘참나’는 우리의 심층 속에 숨겨져 있는 ‘잠재의식’을 가리켰다. 마법이나 소원이 작동하는 원리원칙은 아주 간단했다. 나인 현재의식이 바라는 일을 참나인 잠재의식이 허락해주면 내가 원하는 모든 일들이 실제로 가능해진다.
즉, 다시 말해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이 완벽하게 같은 방향으로 일치하는 순간, 흔히들 말하는 기적이나 마법 같은 것들이 발동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현재의식이 아무리 원하고 갈망해도 잠재의식이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아무리 피날 만큼 노력해도 절대 원하는 것을 얻어내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려서부터 생활이 궁핍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몹시 어렵게 살았던 불우한 환경 탓인지 평소 입버릇처럼 자신은 절대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주변에 떠벌리고 다녔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찮게 굉장한 큰돈을 만질 수 있는 행운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다지 많은 돈을 벌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지 그 사람이 운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현재의식인 ‘나’가 큰돈을 벌고 싶은 욕망들로 가득했어도 잠재의식인 ‘참나’에서부터 이미 자기 스스로 가난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속박을 걸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도 가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사실 대종말 이전에는 현재와 같은 주술이나 마법 대신에 과학이라는 허술한 문명 체계가 그 자리를 차지했었다고 전해진다. 대종말 이전의 사람들은 잠재의식 속에서 이런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아예 믿지 않았으며,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비밀리에 마법이 공유되었다고.
그러고 보면 꽤 오래전에 아돌프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들 중에, 방금 이것과도 관련된 평행우주에 얽힌 한 가지 재미난 일화가 있었다. 우주의 삼라만상을 모두 통달하고 있는 관음존자답게 가끔 그의 얘기는 마치 별게 아닌 것처럼 들려도 알고 보면 꽤 핵심을 짚어내는 경우가 많았다.
‘……때때로 네가 머릿속에서 품는 어떤 병신 같은 생각이나 상상들이 모두 존재하고 있는 우주가 있어. 그것들은 네가 생각함과 동시에 다른 평행우주에서 생겨나지. 그리고 그 병신 같은 상상들이 실제로 네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바로 너의 잠재의식이 그러한 생각들을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기에 비로소 네가 사는 우주에서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 뿐이야.’
‘상상이라는 그 말 자체가 애초부터 실제로는 일어나기가 힘든 일 아닙니까.’
아돌프가 내 얼굴을 말끄러미 응시하며 자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입술을 좌우로 찢었다.
‘그래. 네가 아주 어렸을 때 허구한 날 이불 속에 처박혀서 했을 법한, 바로 날 죽이는 상상 같은 거 말이야. 그것 역시 네 잠재의식에서 날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거라고 미리 단정 짓고서 현재의식에 불가능이라는 못을 박아뒀기 때문에 한낱 망상으로 그쳤겠지만, 어쩌면 다른 곳에서는 네가 진짜로 날 죽이게 되는 우주가 존재할지도 몰라.’
불리할 때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최고였다.
‘이걸 달리 말해보자면 정신병자의 망상은 이곳 물리계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쳐.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들 주변에서 꽤 신기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거 알고 있냐? 왜냐하면 미친놈들은 생각 자체가 완전 단순하거든. 그러니 자신의 생각이나 상상을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진짜 현실이라고 강력하게 믿기 때문에 잠재의식과의 친밀성이 남들보다 배 이상 높거든. 그렇기에 역사에서는 많은 미친놈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세상도 같이 미쳐 돌아갔단 말이지.’
나 역시 아돌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 그래서 지금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하고 말이다.
관음존자의 본명인 아돌프는 내가 듣기로는 대종말 이전에 전 세계적으로 큰 전쟁을 일으켰던 아주 유명한 독재자의 명칭에서 직접 따왔다고 들었다. 그 사람도 미쳤었는진 알 수 없지만,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작은 생각 하나가 마치 나비 효과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을 보면 정말로 생각의 힘이라는 것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성질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이 뭘 어떻게 해봐도 뾰족한 수가 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무슨 생각을 해도 결국엔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쳐서 낙담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을 까먹는 것도 아까워 죽겠는데 유리로 덮인 돔 안에 갇혀버려서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니 마음이 갑갑해서 돌아가실 노릇이었다.
이건 마치 누군가 일부러 우리의 발을 묶어놓기 위해 함정에 빠트린 듯한…….
“현아, 내 말 듣고 있냐? 야! 정신 차려!”
아우 깜짝이야. 정신을 차려보니 파오 놈이 내 눈앞에서 뭐라뭐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옆에서 사람이 암만 불러도 대답을 안 하냐?”
“잠시 관음존자가 예전에 했던 말들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관음존자? 그 자식 생각은 뭐 하러 해.”
“남이야 뭔 생각을 하든지 그쪽이 무슨 상관입니까.”
“하긴, 너한테야 관음존자가 양날의 검 같은 존재일 테니까.”
파오는 오늘따라 부쩍 기운이 넘치는지 우리 주변을 뽈뽈거리며 잘도 돌아다니는 오조를 슬쩍 곁눈질하면서 눈치도 없이 내 아픈 구석을 쿡쿡 찔러댔다.
“원수와 은인이 동일 인물인 경우가 극히 드물긴 하지.”
“…….”
“솔직히 나 같으면 너란 놈 그냥 밖에다 내다버릴 정도로 예전의 너는 진짜 쓸모없었어. 그런 너를 여태껏 살려두며 그나마 사람 구실하게 만들어놨으니 아무쪼록 굉장한 은인이긴 한데, 따지고 보면 네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만든 당사자인 만큼 이건 무슨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수준이긴 하네.”
“부탁인데 그 입 좀 닥쳐주십시오.”
“……너까지 걱정 안 해줘도 관음존자는 지금쯤 네 생각 할 여력도 없이 아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을 거야.”
마치 지가 뭐라도 알고 있는 양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파오의 허풍에 지친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서 심지어 백기까지 흔들었다.
“자꾸 이상한 헛소리 할 거면 출구 찾는 일에나 총력을 기울여주십시오. 관음존자라면 수정궁에서 두 다리 뻗고서 잘 먹고 잘 자고 있을 텐데 걱정은 무슨 놈의 걱정입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의외로 자기가 귀여워하던 강아지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지금쯤 뜬눈으로 밤잠을 못 이루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시비라도 걸고 싶으신 거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습니다.”
오늘따라 파오 자식이 유독 짜증 나게 굴었다. 놈이 능글맞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치더니 거의 나에게만 들릴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그냥 내 생각이지만 사실 아돌프 새끼의 약점은 네가 아닐까 싶어.
너 오늘 약이라도 먹었냐. 내가 마음의 소리로 쏘아붙였지만 당연히 내 마음의 소리인 만큼 놈에게 전해지진 않았다.
최근 들어서 다시 컨디션이 좀 괜찮아졌는지 아까부터 오조가 뭉글이도 없이 지팡이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그만 파오의 등에 콩 부딪치고 말았다. 파오가 등을 돌렸다가 자기와 부딪친 상대가 오조인 걸 알고는 그냥 말없이 무시해버렸다.
이곳에서 기갑 괴물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그날, 오조의 고백 이후로 우리 중 누구도 그때의 얘기를 다시 입 밖에 꺼내려 드는 사람이 없었다. 아침이 되면 쉽고 간편하게 야채 만두를 쪄 먹었고 계란부침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손우경과 파오가 별것도 아닌 문제로 말싸움을 하거나 오조가 뭉글이의 등이 아닌 침대에서 잠을 자면서 간혹 오늘처럼 출구를 찾는 일에 손수 따라 나서곤 했다.
그나마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파오가 예전에 비해서 이제 오조에게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것뿐, 모든 것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먼 곳까지 정찰을 나갔었던 손우경이 고층 건물 위에서 뛰어내려 정확히 우리 눈앞으로 착지했다. 오조가 그걸 보더니 살짝 멋있게 느껴졌는지 자기도 꼭 해보고 싶다고 지팡이를 붕붕 흔들어댔다. 하지만 이윽고 손우경이 시큰거리는 표정으로 잠시 자기 발목을 감싸 쥐는 것을 보더니 그 입을 싹 다물었다.
어쨌거나 정찰을 다녀온 손우경이 입을 열었다.
“나도 이게 내 기분 탓이면 좋겠지만 이 도시에서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져.”
“뭐?”
파오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의심하듯 바라봤지만 손우경은 꽤 심각했다.
“파오 사형, 혹시 사막에서 우릴 따라붙던 놈들 기억나?”
“어? 그놈들은 갑자기 왜.”
“아마 한 놈 정도가 이 도시에 함께 숨어든 것 같은데 그때의 그 녀석들이랑 추적하는 방식이 거의 흡사해서.”
“근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냐? 미행하는 수법이 다 거기서 거기지.”
“여긴 지난번 오조가 그 역겨운 놈들을 전부 처리하기 직전까진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이 아니었어. 그러니 방금 전에 내가 느꼈던 그 기척은 바로 우릴 쫓아서 이 도시에 따라 들어온 거라고밖엔 생각할 수 없어. 일단 그 자식을 찾아내서 여기서 나가는 출구가 어디인지를 물어봐야겠어.”
“내가 우리 애들 시켜서 한번 찾아내볼까? 나랑 계약된 소환수들 중에는 후각 기능이 엄청 발달한 녀석이 있거든.”
새끼 여우의 낭랑한 목소리에 우리 셋 다 동시에 고개가 돌아갔다. 오조가 지팡이 끝으로 소환진을 그리려던 찰나에 제일 빠르게 움직인 것은 놀랍게도 파오였다. 오조의 두 다리가 허공으로 둥둥 떴다. 우리 중에서 가장 장신인 파오가 안 그래도 키가 작달막한 오조의 멱살을 덥석 그러쥔 것이었다.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작작 해라, 좀.”
파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오조의 눈이 다소 놀란 토끼 눈처럼 변했다.
“왜, 왜 그래?”
“소환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앞으로 소환의 소 자라도 꺼내면 네 자식 남은 시간이 오년이든 오개월이든 간에 내 손에 먼저 뒈질 줄 알아.”
파오가 오조 주변에서 넌지시 대기 타고 있던 뭉글이와 서비터들을 힐끗 노려보더니 더 난폭하게 윽박질렀다.
“저것들도 있던 곳으로 다 돌려보내고 앞으론 니 두 다리로만 걸어 다녀.”
멱살이 잡힌 채 들려 있던 오조가 파오에게 자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왜 화를 내지?”
“…….”
“설마 나를 걱정해서 그러는 거라면 당신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던가?”
그 말에 파오가 오조를 바닥으로 휙 내팽개치며 험상궂은 눈빛으로 새끼 여우를 경멸하듯이 내려다봤다. 결국 파오는 오조에게 등을 돌리고 자기 혼자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 근처에 있던 손우경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새끼 여우의 한쪽 팔을 붙잡아 자리에서 바로 일으켜 세워줬지만, 오조는 그새 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하반신이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조의 파란 눈동자가 거리 끝으로 점점 사라져가는 파오의 뒷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중이었다. 갑자기 놈의 하얀 두 뺨이 새빨간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새끼 여우는 양팔을 파닥거리며 자기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였으나 녀석보다 더 당황해버린 것은 나였다.
이런 상황에서 불현듯 발동해버린 나의 귀신같은 직감이 무언의 외침을 질러대고 있었다. 새끼 여우야, 설마하니 너…….
* * *
내가 잘라낸 녀석의 한쪽 팔에서 피가 물 흐르듯이 쏟아졌다. 그 과정에서 나도 약간의 외상을 입긴 했으나 저것에 비하면 그래도 약과였다. 궁지에 몰린 남자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다가 뒷문으로 도망치려고 들었다. 구태여 붙잡지 않고서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래봤자 결계 때문에 문 자체가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을 테니 어차피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밖이라면 모를까, 내가 미리 설정해둔 이 무형 결계 안에선 설령 이 기술을 내게 직접 전수해준 관음존자라 할지라도 쉽사리 빠져나가긴 어려웠다. 그러니 놈은 이미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남은 외팔로 몇 차례나 문고리를 당겨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 헛손질만 실컷 하고선 결국엔 벽에 등을 딱 붙인 채로 나를 향해 온갖 저주와 악담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다 제풀에 꺾여 이제야 통성명을 요구했다.
“너, 넌 누구냐!”
“내가 누구든지 간에. 근데 거기 눈깔은 폼으로 달려 있나 보지.”
“서, 설마…….”
언령으로 만들어낸 무형결계의 효력은 한정적인 제약이 걸려 있을수록 그 효과가 커진다. 그리고 시간이 짧을수록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된다.
내가 이 결계 안에 걸어둔 제약은 오직 하나.
결계의 주인인 나를 제외하고서 ‘겁에 질린 자’는 여기서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다.
그리고 시간제한은 탁자 위에 놓인 저 촛불이 다 타들어가기 전까지.
내가 방을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결계에 대한 강력한 제약이 발동했다.
사지 중 한 부분을 잃고 방금 내 가슴팍에 달려 있는 아돌프의 표식까지 보게 된 저 남자가 과연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서 이 방의 결계를 뚫고 빠져나가게 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어쨌든 다른 놈들 같았으면 되든 안 되든 일단 싸움부터 걸어왔을 텐데 지금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떠는 저 꼴을 보니 안타깝게도 잔챙이인 듯 보였다. 평상시에도 이와 같은 상황에 잘 단련된 내 직감이 말하길, 오늘도 큰 수확은 없을 것이다.
제기랄, 공연히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네.
“관음존자 밑에서 더러운 졸개 노릇이나 하고 있는 이 배알도 없는 자식아! 너희가 그런 천인공노할 짓들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얼마 안 가서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천벌이 내려질 것이다!”
“불만이 있으면 나 같은 말단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총책임자인 아돌프한테 찾아가서 직접 얘기해보든가.”
잠까지 줄여가며 외근을 뛰는 와중에 남의 불평불만까지 들어줄 마음은 없었다. 나는 금강저를 단단히 쥐고서 남자의 목을 겨누었다.
“……그보다 일단은 네 걱정부터 하는 게 어때?”
방금 전 놈의 팔뚝을 단숨에 잘라낸 날카로운 그 부분이 목젖을 금방이라도 뚫을 듯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있었다.
“아까 너도 졸지에 이곳에 갇혀버렸다고 했으니 그럼 너 말고 다른 쥐새끼들은 어느 곳에 꼭꼭 숨었는지 털어놔봐. 그럼 그 성의를 봐서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죽여줄게.”
내 비열한 제안에 되돌아온 것은 고작 경멸 어린 시선과 함께 내 얼굴로 퉷 뱉어진 침뿐이었다. 게다가 일부러 웃는 낯으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꼴을 당한 걸로 봐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은 이로써 명백한 거짓임이 밝혀졌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협상은 완벽히 결렬되었다. 결론적으로 놈이 죽는다는 사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이왕이면 좀 더 창의성 넘치는 대사를 해줄 수 없는 걸까. 아니, 누가 불교 신자들 아니랄까 봐 꼭 이런 상황이 올 때면 모두 하나같이 지옥을 운운하다니.
쓴웃음을 지으며 얼굴에서 흐르는 액체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내 진심 어린 제안을 상대방이 거부했으니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아침 일찍 미리 써두었던 환살幻殺 부적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두 손가락 끝에 살짝 걸린 부적을 아무 주저 없이 남자 이마의 정중앙에 박았다.
부적은 정확히 인당혈에 꽂혔다. 사람의 정신 세계를 주관하는 아즈나 차크라와 영안이 위치한 자리이니만큼 부적의 파장과 일치하게 된 남자의 동공이 급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두 눈에 비치는 것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흉측하게 생긴, 자신보다 거대한 독거미일 것이다. 털이 북슬북슬하게 난 여덟 개의 새카만 다리가 남자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갔다. 사람 머리통만 한 여섯 개의 섬뜩한 홑눈이 남자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곧이어 거미의 징그러운 다리가 남자의 몸통을 촘촘히 감싸더니, 이빨 구실을 하는 큰 턱이 단번에 그의 연약한 가슴살로 독니를 덥석 밀어 넣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그 순간 남자가 절규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이미 껍데기가 파헤쳐진 가슴으로 거미가 남자의 붉은 심장을 탐욕스럽게 물어뜯었다. 남자는 자신의 심장이 거미에 의해 잔인하게 씹혀 삼켜지는 것을 죽는 순간까지도 똑똑하게 지켜봐야 했다.
물론 그런 그의 환각과는 다르게 실제로 그의 심장을 뚫어버린 것은 나의 왼손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심장마비로 죽을 확률이 높지만 일처리는 모쪼록 깔끔하게 끝내자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가슴에 깊숙하게 찔러 넣은 왼손이 방금 죽어버린 시체의 체온으로 인해 뜨겁게 달궈졌다. 스르륵 손을 빼내는데 안에 고여 있는 피가 울컥거리며 줄줄 흘러내렸다.
피로 빨갛게 물들어버린 손을 잠시 동안 내려다보다가 방 안에 걸려 있던 하얀색 커튼에 쓱 문질러 닦았다. 그래도 여간해선 피 냄새가 잘 사라지지 않았다. 심장이 꿰뚫린 채 벽에 기대앉아 죽은 남자는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이라도 본 것처럼 여전히 넋이 심하게 나간 표정이었다.
촛농이 탁자 위로 잔뜩 눌러 붙은 백랍의 불빛을 입으로 후 불어서 껐다. 결계에 걸려 있던 시간제한이 사라졌으니 이제 겁에 질린 영혼이 이 방 안에서 온전하게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손을 모아 넋을 기리는 합장을 한 다음, 방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 * *
임시 숙소가 마련된 폐허도시의 낡은 건물로 돌아왔다. 대종말 이후로 전력 공급이 끊긴 승강기가 입구를 훤히 내보인 채 그 안에 지저분한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 층간마다 촘촘히 쳐진 거미줄은 굳이 환살 부적을 쓰지 않아도 어디서 돌연변이 거미 하나쯤은 당연히 튀어나올 법한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얼굴로 자꾸 귀찮게 달라붙는 가느다란 거미줄의 흔적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내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온몸이 불쾌한 피 냄새에 절어 있었지만 씻는 건 고사하고 어서 잠이나 자고 싶었다. 비록 예전처럼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자처해서 손에 피를 묻히고 온 기분이 그리 좋을 리가 만무했다. 뽀얀 먼지와 적막한 어둠이 동시에 내려앉은 이 어두컴컴한 방 안에는, 내가 며칠 전 아래층에서 힘들게 지고 올라온 침대 하나가 덜렁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내가 전혀 갖다놓지 않은 물건까지 덤으로 얹혀 있었다.
나는 피곤에 젖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꺼져. 지금 너랑 상대할 기분 아니야.”
침대에 모로 길게 누워서 팔로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우경은 내 말에 대꾸조차 안 했다. 아까 분명히 다른 방들마다 전부 잠이 든 걸 확인하고 나왔었는데 대체 이 야심한 시각에 이자식이 내 방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결계를 치느라 없는 체력까지 전부 끌어다 쓴 판에 이놈과 다시 무의미한 실랑이를 벌이기엔 나는 이미 지나치게 피곤했고 인내심마저 바닥나 있었다.
별로 내키진 않지만 정공법을 쓸 수밖에.
“제발 부탁인데, 여기서 나가주라. 나 정말 피곤해.”
꿈쩍도 안 하고서 어둠 속에서 날 올려다보는 눈초리에 놈의 심중을 읽어내기란 영 까다로웠다. 그래도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녀석이 내 침대 위에서 물러날 생각이 절대로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기껏 힘들게 마련해둔 내 푹신한 침대가 아깝지만 일단은 포기하고서 옆 칸에 위치한 녀석의 거처로 가기 위해 몸을 빙글 틀었다.
그래, 네가 정 가기 싫다면 내가 움직이는 수밖에.
그러나 돌아서려던 몸이 왼팔부터 단단하게 휘어잡혔다. 누구의 소행인지야 뻔하니 아예 돌아보지도 않고서 팔을 뿌리치고 나가려는데 놈이 나를 침대 위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자신의 넓은 품속에 날 꽉 욱여넣고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손우경은 붙잡고 있던 내 왼쪽 손목을 자기 입술로 당겨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전혀 뜻밖의 행동에 온몸이 얼어붙어버린 내가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자, 녀석이 손안에 쥐고 있던 내 왼손에다가 집중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내 손가락에 일일이 입을 맞추는 것이 무슨 영역 표시라도 되는 양, 그 행위 자체에 여느 때보다도 큰 공을 들였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그것도 내 ‘왼손’에다가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손우경은 뒤에서 나를 꼭 껴안고서 목덜미에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놈이 내 귓가에 대고 저음의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여왔다.
‘난 네 냄새가 좋더라.’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같이 나른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피 냄새가 나는데도 이상하게 달콤해.’
녀석은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지금 내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간파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금세 복잡해져갔다. 그런 혼란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이 혓바닥으로 내 뺨 언저리를 핥았다. 혀가 닿는 위치가 쓰라려왔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 아까 상처가 난 듯했다.
‘누가 그랬어?’
대답을 하지 않았더니 손우경이 계속해서 상처가 난 자리를 아프도록 핥아댔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말랑거리는 혀끝이 들어갈 때마다 저절로 내 목에서 아픔을 참아내는 소리가 났다. 아프니까 이제 그만하라고 몸을 뒤틀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아프라고 하는 거야.’
벌을 주듯 내 얼굴을 계속 할짝거리는 녀석에게 반항할 힘도 없었다. 오늘도 설마 손우경에게 이 상태로 안긴 채 새벽을 보내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동안 잦은 노숙으로 지쳐 있던 몸이 간만에 맛보게 된 침대 쿠션에 취해서인지 솔직히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다. 비록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녀석의 손길이 부드러웠지만 절대로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심신이 무척 피로한 상태고, 그리고……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나를 손우경은 평소와는 달리 아무런 변태 짓도 하지 않고서 그저 말없이 안고만 있었다. 녀석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 몰래 놀러 나갈 때마다 바깥에서 남자 원혼 같은 거 달고 들어올 생각이라면 질투 나니까 그만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늑함에 잠시 방심했던 차에 손우경의 그 말을 듣자 온몸의 세포들이 화들짝 놀라 모두 깨어난 듯했다.
‘문 앞에서 심장과 팔 한쪽이 없는 남자가 널 아주 무섭게 쳐다보고 있어.’
텅 비어 있는 문 앞보다 왠지 머리 뒤에서 가깝게 들려오는 손우경의 말소리가 지금은 더 무섭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방 안에서 한기가 느껴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불쑥 다가와서 자신의 남은 원한을 나에게 쏟아부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살펴봐도 정말로 문 앞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그런 내 눈가를 손바닥으로 완전히 가리면서 다시 은밀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내 허락 없이는 너한테 아무 짓도 못해.’
날 불안하게 하는 것도, 그리고 다시 안심시켜주는 것도. 생각해보면 언제나 이 녀석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끝에 간신히 붙들고 있던 정신줄을 놓고서, 칠흑같이 어둡고도 외로운 잠의 세상 속으로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 * *
처음엔 질 나쁜 가위에라도 눌린 줄 알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더니 손가락 하나조차도 까딱할 수 없었다. 몸 곳곳이 납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혼미해진 머리로 어떻게든 제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으나 그럴수록 깊은 늪에서 내 몸을 쭉쭉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완전히 헤어 나올 수 없는 무기력한 느낌이 들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한 이질감에 치를 떨면서도 도저히 자력으론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가 불가능했다. 얼굴이 화상을 입은 것도 아닌데 고열이 올라서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얜 언제부터 이렇게 됐어?”
파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새벽부터.”
그리고 손우경.
초점이 흐릿해진 눈을 힘겹게 떠보니 파오가 내 상태를 들여다보며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왜들 저러는 거지.
“명칭은 나도 확실하게 모르겠는데 발열 속도나 피부색이 변하는 걸로 봐서는 대충 어떤 종류의 독인지는 알겠어.”
“많이 위험한 건가.”
“보니까 팔 쪽에 칼로 스친 자국이 있던데 언제 생긴 건진 잘 모르겠지만 저 부위에서부터 색이 짙게 변하고 있는 걸로 봐선 아마도 거기가 원인인 것 같다. 이건 시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절지동물의 싸구려 합성 독이야. 가격이 저렴한데다 효과까지 확실히 보장해주지. 대신 잘 알려진 독이니만큼 해독제도 많아. 의원에게 바로 보이고서 약을 처방받아 며칠 푹 쉬면 아마도 싹 나을 테지만, 단지 그러려면 우선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빠져나갈 방법부터 찾아야겠지.”
독이라고? 내가 지금…… 독에 당했단 말인가. 어디에서, 대체 어떤 순간에? 아무리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보려고 해도 머리가 온통 산란해진 터라 현재로는 그 어떤 실마리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럼 삼장은…… 이제 죽는 거야?”
이번엔 우물거리는 오조의 목소리였다. 조심스럽게 묻는 새끼 여우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조가 걸핏하면 풀이 죽는 음성으로 자기 혼자 중얼거렸다.
“그럼 안 되는데. 삼장이 죽으면 밥은 누가 해주지.”
이런 몸 상태로도 순간 극도의 배신감이 치밀어 오르는 걸 보면 정말 죽을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몸은 여전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만 파오가 어쩐 일인지 오조의 그 말에 무심하게 대꾸해주고 있었다.
“당장 죽을 정돈 아니지만 이대로 놔두면 어디 하나 병신이 되거나 하겠지.”
“……방법이 아예 없는 거야?”
내 귓가로 아주 간간이 들려오는 무미건조한 저음. 불쾌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조금은 애가 타는 것 같기도 했다.
“글쎄다, 전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흡정법 비슷한 걸 사용한다면 모를까.”
“흡정법?”
“간단히 말해서 섹스를 통해서 상대방의 정기를 빨아들이는 방중술의 일종이야. 돈 많은 늙은이들이 어린 계집애들하고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조금씩 회춘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지.”
“…….”
“현이는 어릴 적부터 하도 선천적으로 허약하게 태어난 녀석이라 별거 아닌 독이라도 현재로선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어. 그동안 미우나 고우나 관음존자의 가피가 있었으니 그나마 이 정도로 멀쩡하게 돌아다녔던 거지, 어렸을 때에는 사나흘이 멀다 하고 툭하면 픽픽 쓰러졌다고.”
“관음존자의 가피라고?”
오락가락하는 정신머리로도 내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여실히 느껴졌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최선의 방법은 일단 의사한테 현 상태를 보이는 거니 여기서 탈출구를 찾을 때까지는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시켜줘야 돼. 지금은 독 기운이 몸 전체에 퍼져 있으니 흡정법을 시도할 교합자가 이 녀석의 탁한 기를 빨아들여서 독을 중화시키고, 다시 자신의 기를 불어넣어주는 방법이 차선책이야. 물론 그러려면 몸 안에 상당한 내공을 갖춰야 하고, 독에 당한 사람과 위험한 교접을 벌일 만한 정신 나간 지원자가 있어야겠지. 어설프게 흡정법을 사용했다간 오히려 기력을 빨려서 죽게 되니까. 그러니 세상에 그럴 만한 미친놈이 어디 있겠…….”
왜 갑자기 조용해지지.
잠시 후, 파오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 하나 있구나, 여기.”
* * *
적당히 차가운 손이 기분 좋은 온도로 얼굴에 와 닿았다. 여전히 내 몸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간신히 벌려 뜬 눈꺼풀만이 지금 내 웃옷 단추를 벗겨내고 있는 어느 누군가를 포착하고 있을 뿐이었다.
건…… 드리지 마…….
쉬어서 갈라진 목소리가 나 스스로도 끔찍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 저항도 못하는 나에게서 손우경은 마치 인형 옷을 벗겨내듯이 아무 스스럼없이 내 옷가지들을 들어냈다.
싫… 어……. 하지 마…….
“이제 와서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손우경은 껍질을 전부 벗겨낸 내 알몸뚱이 등을 받쳐서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녀석이 자꾸만 기운 없이 꼬꾸라지는 내 고개를 똑바로 부여잡고 눈을 맞춰가며 얘기했다.
“지금부터 네 배 속에다가 내 정이랑 기운을 불어 넣을 거야. 어쩌면 중화 과정 중에 많이 아플 수도 있어.”
아무 대답도 못하고 가쁜 숨만 내쉬고 있자 놈이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더니 뚜껑을 열고 내 입으로 가져다대었다.
“마셔.”
건조하게 타들어가는 입속으로 액체가 억지로 흘러들어왔지만 아예 삼키지도 못하고 줄줄 흘러내리기만 했다. 손우경은 병에 든 액체를 자기 입에 전부 털어 넣더니 이윽고 내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사납게 입을 맞춰왔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자 목이 뒤로 젖혀지며 녀석의 혀와 함께 액체가 목구멍으로 흘러들어왔다. 혀로 목젖을 자극해서 입안에 든 액체를 강제로 삼키게 만들더니 내가 거의 다 삼킬 때쯤 돼서야 손우경은 입을 떼었다.
“파오 사형이 말하길 자기 자신을 잃을 정도로 강력한 미약이라고 하더군. 예전에 하룻밤 상대랑 화끈하고 뒤탈 없이 즐기기 좋았던 약이라고.”
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두 눈을 흐리멍덩하게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한계치에 달해 있었다.
“넌 겉보기만으로는 자존심이 세니까.”
손우경이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혀주며 덧붙였다.
“내가 이제부터 너한테 할 짓을 아예 기억 못하는 게 나을 거야.”
모으고 있던 두 다리가 양옆으로 갈라지는 장면이 눈에 비쳤다.
싫어……. 싫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나는 앵무새처럼 계속 그 말만을 반복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몸을 끼운 손우경이 달래듯이 내 얼굴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얘기했다.
……괜찮아, 오늘은 네가 기분 좋게끔 박아줄게.
굳이 독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를 옭아매듯 내려다보는 그 서늘한 눈빛에 나는 마치 무서운 덫에라도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지금만은 꼭 손우경이 다른 사람같이 낯설게 느껴졌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나는 겁에 질린 어린아이처럼 턱 끝을 벌벌 떨어댔다. 놈이 웃는 얼굴로 내게 말을 걸고 있었음에도 그 안에 흉포한 야수가 숨겨져 당장이라도 내 목을 거칠게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몸 상태가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감각만은 더 예민해져갔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손우경이 뭔가 화가 났다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의 다리가 이렇게까지 크게 벌어질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사타구니와 두 다리를 잇는 뼈가 한계로 벌어져서 금방이라도 아작이 날 듯 아파왔다. 놈이 내 다리 사이로 끈끈한 액체를 부어서 손가락으로 구멍 안을 갈무리하며 촉촉이 적셔댔다.
그다음엔 녀석의 뜨거운 불기둥을 내 안으로 천천히 찔러 넣었다.
푸욱.
촘촘하게 오므라들어 있던 항문이 강제로 넓혀지면서 놈의 거대한 것을 탐욕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손우경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게 싫지가 않았다. 녀석이 자기 것을 뿌리 끝까지 전부 밀어 넣고 내 두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친 뒤, 내 위로 배를 맞대고 미끄러졌다. 배 속이 뻥 뚫려버린 기분이었다. 놈의 두 어깨로 올라간 다리를 내가 바르작거리며 떨자 손우경이 내 콧잔등에 키스를 해주고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어주었다.
“내 인형.”
내가 손우경의 입술로 밭은 숨을 색색 내쉬었다.
“지금 네 안에 들어와 있는 이 느낌을 잘 기억해둬. 이제부터 그곳으로 네가 움직일 수 있도록 내 기운을 직접 나눠줄 거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말의 진위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려 했지만 손우경이 너무 키스를 잘해서인지 놈의 입술을 빠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녀석의 입안이 너무 달았다. 그 말캉한 혀끝이 내 입속을 다정하게 휘저어댔다. 게다가 입안이 건조해져서 그런지 흥건하게 적셔오는 손우경의 타액을 마치 감로처럼 꿀꺽꿀꺽 삼켜대고 있었다.
놈의 목에다가 팔을 두르고 싶었는데 몸에 너무 기운이 없어서 움직이질 못했다. 그런데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내 안을 깊숙하게 파고든 이 남자가 날 좀 더 강하게 껴안아주고 어서 허리를 거칠게 움직여주길 바랐다.
그러던 중 내장 안에서 뭔가 묵직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손우경이 키스만으로도 흥분했는지 내 안에서 또 여의봉을 키우고 있었다. 아이라도 밴 것처럼 배 속이 미어터질 듯했다. 위장이라도 뚫어버릴 듯한 그 길이는 차치하고서라도 두께가 너무 심하게 불어나서 녀석의 성기를 꽉 물고 있던 내 항문이 금세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배 안쪽에 파스를 바른 듯한 싸한 느낌이 전해졌다가 별안간 내 밑구멍으로 생체 기운이 쭉쭉 빨려 나가는 거센 흐름이 일어났다.
하으읏! 흐흣!
내가 아픔이 뒤섞인 묘한 신음 소리를 내자 손우경이 몸을 살짝 떼어내며 낮게 속삭였다.
“일단 네 안에서 나쁜 기운부터 뽑아내는 중이니까 아프더라도 조금만 참아.”
발가락 끝을 마구 오므리며 몸 안에서 전해지는 통증들을 조금이라도 견뎌내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살점들이 쑤셔오고 뼈 마디마디가 전부 저려왔다. 배 속에서 폭탄이라도 터졌는지 그 안이 쉴 새 없이 들끓었다. 빠른 속도로 자라나는 손우경의 여의봉은 과장을 보태서 거의 내 목구멍까지 닿을 기세였다. 놈에게 수치스러운 모양새로 아래가 꿰뚫린 채, 허벅지가 바들바들 흔들리며 가슴은 초라하게 헐떡거렸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말이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놈에게 끝없이 사정하며 뭔가를 연신 빌어대고 있었다.
……줄여줘!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줄여줘!
입가로 침이 줄줄 흐르고 전신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손우경은 그런 내 몸을 더 움직이지 못하게 꽉 붙들며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만행을 멈추지 않았다.
“잠에서 깨고 나면 네가 지금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도 모를 거야.”
아파! 너무 아프단 말야!
“쉬잇. 현아, 착하지?”
손우경은 내 허리 아래로 두 손을 집어넣어 나를 자신의 품으로 들어 올린 다음 하던 일을 마저 이어나갔다. 나는 놈에게 안겨서 계속 아프다며 소란을 피웠다. 온몸에서 내장을 통해 항문 밖으로 빨려 나가는 이상한 기운과 뼈 마디마디가 끊어지는 격한 고통을 함께 느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땀으로 온통 젖어버린 내 몸에서 드디어 손우경이 쑥 빠져나갔다. 침대에 나를 눕혀놓고 손우경 또한 한동안 움직이질 않았다. 시야가 흐릿해진 터라 놈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몸의 기력이 전부 쇠한 것처럼 모든 신경이 무감각해져갔지만 그럼에도 난데없이 강한 추위가 느껴져서 턱 끝을 덜덜 떨었다.
……손우경, 나 좀 어떻게 해줘.
손가락을 간신히 움직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더듬자 잠시 후에 누군가 내 손을 잡으며 조용하게 그 말문을 열었다.
“……너 진짜로 감당이 안 된다.”
손우경의 목소리였다. 커다란 손바닥이 이마를 쓸어 넘겨주다가 내가 추위에 떠는 것을 깨닫자마자 녀석의 알몸이 내 몸에 따뜻한 체온을 겹쳤다. 그 몸이 너무 따뜻해서 꼭 끌어안고 숨을 거칠게 내쉬자 손우경이 조곤조곤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뭘 어떻게 하냐니. 나 너무 추워. 네가 날 어떻게 좀 해봐.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지만 놈은 이미 다 알아들은 듯한 답변을 건네주었다.
“이게 너한텐 마지막 기회인데 정말로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마지막 기회가 무슨 말이냐구.
“네 안에 다시 넣게 되면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해.”
뺨을 부비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간지러워.
목덜미를 쪽쪽 빨아대던 입술이 쇄골을 가볍게 물더니 어느새 유두로 내려가 그곳을 솜씨 좋게 핥아댔다. 자기 입에 닿는 곳이라면 무조건 키스하거나 빨아대면서 꼭 자신만의 영역 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온갖 정성을 다 들였다. 그래도 추위에 벌벌 떨던 몸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손우경이 내 사타구니를 열이 나도록 세게 문지르며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녀석이 고환과 뿌리 끝을 한 번에 말아 쥐었는데 뭔가 내 전체를 한 손에 틀어잡고서 위협을 가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내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니라 협박이라도 하듯 밑에서 날 꽉 쥐고 손장난을 치는 손우경에게 더듬더듬 입술을 벌렸다.
……해, 해줘어.
“뭘 해줄까?”
해줘……. 안아줘…….
“지금 몸으로 안아주고 있잖아. 정확히 뭘 어떻게 안아달라는 거야?”
저번처럼…… 안아줘…….
“저번처럼? 그땐 싫은데 나한테 억지로 안겼던 거 아니었어?”
비록 왔다 갔다 하는 희미한 정신 상태였지만 지금 손우경이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을 빌미로 상당히 짓궂은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다. 그럼에도 나는 지극히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지금 하는 말들은 전부 내 자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야……. 싫지 않았어…….
손우경이 손가락으로 내 회음부를 꾹꾹 짓누르며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말도 잘 듣고 참 착해.”
회음부를 뭉개듯이 문지르자 아래쪽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발기된 성기한 아랫배까지 바짝 직립해 있었다. 좀 더 강렬하게 눌러줬으면 좋겠지만 놈은 그곳을 세게 누를 듯하다가도 손에서 힘을 빼고 내가 다시 애가 탈 때쯤 되면 강도를 높여주며 연달아 나를 괴롭혀댔다.
싫어. 거기 그만해…….
“더 만져달라고 니 스스로 다리까지 벌리고 있으면서 그만하라니.”
싫단 말야…….
내가 거의 울 지경이 되자 손우경이 회음부를 희롱하던 것을 그만두고는 내 몸을 거꾸로 뒤집더니 뒤에 올라타며 귀에 대고서 말했다.
“독에다가 미약까지 섞였더니 애기가 다 됐네. 뭐 이것도 귀엽지만 난 평소처럼 무표정한 네 모습이 더 좋아. 그런 주제에 박아주기만 하면 요부처럼 변하는 게 제법 자극이 되니까.”
엉덩이가 물건처럼 좌우로 벌어졌다.
“어쨌거나 선택은 다 네가 한 거야.”
다시 차가운 액체가 엉덩이 안으로 꾸물꾸물 흘러들어갔다. 그 후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거대한 살집이 내 허리를 들어 올린 후 벌어진 구멍 안으로 삽입을 시도했다. 엉덩이 바로 윗부분의 움푹 들어간 허리 부분이 어떤 익숙한 기대감에 의해서 저절로 활처럼 휘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방금 전에 놈이 나에게 했던 어떤 행위들로 인해 내 몸 전체가 상당히 수축된 상태였다. 손우경이 목에서 살짝 힘든 소리까지 내가며 아까보다 더 퍽퍽해진 내부로 옹골지게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기분 탓인지 놈의 성기는 아까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느껴졌다.
귀두를 시작으로 해서 몸 안으로 뿌리 끝까지 미끄러져 들어오자 내 등줄기로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접때 여의봉의 신성한 힘은 주인의 기분을 상대방에게도 똑같이 느끼게 해준다고 들었었지만, 사실 그런 것보단 이미 내 안에서 놈의 그것을 여태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기껍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철퍽 소리를 내며 내 엉덩이에 놈의 치골이 세게 부닥쳤다. 엎드린 상태에서 속절없이 밑으로 쏠려 있던 내 고환 위로 손우경의 불알이 마주 튕겨졌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실제로 직접 보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들에서 소리나 다른 감각에 의해 상상력이 자극되는 것이 더 야하게 다가왔다. 두꺼운 힘줄이 정력적으로 돋아난 놈의 거대한 좆이 내 엉덩이를 퍽퍽 찔러 올리고 있는 장면들을 머리에 떠올리자 사타구니가 금세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때 귓가에 어느 억센 힘에 의해 천이 북북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내 눈가에 길고 가느다란 천이 드리워졌고 내 머리 뒤편으로 매듭이 묶였다. 그다음엔 손우경이 내 양쪽 손목을 허리 뒤로 가져가더니 역시나 같은 천을 사용해 두 손목을 한데 묶어버렸다. 팔로 몸을 지탱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턱으로 납작하게 엎드려 불가항력적인 타인의 힘에 의해 엉덩이를 더 높게 치켜 올렸다.
“지금부턴 내 정을 너에게 불어넣는 과정이야. 탁한 것을 빼내던 것과는 달리 이번엔 내 기운 자체가 어쩌면 너에게 잘 안 맞을 수도 있으니 네가 날 받아들이는 순간들에 하나하나 최대한 집중해야 돼. 물론 네 눈 말고 손까지 묶어버린 건 반쯤 내 취향이기도 하고.”
눈이 보이질 않으니 정말 몸의 모든 오감과 감각이 내 엉덩이에 처박혀 있는 손우경의 좆으로만 쏠려갔다. 이런 자세 자체도 몹시 굴욕적이었지만 팔까지 못 움직이니 사람이 되게 수동적으로 변하는 느낌이라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손우경이 허리를 살살 돌리며 내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려댔다. 그때마다 항문이 움찔거리며 손우경의 좆을 꽉꽉 조여댔다. 놈의 목에서 기분 좋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생긴 건 더럽게 멀쩡하게 생겨가지곤 진짜 변태 같은 녀석이었다. 내가 어쩌다가 저런 놈한테 걸려가지고.
“그럼 뒤로만 느껴봐.”
녀석이 허리를 힘차게 쳐올렸다. 정말 아까와는 다르게 황소처럼 드센 기운이 내부로 마구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신비한 여의봉이 장착된 손우경의 성기는 단순히 나의 내장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으로도 놈과 똑같은 느낌을 동시에 전해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녀석 고유의 기운까지 섞여 들어오니 그 황홀하고 야릇한 느낌에 도저히 허리 아래가 견뎌내질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삽입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 놈은 항상 그러하듯 내 애를 바짝 태우는 것이 주목적이었기에 일부러 날 가지고 노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치고 빠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천에 가려진 시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서 내장을 쓱쓱 비벼대는 손우경의 좆 모양과 크기가 더욱 적나라하게 상상되었다. 그러다 자기 좆 냄새를 맡게 하려고 두툼한 성기 끝을 내 얼굴에 들이댔던 일전의 기억마저 떠올랐다.
그렇게 비단 감각에만 의지하지 않고 상상력이 보태지자, 내 머리에서는 스스로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찾아내어 마치 내가 누군가에게 억지로 겁간당하는 듯한 상황극을 만들어냈다.
손우경이 저속한 대사를 내뱉으며 나를 무참히 희롱할 때마다 실은 더한 쾌감을 느끼며 열심히 허리를 흔들어대는 나였다. 이젠 몸 안에서 쑥쑥 자라나는 손우경의 여의봉이 아주 당연하게도 나와 한 몸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하읏, 우, 우경아. 니 꺼 너무 크고 딱딱해.
내 끙끙 앓는 소리에 손우경이 뒤에서 날 확 껴안으며 허리를 더 사정없이 쳐대더니 숨 가쁘게 말했다.
“하아, 얘 진짜 미치겠네.”
놈이 내 머리카락을 잡아채서 고개를 옆으로 꺾은 다음에 진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둘 다 쉬지 않고 하반신을 연신 부벼댔지만 달라붙은 입은 잠시도 떼지 않았다.
놈이 어렵사리 자기 입을 떼어내자 내 입은 또 머리를 전혀 거치지 않고서 멋대로 혀를 놀려댔다.
……좀만 더 안아줘, 더 세게.
그리고 손우경이 폭발하듯 내게로 달려들었다.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손우경에게 안겨야 했다. 내가 입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놈이 건네주는 미약과 함께 손우경의 정액이 전부였다. 전부 다 세세하게 기억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 외에도 큼직한 불알을 입에 덥석 물거나 거의 사정하기 직전인 놈의 귀두를 억지로 빨아주는 일들이 잦았다.
나한테 새로운 체위와 이상한 짓들을 요구하고 내가 그것들을 하나씩 행할 때마다 손우경은 착하다며 입술에 키스를 해주었다. 짐승 주제에 자기가 나를 길들이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런데 그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녀석이 내 왼손을 장장 몇 시간에 걸쳐 끈질기게 애무하더니 뭔가 이상한 짓들을 벌였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거의 다 섹스 도중에 내가 놈에게 아랫도리를 뻥뻥 꿰뚫리며 정신 못 차릴 때 했던 짓이라 아주 자세하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불같았던 시간, 놈이 어둠 속에서 은회색 눈동자를 잔인하게 내리뜨며 내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들이 불완전하게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 모든 걸 그 자식이 전부 훔쳐갔으니 너는 내가 갖겠어.’
나를 갖겠다니.
그 후로는 모든 것이 암전이었다.
* * *
“내가 며칠이나 잤어?”
오조가 손가락을 구구 꼽다가 문득 날 째려봤다. 아, 미안, 너 숫자 셀 줄 모르지.
그런 새끼 여우가 내 가방을 막 뒤지더니, 그 안에서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를 찾아내어 내 침대 머리맡까지 가져왔다. 그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이제야 간신히 기운을 차린 나에게 당장 밥을 내놓으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함부로 거두는 것이 아니라더니. 근데 얜 머리가 백금발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갔어?”
“우경이는 출구 찾는다고 아침 일찍부터 나갔고 그 사람은…… 나도 어디 갔는지 잘 몰라. 말 안 해줬어.”
손우경은 우경이라고 칭하면서도 설마 여태까지 파오의 이름을 몰랐던 것은 아닐 텐데 구태여 그 사람이라고 얼버무리는 새끼 여우가 많이 수상쩍었지만 그냥 내버려뒀다. 뭐, 새침해진 눈매가 살짝 귀엽긴 했다.
오조가 내 배를 탁탁 만지며 또 이상한 말을 꺼냈다.
“이제 아가 생기는 거 맞지?”
“뭐?”
“우경이가 백번이라고 했는데, 그 정도면 백번 아냐? 엄청 많이 했잖아.”
“……너 똑바로 말해. 여기서 갑자기 백번이 왜 튀어나오는지.”
오조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동안 내 방문을 열고서 파오가 들어왔다. 내가 파오에게 방금 전에 내가 들었던 말들을 해명해달라는 눈초리를 쏘아 보냈지만 놈은 좀 겸연쩍은 얼굴로 나와 오조를 멀뚱히 볼 뿐이었다. 그리고 오조는 파오를 보더니 여자보다 더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는 문밖으로 도망가듯 얼른 빠져나가버렸다.
근데 너, 쟤 앞에서 그딴 쑥스러운 표정은 왜 짓는 거니, 이 새끼 여우야. 만에 하나 내 짐작이 정말로 맞는 거라면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내가 그 꼴만은 절대 못 본다.
그나저나 내가 잠들었던 요 며칠 사이에 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누가 제발 좀 알려주세요…….
파오가 방 안으로 들어와 나와는 가급적 떨어진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더니 큼큼 하고 어색한 목소리를 냈다.
“몸은 좀 어때?”
“몸이 어떠냐고 물어도 지금으로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보다 제가 왜 계속 잠을 자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설마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거냐? 아님 안 나는 척하는 거냐? 한번 기절했다가 다시 일어나면 기억을 아예 못하는 게 여기 유행인가 보지.”
오조에 이어 나까지 똑같은 소릴 하니 꽤 답답한가 보다. 어쨌든 파오는 날 떠보는 듯한 눈빛으로 이리저리 얼굴을 훑어보다가 이내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밤낮으로 그렇게 시끄럽게 굴고도 네 성격에 날 보고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걸 보면 기억을 못한다가 진짜 정답이겠네.”
“밤낮으로 시끄럽게…….”
“너 며칠 전에 우리 몰래 밤늦게 ‘외출’했었지? 외출에서 돌아오고 나서 누군가에게 독으로 당했는지 넌 한동안 완전히 인사불성이었어. 그렇게 며칠 동안 아예 정신도 못 차리다가 이제야 제정신이 들어서 깨어난 거구.”
“제가…… 독에 당했었다고요?”
며칠간의 기억들이 머리에서 흐릿하긴 해도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을 따라붙었다는 미행자 녀석을 색출하러 갔던 과정만은 생생하게 떠올랐다. 독이라니.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놈을 궁지에 모는 과정에서 약간의 외상을 입었던 건 분명하지만, 그 녀석이 품이나 주머니에 몰래 숨겨두었던 칼이나 다른 무기를 꺼낸 것이 아닌, 그저 날 피해 다니던 과정 중에 손에 잡히는 아무 물건이나 마구 던져댔기에 아주 불가피하게 입었던 부상이었다.
몇 번을 다시 떠올려봐도 그 겁쟁이 남자가 당시 내게 독을 쓸 만한 기지가 있었으리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 대체 독은 웬 말이고 나한테 독을 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거기에 도움을 주진 못할망정 파오가 처치 곤란인 시한폭탄 하나를 내게로 던져버렸다.
“독에 당했는데 니가 왜 멀쩡하게 살아 있는지는 안 궁금하냐?”
“살아 있으니 된 거 아닙니까.”
“아니, 손우경이야.”
거기서 왜 손우경의 이름이 나오지.
“손우경이 사흘 밤낮으로 흡정법을 통해서 네 몸에 퍼진 독과 탁한 기를 뽑아내고 다시 자기 정기를 나눠줘서 지금 네가 기적같이 살아났어. 원래대로라면 필히 의원한테 보여야 될 만큼 위급하던 상태였는데 그놈이 확실히 대단하긴 대단한가 봐.”
“흡정법이라면…….”
파오가 한쪽 손의 손가락을 둥글게 말고서 다른 손의 손가락 두 개를 그 말아 쥔 구멍 안으로 퍽퍽 쑤셔 넣는 저질스러운 동작을 취하며 희게 웃었다.
“뭐 결과적으로 봤을 땐 그런 거지.”
“……손우경, 지금 어딨습니까.”
“방금 전에 요 앞에서 나랑 만나서 같이 건물로 들어왔는데 아마 자기 숙소에 가 있을 거야.”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가려는데 순간 허리로 강한 통증이 일었다. 다리가 비틀거리며 무릎마저 휘청거렸다. 하지만 파오 앞에서 더는 추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겨우겨우 문 앞까지 걸어갔는데 놈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내 발목을 붙잡았다.
“야! 너, 잠깐만 기다려봐.”
“또 뭡니까.”
“설마 우경이한테 가서 아무 의식도 없었던 나를 상대로 무슨 짓을 벌인 거냐고 따져 물을 작정이라면, 너 당장 이 침대로 돌아와서 잠이나 더 처자. 그 자식이 십여 년도 넘게 봐온 친동생 같은 너한테 그런 짓을 한 건 나도 그다지 마음에 안 차지만, 니가 아무리 성격이 못돼처먹은 놈이라도 상대방한테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어.”
“…….”
“네가 손우경이 무슨 엄청난 괴물쯤 되는가 보다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파오가 처음으로 연장자다운 면모를 보였다.
“독으로 죽어가는 상대에게 흡정법을 시도하는 일은 거의 자기 목숨을 내걸어야만 할 수 있는 짓이야. 겉으로 별로 티는 안 내도 지금쯤 속으로 내상 입은 게 아마 장난 아닐 거야. 그리고 나였으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것도 고작 너 같은 놈을 위해서 그딴 미친 짓은 안 해.”
“…….”
“내 말이 무슨 얘기냐면, 네가 혼자서 감당해야 할 고통까지도 걔가 전부 독박 썼다는 그 말이다.”
문을 열자 상반신을 탈의한 채 저 혼자 몸에 붕대를 감고 있던 손우경이 날 귀신 보듯이 바라봤다. 그러다가 또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돌변해서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했다.
“안녕. 네가 세 다리로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걸 보니까 왠지 감회가 새롭네.”
사막에서부터 이어지던 그놈의 세 다리 타령. 하지만 녀석의 그을린 피부 곳곳에는 울긋불긋한 독들이 피어올라서 언뜻 보기엔 화상을 입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놈이 자기 몸에서 차마 눈을 못 떼는 나에게 턱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좀 도와줄래.”
몸에 엉성하게 두른 붕대 끝을 내밀며 손우경이 도움을 요청했다.
놈을 일단 의자에 앉히고서 이건 대체 또 어디서 구해 왔는지 비상 구급 약통에 들어 있는 약들과 붕대를 들고 녀석의 등에 나 있는 상처들부터 치료했다. 툭툭 불거지는 힘줄로 엮인 근육에서 비록 힘찬 기운이 느껴졌으나 이미 녀석의 피부 자체는 눈 뜨고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나는 고르게 잡힌 손우경의 등 근육 위로 껍질이 벗겨지고 짓무른 부분들을 찾아 꼼꼼하게 약을 발라주었다.
근데 독 때문에도 이런 긁힌 자국 같은 게 나나.
솜에 빨간 소독약을 묻혀 핀셋으로 날개뼈 부근에 양쪽으로 죽죽 난 자국들을 문질러주는데 손우경이 첨언을 했다.
“현아, 미안한데 그 손톱자국은 다 네가 낸 거니까 책임감을 갖고 좀 살살 해줄래.”
그 말에 책임감을 갖고서 빨리 나으라고 핀셋에 힘을 주어 박박 문질러주었다. 손우경이 엄살을 부리며 일부러 아픈 소리를 냈다.
“야아, 뭘 또 부끄러워하고 그래. 다 니가 만든 흔적인데.”
입을 꽉 다물고서 묵묵히 등의 상처를 치료하다가 놈의 가슴 쪽으로 넘어가게 되자 정말 암만 나 같은 놈이라도 한마디쯤은 입을 열어야 될 것 같았다.
“……너 나한테, 목숨 같은 거 걸지 마.”
그러자 의자에 앉아 있던 손우경이 내 허리를 불쑥 껴안았다. 이거 놔. 너한테 바른 소독약이 내 옷에 다 묻잖아…….
“네가 키스해주면 다 나을 것 같아.”
내 허리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더니 킥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게 아님 좀 이따가 내 등에 다시 손톱자국이라도 내주든가.”
등 말고 지금 당장 얼굴은 안 되겠나 싶었다.
쉬어가는 페이지 4 <아돌프>
★ 하루라도 널 괴롭히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처음엔 저게 제정신인가 싶었다.
사실 집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작은 애새끼 하나가 불당 밑에 납작 엎드려 내가 저지르는 모든 일들을 숨죽인 채 전부 지켜보고 있다는 것쯤은 진즉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라고.
이 집 안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들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겁과 고통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사람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는 언제 들어도 즐거웠다.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이야말로 언제나 나에게 커다란 에너지를 부여했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빌어대는 구질구질한 소리들만 아니라면 여기에 한껏 유쾌해진 내 기분을 해칠 만한 구석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무얼 하러 왔었는지, 혹은 반란에 가담하려 들었던 여기 집주인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도 이미 다 잊어버렸다. 상관없었다. 그저 인간을 무차별로 사냥하는 쾌감만이 내 전신을 지독한 흥분으로 들끓게 만들었으니까.
같잖게도 감히 나를 상대해보려던 남자들을 먼저 죽이고서 그다음엔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져버려서 몹시 시끄럽게 울어대는 여자들을 차례대로 죽였다. 평소 같았으면 단순히 머리통을 박살 내는 정도로 그쳤을 텐데, 반란에 가담한 자들은 항시 타인에게 큰 본보기를 보여야 함으로 나도 실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몸 안의 혈관들을 전부 터트리자 사람의 모든 구멍에서 마치 분수처럼 피가 뿜어 나왔다. 그런다고 한들 숨이 곧장 끊어지는 것은 아니니 죽음의 달콤한 여운을 천천히 느껴보라고 바닥에 쓰러진 수많은 산송장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다만 이 집주인의 경우엔 부러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식욕을 돋우는 애피타이저가 끝났으니 그 메인 디시는 더욱더 기대해볼 만했다. 남자는 자신의 부인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여자를 감싸 안으며 나에게서 도망치려 들었으나, 나는 기문파공으로 아래 공간의 층을 나눠서 남자의 발목을 싹둑 잘라버렸다.
그러자 여자가 새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다음은 손가락을 자르고, 손목을 자르고, 팔목을 자르고, 어깨를 자르고. 남은 하체도 이와 마찬가지로 몸이 굽어지는 마디를 하나하나 손수 잘라주었다. 몸통과 목만 남은 남편을 끌어안고서 여자가 미친 것처럼 절규했다. 그게 너무 시끄러워서 여자를 완전히 반으로 갈라버렸더니 이번엔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숨이 붙어 있었던 남자 쪽에서 눈과 입으로 피를 토해가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 구역질나는 광경에 슬그머니 불쾌감이 치밀어서 슬슬 전부 다 끝내야겠다고 마음먹던 차였다. 이 모든 쇼를 관람하라고 친절하게 어린 관객까지 한 명 살려두었으니 이제는 그 구경 값도 받아내야 했다.
나는 애새끼가 몰래 숨어 있던 불당을 기문파공의 전격 파동을 통해 산산조각으로 부수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소리 죽여 울고 있던 그것은 성별이 확실치가 않았다. 하지만 꽤나 잘 차려입은 차림새와 피로 물든 몸뚱이를 부둥켜안고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던 저 두 남녀에게서 결코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니 아마 저것들의 핏줄이었던 모양이다.
저벅저벅 걸어가서 그 애새끼의 이마에 손바닥을 뻗었다. 애비를 잘못 둔 죄가 크지만 마지막 배려로 고통 없이 한 번에 머리를 터트려줄 테니 잘 가라.
그때였다.
내 손바닥으로 쉴 새 없이 부들거리는 작은 손가락이 겹쳐져왔다. 얼마나 몸을 떨어대는지 내 손을 통해 그 전율이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오히려 안 그래도 짜증이 나 있던 차에 내 불쾌감을 더 가중시킬 뿐이었다. 양손으로 내 손을 꼭 부여쥔 그 애새끼가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입으로 가느다란 숨을 토해내며 입술을 움직였다.
제…… 발…… 살려만…… 주세요…….
눈물로 범벅된 그 겁에 질린 눈동자는 여태껏 내가 봐왔던 그 어떤 것들보다 일품이었다.
내가 저런 걸 왜 살려뒀었지.
진짜로 기억이 안 난다. 왜냐하면 저건 정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특별히 마나의 그릇이 크다거나 기의 운용이 빨라서 몸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타입도 아닌데다, 무엇보다도 체력 자체가 전혀 받쳐주질 않으니 사나흘이 멀다 하고 자리에서 끙끙 앓아눕기 일쑤였다.
내가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이제 그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천애고아가 됐으니 저 험난한 바깥세상에 나가면 아마 만 하루도 못 가 픽 죽어버릴 듯한 나약한 생명체였다. 사실 세 번이나 아랫것들을 시켜서 먼 곳에다가 내다버리고 왔는데, 그때마다 악착같이 이곳 티뷸라 궁으로 돌아와서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인 나에게 통사정을 하며 자꾸 성가시게 매달렸다.
그리고 이번이 바로 그 세 번째였다.
체력이 허약하여 호흡조차 잘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든 내게 반드시 도움이 되겠다며 제발 옆에만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저 버러지 같은 게. 정말이지 기도 안 차는군. 아예 신경을 끄고서 어제부터 읽고 있었던 책을 들춰보는데 내 옆에서 시끄럽게 앵앵거리던 소음이 뚝 멎어버렸다.
한참 후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 녀석이 바닥에 엎어져서 기절해 있었다. 지난번에 갖다버린 곳보다 훨씬 더 먼 곳이었는데 이 추위 속에서 맨발로 여기까지 걸어오다니. 다른 건 몰라도 살고자 하는 의지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그것에게 다가가서 몸 안에서 미세하게 흐르고 있는 맥을 짚어보니 기의 흐름 자체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이건 애초에 태어나기를 선천적으로 이렇게 타고난 것이었다. 주요 혈자리가 전부 꽉꽉 막혀 있는데다가 현재 몸 상태까지 밑바닥인데도 용케도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때 기절한 줄 알았던 그 버러지가 내 옷자락을 덥석 붙잡았다. 다른 곳은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내 옷자락만은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것의 손가락을 거칠게 떼어내려다가 어쩐지 그 작은 손으로 시선이 갔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고작해야 내 손의 삼분의 이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크기였다.
대체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버러지의 손을 통해서 아주 조금이나마 내 기운을 나눠주었다. 죽은 시체들보다 더 안색이 나빴던 버러지의 얼굴에 조금씩 정상인의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가 아니면 죽어버리는 생명체. 그야말로 온실 속의 화초였다.
물을 줘가며 돌봐주지 않으면 금세 죽어버릴 테니까.
“언제 그렇게 손이 자랐지.”
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날 이상하게 쳐다봤다.
“손이라뇨.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너 손이 자랐잖아. 처음엔 이거보다 훨씬 작았는데.”
“그게 대체 몇 년 전 얘기를…….”
녀석이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서 감히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는 얼른 안면을 바꾸고선 말했다. 내 밑에 있는 동안 늘어난 거라곤 눈치뿐이었다.
“그야 사람이 나이 듦에 따라서 몸도 함께 성장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항상 아래쪽에서 나를 올려다보던 눈높이가 어느새 엇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와 있었다. 내가 픽 웃으며 놈에게 얘기했다.
“만에 하나 네가 내 눈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날 내려다보는 날엔 네 다리를 잘라서라도 원상태로 만들어주지.”
“……대체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녀석이 수련장에서 나가고 난 뒤, 나는 성장이 멈추어버린 내 몸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손바닥을 가만히 펼쳐보았다.
‘그야 사람이 나이 듦에 따라서 몸도 함께 성장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인간의 성장 속도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빨랐으며 그해 겨울이 지나 이듬해 봄엔, 드디어 버러지가 내 신장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물론 놈의 길어진 다리를 번뇌의 숫자인 108번 정도는 잘라보기 위해서 다각도로 시도해봤으나 그러기엔 이미 버러지의 머리가 너무 굵어져버린 게 큰 문제였다.
* * *
“관음존자님! 관음존자님!”
내 전속으로 시중을 드는 비구니들 중 어느 하나가 날 부르는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뭐야.”
“아니, 지금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이렇게 넋을 놓고 계시면 어떡합니까. 이 결재 서류에 어서 사인을 해주셔야 저희도 퇴근을 하고 저녁 예불이라도 드리러 갈 것 아닙니까?”
왠지 사인이고 뭐고 다 귀찮아져서 나는 팔짱을 끼고서 고자세를 유지했다.
“요새 내가 왜 이렇게 무료해졌는지 누구 설명해볼 사람.”
그러자 내 곁에서 나를 가장 오랫동안 보필해온 한 비구니가 그 답을 제시해주었다.
“제가 봤을 땐 관음존자님의 하루 일과들 중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왔던 삼장법사님 엿 먹이기가 벌써 몇 달째 사라졌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사실 업무 보시는 것보다 더 열심히 하셨는데 말입니다.”
다른 비구니들도 그 말에 모두 수긍한다는 얼굴로 자기들끼리 연신 쑥덕거렸다.
“그런가.”
“네, 충분히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불러들일 수도 없잖아. 다른 놈을 보낼 수도 없고.”
“네. 저의 소견으로도 그런 번거롭고 짜증 나는 명령에 아무 군말 없이 따를 만한 분은 제가 아는 한 아마 삼장법사님밖에 안 계실 겁니다. 저였으면 탈영을 했거나 사표를 냈겠지요.”
나는 한 손으로 귀찮은 비구니들을 전부 물리고는 수정궁 내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내 침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괴롭힐 사람이 사라졌다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뭐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무릇 꿈이란 것은 타인의 정신에 가장 쉽게 접속할 수 있는 편리한 매개체였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집어삼키며 온돌로 따끈하게 덥혀져 있는 내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잠시라도 체온이 떨어지면 곤란하다.
어쨌거나 오늘의 꿈자리는 조금 바빠질 것 같았다.
쉬어가는 페이지 4 <아돌프> 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