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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GO BACK

-현아, 여기에 숨어서 절대 나오면 안 돼!

어머니가 나를 집 안에 안치된 불당 밑에 다급하게 밀어 넣고는 정작 자신은 숨을 곳을 찾지 못해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이윽고 사람들이 질러대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내 고막이 찢어질 듯이 울려 퍼졌다. 양손으로 귀를 꽉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아봐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 되지는 않았다.

부처님, 현이가 어젯밤에 경전을 읽지 않고 자서, 저, 정말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밤낮으로 예불도 열심히 드릴 테니 제발 이 무서운 상황에서 누가 좀…….

-네 이름 같은 건 관심 없어.

차갑게 내뱉어진 목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가로질렀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어머니와 함께 도망치려던 아버지의 두 발목이 순식간에 잘려나가는 그 장면을 목격한 다음부터. 그 후로 이어지는 모든 순간들이 마치 꿈과 같이 느껴졌다.

그래, 이건 꿈이야……. 꿈…….

아버지의 열 손가락이 피를 흩뿌리며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이어서 손목이 절단 나고 팔목, 어깨, 그리고 다리 순으로 너무 쉽게 토막나버렸다. 어머니가 몸통만 남은 아버지를 끌어안고는 비참하게 통곡하셨다. 울음을 참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봐도 눈물샘이 고장나버렸는지 내 눈에서 쉬지 않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손으로 입까지 틀어막고서 우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목에서 나오는 끅끅거리는 소리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검은색으로 도배된 그자가 내 어머니에게로 다가가 가만히 손을 뻗는다.

내 어머니의 몸이 절반으로 쪼개져 떨어졌다. 어머니의 뼈와 내장이 정확히 둘로 쩌억 나뉘어서 바닥에 두 갈래로 누워버렸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 도저히 사람이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내 어머니의 고깃덩어리였다. 아버지가 몸통만 남은 채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내 몸의 모든 세포들이 정지하고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때 나를 숨겨주었던 불당이 어떤 미지의 힘에 의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그 검은 남자가 나에게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는 내 어머니가 반으로 쪼개지던 찰나의 순간이 수십 차례나 반복되고 있었다.

시,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살려줘!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울지 차마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절대 그런 식으로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어느새 부모님을 눈앞에서 잔인하게 찢어 죽인 남자가 내 이마에 자신의 하얀 손을 얹었다.

그 순간만은 그가 부모의 원수라는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오직 하나.

그저 이 지옥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제…… 발…… 살려만…… 주세요…….

어디서 나온 용기였는지 남자의 손을 붙잡으며 나는 살기 위해서 처절하게 애걸했다.

그러자 붉은색을 띠는 요기 어린 눈동자가 싸늘한 빛을 머금고서 나를 천천히 내려다봤다.

하아하아.

새벽녘에 악몽을 꿨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그때의 꿈을 단 한 번도 꾼 적이 없었는데 확실히 요즘 들어 내 잠자리가 뒤숭숭하긴 한 모양이었다. 내가 지난번 독에 당한 다음부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내 침대에서 같이 자고 있는 손우경이 자다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난 나 때문에 같이 눈을 떠버렸다.

“왜 그래.”

놈이 몸을 일으켜서 거칠게 호흡하고 있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손바닥으로 뺨을 툭툭 때렸다. 마음이 통 진정되지가 않았다. 꿈에서 어머니가 몸이 어떻게 갈라졌더라. 아버지는 또……. 계속 정신을 못 차리고서 거칠게 숨만 몰아쉬고 있자 손우경이 또 제멋대로 날 껴안고는 진정할 때까지 등을 토닥이며 어루만져주었다.

손우경의 가슴에서 놈의 살갗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어왔다. 흉터와 자잘한 상처가 많은 몸이었지만 놈의 냄새가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손우경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턱을 잡아 올리더니 눈을 맞춰왔다.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데.”

“……만약에…… 사람 몸이…… 반으로 갈라지게 되면 얼마나 아플 거 같아……?”

녀석이 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거랑 비슷한 경험이라면 너한테도 하게 해줬던 것 같은데.”

“……됐어. 더 이상 말을 말자.”

놈에게서 떨어져 등을 돌린 채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손우경도 침대에 드러누워 내 몸에 팔을 둘러서 꽉 껴안았다. 이제 독 치료도 다 끝났으니 그만 자기 방에 돌아가서 잤으면 좋겠는데 진짜 성가셔서 죽을 지경이었다. 누구와 같이 잔다는 걸 생각해본 역사가 없었는데 놈이 자꾸 이런 식이라서 몹시 곤란했다. 난방이 안 되는 서늘한 방에서 혹시라도 내가 추울까 봐 자기 팔로 따뜻하게 껴안아주는 것도 싫었고, 잠들기 직전까지 뺨이랑 목덜미에 부드럽게 키스를 해주는 것도 너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눈을 감고 있으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내 입가를 더듬어 오는 놈의 입술에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제발, 이러지 마.

* * *

일행들도 이제 다들 지쳐가는 눈치였다. 우리가 맨 처음에 돔 안으로 들어왔던 그 입구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어떻게 또 다른 출입구가 하나도 없을 수 있지.

그동안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한 다른 방도들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우선 손우경이 기문파공으로 유리 돔 전체를 박살 내는 동안, 내가 밑에서 방어 결계를 쳐서 그 안에서 다른 일행들과 함께 다치지 않도록 대기를 타고 있는 거다. 그 후 하늘에서 유리 파편이 전부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면 그 즉시 결계를 해제한 다음, 다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아주 얇은 유리판으로 둘러싸인 듯해 보이는 이 반원구의 돔은 실제로는 그 두께가 어마어마할 뿐만 아니라, 자칫 어느 한곳이라도 잘못 건드렸다간 하늘에서 장장 몇 십 미터짜리 유리 파편이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대참사를 겪게 될 수도 있었다.

손우경도 그리 말했다. 너희가 결계에 있는 동안 난 어쩌라고? 내가 유리 조각에 사정없이 찔려서 사망하는 모습을 그 안에서 가만히 구경하고 있을래?

돔을 깨부수는 건 정말 만일의 경우까지 대비해서 아껴뒀다가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실행하자고 입을 모았다. 물론 손우경 빼고 우리 셋만.

그 밖의 의견으로는 손우경이 기문파공으로 다른 차원의 공간을 열어서 탈출하거나(이건 반대쪽 출구의 시간 조절을 할 수 없어서 상당히 위험하다고 함) 혹은 손우경이 돔의 중앙부를 기문파공으로 뚫은 다음에 우리 셋을 길어지는 여의봉에 태운 뒤 재빨리 바깥으로 탈출한다거나, 그 밖에도 모두 손우경, 손우경, 손우경이었다.

와, 니네 여태껏 손우경 없이 어떻게 살았냐. 물론 그 의견의 대다수를 거의 내가 내긴 했지만.

몇 주 동안이나 한꺼번에 몰아서 자더니만 요즘엔 수면 시간이 그나마 정상적으로 변한 오조는 계속 도시에만 갇혀 있어서인지 부쩍 심심해진 눈치였다.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뭐 주워 먹을 건덕지라도 있나 열심히 살펴댔지만 나도 녀석과 놀아줄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삼장, 우리가 밥 언제 먹었었지?”

“입가에 묻은 만두용 당면이나 떼고 말해라.”

오조가 혀끝으로 입가에 묻어 있던 당면을 떼려고 안간힘을 쓰는 꼴을 보다 못해 손가락으로 떼어주자 새끼 여우가 그런 나를 곰곰이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떼어주는 건 별로 아무렇지도 않은데.”

“뭐가?”

“네가 떼어주는 건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뭐가 아무렇지도 않냐구.”

“……우경이한테도 한번 해보라고 해야겠다.”

오조가 내 손끝에 묻어 있던 당면을 가져가서 다시 자기 볼에 붙이고는 얼른 손우경에게로 뛰어갔다. 마침 쇠파이프로 건물 쇼윈도를 부수며 안쪽에 걸려 있던 옷들을 빼내고 있던 도둑놈 1(손우경, 24세? 전직 죄수 출신)과 도둑놈 2(파오, 32세, 전직 천봉대원수 출신)가 그런 오조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우경아, 나 빨리 이것 좀 떼어줘.”

해맑게 볼에 붙은 당면을 떼어달라고 보채는 오조를 보며 황당해하는 손우경 대신에 파오가 몹시 고뇌하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슬픈 심경을 토로했다.

“나 니네랑 같이 있다 보면 내가 꼭 성적 소수자가 되어가는 느낌이야. 너랑 현이만으로도 벅찬데 왜 얘까지 난리야.”

옆에서 듣고 있다 보니 정말 어이가 없네. 어째서 결백한 나까지 손우경과 도매금으로 취급하는 거지? 난 완전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남자라고. 워낙 이성 자체에 관심이 없다 보니 비록 이 나이 먹도록 여자 손목도 잡아보기는커녕 연애 한 번을 못해봤지만, 그건 내가 늘 부처님만을 생각하는 불심 가득한 불자이다 보니 남들처럼 세속적인 것에 빠질 여유가…… 아,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각한데.

내가 종단의 쭉쭉빵빵했던 비구니 누나들을 떠올리며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는 동안, 손우경이 오조의 당면을 손가락으로 툭 걷어내며 파오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해두고 내일은 저 뒤편으로 넘어가보자.”

이건 출입구를 찾자는 얘기가 아니었다. 두 놈 다 어깨에 걸린 짐 가방에 뭘 그렇게 많이 쓸어 담았는지 차마 두 눈 뜨고 못 봐줄 정도였다. 손우경과 낄낄거리며 싹쓸이가 끝난 쇼윈도에서 철수하던 파오가 그 근처에 멍하니 서 있던 오조에게 짧게 아는 척을 했다.

“칠칠맞게 입에다가 뭘 자꾸 묻히고 다녀.”

파오와 손우경이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서 그 뒤에 혼자 남겨진 우리 새끼 여우의 넋이 나간 표정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만 내 가슴이 찢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려왔다.

* * *

-갖다버리고 와.

온몸이 아파서 정신을 차리기도 힘든 와중에도 관음존자의 낮은 목소리만은 내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장정 하나가 내 몸을 이불째로 둘둘 말아서 자루에 담았다.

-지난번과 지지난번에도 결국엔 다 자기 발로 되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이 ‘척살부’로 보내시면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그 말에 아돌프가 뭐라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잔뜩 혼미해진 정신머리로는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눈덩이 속에 푹 파묻혀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자루에서 꺼낸 다음 친절하게도 이불째로 버려줬는지라 그나마 몸을 둘러싸고 있는 솜이불 한 장이 내 체온을 아슬아슬하게 유지시켜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일년 중에 절반 이상 폭설이 내리는 포타라카의 오늘 같은 험악한 날씨로는 아마 저녁이 되기도 전에 동사할 확률이 높았다.

추운 걸로도 모자라 배까지 너무 고파왔다. 기운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눈가로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결국 이런 식으로 얼어 죽나 싶어서 공연히 비참해졌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악귀 같은 남자가 여태껏 나를 살려둔 것만으로도 큰 이변이자 신기에 가까운 일들이었다.

집안 형편이 나쁘지 않아 개인 주치의를 따로 뒀을 만큼 윤택한 환경을 타고났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너무 허약해서 하루 동안 챙겨 먹는 약의 종류만도 수십 가지에 달했던 나였다. 그런 애물단지 같은 나를 그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인 남자가 계속해서 두고 볼 거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던 변덕은 이제 그 끝을 예고해주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의 나는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천애고아 신세였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런 고통도 없이 죽을 수 있을까.

문득 부모님이 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억울하게 비명횡사하신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자, 뼛속까지 모조리 얼어붙어서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던 나에게 살아야겠다는 강한 의지력이 싹텄다.

결코 아돌프에게 절치부심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심. 내가 아직까지 가보지 못한 그 미지의 영역 깊은 곳에서, 고약하게 뿜어 나오는 지독한 죽음의 향기가 점차 내 정신을 마비시키고 끝내 마음까지도 비겁하게 굴복시켰다. 부모님이 살해당했던 그때의 순간들이 내 머릿속에 불에 달군 듯이 각인되어 나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겁쟁이로 만들어버렸다.

그것이 설령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대체 어디에서 무슨 힘이 나왔는지 일단 나를 둘둘 감싸고 있었던 이불 안에서 몸을 있는 대로 뒤틀어가며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다음엔 내 몸에 쌓여 있던 눈을 양손으로 정신없이 헤치고 나와 어쩌면 내 무덤이 됐을지도 몰랐던 그 장소에서 아주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첩첩산중이었다. 눈 안에서 몸을 덮어주고 있던 이불이 사라지자 가장 먼저 혹독한 추위가 무방비 상태의 나를 급습했다.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잘 모르겠는데 당장 눈앞에 하얗게 펼쳐지는 그 장대한 산맥의 광경은 어린 나에게 아무런 자비심도 베풀어주지 않았다.

게다가 얼마나 먼 곳에다가 버렸는지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오로지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자락들만이 나를 반겨줄 뿐이었다. 맨발로 눈밭 위에 선 지 채 한 시간이 되지 않아 동상에 걸렸는지 발이 갑자기 너무 시리고 아파왔다. 그 고통은 그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왔던 나에게는 도무지 견뎌내기 어려운 신체적 아픔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었다. 새빨갛게 부어올라 추위에 돌덩이처럼 단단해진 내 발을 꼭 부여잡고서 이대로 그냥 다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에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 울면 울수록 그런 내 처지가 무척이나 기구하고도 서러웠다. 내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아무 걱정 없이 살았던 행복한 지난날들이 떠올라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죽을 순 없다는 생각이 나를 꼭두각시처럼 끝없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공기 중으로 뽀얀 입김을 내뱉으며 나는 계속해서 걷고 또 걸어갔다.

몇 날 며칠 동안 아무런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한 몸에서 이미 한계에 달한 위험 신호를 계속 보내왔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엔 먼저 다리 힘이 풀려와 눈밭에 털썩 쓰러져버렸다. 추위에 손가락이 곱아서 제대로 펴지지도 않는 주제에 나는 그 손으로 살기 위해 악착같이 눈을 퍼 먹었다. 눈물이 전부 말라붙은 줄로만 알았는데 내 목구멍으로 차가운 눈이 녹아 들어갈 때마다 두 눈에서 뜨거운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순백의 나라 포타라카.

그곳에서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티뷸라 궁이 저 먼발치에서 반드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느새 살아야겠다는 의지보다도 붉은 눈동자를 가진 그 남자를 꼭 다시 만나야 한다는 일념만이 나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아니,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 남자의 곁이라는 사실을.

포타라카 산맥의 한복판에서 기적같이 다시 살아 돌아온 후로는 관음존자가 아랫사람들에게 지시하여 나에게 방 하나를 따로 마련해주었다. 모두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며 뒤에서 쑥덕거렸다. 그야 다른 이도 아니고 바로 아돌프였다. 일단은 반역자의 아들이자 심지어 온종일 방 안에 누워서만 지내는 나였다. 그런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데다가 특별 취급까지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궁 안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관음존자는 방 안에서 숨만 붙은 채로 누워 있는 나를 매일같이 찾아와서 내 왼손을 통해 자신의 기운을 나눠주었다. 그가 나에게 그런 과정을 꼭 다섯 번째로 이행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관음존자는 일견 어려 보이는 외견이지만 굉장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표정이 거의 없고 피부색도 창백했다. 그리고 그의 성격처럼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결벽적인 분위기를 가진 얼굴이었다.

내가 이불 안에서 말똥말똥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걸 눈치챈 관음존자가 내 왼손으로 기운을 주입해주던 걸 마저 끝내고는 차가운 눈매로 날 힐끔 내려다보았다.

-현玄이라고 했나. 이름처럼 눈동자가 굉장히 검군.

-…….

-이런 날씨에 여기까진 어떻게 걸어왔지?

대답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이불 안으로 몸을 더 웅크리고 들어가자 관음존자가 지나가는 투로 중얼거렸다.

-추운 건 딱 질색이야.

윤기가 흐르고 촉감이 보드라워 보이는 하얀 털, 관음존자의 퍼 코트가 퍽 따뜻해 보였다. 실내에서도 저런 것을 걸치고 다니는 걸 보니 그는 아마도 추운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때 아돌프가 나를 쓱 돌아보며 입술을 기묘하게 비틀어 올렸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방금 너에게 엄청난 얘기를 들려준 거 알고 있어?

* * *

에취!

목감기라도 들었는지 간질간질하던 목에서 결국엔 재채기가 툭 튀어나왔다. 워낙 잔병치레가 잦았던 어린 시절에야 감기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친한 사이로 지냈었지만, 관음존자에게서 정기적으로 기운을 나눠받은 후로는 간혹 체력적으로 말썽을 부리는 것만 빼면 나도 그럭저럭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졌다.

이때쯤이 포타라카가 가장 추울 시기인데 아돌프가 올해는 값비싼 모피 코트를 과연 몇 벌이나 장만했을지가 심히 궁금했다. 놈이 그것들을 걸치고선 부와 명예의 상징이라고 거드름을 피우거나 내 앞에서 뻐겨대는 것을 매년 수도 없이 봐왔던지라, 배알이 꼴려도 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만 십 몇 년째 나이를 안 먹는 외모에 성장까지 멈춰버린 관음존자가 그 치렁치렁한 털 코트를 입고서 수정궁의 옥좌에 앉아 있는 오만한 모습에선, 어쩐지 아이러니하면서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아주 어릴 때야 진짜 뭣도 모르는 어린애였으니까, 그런 관음존자의 모습을 무슨 선망의 대상처럼 여겼던 철없는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새삼 돌이켜보니 꼴값도 아주 그런 꼴값이 없었다.

추우면 내복이라도 껴입든가 할 것이지, 실내든 바깥이든 완전 중무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관음존자를 보고 있자면 폼 잡는 일이라면 사활을 거는 별종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아니, 남들도 다 타는 추위를 저만 더 유별나게 타는 것처럼 구니까 말이다. 뭘 시킬 때마다 추우니까 그냥 네가 가라, 추워서 그건 안 된다, 추운데 니 얼굴까지 보니까 더 짜증 난다 등등.

‘나도 내가 직접 갔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는 처지라서.’

‘게다가 바깥 날씨가 굉장히 추우니까.’

남한테 떡하니 귀찮은 일을 떠맡기고는 벌써 십 몇 년째 써먹고 있는 추위 핑계를 댔다. 좌우지간 아돌프가 날 엿 먹이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으니 이제 그만 쓸데없는 생각 따윈 집어치우고서 내가 하던 일이나 마저 끝내야겠다.

아무러면 이 커다란 돔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전혀 없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돔 가장자리를 중점적으로 살피되 이전처럼 마구잡이로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좀 더 체계적으로 구역을 나눈 뒤 제대로 된 수색을 펼치기로 했다.

오조는 또 뭉글이의 등에 업혀서 자고 있으니 제외하고서, 일행 중에선 파오가 가장 먼저 앞서서 가고 있었고 내가 그 뒤를 따랐으며 손우경은…….

손우경은 또 어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뒤에서 날 따라오던 손우경이 통 보이질 않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누가 내 뒤통수를 콕콕 찔러왔다. 나한테 이런 짓을 할 놈은 내 주변에서 딱 한 명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스물네 살 때부터 다섯 개의 검 수용소에서 오년 동안이나 시간이 멈춘 방에 갇혀 있었으니, 모쪼록 정신적인 연령은 꽤 되었을 법도 한데 이렇게 매사 하는 짓을 보면 여전히 스물네 살짜리였다. 게다가 어디서 또 본 건 있어가지고 다 시든 꽃 한 송이를 꺾어 와선 내 귀도 아니고 코에다가 쓱 꽂더니 저 혼자 웃다가 자지러진다.

나는 코에 꽂힌 시든 꽃을 바닥으로 가차 없이 버리며 입을 열었다.

“왜 꼭 너 같은 것만 줘.”

이런 놈이 그 악명 높은 다섯 개의 검 수용소의 지하 5층 죄수 출신에다가 대대로 환영제야단의 수장들에게만 극비리에 전수된다는 기문파공의 사용자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까.

유치한 장난이나 쳐대던 녀석이 하늘 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늘도 어김없는 그 시각이었다.

하루에 한 번, 이 폐허도시에서는 돈을 주고도 사서 볼 수 없는 일대의 대장관이 연출되었다. 마침 정오의 태양이 머리 한가운데로 이글거리며 올라왔다.

머리 위에 반원형으로 덮여 있는 저 유리막은 하늘에서 태양이 딱 어느 지점에 위치하면 갑자기 돔 자체가 마치 커다란 볼록렌즈의 기능을 하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마치 태양을 돋보기로 직접 들여다보기라도 하듯이 그 크기 자체가 완전히 거대해져버리는 것이었다.

사막에서 만난 벌레들이나 이 도시의 기갑 괴물들, 그리고 무간도의 균열에서 가장 심하게 느꼈던 대목이지만, 원래 인간이란 존재는 자기 시야의 한계를 초월하는 거대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면 그 공포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비록 전부 다 눈의 착각이긴 했으나 돔 유리막을 사이에 두고 하늘에서 순식간에 거대해진 태양을 바라보는 것은 실로 그 압박감이 대단했다.

하늘이 온통 태양으로 붉게 차오르는 장면에 그만 넋이 나가 있다 보니 손우경이 슬며시 내 손목을 잡아끄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놈이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려고 들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손우경이 넉살좋게 얘기했다.

“내가 저쪽에서 나 혼자서만 보기에 아까운 곳을 발견했어. 선착순 딱 한 명까지만 받을 테니까 나랑 같이 안 가볼래?”

“지원자 없으면 어쩔 건데.”

“그럼 그 앞에 서서 너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지 뭐.”

아직 간다고는 대답도 안 했는데 뭐든지 다 자기 마음대로인 녀석이었다. 앞서서 먼저 가버린 파오와 오조와는 아예 정반대 방향으로 나를 이끄는 손우경을 따라서 마침내 도착한 곳은 어느 낡은 공원의 정문이었다. 뭔가를 크게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방금 전에 태양이 돔의 렌즈에 반사되어 무한하게 팽창하는 명장면을 보고 난 다음이라 나는 잔뜩 실망스러워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너 혼자서만 계속 아까워하면서 봐라. 난 여기서 먼저 갈 테니까.”

손우경이 뼈저리게 배신감을 느낀다는 음성으로 내게 쏘아붙였다.

“넌 사람이 뭐 그러냐. 난 너한테 꽃도 꺾어주고 공원에도 데려와주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저기, 손우경아…….”

내가 양미간을 손가락으로 쥐고서 난처하게 말문을 떼었다.

“나하고…… 뭐 하자는 거야.”

그러자 손우경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뭐 하자는 거냐니.”

“…….”

“그렇게 머리가 나빠 보이진 않는데. 너는 지금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

오히려 자기가 따지듯이 되묻는 손우경에게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사실 이 정도로 확실한 의사 표현을 하고 있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건 바로 내 쪽이긴 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한다 해도 어차피 내 의사 자체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더 이상의 헛된 기대를 심어주는 일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놈의 강렬하게 짙어진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기가 힘들어서 눈썹에다 시선을 맞추고서 차분하게 얘기를 꺼내보기로 했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알아들을 만한 상대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태까지의 많은 전적들을 돌이켜봤을 때 적어도 날 함부로 대하진 않을 거란 믿음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얼마 전에 내가 독에 당했을 때 도와줬던 일은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

“…….”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너에게 이런 식으로 끌려 다니면서 관계를 지속할 생각은 추호도 없…….”

순간 얼어붙은 놈의 표정에 하던 말을 끝까지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이런 식……, 끌려 다녀?”

손우경의 목소리에서 뭐가 삐끗하게 어긋나고 있음이 느껴졌다. 녀석은 짐짓 과장된 듯한 어조로 내게 말을 건넸다.

“네가 지금 말하는 이런 식으로 끌려 다닌다는 관계가 뭘까. 끌려 다닌다라.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수동적인 말이네. 여튼 해석하자면 넌 나랑 섹스도 하고 키스도 하고 별별 짓을 다 했지만 사실은 그럴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었다는 거야? 넌 조금도 내키지 않았는데 전부 내가 억지로 강요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계속 끌려 다녔다는 그 말인가.”

“…….”

“아님 관음존자의 명령 때문에 정말 싫지만 그래도 이번 일이 다 끝날 때까진 날 꽁꽁 묶어둬야 하니까 투철한 희생정신으로 눈물을 머금고서 다리를 벌려줬어? 응?”

놈이 푹푹 찔러대는 구석들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왜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손우경이 웃는 낯으로 빈정거리며 지껄이는 말은 이미 도를 넘고 있었다.

“넌 확실히 얼굴도 내 취향인데다 아직 몇 번 안 자봤지만 나같이 닳고 닳은 좆을 꽉 물고 안 놔줄 만큼 뒷구멍까지 꽤 명기란 말야. 홍등가에서 밤기술 좋기로 소문난 남창들도 보통 나랑 한 번씩 할 때마다 가랑이 사이가 온통 피떡이 지는데 넌 처녀 주제에 내 걸 잘도 한입에 삼키더라. 근데 예전에도 말했잖아. 넌 분명히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멤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꼭 서쪽까지 가야 할 막중한 사명감을 갖고 있는 놈이라서 내가 무슨 장난을 쳐도 저항하지 못할 거라고.”

관음존자는 나를 손우경이 포함된 이 멤버 안에 끼워 넣으면서 과연 어디까지 예상했었을까. 둘이 도반 관계였다는 얘긴 언뜻 들었지만 정말 아돌프는 저 손우경이 남색가라는 걸 다 알고서 여기에 나를 인질처럼 딸려 보냈을까.

이 일의 적임자, 널 살려둘 줄 알았어. 그리고 또 뭐가 있었지.

이런 거라도 해야 하는 너절한 신세라서 놈의 말마따나 처음엔 손우경에게 희생하듯 안겼지만, 내가 놈의 밑에서 어떤 위선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만한 주제가 아니었다. 그게 너든, 다른 누구든.

모든 것은 나의 의지와는 전부 동떨어져 있었다. 그저 십년도 훨씬 전에 이미 죽었어야 할 나를,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해준 내 주인에 의해서 하루하루 죽은 듯이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내 팔과 다리에는 수십 개의 보이지 않는 끈들이 매달려 있었고, 그 끈을 조종하는 누군가의 연출에 의해서 한낱 인생이라는 이 허황된 연극판에서 가짜 연기를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그런 내게 손우경이 성큼 다가왔다.

“너, 아돌프에게서 정기적으로 기운을 받고 있었지?”

역시나 놈도 다 눈치채고 있었구나 싶었다. 녀석이 내 왼손으로 자기 손을 뻗어왔다. 뿌리치려고 했지만 언제나처럼 놈 쪽이 한발 더 빨랐다. 손우경이 내 왼손을 꽉 쥐면서 비열하게 윗입술을 들어 올렸다.

“앞으론 그럴 필요 없어질 거야.”

“뭐?”

“네 왼손에 각인되어 있었던 아돌프 자식과의 연결점을 내가 다 끊어버렸으니까.”

순간 어금니가 덜덜 떨려왔다. 지금 손우경이 뭐라고 한 거야. 과, 관음존자와의 뭘 어쨌다고?

“기억도 안 나겠지만 네 몸의 독을 중화시키던 과정에서 내 기운을 불어넣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손우경이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이를 으득 갈면서 덧붙였다.

“왜냐면 그 새끼가 네 몸에다가 손을 안 대놓은 구석이 없더라고.”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짓다가 끝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놈의 뺨을 후려치려던 걸 도중에 또 붙잡혀버렸다.

“너 이 개자식아! 누구 마음대로 그걸 끊고 자시고야! 그게 나한테 어떤 건지나 네가 알기나……!”

손우경이 치고 나왔다.

“알아. 다 안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내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관음존자의 기운이 전부 끊어졌다고? 그럼 지금 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다는 거지.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당장 포타라카로 돌아가서 아돌프에게 다시…….

“이대로라면…… 포타라카에 돌아갈 수도 없잖아. 여, 여기에 갇혀버렸는데…….”

“내 말귀 못 알아듣냐? 앞으로 그럴 필요 없다고 했잖아.”

놈에게 한쪽 팔을 잡힌 채 잔뜩 흥분해서 몸부림을 치는 나를 손우경이 강한 힘으로 한 번에 제압하더니 진정하라고 내 턱을 꽉 부여잡았다.

“현아, 있잖아.”

“너 따위가 뭔데! 이, 이걸 어떻게 할 거냐고!”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지독하고 더러운 자식이야.”

손우경이 내 얼굴을 더 세게 틀어쥐며 나직하게 속삭여왔다.

“너 지금 어떻게 움직이고 있나 신기하지?”

그랬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좋은 체력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움직일 수가 있는지 어느 누군가의 설명이 꼭 필요했다.

손우경이 생긋 웃었다.

넌 내 인형이라고 했잖아.

등줄기로 싸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웃고 있는 손우경의 표정에서 나는 불길한 그림자를 읽어냈다.

“너 설마…….”

“어차피 정기만 받을 수 있으면 그게 누구라도 크게 상관없는 일 아닌가. 난 아돌프와는 다르게 그런 건전한 부분을 통해서 너에게 기운을 나눠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놈의 한쪽 손이 내 엉덩이를 슬금슬금 어루만지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사흘 내내 내가 단지 니 몸만 중화해줬을 거라 생각해?”

내 엉덩이를 꽉 쥐는 손아귀의 힘 때문에 입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입술, 쇄골, 젖꼭지, 허리, 그리고 좆이랑 불알까지 내 손이랑 입이 안 닿은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어. 게다가 미약에 취해서 내 좆을 엉덩이에 처박고는 더 안아달라고 애기처럼 졸라대는 널 보니까 진짜 머리가 돌아버리겠더라고.”

“이거 놔, 이 더러운 자식아! 너한테 조금이라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내가 등신이지!”

“아돌프는 네 왼손을 통해서 몸 안에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한 기운을 나눠준 것 같던데 난 그렇게까지 남한테 막 퍼주는 타입은 아니라서.”

어금니가 으득 갈려왔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나한테서 정기를 받아 가야 해. 연결 장소는 네 배 속 깊은 곳에다 여의봉을 통해서 잘 심어놨으니까 아돌프가 네 엉덩이 안으로 팔이라도 밀어 넣지 않는 한 다시 그 장소를 해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걸? 그 자식 알고 보면 결벽증도 심한데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하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살짝 넋이 나간 것 같으니까 네가 잊어버리지 않도록 다시 말해줄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이야.”

“……내가 니 뜻대로 해줄 것 같아?”

손우경이 후 하고 웃음을 삼켰다.

“원하면 그래보든가. 파오 사형 얘기론 너 어릴 때에는 사나흘이 멀다 하고 픽픽 쓰러졌다며? 난 너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며칠 안 가서 너 스스로 엉덩이를 까고서 제발 안아달라고 사정하게 될걸.”

“야, 야, 이 나쁜 새끼야!!!”

주먹도 휘둘러보고 다리로도 걷어차보고 할 수 있는 갖은 짓을 다 해봐도 계란으로 바위를 내려치는 것보다 더 무의미한 짓거리였다. 내가 때리는 걸 전부 묵묵히 맞아주던 손우경이 순간 더는 못 참겠는지 내 양팔을 억압하며 내 정수리에 최후의 철퇴를 내리꽂았다.

“그 대신에 날 얼마든지 이용해. 알면서 속아줄 테니까.”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왔다.

억울한 심정이 들기도 하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뇌수가 꼬인 듯한 머릿속을 헤집어서 빠져나갈 구멍을 뒤적여봤자, 이 돔 안에서도 못 나가는 내가 무슨 수로 손우경같이 영악한 놈을 상대하냔 말이었다.

대신에 자기를 얼마든지 이용하라고? 애초에 자기를 이용하려고 드는 얕은 수를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날 이딴 간악한 함정에 빠트린 건 분명 놈이었다.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현재 이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손우경이었다.

내 생명줄을 걸고서 이제는 놈에게까지 아쉬운 사정을 해야 하는 내 신세가 몹시도 처량했다. 심지어 지금 붙잡힌 팔을 빼내고 싶어도 저 손아귀의 힘을 이겨내지도 못했다. 체념하는 것은 늘 내가 해왔던 일임에도 놈에게만은 결코 지고 싶지 않아하는 내 마음이 참 이상하기만 했다.

손우경이 고개를 숙여서 나와 눈을 맞춰오며 입을 열었다. 예쁜 빛이 나는 저 은회색 눈동자가 지금은 죽을 만큼 꼴 보기 싫었다.

“너무 그런 표정 하지 마. 심한 말 해서 미안해.”

“……저리 꺼져. 앞으로 나한테 말 걸지 마.”

“이 정도까지 했으면 내가 너한테 왜 그러는지 정말 몰라?”

“그딴 거 알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다 네 마음대로 하고 있는데 내 생각이 뭐가 그리 중요해?”

손우경이 비릿하게 입가를 들어 올렸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면 넌 예전에 나한테 죽었어.”

“…….”

“속아주겠다고 하잖아. 내 기운도 나눠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뭐가 그렇게나 억울해?”

놈이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주는 게 억울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우경은 그런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내 팔을 붙잡고서 공원 안으로 데려갔다.

이 공원 안은 말라붙은 나무들과 유리가 깨져버린 가로등, 그리고 녹이 슨 벤치 등이 전부였다. 고작 이런 삭막한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 공원까지 데리고 왔나 싶었지만 정작 도착하게 된 곳은 공원 안쪽에 위치한 관람차를 타는 장소였다.

그것도 약 반세기 전에 정지해버린.

관람차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손우경에게 내가 조금 답답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설마 이걸 보여주려고 날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냐.”

손우경이 나를 쓱 돌아보며 그럼 안 되냐는 듯이 자기 어깨를 으쓱거렸다. 놈과 사이좋게 손까지 붙잡고서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관람차를 구경할 만큼 나는 그리 여유 있는 상황도, 또 그럴 만한 기분도 아니었기에 공연히 마음만 더 상해버렸다. 하지만 손우경은 그런 내 반응 따윈 아랑곳없이 언제나 자기가 할 말은 무조건 다 하고야 마는 성미였다.

“이 도시 말이야, 아무래도 외부에서부터 격리된 곳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묵고 있는 건물 외에 아직 다른 건물 안엔 안 들어가봤지?”

손우경이 목소리를 음산하게 내리깔며 쓸데없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암만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봐도 진짜 이해가 안 되는 인물이었다. 방금 전에 내가 그 난리를 친데다 내 뒷구멍이 명기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저질 발언까지 해놓고는 어쩌면 이리도 뻔뻔하게 웃는 얼굴로 또 장난을 치려고 드는지.

하지만 손우경이 한층 더 심각해진 목소리로 털어놓은 또 다른 진실이 그만 내 몸의 털들을 온통 곤두서게 만들었다.

“여긴 빠져나갈 출구가 아예 없어. 지금 내가 말한 사실에 내 양쪽 손목을 걸어도 좋아. 들어왔던 출구는 밖에서만 진입이 가능하고 안에서는 나갈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어. 너나 파오 사형은 몰라도 내가 한번 지나쳤던 장소를 절대 잊어버릴 리가 없지. 우리가 처음에 들어왔던 그 부근을 벌써 수십 차례나 방문했는데 그곳의 지반 아래에서 기계들이 미세하게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어.”

“……겨우 그 정도 추론으로는 격리됐다느니 하는 말은 좀 성급하지 않아?”

“내 말 끝까지 들어. 사람들을 이곳에다가 가둬놓고서 외부와 완전히 격리해놨어. 그게 왜일 것 같아?”

“그것도 네가 내린 하나의 가정일 뿐이잖아.”

“이따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식 건물 말고 아무 건물이나 한번 들어가봐. 거기서 과연 무슨 장면을 보게 될지. 파오 사형은 너나 오조가 동요할지도 모르니까 일단은 입 다물고 있자고 했지만.”

“……거기서 뭘 봤는데?”

“사람의 뼈. 살이 전부 썩어서 오롯하게 뼈들만 남은 걸로 봐선 확실히 이곳은 반세기 전 대종말 전에 세워진 도시가 맞을 거야. 주택형 건물의 그 어디를 들어가봐도 전부 그와 비슷한 풍경이 펼쳐져 있지. 대개가 침대에 누워 두 손을 배에 얹고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해골이나, 혹은 누군가와 손을 붙잡거나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뼈들이지. 사람은 썩어서 없어졌다지만 그 뼈들 주변에 있던 수면제 통이나 독극물 같은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거든.”

누가 찬 손을 뒷목에 댄 듯 오싹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다면 손우경의 말은.

“한날한시에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 모두가 함께 자살한 것 같아.”

“자살이라니…….”

“격리된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도 대종말 즈음에 유행했다던 전염병의 일종 탓에 강제 격리당한 것 같아. 외부에서의 공급도 끊긴 채 이들이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가며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아마 자살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그럼 우리가 이 도시 안에 들어왔을 때 봤던 그 괴물들은 뭐였어? 네 말대로 반세기 전에 외부에서 격리당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살을 선택한 도시라면 어째서 아직까지도 그런 괴물들이 여길 돌아다니고 있었던 거야?”

놈이 대답해주었다.

“너 그날 오조 얘기 못 들었냐? 걔들보고 자격이 없다고 말했던 거.”

그날 뭔가가 씐 듯 이상하게 굴었던 오조의 말을 뇌리에 즉시 떠올려보았다.

‘수십 년 전에 계약이 끝났음에도 아직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질 않다니.’

‘……넌 자격이 안 되는구나.’

새끼 여우의 대사를 몇 번이나 곱씹어봤지만 손우경이 내게 해주려 드는 이야기의 실마리는 그 모습을 꼭꼭 감추고서 쉽게 나타나려 들지 않았다.

“수십 년 전에 계약이 끝났다라…….”

그때 머리에서 반짝이는 생각 하나가 돌출했다.

“네 말은 그놈들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소환수였다는 거야?”

“오조 녀석이 불러오는 놈들이 하나같이 역대급이라 눈이 높아져서 그렇지, 소환계 언어로 그라우마탄급이면 어지간한 소환술사들은 감히 명함도 못 내밀어. 격리된 사람들이 저 괴물들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렸는지 나야 거기까진 모르는 일이지만.”

손우경의 이야기에는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이 남아 있었다. 뭔가 굉장히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기분인데.

“……아직이야? 오조가 소환한 것들 중에 ‘유’를 제외하고 다른 놈들은 모두 어떻게 했었는지를 떠올려봐.”

유를 제외하고. 유를 제외하고. 아, 이 이름으론 집중이 안 되네. 뭉글이를 제외하고. 뭉글이를 제외하고.

“볼일이 끝나면 다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

‘수십 년 전에 계약이 끝났음에도 아직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질 않다니.’

“그래, 맞아! 당연히 소환술사와의 계약이 끝나는 즉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정상이잖아? 근데 걔네들은 어떻게 아직까지 남아서 이 도시를 활보하고 있었던 거야?”

“그라우마탄급의 괴수들은 멍청하게 생긴 거에 비해서 사실 머리가 꽤 좋은 편이야. 그런 놈들이 일부 소환술사의 허접한 부름에 응답하는 이유라고 해봤자 딱 하나뿐이지. 바로 인간 고기를 좋아하니까. 이것도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지만, 이 도시의 면적으로 봐선 우리가 들어왔을 때 남아 있던 괴물들보다 더 많은 숫자가 소환됐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반세기 전에 이곳에서 인간 고기의 맛을 처음으로 보게 된 몇몇 놈들이 원래 있던 공간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소환계와 인간계를 잇는 그 중간 지대쯤에서 계속 얼쩡거리고 있었을 거야. 그걸 어느 누군가가 아주 교묘하게 우리가 들어오기 직전에 풀어놓은 걸 테고.”

“누가?”

“…….”

손우경이 기가 차단 얼굴로 조소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거 외에도 해주고 싶은 말들이 많지만 일단은 여기까지만 해둘게. 어쨌거나 네가 지금 이 상황에서 고려해야 할 건 오직 하나뿐이야.”

“무슨 고려.”

“너, 여기서 나 아니면 대체 누굴 믿을 거야?”

머릿속으로 파오와 오조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끼 여우에겐 살짝 미안하지만 사실 둘 다 못 미더웠다. 그렇다고 손우경한테 의지하자니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아, 이 격언은 사막고양이 사건 이후로는 싫어하기로 했지.

하지만 손우경의 의도를 이제야 알 것 같기도 했다.

“……그 말을 하려고 날 일부러 여기까지 끌어냈던 거냐.”

“뭐, 좋을 대로 생각하라구.”

확실히 파오와 오조의 앞에서 할 수 있는 성질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 의해서 함정에 빠졌다는 말을 손우경이 하고 싶은 거라면 말이다. 그라우마탄급의 소환수를 불러낼 만한 소환술사는 우리 중에서는 오조가 가장 유력했으며, 손우경이 왠지 들어가기를 꺼림칙해하던 이 돔을 통과하자고 강력하게 제안했던 것은 바로 파오였다. 그리고 그 두 명은 나와 손우경이 기갑 괴물들을 만나기 직전까지 눈앞에 없었으니 의심하기에는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두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하려고 들었겠어. 대체 무슨 이득을 볼 수 있다고.

녀석이 관람차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잘 알겠지만 난 그렇게 감성적인 놈은 아냐.”

“…….”

“그런데 난 이 장면을 수용소에서 갇혀 있을 시절에 분명히 꿈에서 여러 번 본 적이 있어.”

감성적인 놈이 아니라면서 꿈 얘기나 꺼내는 건 또 뭐람.

“이 낡아빠진 관람차의 꿈에선 항상 내 옆에 누군가가 같이 있었는데 아무리 고개를 돌리려고 해도 그 사람의 얼굴만은 절대로 보이지가 않더라. 꿈에서도 무척이나 답답한 기분이었는데 막상 눈을 떠보면 여전히 수용소에 갇혀 있는 내 현실 때문에 더 짜증이 나더군.”

손우경이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돌리며 입술을 떼었다.

“아침에 우연찮게 여길 발견하고 나서 굉장히 놀랐었거든. 예지몽이라고 하기엔 너무 지겹게 꿨던 꿈이라서. 그러다가 내가 여기 이 자리에서 고개를 딱 돌렸을 때, 옆에서 바로 네 얼굴이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꾸고 나면 늘 아쉽게 끝이 나는 꿈의 여운이 현실에서도 똑같이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손우경이 계속 붙잡고 있었던 내 손을 불쑥 끌어당겼다. 녀석의 가슴으로 내 얼굴이 박혔고, 등에는 여지없이 팔이 감겨왔다. 놈이 내게 묻는다.

“넌 나랑 이러고 있어도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별로.”

“안 믿어.”

“네가 나 안는 거 싫어해.”

“맨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서 날 싫다고 하는 건 언어도단 아닌가.”

넌 모르는 게 없어서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군부에서-역사상 전례에도 없을-열네 번의 퇴짜를 맞게 된 나는 어느덧 다시 버려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개중 신병들의 수행 대장을 맡고 있던 파오 형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가며 번번이 나를 받아주지 않으려 드는 것도 크게 한몫했다.

여긴 너 같은 어린애가 올 곳이 아냐.

군부 신병들 중에는 내 또래의 동자승들도 많았다. 물론 내 약해빠진 육체가 그런 험난한 훈련에 적합하지 않다는 거야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환영제야단에 들어와 비구나 비구니 같은 수행자의 길을 걸을 것이 아니라면 내가 더 이상 이곳 티뷸라 궁에서 묵을 이유가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세 번 버려지는 동안, 날 냉정하게 바라보는 관음존자에게 옆에 있게만 해주면 어떻게든 당신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애원하며 매달렸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밥만 축내는 식충이로 전락해버릴 가능성이 더 컸다.

관음존자는 변덕이 극심한 사람이었다. 오전에는 법당에 잘 놓여 있었던 불상을 좀 더 오른쪽으로 옮겨두라고 명했다가도 오후가 되면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다 가져다놓으라고 하고, 그러다 새벽이 되면 아예 그 불상을 옮긴 사람을 찾아내서 죽여버렸다.

그의 괴팍한 성격에 빗대어 과장된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지금이야 무슨 영문인지 내 존재를 잠자코 용인해주고 있어도 언제 또 마음이 바뀌어서 나를 죽이려 들지 몰랐다. 병약한 몸으로 태어나 침대 밖으로는 거의 나가본 적도 없었다. 주변에는 병수발을 들어주는 간호인과 주치의, 부모님만이 내가 아는 이 세상의 전부라 해도 크게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관음존자에게서 힘을 나눠받고 나서는 내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세상이 어떤 곳인지 눈으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고 난 다음에 다시 원래 살던 우물로 돌아갔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등 뒤에서 내게 손가락질했다. 배알도 없이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 목숨이나 구걸하는 비열하고 구차한 놈이라고. 하지만 내가 달리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 붉은 눈의 남자에게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설령 그가 나를 해치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나에게는 부유하신 부모님 덕택에 근근이 이어져오던 얇은 생명줄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를 지불했던 사람들이 이제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지금, 나는 완전히 끊어지려고 하는 내 생명줄을 다시 연장시켜줄 또 다른 대상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설령 부모님의 원수라고 할지라도 죽는 것보다는 더 나았으니까.

하지만 선택이란 언제나 대가를 져야 했고 그 대가에는 무서운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아직 잘 몰랐었다.

새카만 방 안에는 오로지 나와 그, 단둘뿐이었다. 관음존자로부터 개인적인 훈련을 받게 된 지 이제 약 삼주의 시간이 흘렀다. 심지어 그는 방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돌프가 하는 것이라곤 그저 내 정신에 검은 환상의 씨앗을 심어놓고 그것이 내 고통을 양분 삼아 점점 자라나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역할뿐이었다.

방 안에서 울어도 보고, 굴러도 보고, 소리를 마구 질러봐도 관음존자는 내 머릿속에 잔인한 상상을 풀어놓는 것을 결코 멈춰주지 않았다. 상상의 첫 시작은 덧없이 달콤하고 행복하기만 하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잡힐 듯한 따스한 풍경들 속에서 나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 그러나 행복의 크기가 커질수록 그것을 잃고 싶지 않아하는 마음 역시 더 커지게 된다.

우주의 법칙상 행복과 불행은 같은 선상에 놓인 말이자 항시 같은 비율로 존재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불행해지고 싶지 않다는 말이며, 그것은 빛과 그림자처럼 양면성을 가졌을 뿐, 언제나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무서운 절망이 찾아왔고, 내가 나락으로 떨어져 뒹구는 모습을 관음존자는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고통은 행복의 크기와 비례했다. 매일같이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진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내 부모님이 죽어 나가는 장면을 끝없이 목격해야 했다.

어느새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도 점점 초연해져가자 그다음은 내가 타인의 삶 속에 들어가 그들의 불행을 직접 체험하는 끔찍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나의 하잘것없는 고통은 그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신이 망가져버릴 것 같았음에도 관음존자에게는 자비심이 없었다.

녀석이 구두 끝을 세워 바닥에 쓰러진 채 눈물로 얼룩진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마음을 텅 비워.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에도 감정 따위 이입하지 마. 지금 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아무런 실체가 없어. 그저 그것을 바라보는 네 시선이 그곳에다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뿐이야.

관음존자가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은 불교에서 흔히들 말하는 공空 사상이었다. 현상계가 무상無常하고 실체가 없기에 모든 것들이 텅 비어 있다는 말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공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그로부터 일체의 집착과 번뇌를 버리면 열반의 경지에 오르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심오한 것을 어린 내가 제대로 이해할 리가 없었다.

-내 것이 되겠다는 말은 마음 같은 하찮은 걸 뛰어넘었을 때나 가능해.

아돌프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바닥에 쓰러져서 울고 있는 내 머리카락을 아프게 휘어잡아 얼굴을 번쩍 치켜들게 했다.

-네가 널 죽일까 봐 무섭겠지?

-…….

-‘절대로 죽고 싶지 않아.’ 그게 현재 자기최면처럼 네 안에 걸려 있는 저주이자 앞으로의 인생마저 좌지우지하게 될 일종의 프레임심리학 용어. 가치관, 무언가를 둘러싸고 있는 경계선이나 틀, 세상을 보는 눈이야. 지금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도 이제부터의 모든 선택의 순간들은 네 그 프레임에 의해 결정되며,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될 거야. 뭘 하든, 뭘 생각하든 오로지 그것만이 최우선의 전제 조건이 되어서 네가 앞으로 내릴 수많은 결정들을 방해하거나 인생의 장애물들을 만들어가겠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반도 알아듣질 못했다.

-마음만 먹으면 그 틀 자체를 내가 풀어줄 수도 있겠지만 난 너에게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곤 오로지 네 의지뿐이야.

관음존자가 요사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결심, 희망, 노력. 인생에서 그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

-인간의 마음은 마치 모래성 같은 것이라 현실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한 번씩 밀어닥칠 때마다 너무나 쉽게 허물어지거든.

그는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 모래성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나에게만 보여줘.

강아지라니.

관음존자에게서 뽀송뽀송한 하얀 털이 자란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받고서 너무 놀란 나머지 왼쪽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어댔다. 코랑 눈이 까맣고 귀가 반 정도 접힌 강아지가 내 품 안에서 낑낑거리더니 옷에 침까지 묻히며 여기저기를 막 핥아댔다. 짧은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멍멍대는 게 너무 귀여웠지만 관음존자의 앞이라 차마 내색은 못하고서 강아지를 꼭 끌어안고만 있었다.

-마음에 드나?

고개를 얼른 끄덕이자 관음존자가 내 머리통에 장갑 낀 손을 살짝 얹고는 척살부의 몇몇 수행원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아돌프의 친위대이자 특수 수행부인 저 ‘척살부’는, 기존의 환영제야단 내의 인사들 중에서 뽑은 것이 아니라 관음존자가 어딘가에서 단독으로 선별해서 만들어낸 최강의 정예 부대였다.

그들은 관음존자의 명령에 의해서 반란의 싹들을 미리 찾아내거나 혹은 골치 아픈 인물들을 제거하는 일을 도맡았었기에 사실 암살자 집단으로서의 명성이 더 높았다.

척살부는 환영제야단의 정통 표식이자 석가여래님의 옴ॐ자 대신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 아돌프의 문장인 만卍자 배지를 가슴팍에 달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멀리서 저 표식만 봐도 지레 움찔거리며 겁을 먹곤 했다.

관음존자와 척살부가 복도 끝으로 사라진 것을 두 눈으로 전부 확인한 다음에야 나는 강아지를 끌어안고서 내 방으로 들어왔다. 털이 엄청나게 부들거려서 손에서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작은 녀석이었다. 애교도 많고 사람을 워낙에 잘 따라서 내가 관음존자에게 ‘그 방’으로 불려가는 시간이 되면 어찌나 왕왕거리며 날 따라오려고 드는지 잠시라도 떼어놓기가 힘들었다.

사실 내 매일매일이 고난의 연속이었다.

강도가 점점 커져가는 환상의 부피는 나를 압사시키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기에, 계속되는 그 고행 속에서 내 방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강아지만이 유일무이한 친구이자 안식처였다. 부모님의 얼굴이 생각나는 늦은 밤이면, 나는 강아지를 품에 꼭 끌어안고서 약간의 외로움을 달랠 수가 있었다.

내 강아지의 이름은 흰둥이였다. 흰둥이가 이불 안에서 꼬물거리다가 내 얼굴을 싹싹 핥아주는 게 너무나 예쁘고도 사랑스러웠다. 흰둥이가 계속 내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다 버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평소처럼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리던 포타라카의 어느 날.

관음존자가 이른 아침부터 먼 곳으로 출타했다는 희소식을 날 돌봐주는 어느 비구니 누나가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개인 훈련도 취소된 것일 테니 오늘은 늦잠도 푹 자두고 오후에는 흰둥이와 눈을 구경하러 나가기로 결심했다.

오후가 되자 외출할 준비를 서둘렀다. 감기라도 걸릴까 봐 목에 목도리를 친친 감고서 가지고 있는 옷이란 옷은 전부 다 껴입었다. 동자승용으로 제공되는 방한복은 맵시보다는 기능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입으면 굉장히 둔해 보였다.

사실 내가 원래 살고 있던 집에는 그동안 아파서 침대에만 누워 있느라 한 번도 못 입고서 옷장에만 넣어둔 옷들이 아주 많았었다. 허나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우리 집은 이미 싹 다 불타버려서 뭐 하나 건져 올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동자승 옷도 그리 나쁘진 않다. 정말로.

우울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서 흰둥이를 안고 티뷸라 궁 밖으로 나갔다.

눈이 오면 좋아하는 것은 오직 애들과 강아지뿐이라더니, 그 완벽한 조합으로 인해 나는 흰둥이와 둘이서 신나게 눈 위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예전에 집에 있을 때에는 행여나 내가 감기라도 들까 걱정하시는 부모님의 과보호 때문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었다. 흰둥이가 그 짧은 다리로도 날 훨씬 앞서가면서 눈이 쌓인 언덕 위로 왕왕대며 달려갔다. 마침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얀 눈들이 환상적으로 아름다워서 넋이 나간 채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치켜들고 입을 아 벌려서 눈을 받아먹었다.

예전에 산중에 버려졌을 때,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눈을 파내 먹었던 기억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다행이구나 싶었다.

그때 언덕 위를 마구 뛰어다니던 흰둥이가 갑자기 좀 이상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우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슬며시 고개를 틀어보니, 하얀 눈이 내리는 순백의 풍경 속에서 온몸에 검은색 제복을 걸친 관음존자가 마치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흰둥이가 관음존자에게 으르렁거리며 사납게 짖어댔다. 싸늘하게 얼어 있던 붉은색 눈동자가 내 작은 강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무 다급한 마음에 숨 한번 몰아쉬지 않고서 곧장 언덕 위까지 달려갔다.

관음존자에게 당연히 해야 할 인사조차 하지 않고서 얼른 흰둥이를 품에 안아 챙겨 들었다. 흰둥이가 더 세차게 짖어대는 걸 옷 안으로 숨겨가며 어색하게 웃자 관음존자도 그런 나를 보며 섬뜩하게 입가를 찢었다.

하지만 눈이 전혀 웃고 있질 않았다. 세차게 뛰어대는 내 심장이 녹아내릴 듯이 뜨거워졌다.

관음존자가 한쪽 손을 내밀며 나에게 말했다.

-그거 잠깐 이리 줘봐.

-아, 안 돼요…….

-안 된다니. 애초에 내가 준 거였잖아.

놈이 웃는 낯으로 나에게서 흰둥이를 가져가버렸다. 착한 흰둥이가 얼마나 크게 짖어대는지 내 애간장이 다 타들어갔다. 흰둥아, 제발 가, 가만히 있어…….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흰둥이가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을 가하자 관음존자는 그걸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이쪽이 조금 낫군.

한쪽 손으로 흰둥이의 목을 뚝 꺾어버렸다. 녀석이 얼이 빠져버린 나에게 흰둥이를 다시 되돌려주었다. 충격을 받아서 하얗게 질려버린 내 얼굴을 바라보던 관음존자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멍청아, 마음 같은 거 버리랬지, 내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아무리 참아보려고 해도 내 손에 들려 있는 죽은 흰둥이 때문에 너무 가슴이 아파서 멈출 수가 없었다. 내 강아지가 목이 꺾여서 혓바닥을 쭉 내민 채로 숨이 멎어 있었다. 하늘에서 눈이 오듯 내 눈에서도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허나 관음존자는 그런 나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장갑을 낀 손이 내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의지하지 말고 마음도 주지 마.

급속도로 목이 졸려와 순간 날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것이 다였다.

-오로지 너 하나만 생각해.

바닥에 나를 내팽개친 관음존자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뿌옇게 희미해지는 눈가로 내 품에 있던 흰둥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왕왕 짖으며 어딘가로 달려가는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관음존자는 그 후로도 내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결코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반드시.

* * *

셔츠를 걷지도 않고 손우경이 옷 위에서 내 유두를 빨아댄다. 가슴 부위가 척척하게 침으로 젖었지만 놈은 상관하지 않았다. 속옷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성기를 부드럽게 애무했다. 내 몸이었지만 놈은 나보다도 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넣진 않는다고 약속했지만 바지도 다 벗겨놓고서 사타구니를 주물럭거리는 손길이 너무 집요했다.

‘너도 내 좆 좀 만져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속삭이는데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팬티 벗고 내 위에 올라타서 낑낑거려달라곤 안 할게.’

귓바퀴를 이로 잘근거리며 자꾸 자기 것을 만져달라고 꼬셔댔다.

‘그 정도는 어렵지도 않잖아?’

이러다간 정말 끝이 없어질 것 같아서 일단 손으로 놈의 하반신을 더듬었다. 무식하게 볼록해진 앞섶이 손바닥을 스치자마자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여의봉이 자동 센서 역할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지 사이를 어설프게 만지자 손우경이 내 손목을 아예 그 안으로 푹 집어넣어버렸다. 몽둥이 같은 살덩어리는 그 둘레가 한 손으로도 다 잡히지 않았다. 놈과 서로의 것을 만져가며 키스를 당하고 있었는데 황홀할 정도의 손놀림을 자랑하는 손우경에 의해 결국 내가 먼저 사정해버렸다. 사정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내 미적지근한 손동작에 질려버린 녀석이 아예 좆을 내 입으로 가져다대곤 빨아달라고 제안했다.

싫다고 했지만 입안으로 좆이 밀고 들어왔다. 입에 반의반도 안 들어가는 놈의 것은, 그 두툼한 귀두를 목젖까지 처박고 연신 헛구역질이 나게 만들었다.

잠시 후 내 입가로 놈의 정액이 주룩주룩 새어나왔다. 놈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삼킬 필요까진 없어. 그거 맛없는 건 나도 아니까.

손우경이 수건으로 입에 묻은 정액을 닦아주며 더럽지도 않은지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뒤처리 후, 등을 돌리고 누운 나를 녀석이 또 뒤에서 껴안아왔다. 나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날 자꾸 네 여자 취급하지 마.”

“……나도 어쩔 수 없어.”

손우경의 음성에서 어느새 졸린 기운이 묻어났다.

“오년 넘게 수용소에 처박혀 있다가 갑자기 눈을 떠보니까 너처럼 냄새 좋은 인간이 내 눈앞에서 막 얼쩡거리는데.”

놈이 내 머리에 코를 묻고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 졸음 섞인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듯이 한없이 나른하게 울렸다.

“그런데…… 네가 진짜로 인형이라서…… 여기에 정말 아무것도 안 들었으면 어쩌나 생각해…….”

내 심장 부근을 매만지던 손끝에서 이내 행동이 뚝 잦아들었다. 녀석의 추측대로 텅 비어 있을 내 마음이 환지통처럼 아프게 저려왔다.

몸을 조심스럽게 돌려서 이미 잠들어버린 손우경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부탁이니까, 더 이상 나한테 다가오지 마. 미안하지만 너에게 내 마음 같은 거 절대 못 줘.

요 며칠째 계속해서 이어지는 과거의 꿈들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하고 또 시기적으로도 절묘했다. 나와 왼손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걸 그 귀신같은 관음존자가 모를 리가 없었다. 오래전에 죽어버린 내 강아지를 눈 속에 파묻어주면서 당시의 나는 어떤 결심을 했었다.

항상 해왔던 것처럼 잠든 그의 입술에 몰래 키스하려던 순간, 뇌리에 붉은 눈동자가 떠올라 흠칫 입을 떼어내고 말았다. 나는 도리질을 치며 속으로 애원했다.

우경아, 제발 나한테서 떨어져.

네가 원한다면 같이 잠도 자고 뭐든지 다 해줄 테니까.

나 좋아하지 마. 아니, 절대 좋아한다고 말해주지 마.

그랬다간.

……이번에도 관음존자가 너를 완전히 망가트려놓을 거야.

쉬어가는 페이지 5 <손우경>

★ 타인에게는 절대 자신의 약점을 알려주지 마세요

언젠간 크게 후회할 날이 돌아옵니다

진짜 안 지겹냐.

이른 아침에 담을 타고 수련장에서 탈출했을 때에도 신새벽부터 수련에 열중하는 아돌프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찼었는데, 저녁 늦게까지도 여전히 저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 놈을 보니 어째 내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기까지 했다.

석가여래께서 왜 저런 이방인을 제자로 받아들이셨는지 아직도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기문파공의 정식 계승자는 벌써 몇 해 전에 나로 정해진 게 아니었던가.

뭐 내 자랑 같은 말이었지만 어차피 나를 능가하는 놈이 나올 리가 없었다.

좌우지간 걸핏하면 수련을 빼먹고서 담벼락을 넘나드는 내 모습을 전부 뻔히 지켜보면서도 아직 스승님께 일언반구의 언질도 하지 않는 걸 보면 내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닌 듯했다.

검은색 도복으로 갈아입고서 수련장으로 향하던 도중, 그 근처에서 가장 기초적인 공간 나누기에도 애를 먹고 있는 아돌프를 발견하고는 약간의 힌트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공간을 자르는 게 아니라 분리하는 거야. 그걸 못 깨달으면 평생 해봤자 소용없어.”

붉게 물든 눈동자가 스르륵 내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놈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침묵하더니 잠시 후 약간 어설프긴 하지만 공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소질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모양이지.

내가 한 말이 기문파공의 핵심이긴 하나 단순히 말로만 설명을 듣고도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는데 저 녀석이 너무 금방 해버리니까 나도 맥이 빠졌다.

불알까지 잘 핥아줘.

작은 입술이 기둥을 옆으로 빨아주다가 내 은근한 명령에 한쪽 불알을 덥석 물고는 입안에서 열심히 굴려댔다. 혀가 고환의 주름을 정성스럽게 애무하는 걸 음미하다가 녀석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입으로 푹푹 찔러 넣었다. 입안에 반도 채 들어가지 않는 걸 음탕하게 받아들이느라 입 주변이 타액으로 넘쳐흘렀다.

놈이 내 좆에서 입을 거두며 이미 벗고 있던 하반신을 스스로 벌리며 헐떡거렸다.

“하아, 우경아. 나 빨리 넣어줘어.”

남자치곤 그만하면 얼굴도 이쁘고 엉덩이까지 잘 대주니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몇 번 몸을 섞다 보니 금방 질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쓸데없이 달라붙는 계집애들이라면 주위에 널리고 널렸지만, 내 빌어먹을 성적 취향 때문인지 남자 엉덩이가 아니면 이렇게까지 발기가 되질 않았다.

몸을 비틀며 안달하는 녀석의 엉덩이를 손아귀로 쥐어짜듯 주물거리며 내가 피식 웃었다.

“정상위는 이제 지겨워서 싫은데.”

나는 놈의 두 다리를 잡아들고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급작스레 몸이 거꾸로 되어버리자 다리 밑에서 찡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서 한쪽 손으로 내 뿌리를 아래로 향하게 만든 다음 벌어진 구멍에 푹 끼워 넣었다.

오늘만 해도 이미 두 번이나 사정했던 곳이지만 뚫은 지 며칠 안 되는 구멍인지라 살에 엉겨 붙는 감촉이 쫀득거렸다.

“머리 다칠지도 모르니까 두 손으로 몸이나 잘 받치고 있어.”

그 대답은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감각을 맞이하게 된 어느 난잡한 신음 소리가 대신해주었다.

“기문파공 수행자가 갖춰야 할 세 가지 덕목은 첫째도 겸손이고 둘째도 겸손이며 셋째는 타고난 재능이다.”

어제 잠을 한숨도 못 잔 상태라서 입에서 하품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도반 녀석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갖은 눈치를 줬지만 이미 석가여래님의 못마땅한 시선이 내 얼굴에 날카롭게 꽂혀 있었다.

“우경이 넌 내 말을 어찌 생각하느냐.”

내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다행히 세 번째 덕목을 완벽하게 타고났으니 겸손은 차차 쌓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딴 썩어빠진 정신머리로는 네가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다고 한들 기문파공의 진정한 참뜻을 끝끝내 깨닫지 못할 것이다.”

석가여래님의 엄한 불호령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냥 그 참뜻이 뭔지 이 자리에서 얘기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봤자 그 숭고한 뜻은 어차피 알아먹을 놈이나 알아먹겠죠. 스승님께서 그 깨달음 하나를 얻기 위해 본인의 반평생을 허비하셨다고 저희까지 그와 똑같은 절차를 밟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매일같이 반복되는 수행도 지겨워 죽을 맛인데 언젠가 깨달음을 얻겠답시고 이 이상 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쏟아지는 눈총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서 아침 예불을 드렸던 절간을 빠져나오자 그 이방인 녀석이 내 뒤를 쫓아서 따라 나왔다. 이방인 애송이와 이런저런 말을 섞고 싶진 않았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유독 친밀하게 굴며 자기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런 말을 함부로 지껄이기엔 네 계승자 자리가 위태롭지 않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직할 정도로 수행만 하는 녀석이기에 앞뒤가 꽉 막힌 놈일 거라 예상했는데, 어째 말투나 사용하는 단어의 수준이 그리 고상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꽁꽁 묶어둔 경계심을 푼 채로 편하게 입을 열었다.

“뭐 상관없어. 계승자 자리건 뭐건 크게 미련도 없는데다 그래봤자 아쉬운 건 내가 아니니까.”

“……미련이 없다라. 석가여래님의 뒤를 잇는다는 건 앞으로 환영제야단을 전부 차지할 수 있단 얘기나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서 방금 말하지 않았던가. 그 자리 차지할 만한 재목은 나밖에 없다고.”

항상 무표정하던 아돌프의 입가에 묘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넌 확실히 겸손이 뭔지를 좀 배워야겠다.”

그때 놈의 콧잔등으로 우리 주변을 떠돌던 작은 날벌레 하나가 내려앉았다. 녀석의 눈이 자신의 콧등으로 모였고 내가 검지를 들어 올려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날벌레의 날개 두 장이 마치 이파리처럼 양쪽으로 떨어져 내렸고, 그렇게 오롯이 몸통만이 남아버린 것을 내가 입으로 후 불어서 마저 떼어내며 속삭였다.

실력이 있으면 구태여 겸손해지지 않아도 타인에게 겸손을 요구할 수 있지.

내 말에 아돌프가 바로 동의를 표했다.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야.

녀석이 내 어깨를 붙들며 기습적으로 요구했다.

방금 그거 어떻게 하는지 알려줘.

나는 놈의 해사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뭐 그다지 내 취향은 아니지만 같은 문파의 도반으로서 친하게 지내는 것은 제법 괜찮을 듯했다.

“밖에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너 남자 좋아한다며.”

아돌프가 법당의 커다란 부처님 불상 뒤에 숨어서 두꺼운 경전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고 있던 나를 찾아내선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나는 눈을 비비며 까짓것 뭐 새삼스러울 거 있냐는 식으로 놈을 안심시켜주었다.

“걱정 마라, 넌 내 취향하곤 거리가 머니까. 너한테 꼴렸으면 벌써 따먹었지.”

진짜로 아돌프처럼 어린애 같은 얼굴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게 뜬소문은 아니었나 보네.”

“석가여래님도 다 아시는 얘기야. 나 사람 새끼 만들어보겠다고 십년도 넘게 타일러도 보고 윽박질러도 보고 달래도 봤지만 뭐 어쩌겠어. 내 좆이 이미 남자 뒷맛을 봐버렸는데.”

키득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아돌프가 상당히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서 내 앞에 털썩 앉더니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남자라면 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취향 같은 것도 있나?”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하게.”

“알아둬서 나쁠 거야 없지.”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놈이 나한테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녀석은 확실하게 그쪽 계열의 인간이 아니었다. 시험 삼아 몸을 의도적으로 터치해본 적도 있었지만 둔한 건지, 눈치를 못 채는 건지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다. 아마도 놈은 기문파공으로 인해 친해져야 할 이유가 생긴 나에게 접근할 구실 따위를 만들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뭐 나도 심심하던 차였으니까 적당히 속아주자.

“엄청난 미인.”

“뭐?”

“내 이상형. 엄청난 미인이라고.”

“그런 말은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겠다. 세상에 미인을 싫어하는 남자도 있나.”

“그렇긴 한데 ‘미인인 남자’는 극히 드물지. 아직까지 만나본 적은 없지만 만약 진짜로 끝내주는 미인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준다면 이 지긋지긋한 계승자 자리를 바로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법적으로 승려들은 이성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는데다 환영제야단을 이끄는 책임자가 같은 사내랑 비역질이나 한다는 소문이 나는 것도 꽤 곤란하니까.”

아돌프가 눈알을 또르르 굴리며 재차 물었다.

“그게 다야?”

“아, 미인에 좀 차가운 성격이라면 좋겠어. 나한테 너무 쉽게 넘어오는 것도 재미없으니까 적당히 튕기다가 못 이기는 척 안겨주면 금상첨화겠지.”

나는 다시 바닥에 드러누워 한쪽 팔로 머리를 떠받쳐서 몸을 모로 가누었다. 그런 다음 아돌프를 지그시 바라보며 뒷말을 덧붙였다.

“근데 내가 좀 많이 잘나서인지 아직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나 싫다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게 제일 큰 문제야.”

아돌프가 하 하고 완전 어처구니없다는 식의 짧은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이 갇힌 공간에서 보내야 했는지 이젠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날짜를 세는 것을 포기한 지는 오래였다. 하루하루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반복되는 이 시간의 속박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의 순간들을 후회하는 것이 전부였다.

지루할 정도로 평화롭게만 여겨졌던 그때의 그 시절이 이따금씩 내 꿈속에서 아주 찬란한 모습으로 반짝거렸다. 만일 나에게 딱 한 번만 시간을 되돌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연 어느 지점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걸까. 과거의 나에게는 지금의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오류들과 보이지 않는 함정들이 존재했었다.

‘공간을 자르는 게 아니라 분리하는 거야. 그걸 못 깨달으면 평생 해봤자 소용없어.’

그때 내가 그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콧속으로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향냄새가 감돌았다. 아마도 방금 전에 내가 꾸었던 꿈의 연장선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갈수록 짙어져가는 향냄새 때문에 나는 아주 오랜만에 스스로 꿈속에서 깨어났다.

내가 눈을 떴을 땐, 어느 청아한 눈동자가 나를 말갛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상형. 엄청난 미인이라고.’

나는 아무래도 그 기나긴 꿈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듯했다.

쉬어가는 페이지 5 <손우경> 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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