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키치 만물상점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대륙 남단의 항구 도시인 ‘아부-게르다’였다. 세상이 동서의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를 배척하며 피로 얼룩진 역사를 만들어가던 환란의 시기에도, ‘균열’이 있는 사무타 지역이나 ‘아부-게르다’처럼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중립을 표방하는 회색분자들이 존재했다.
아부-게르다는 비록 중립적 입장을 표방하고 있긴 하나 자신들만의 특색 있는―다신 숭배의―종교 체계를 갖고 있었다. 서쪽의 룸버린과 로고스는 기존 종교의 도그마적인 계시들을 버리고서 자신의 신성을 발현하는 영지주의, 즉 주술적인 그노시스를 표방한 지 오래였고, 동쪽의 불교 체제 역시도 자신 내부의 깊은 성찰을 통해 궁극적인 해탈, 즉 깨달음을 얻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돌프가 이교도들인 아부-게르다에게 그 어떤 간섭도 하지 않는 까닭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로 축약될 수 있었다.
대륙의 중앙이자 남단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아부-게르다는 위치상 현재 전쟁 중인 동과 서를 잇는 유일한 무역 항로였고, 서쪽으로 물건을 납품하며 암암리에 거둬들이는 수지가 그야말로 엄청났다.
또한 하루에도 수백 척의 선박이 오가는 도시의 항만에서는 동서양은 물론이거니와 좀처럼 발이 닿기 힘든 지역들의 물건까지 전부 취급했기에, 필요한 물품이나 군수용품은 육로로 운송하기보다는 주로 아부-게르다의 선박을 이용하는 편이기도 했다.
그런 아부-게르다를 이끄는 대부호들은 이후로도 우리 쪽의 바다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도록 매년 환영제야단 앞으로 세금을 빙자한 막대한 군자금을 납부하는 중이었다. 명목상으론 단순한 통행세에 불과했으나 기실 자신들의 중립적 입장을 계속 잘 봐달라는 사사로운 뇌물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는 거대한 윤락가가 세워져 전 대륙 안에서 유일하게 공식적인 매춘을 알선해주는 업체들이 활발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위급한 전시 중이었고, 함부로 여자를 품어선 안 될 수행자의 몸이긴 했지만 종단 군부가 혈기왕성한 사내들만으로 구성된 집단인 만큼 남색 행위라든가 민간인 아녀자 겁간 등 여러 골치 아픈 문제가 적지 않게 발발하고 있었다.
점점 쌓여가는 성욕을 풀 길이 없어 탈선으로 이어지는 문제를 방지코자 아돌프는 아부-게르다의 어두운 일면인 향락 산업을 고스란히 눈감아주었다. 종단의 교리상 합법적인 매춘을 권장할 순 없지만 아부-게르다가 중립 지역으로 남아 있는 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관용이 발휘된 것이다.
그 때문인지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타라카로 살아 돌아온 군부의 사내들에게 그곳 아부-게르다는 언제나 요란한 소문들로 자자한 곳이었다.
자,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현재 어디쯤에 있냐면 말이다.
아부-게르다는커녕 여기가 어딘지도 전혀 모르겠다.
걷고 걸어도 끝없이 이어질 뿐인 허허벌판을 쭉 둘러보는데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조는 유리 돔에서 탈출한 직후 다시 잠들어버려 벌써 며칠째 일어날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었고, 새끼 여우의 발인 뭉글이는 걷다 지쳐서 잠시 탈진한 상태였다.
손우경과 파오는 눈만 뜨면 (말)싸움질을 일삼으며 이쪽 방향이 맞니 저쪽 방향이 맞니, 여의봉을 놓고 내 게 크니 니 게 크니(?) 하는 하잘것없는 신경전이나 벌여댔다.
게다가 유리 돔에서는 그나마 숙소가 있어 잠이라도 편하게 잤지, 이제는 모래 바닥 위에서 초롱초롱한 별들을 벗 삼아 노숙하는 일에 점차 심신이 지쳐가고 있었다. 일찍이 사막 마을에서 구입해둔 애벌레 모양의 초록색 침낭이 아니었으면 나의 상황은 더 최악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어제는 손우경이 내 옆에서 자려고 들기에 침낭으로 온몸을 꽁꽁 싸맨 채로 꿈틀꿈틀 애벌레처럼 기어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더니, 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비웃으며 나더러 대체 언제 나비로 변태할 거냐고 물어봤다. 저야말로 변태 같은 게.
그때 파오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체중을 실어왔다. 손우경이 주변을 살펴본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놈이 갑자기 왜 친한 척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무거운 팔을 걷어내기도 전에 놈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현아, 너도 내가 의심스럽냐.”
내게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질 줄은 몰랐기에 말없이 파오를 응시했다.
“니가 보기에도 내가 일부러 그 도시에서 너희를 못 빠져나가게 붙잡아뒀던 것 같냐고.”
“그걸 왜 저에게 묻습니까.”
“네가 손우경을 완전히 믿는 눈치길래.”
“……전 저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그간 행적이 제 눈에도 수상쩍은 건 사실입니다.”
파오가 흠 하면서 짧게 소리를 냈다. 내 몸에서 팔을 떼어내고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녀석이 조금 황당하다는 듯이 입가를 들어 올렸다.
“내가 오랫동안 지켜봐온 바로는 넌 생각은 많은 편이지만 의외로 단순하고 주변 사람을 통 의심할 줄 몰라.”
“당신이 수상하다고 방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분명 관음존자가 에메랄드 태블릿을 들먹이며 세상의 멸망이 어쩌고 떠들어댔었지. 근데 우리가 포타라카를 떠난 후로부터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알기나 해? 세상이 파멸할 징조는 대체 어디에 있지? 꼭 서쪽까지 가야만 그 징조를 찾을 수 있는 거라면 그냥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
“그건…….”
파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관음존자는 뭔가 금방이라도 큰일이 터질 것처럼 내 불안감을 유발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한 법칙들에 의해서 하루하루 별 탈 없이 잘만 흘러갔다.
“넌 바로 눈앞에 놓인 상황에만 집중할 뿐이지 더 먼 곳까진 내다보지 못해. 우경이 자식이 뭐라고 너를 홀려놨든지 네가 지금 가장 의심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녀석이다.”
“…….”
“너와 나 사이에 과거들은 잠시 묻어두고 작금의 상황을 잘 들여다봐. 우리 네 명 중에서 아돌프에게 가장 원한이 깊은 건 다름 아닌 손우경이야. 그런 놈이 아무리 지 머리에 칩이 박혀 있다고 해서 자신에겐 원수나 다름없는 관음존자의 명령을 그대로 이행해주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되냐.”
그렇기에 관음존자가 나를 마치 부적처럼 손우경의 옆에 찰싹 붙여두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파오 역시 몰랐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지만 둘 다 그에 대해선 입에 올리지 않았다.
“우경이가 탈출구의 존재 여부를 파악했듯이 나 역시 진작부터 그 장소를 알고 있었단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어. 확신할 순 없어도 놈과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알아차렸던 것 같아.”
“탈출구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면서 그동안은 왜 입을 꾹 다물고 있었습니까.”
“당분간 거기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누구 씨에게 충성스러운 너완 다르게 나는 아돌프의 명령을 듣는 척 그저 시늉만 했을 뿐이야. 어쨌든 그곳은 우리 외엔 아무도 없는 안전한 장소였고, 혹여 관음존자가 어떤 책략을 꾸몄다면 간파할 만한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
“내 예상대로 상황을 계속 끌어봤지만 이 세상엔 별다른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고 손우경도 그걸 눈치채고서 저 나름대로 시간을 벌고 있었어. 난 그 녀석이 네게 하는 행동들이 결코 진심일 거라곤 생각지 않아. 넌 이용하기 쉬운데다가 아돌프의 약점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전혀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설사 손우경이 날 이용한다고 해도 여기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게 있어 아돌프의 명령은 절대적이니 어떤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내 맡은 바 임무를 끝까지 완수해야 했다.
내가 말했다.
“당신의 말을 정정해드리자면 일단 저는 그분의 약점 같은 건 될 수 없습니다. 관음존자께서 저를 곁에 두시는 건 그저 변덕일 뿐이고 그 변덕은 언제든지 다시 회수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파오가 무슨 말을 꺼내려 했지만 내가 가로막았다.
“저야 이미 십년도 전에 사라졌어야 할 목숨이니 그걸 하루라도 더 연명할 수 있다면, 손우경이 저를 이용하든 혹은 당신이 내게 이런 식으로 혼란을 주든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현아.”
“그리고 손우경은 물론 당신의 말 또한 믿지 않습니다. 제가 사람을 믿지 못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셨던가요. 유리 돔으로 들어가기 직전, 다들 멋대로 기대를 걸었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쪽에게 단 한 번도 일방적인 기대를 건 적이 없습니다.”
갈수록 음성이 잦아들었지만 나는 기필코 마음에 담긴 말을 짜내야 했다.
“어린아이에게 했던 ‘약속’들이니 아마 그깟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셨겠지요. 당신이 제 살 궁리만 하고 있는 비겁자인 것도 모르고 저는 제게 했던 그 약속을 언젠가 지켜주실 거라고 생각하며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모든 걸 전부 내팽개치고 비겁하게 종단을 떠나기 직전까지도요.”
“…….”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이걸로 대답은 충분합니까.”
놈의 팔이 내게 뻗으려던 찰나 파오의 등 뒤로 손우경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파오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우경의 기척을 느낀 모양이었다. 특유의 유들유들한 미소를 입에 걸더니 여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래, 당신은 원래가 그런 사람이었지.
뒤늦게 나타난 손우경보다 더 신경 쓰였던 건, 자는 줄로만 알았던 오조가 뭉글이의 위에서 나와 파오 쪽을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단 점이었다. 쟨 언제 일어난 거지.
새끼 여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들켜서는 안 되는 장면이라도 보여준 것처럼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죄 지은 사람도 아닌데 공연히 오조에게 걸어가 배고프면 만두를 먹겠냐고 물었지만 웬일인지 먹을 거라면 사족을 못 쓰던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오조의 침울해진 표정을 살피는데 녀석이 작은 입술로 우물거렸다.
“삼장이랑 둘이서 얘기를 나누는데.”
“…….”
“내가 끼어들 수가 없어서.”
아무래도 이 아이는 나와 파오의 과거에 대해 꽤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분위기상 대화에 끼어들 수도 없었거니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얘기를 하는 것에 기분이 묘해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마땅히 해줄 말도 없어서 어색하게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더니 뒤에서 누군가 내 팔뚝을 움켜잡았다.
“뭐야, 이 분위기는.”
손우경이었다. 녀석이 오조를 쓱 내려다보다가 내게 눈을 돌리고 설명 좀 해보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놈에게도 딱히 해줄 얘기가 없었다. 일단은 화제 전환이 시급했다.
“근처에서 뭐 좀 발견한 거라도 있어?”
손우경이 미간을 모으며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뭘 발견하긴 했는데.”
놈의 알 수 없는 표정에서 어딘지 불길함이 스쳐 지나갔다.
“급하게 말을 돌리려는 널 보니까 혼자서 괜한 짓을 하고 온 거 같네.”
우리와는 좀 떨어져 있었지만 파오도 방금 내뱉은 손우경의 말을 충분히 들었을 것이다. 기분 탓일지는 몰라도 날 뚫어지게 보는 손우경의 눈빛이 강하게 책망하는 것 같았다.
“너 진짜 대단하다.”
“뭐?”
귓속말이 파고들었다.
‘정말 그러기가 힘든데 나 말고도 여러 사람한테 약점이 되니까.’
설마 내가 파오와 했던 얘기들을 다 들었던 건가. 다른 놈이면 몰라도 손우경이니까 가능한 얘기다. 손우경은 귓가에 한마디를 더 속삭이곤 다시 장난스럽게 웃었다. 순간적이나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서 파오에게 방금 자신이 둘러보고 온 장소로 가보자며 평소처럼 제안하는 손우경이 무척이나 꺼림칙했다. 내 얼어붙은 귓속에선 방금 놈이 내뱉은 말이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난 그 약속이 뭔지 모르겠는데 만일 그게 아직도 유효한 거라면, 반드시 그 약속을 했던 당사자를 니 앞에서 찢어 죽여줄게. 나도 ‘약속’하지.’
오조의 서툰 반응은 차라리 귀여운 편에 속했다.
손우경이 우리를 데려간 곳은 황폐한 원야 위에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고 사방에서 모래바람만 휘몰아치는 벌판 위에 저런 판잣집이 세워진 것이 참으로 괴상했으나, 더 엉뚱한 것은 판잣집 앞에 조그마한 간판이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 키치 만물상점 ]
붉은 페인트로 휘갈겨진 상호가 촌스럽고도 기묘한 인상을 주었다. 손우경이 여길 들어가 보자고 말했지만 다들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들어가는 문도 작았지만 상점 전체가 난쟁이 하나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였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손우경이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놈이 사라지고 난 뒤, 안이 잠잠해지자 이번엔 파오가 문을 열고서 판잣집을 방문했다. 손우경 하나로도 벅차 보이던 판잣집이 파오까지 집어삼키자 어느새 오조까지 용기를 내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벌써 세 명이나 저 안에 들어간 뒤 조용해지니 나도 이젠 별수 없어졌다. 장난치는 게 아니라면 직접 확인해보면 될 일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자 훅 하고 몸이 깊게 빠지는 감각이 들었다. 이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겉으로 봐선 아예 상상할 수도 없던 공간이 나타났다.
공간 자체가 엄청나게 넓은 건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허름한 분위기 속에서도 만물상이라는 상호에 걸맞게 여러 가지 물건들이 진열돼 있었다. 앞서 가게 안으로 들어왔던 세 명이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나를 돌아보며 다들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놈들도 뭔가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그런 우리를 단숨에 주목시킨 것은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어서들 오십시오.”
도무지 연령대를 짐작할 수 없는 창백한 인상의 남자 하나가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고는 우리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분명 방금까지는 저런 사람이 없었는데, 어디에 숨어 있다가 별안간 등장한 거지.
“여긴 뭐하는 곳입니까, 주인장.”
파오의 질문에 남자가 자기 뒤편에 걸린 상호를 가리키며 익살맞게 입을 쩍 벌렸다. <키치 만물상점>. 남자의 벌어진 입술 새로 톱니 같은 날카로운 이가 드러나, 보는 이들을 흠칫하게 만들었다.
“무엇이든지 저렴한 가격에 파는 만물상점이올시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들이니 아주 특별한 가격에 모시겠습니다.”
“……손님이란 게 있긴 한 겁니까.”
어쩌다 보니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만천하에 호언장담한 내가 의심에 찬 어조로 물어봤다. 주인 남자가 그라인더같이 생긴 기구로 자기 잇새를 지이잉 갈면서 빠르게 대답했다.
“여길 지나가는 손님이 그리 자주 있진 않습니다만, 약 몇 달 전에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어떤 물건 하나를 아주 흡족해하며 구매해 갔습죠.”
“그 젊은이가 뭘 사 갔는데요?”
“그보다 우선은 가게를 둘러보시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사야 할 물건이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만물상점이라면서 투명한 수정 구슬이나 거울, 지팡이 같은 마법용품들만 잔뜩 놓여 있어서 더 그랬다. 목재로 짜인 가판대 위를 성의 없이 뒤적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것의 재고 여부를 물어보았다.
“쉽고 간편한 요리, 전문가용 키트가 있습니까?”
주인 남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그런 종류의 일반 물건들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아깐 무엇이든지 저렴한 가격에 파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이죠! 저희 만물상점엔 손님께서 진짜로 원하시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존재하니까요. 다만 주의하실 점은 현금이나 카드 같은 것들로는 물건 값을 지불하실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물건 값을 대신해야 하죠?”
남자가 낡아빠진 탁상에서 저울 하나를 들고 와서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당신 안에 담겨 있는 영혼입니다. 아, 전부 다 주실 필요는 없고 원하시는 물건의 무게를 재서 엇비슷할 정도로만 떼어주시면 됩니다. 보통 30그램 정도의 가벼운 무게로도 완벽한 결제가 마무리되지요. 본점에선 평생에 걸친 소원이라든가 꿈의 성취, 연애, 부자가 되는 법, 타인을 향한 저주 같은 품목을 모두 원가에 팔고 있사오니 세상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원하는 것을 전부 얻어 가도록 하세요. 개인 맞춤형 물건들도 즉석에서 제작 가능합니다. 알라딘 씨 덕분에 대외적으로 잘 알려진 날으는 양탄자도 실은 저희 가게 물건이지요.”
당연히 헛소리일 텐데도 나도 모르게 혹할 뻔했는데 손우경이 곧장 픽 비웃으며 말했다.
“영혼의 무게가 원래가 30그램이 채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떠도는 속설이긴 하지만 약 21그램 정도라고.”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의 첫 손님 이후로는 어째 오시는 분들마다 자기 주머니를 열기 싫어하시는군요. 정 그러시다면 영혼 말고 다른 지불 방법이 있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그 젊은이도 자기 영혼을 주긴 싫다며 다른 걸 내놓고서 필요한 물건을 가져갔답니다.”
그런데 좀 전부터 오조 놈이 무슨 정서 불안에 빠진 애처럼 지팡이를 끌며 가게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뭘 줬는데요.”
“보기 드물게 아주 달고 맛있는 두려움이었죠. 그는 무명의 예술가였는데 다년간에 걸쳐 꽤 깊은 에너지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저도 더없이 만족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두려움을 전부 내려놓고서 한쪽 어깨에 끝없이 샘솟는 ‘창의성’ 보따리를 짊어지고 떠났습니다.”
“두려움을 내놓고 원하는 것을 얻어 가다니 그럼 그쪽 손해이지 않습니까.”
미친 사람의 헛소리를 더는 들어줄 요령이 없어서 나는 일행들을 둘러보며 슬슬 나가자는 눈치를 보냈다. 주인 남자는 그런 내게 묘한 시선을 건네며 흉측한 이가 드러나게 미소 지었다.
“그것이야말로 당신네들의 편협한 사고방식이지요. 계약이란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게 서로가 원하는 것들을 얻는 것에 주안점을 둡니다. 그 젊은이의 두려움은 상당히 맛있고 순도 높게 형성된 부정적인 에너지였습니다. 물론 정식 계약이 아니었으니 그 젊은이에겐 아무런 뒤탈도 없었습니다. 저는 다른 자들과는 다르게 양심적이고 언제나 상호 이득이 되는 거래를 하는 편이지요.”
“…….”
“제가 보기엔 이들 중에서 유독 청년 당신의 것이 굉장히 탐나는군요. 어떻습니까, 내게 당신의 영혼을 주고 나와 거래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거대하게 형성된 두려움 쪽도 괜찮습니다. 허나 당신에게서 그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 자기 자신을 간신히 지탱해주던 에너지가 전부 사라져버릴 테니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습니다. 아직은 바뀌어버릴 때가 아니니 만큼 당분간은 그걸 가지고 있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밖에서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가게라지만 내부 안에는 엄연히 조명이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뒤쪽으로는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손우경이 망설이는 나를 잡아끌며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어느새 문은 사라져버린 후였다. 오조는 아직도 정신없이 가게 안을 배회하는 중이었다. 주인 남자가 곰팡내 나는 음울한 말투로 우리에게 얘기했다.
“이미 제 공간에 발을 들인 이상, 가게 안에서 어떤 물건이든지 꼭 구입하셔야 합니다.”
파오가 남자의 멱살을 쥐고서 강하게 윽박질렀다.
“개수작부리지 말고 여기서 나가게 해줘!”
파오도 장신이었으나 해골같이 삐쩍 마른 저 주인 남자 또한 상당한 신장을 가지고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오랫동안 이곳에서 물건을 팔았지만 여기서 아무것도 사 가지 않으려 들거나 제게 위해를 가하려는 손님은 당신들이 처음입니다.”
왜 우린 들어가는 곳에서마다 매번 이런 어이없는 상황 속에 처하게 되는지 참으로 팔자 한 번 기구하다. 그때 여태껏 일언반구도 없던 오조가 지팡이를 질질 끌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럼 나하고 계약해.”
주인 남자의 인위적인 표정이 금세 싸늘해진다.
“당신은.”
“나와 계약하자고 말했어.”
“하지만 당신에겐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중 계약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의 것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이쪽 업계의 상도덕이니까요.”
“그 정도는 알아.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내 계약을 거부할 수 없을걸.”
오조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쾅 내리치는 순간, 바닥에서 새파란 빛이 새어나왔다. 이윽고 가게 전체에 걸친 복잡한 모양의 마법진이 그 빛을 따라 완성되었다. 당황한 낯빛으로 돌변한 주인 남자는 그 마법진의 중앙에 있었고 오조는 두 눈을 나른하게 내리뜨며 거만하게 입가를 들어 올렸다.
계약의 서가 발동하였다.
소환진의 주인인 나 오조의 부름에 따라
너의 모든 의식은 나와 결계 안에 속박되어
참된 주인을 따를 것을 명하노라!
주인 남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날카롭던 이가 점점 자라나고 눈에서 붉은 기운이 빗발치듯 뿜어 나왔다. 남자의 눈앞으로 계약서처럼 보이는 종이 한 장과 깃털이 달린 펜 한 자루가 생겨났다. 그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오조를 노려보았다.
-초환도 아닌 하찮은 소환진 안에 감히 나를 가두겠다니 그 용기가 가상하구나, 꼬마야!
평소 멍하기만 했던 오조의 얼굴에 자신에 찬 영악한 웃음이 덧그려졌다.
“운이 좋았어. 당신 같은 대단한 존재와 이렇게 쉽게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니.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으니까.”
보이지 않는 강제적인 힘에 의해 깃털 달린 펜이 남자의 손아귀에 쥐였다. 종이 안으로 손이 움직이자 남자의 얼굴은 이미 인간의 형상과는 거리가 먼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계약이 체결되었으니 너에게 뭔가를 부탁해야 하는데…… 갑자기 떠올리려니 생각이 잘 안 나네.”
소환진 안에 갇혀버린 악귀 형상의 남자가 오조를 물어뜯을 듯이 포효했다. 오조는 싱긋 웃으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계약자여, 나의 명에 응하라. 우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게 해줘. 음, 그리고 나 지금 무지 배고프니까 밖에 만두가 듬뿍 담긴 접시 하나만 준비해두고.”
애가 참 욕심이라곤 없는 놈이긴 한가 보다. 저 남자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오조가 대단한 존재라고 말한 걸로 봐선 사실 세계 정복이나 기타 등등의 소원을 부탁해도 됐을 텐데, 고작 밖으로 나가게 해달란 것과 만두 한 접시라니.
남자가 이를 악물며 격앙해서 소리쳤다.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의 굉장한 음성이었다.
-건방진 꼬마 녀석, 이 계약의 조건으로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오조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을 하며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까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내게선 가져갈 것이 없다고.”
낮은 음성으로 맛이 간 미친놈처럼 키득거리는 오조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낯설게 느껴졌다. 소환이나 마법에 관련될 때면 오조는 항시 목소리나 인격 자체가 완전히 변하는 듯했다.
소환진에 갇힌 남자가 고막을 찢어버릴 듯한 고함을 내지르자 우린 순식간에 바깥에 나와 있었다.
다 쓰러져가던 판잣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고 새끼 여우는 바닥에 세워진 지팡이에 몸을 기대며 이제야 한숨 돌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으, 다행이다…….”
손우경이 오조에게 얼른 물었다.
“방금 뭐였어? 그 남자, 인간이 아닌 건 처음부터 알았는데.”
“야, 남자라니? 여자 아니었어?”
파오가 그럴 리가 없다며 반문했다.
“무슨 소리야, 여자라니. 아돌프 자식하고 어딘가 닮았지만 나이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이상한 녀석이었잖아.”
“너 눈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냐? 분명히 섹시한 분위기를 가진 묘령의 여자였다고!”
내가 봤던 주인 남자의 모습과 성별 등이 전혀 불일치한 갖가지 후기들이 속출했다. 오조가 힘 빠진 얼굴로 그 둘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머리에서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대로 모습을 드러내니까 어느 쪽이든 맞아. 그러니 그만들 해.”
오조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 옆에 놓인 만두 접시를 자기 무릎으로 가져오며 방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아까 그 사람, 악마 메피스토였어.”
“메피스토?”
“진짜 이름은 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 박사와 계약을 맺어 그 혼을 손에 넣었다고 알려진 독일의 유명한 악마. 털이 무성한 몸에 부리와 날개가 있어서 어딘가 괴물 그리핀과 비슷하다고 한다. 인간으로 변신할 때에는 가늘고 긴 턱수염과 두 개의 뿔, 박쥐의 날개, 당나귀의 말굽을 갖는다라고 하는데, 거물이지만 나약한 인간들을 좋아해서 가끔 지상에 나타나 영혼을 얻는 대가로 어떤 계약을 맺곤 해. 뭐, 불멸의 존재니까 메피스토의 입장에선 일종의 유희거리 같은 거지만.”
오조가 접시에 담긴 만두들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그중 가장 토실토실한 놈을 골라내었다.
“저런 부업거리를 하는 걸 보니 지옥의 대공님께서도 요새 먹고사는 게 많이 힘든가. 그래도 저급한 악마들처럼 인간에게 나쁜 존재는 아니…….”
만두를 크게 냠 베어 문 오조가 한쪽 볼로 맛을 음미하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악마 새끼! 만두에 고기가 하나도 안 들었잖아!”
그렇게 노여워하는 오조는 처음이었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