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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 사이버틱한 항구 도시에는 뭔가 사이비스러운 종교가 있어 (15/24)

신서유기 02

12. 이 사이버틱한 항구 도시에는 뭔가 사이비스러운 종교가 있어

까치발로 선 새끼 여우가 목을 길게 빼고는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꼭두새벽부터 남쪽으로 정탐을 보낸 실프 정령이 벌써 꽤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팔을 앞으로 축 늘어뜨리고서 미동도 없이 어느 한 점을 응시하는 오조의 모습에서 사막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미어캣이 연상되었다.

음식 종류가 고작 여섯 가지에 불과한 <쉽고 간편한 혼합 요리>의 폐해 탓인지, 손우경이 매일 아침 불만 가득한 얼굴로 ‘저놈들이 조금만 덜 귀여웠어도 당장 껍질째 구워 먹었을 텐데’ 하고 으르렁거리는 바로 그 미어캣들 말이다.

한동안 사막 한가운데로 고집스럽게 시선을 내몰던 오조가 마침내 뭉글이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녀석은 치렁치렁한 로브 안에서 자신의 반쪽처럼 소중히 여기는 그리모어를 불쑥 꺼내 들더니 별안간 다급해진 얼굴로 마구 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왜 저러는지 그 이유야 모르겠지만 휙휙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거 일기장 아니랬는데 자꾸 까먹는다.

그때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손우경이 새끼 여우의 등 뒤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아마도 평소처럼 오조의 ‘위대한 마도서’를 몰래 훔쳐보기 위함인 듯하다. 이윽고 놈은 오조의 싸늘한 눈총세례와 거센 반항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미지 없이 그림일기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아니, 아니. 그림일기가 아니라 마도서였지…….

자신의 분신을 되찾기 위해 손우경과 무의미한 실랑이를 벌이던 오조가 이번엔 지팡이를 고쳐 잡고 악다문 잇새로 괴상한 언어를 읊조린다. 그러자 불길한 낌새를 느낀 손우경이 이계에서 뭔가가 소환되기 직전에야 순순히 가죽피로 된 그리모어를 돌려주었다. 새끼 여우는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그리모어를 꼭 끌어안더니 그 큼직한 파란색 눈동자로 매섭게 손우경을 노려보았다.

옆에서 상황을 계속 지켜보던 나는 얼른 손우경을 다른 곳으로 끌어당기며 조용히 타박했다.

“너 왜 어린애 상대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내게 얌전히 끌려가주던 손우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한다.

“넌 잘 모르겠지만 저 안에 꽤 재미있는 것들이 적혀 있거든.”

“그래봤자 하루 일과에 대한 시답잖은 내용들이겠지.”

혹은 일행들의 상대 평가라든가. 그나저나 내 동그라미는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을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녀석은 뜻 모를 미소나 지으며 아리송한 답변을 남겼다.

“아냐, 꼭 그렇지만도 않아.”

놈과 나의 걸음이 우뚝 멎은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손우경이 손가락 끝으로 뺨 언저리를 긁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했나.”

뭐가 그렇게도 분했는지 오조가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청승맞다 못해서 엄청나게 불쌍해 보였다. 나는 눈을 일직선으로 굳히고서 손우경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근래 들어 많이 예민해진 것 같던데 뒷수습 어쩔 거야.”

녀석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살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손우경은 방금 전 내게 한 말과는 달리 전혀 심각한 기색 없이 오조를 향해 선심 쓰듯 외쳤다.

“이리 와봐. 가져간 스펠 다시 돌려줄게.”

오조가 악을 쓰듯 소리 질렀다.

“어차피 필요 없어졌잖아! 완성하기 직전이었는데!”

“그것 참 아쉽게 됐네.”

“이건 완성하기 전에 타인에게 보이게 되면 아무 소용 없단 말야! 다시 방해하면 우경이 너라고 해도 가만두지 않겠어!”

손우경은 화가 잔뜩 난 오조에게 조금도 미안하지 않다는 얼굴로 태연하게 지껄였다.

“너 금방 변성 의식 상태였지? 너희 쪽 말로는 트랜스 상태. 아마 상부로부터 어떤 영감이 내려왔겠지. 마법사란 원래 그런 존재니까. 새로운 주문이라든가 그런 게 떠올랐던 모양인데, 제발 적당히 좀 하고 집어치워.”

마법사건 영감이건 주문이 어떻고 간에 오조가 긴 시간 동안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사막을 응시했던 이유는 내 짐작처럼 단순히 실프의 귀환이나 기다리던 게 아닌 듯했다.

“게다가 그런 거 후대에 남겨서 뭐 할 건데.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그, 그리모어는 우리 마법사들에겐 굉장히 귀중한 자산이자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오조 본인도 자기 말에 크게 확신이 없는 듯 보였다.

“아돌프가 너에게 남은 유예 기간을 약 오년 남짓이라고 했던 것 같지만, 지금 그 상태로 마력이 낭비되면 넌 서쪽에 도착하기도 전에 무덤자리부터 알아봐야 할걸.”

“…….”

“네가 잠을 많이 자긴 해도 여기서 뭘 꼭 해야 한다는 법은 없어. 저런 인간도 있으니까.”

손우경이 엄지로 쓱 가리킨 자리에는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여전히 세상모르고 퍼 자고 있는 파오 녀석이 있었다. 저 한량 같은 자식, 종단에서 쫓겨난 후론 빈대처럼 여자 등골이나 빨아먹으면서 기둥서방 노릇을 하며 살았겠지.

어쨌든 손우경의 말에 의거하여 잠시 생각해봤더니 겉보기엔 오조가 엄청 게으르고 잠만 자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 깨어 있는 시간만큼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에너지 소모가 많은 편이긴 했다.

먼저 수백 마리의 서비터들과 소환수인 뭉글이가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풀가동 중이었고, 이따금씩 4대 원소의 정령들을 동원하여 오늘처럼 먼 곳으로 정찰을 보낸다거나 야영 도중 모닥불을 피우고 혹은 일행들이 씻을 물을 제공해주는 등의 수고로움도 전부 다 오조의 몫이었다.

뿐만 아니라 얼마 전 간신히 빠져나왔던 유리 돔 안에서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일당백의 역할을 했던 것도 바로 오조였다.

본인의 주장처럼 문차일드라서 마나의 제한을 크게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력 자체가 본디 생명 에너지에 기반을 둔다는 걸 저 영리한 시한부 꼬맹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파오 쪽을 힐끔 보던 새끼 여우가 손우경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망설이길 거듭하다가 결국엔 침울하게 입을 열었다.

“……나 좀 자야겠어.”

오조는 로브를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쓰고 뭉글이의 등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서비터들은 주인의 주위로 속속들이 모여들더니 그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보초를 섰다. 내가 여태 관찰한 바로는 저들은 그리 대단한 지능은 없지만 주인의 감정 상태에 충실하게 동조하는 놈들인 것 같았다.

아주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 네 명이 아돌프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서쪽으로 떠나게 된 이유가, 앞으로 그곳에서 벌어질 세계 멸망의 징조를 찾아서 막기 위함이 아니라, 차라리 저 아이의 복수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오조에게는 어딘지 처연하고도 공연히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물론 새끼 여우의 사정을 다 알고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나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저 어린아이 혼자 감당하고 있다는 게 어찌 보면 안쓰럽기까지 했다.

언젠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죽음을 완전하게 선고받은 공포는 차원이 다를 것이 분명할진대, 오조의 정신력이 나 같은 놈보다 훨씬 강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으하암!

천박한 하품 소리가 내 애틋해진 정서를 처참하게 뭉갰다. 정녕 영면에 들어야 할 인간 말종은 다른 놈인데 늘 운명의 선택이란 참으로 모순적이었다. 파오가 바지춤으로 손을 집어넣고 벅벅 긁어대다가 나와 손우경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거시기를 만졌던 손으로 다정하게 건네는 인사에 기분이 참으로 께름칙했다.

잠을 잘 자서 반질반질해진 얼굴로 파오가 뻔뻔하게 말했다.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아부 게르다에 도착할 테니까 오늘은 좀 서두르는 게 좋겠어.”

잘 거 다 자고 일어난 주제에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내가 물었다.

“그 두꺼운 철면피는 대체 어디엘 가야 살 수 있는 겁니까.”

“우리 엄마 배 속일걸. 흔치 않은 한정판이라구.”

손우경은 달리 시비를 걸지 않고 파오에게 자못 정상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쪽으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던 예전 기억은 확실한 거야?”

“다른 데라면 모를까 군부 사내들에게 있어 아부 게르다는 마누라 몰래 비상금을 숨겨둔 장소나 마찬가지라고. 그런 신성한 곳을 잠시라도 잊어버릴 틈이 있겠냐.”

파오가 조금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손우경에게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근데 너 말야, 어지간한 세상 물정이라면 나 못지않게 빠삭한 놈이 어떻게 아부 게르다에 대해 잘 모를 수가 있지? 심지어 애초에 거길 가자고 말했던 것도 너잖아.”

돔 안에서 빠져나온 뒤부터 계속 남쪽 항구 도시를 찾아가자고 주장하던 손우경이 불과 어제 저녁, 파오가 아부-게르다의 황홀한 매춘 산업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영 못 알아듣는 눈치더니 도중에 재빨리 말을 맞췄다. 그리고 그걸 저 너구리같은 파오가 계속 수상쩍게 여기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손우경 또한 잡아떼는 일에는 선수였다.

“나야 오년이나 수용소에 갇혀 있었으니까 그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었나 보지. 더구나 어제 기대에 찬 목소리로 내게 아부 게르다 썰을 풀어보려던 사형을 실망시키고 싶지가 않았거든.”

파오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차갑게 대꾸했다.

“관음존자가 아부 게르다의 향락 시설을 공공연히 눈감아주면서 뒤로는 막대한 상납금을 받아먹기 시작한 게 벌써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야. 네가 보기에도 지금 네 말이 앞뒤가 전혀 안 맞는다고 생각 안 해?”

“뭐 믿기 싫으면 그렇게 하든가.”

파오는 한쪽 입가를 씩 들어 올리더니 일부러 표정까지 익살스레 구기며 손우경에게 엄포를 놨다.

“여기서 제일 이상한 건, 너는 분명 수천억의 예산을 쏟아부은 천도 프로젝트를 한순간에 백지화로 돌려놓은데다 종국엔 환영제야단의 수장마저 암살하려 들었던 극악무도한 범죄자로서, 특급 살인 미수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서 그동안 다섯 개의 검 수용소에 격리되어 있었단 거야. 근데 그 천도 프로젝트란 거, 사실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되긴 했었지만 원래 일 하나가 뻥 터지면 귀찮은 뒤처리는 싹 다 우리 군부에서 떠맡게 되거든?”

파오 녀석이 내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냈지만 싹 무시했다.

“그 사건 최고 관리자가 바로 나였는데 난 어째서 네 얼굴은커녕 이름마저 여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까?”

듣고 있던 내 심장이 다 조마조마했다. 왜냐하면 저 비슷한 의심을 나 또한 얼마 전까지 했던지라. 솔직히 파오와 손우경을 동시에 두고 판단했을 때, 미안하지만 파오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종단에서도 아무런 힘이 없던 나야 손우경의 존재 자체를 아예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군부 전체를 통솔하던 천봉대원수, 파오의 입에서 똑같은 소리가 나온다면 그것은 종단 내부에 보안 체계상 막대한 결함이 있단 뜻이므로.

“네가 그렇게 흔해빠진 얼굴도 아니고.”

“…….”

“그 정도의 실력이면.”

“…….”

“……무엇보다 우리 가문에서 널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답지 않게 조용해져 있던 손우경이 키득 웃으며 다시 반격에 나섰다.

“뭐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간 실력을 꼭꼭 감추고 있나 했더니 오늘따라 힌트를 너무 많이 주네.”

손우경이 나를 내려다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현아, 파오 사형이 아마도 대원수로 임명받던 날, 당일 저녁에 사형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지?”

놈의 질문에 기억을 되짚어보는데 파오가 아연실색하며 반문했다.

“어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오래전에 스승께서 내게 말씀해주신 적이 있지. 내가 유일하게 전수받지 못하는 몇 가지 비전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전부 류 씨 가문에서 나오는 기술들이라고. 그리고 그 류 씨 가문은 수십 년째 군부를 송두리째 독식하며 자기들끼리 독자적 노선을 걸으려 드는 종단 내 암적인 존재들이라고 말이야.”

손우경이 삐딱하게 눈썹을 꿈틀대며 경고하듯 쏘아붙였다.

“그 골치 아픈 류가 놈들은 자신들의 수장을 뽑는 자리에서 늘 새로운 수장 후보가 전대 수장을 가문의 모든 일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잔악무도하게 살해하는 내력이 있다더군. 하지만 워낙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귀 집단이라 그날 하루를 무슨 피의 전야제처럼 즐기기까지 한다던데.”

“…….”

“그게 정말인가. 암만 살해하는 대상이 자기 아버지라도 말이야?”

내내 무표정이던 파오가 풉 웃음을 터트리며 황당무계해진 얼굴로 말했다.

“야, 출처도 불분명한 헛소문을 가지고 사람을 천하의 패륜아인 양 매도해도 되는 거냐? 말이 너무 심하잖아!”

“글쎄, 딱히 불분명한 출처는 아니야. 그게 누군지 듣게 되면 아마 깜짝 놀라게 될걸?”

파오는 살짝 켕기는 구석이 있는지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깊은 한숨을 쉬며 토로했다.

“인마, 우리 아부지는 여든에 가까운 연세에 심장 질환으로 돌아가셨어. 네 말처럼 내가 대원수로 임명받던 날 저딴 썩어 뒈질 놈이 종단 군부를 책임지다니 환영제야단이 망할 징조라는 둥, 먼저 가신 가문 어르신들을 뵐 면목이 없다는 둥 온종일 시름시름 앓다가. 급기야 파오 저놈의 자식을 호적에서 당장 파버리라는 게 마지막 유언이었다구. 소문이 거기서 크게 와전된 것 같은데, 덕분에 한동안 죄 지은 놈처럼 울 엄마 보러 집에도 못 들어가고, 그땐 아직 티뷸라 궁 내부에 대원수 숙소가 마련되기 전이었어서 여관을 전전해가며 쪽잠 자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평소 저 인간이 얼마나 망나니짓을 많이 하고 다녔으면 자기 친아들이 나라의 국방을 책임지는 최고 직책에 임명됐음에도 그의 아버지가 종단의 안위와 조상님 걱정을 하다가 심장 질환으로 돌아가셨을까.

요즘 들어 부쩍 견원지간이 된 두 놈이 주거니 받거니 서로를 열심히 힐난하고 물어뜯는 동안,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류 씨 가문이라니.

나는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거기다가 이미 ‘류 씨’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아주 예로부터 우리 동양인들은 성씨를 너무 중하게 여겨서 어떤 가문의 출신이냐에 따라 파벌을 나누고서 세력 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특히 사만여 개의 돔 안에서 동양권 인구들 중 가장 많이 살아남은 한국과 그다음인 중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유독 성씨에 대한 편 가르기가 자주 일어났는데, 개중 외자 성을 가진 이들의 순혈 주장까지 가세되면서 그 외의 성을 가진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극심해졌다고 전해진다.

결국 석가여래께서 환영제야단을 다스리실 무렵에는 성씨 사용이 법으로 완전히 금지되었고, 지금은 동쪽에 사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이름에 ‘성’을 붙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권력을 가진 세도가들이 다른 성씨와는 함부로 섞이지 않으려는 몇몇 꼼수를 부렸는데, 자신들의 순혈을 지키기 위해 대대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같은 이름을 물려주는 기현상이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친척들끼리 ‘족보’라는 책을 은밀하게 공유하며 자신들의 성씨와 가문을 지켜나가기도 했다(다만 종단 역대 최악의 사태라 일컬어지는 아돌프의 집권 이후, 몇몇 가문들이 삼대가 고스란히 멸족하는 등 지금은 그런 현상들이 많이 누그러진 상황이긴 했다).

나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현’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왔고, 집안끼리 왕래가 잦았던 파오 역시 부친에게서 그 이름을 물려받았다. 사실 내가 덕망 높은 고승들을 많이 배출했던 우리 ‘현’ 가문에 먹칠한 것에 비하면 파오의 경우는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좌우지간 내가 성씨와 가문에 대한 사색에 잠기게 된 이유는 손우경이 방금 언급한 류 씨 가문의 괴이쩍은 풍문 때문은 아니었다. 파오도 웃어넘겼지만 그건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라고 생각하니까. 파오가 커가면서 점점 부친과 소홀해지긴 했어도 내가 어린 시절부터 쭉 지켜봐온 세월에 의하면 서로 신의와 애정이 없는 부자지간은 아니었다.

그보다 놈이 하도 인간의 범주와 상식을 벗어나는 놈이라 그간 신경조차 안 쓰고 있었는데―.

손우경은, 어떻게 ‘손’우경인 거야?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새삼 녀석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지난번에 파오가 은근히 주의를 줬던 것처럼, 내가 이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저 손우경일지도 모른다. 너의 이름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려 했지만 이미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손우경은 슬슬 이야기의 결론을 내려는 듯했다.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인데, 뭐 한 가지 정도는 말해줄게.”

녀석은 눈동자 가득 파오를 머금으며 말했다.

“당신도.”

놈이 옆에 있던 내 어깨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듯 거머쥐었다.

“그리고 이 녀석도.”

손우경은 아주 당연하다는 것처럼 못을 박았다.

“원래는 전부 다 내 손아귀에 있어야 할 것들이지.”

그 말을 들은 파오는 저 미친놈이 지금 뭐래? 하는 눈으로 날 쳐다볼 뿐이었다.

* * *

눈을 도무지 어디에 먼저 두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어제는 너무 늦게 도착했던지라 미처 도시 경관을 제대로 살필 틈이 없었다. 기절 직전인 몸을 이끌고 변두리의 허름한 건물로 들어가 숙소를 마련한 후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각.

현재 이곳의 풍경은 내가 혹시 별천지에 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자아냈다. 도시로 첫 진입하는 외곽 지대는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건축물들로 즐비했으나 점점 중심지로 들어설수록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산골에서 포타라카로 갓 상경한 동자승들처럼 촌스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려는 걸 최대한 억제했으나 결코 쉽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의 형태를 엇비슷하게 본떠 만든 인간 기계가 하반신에 달린 캐터필러 바퀴로 금속 벨트를 마구 굴려가며 지금 내 앞을 막 빠르게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 아부-게르다의 중심지에는 메탈 소재의 번쩍거리는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선 가운데, 한 가지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었다. 바로 나무와 꽃을 포함한 녹색 지대가 도시 경관과 어우러져서 무척이나 아름다운 거리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주변이 온통 사막 지대인데 어떻게 저리도 울창한 나무와 꽃들을 키워냈을까 궁금했다. 더불어 저 수많은 가로수와 화단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예산이 한두 푼 깨지는 게 아닐 텐데 하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것은 나의 착각임을 깨달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나무와 꽃들로 만개했던 거리의 풍경이 눈 깜빡할 사이에 야자수 나무와 조개껍질이 널린 모래사장으로 뒤바뀌어버린 것이 아닌가. 지금 헛것을 보나 싶어서 눈을 몇 차례고 비벼봤으나 어느새 시원스러운 파도 소리마저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 네 명 중 아부-게르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파오가 그런 나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놈의 말에 의하면 사실 저 식물이나 풍경들은 전부 다 홀로그램으로 처리된 일종의 눈속임으로, 다양한 종류의 영상 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전사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직접 얘길 듣고도 믿기가 어려워 야자수 나무를 만져보려 했지만 그만 내 손이 유령처럼 영상을 휙 통과해버렸다. 허나 간발의 차로 내가 만지려 했던 홀로그램 나무 위에서 통통한 야자수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진다. 아무래도 적당히 하고 좀 꺼져달라는 완곡한 부탁인 것 같았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때마침 내부가 모두 투명하게 드러나는 대로변의 몇몇 건물들이 시끄러운 기계 소음과 뿌연 스팀을 뿜어내며 힘차게 가동되기 시작했다. 저 건물들은 외부가 투명하게 만들어진 것에 반해 내부의 방들이 각기 다른 색상과 모양을 가진 블록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방문객이 찾아와 입구 옆에 달린 조이스틱과 버튼을 사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층을 1층으로 차근차근 내려놓는 방식인 것 같았다. 물론 리셋 버튼과 함께 동전을 투입하는 구멍이 있어서 그 안에 일정량의 돈을 넣으면 건물에서 자동적으로 퍼즐을 맞춰주기도 했다.

이미 건물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방이 한 칸, 두 칸 들썩일 때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웃어젖히며 고래고래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다들 뭔가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걸 멍청하게 구경하고 있던 나에게 이번에도 파오가 먼저 다가와 저 건물들의 명칭은 ‘테트리스’라고 알려주었다. 저 안에 들어가 있으면 마약 성분이 섞인 최면 가스를 마시게 되어 잠시 동안 한껏 들뜨게 된다는 얘기였다.

대종말 이후, 바야흐로 전 대륙에 걸쳐서 주술과 마법이 종교적인 테를 만나 하나의 통합 체제로서 완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곳에선 이미 구시대적 산물이라고 일컬어지는 과학과 연금술이 아부-게르다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보편적인 기술이자 학문이었다.

오래전, 석가여래께서 과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엄청난 해악을 가져다준다며 설법하시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과학을 구시대적인 산물이라고 폄하하는 걸까. 바로 대종말의 원인이 되었던 위험한 기술이기 때문일까.

내가 보기엔 가만히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면의 신성과 조우하는 행위가 훨씬 더 구시대적인 발상인 듯싶었다. 기의 그릇이니 마력이니 이런 구분 따위를 하지 않아도 과학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작용하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이 웅장한 기계 도시는 언뜻 보기엔 번잡하면서도 그 나름대로는 규칙적인 배열을 지니고 있었다. 축제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이 길거리에서 시끄러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바로 기계의 소관이었으며, 그것을 감상하는 것은 모두 인간이었다.

심지어 널브러진 걸인 옆에서 구걸을 위해 30초마다 한 번씩 허리를 굽히며 손바닥을 내밀고 있는 것도, 몸통에 피복 벗겨진 전선이 위험하게 드러난 어느 낡은 기계인형이었다.

그러니 이 장소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는, 주머니 속 지폐를 뿌리는 것뿐이었다.

음, 아무래도 과학이 주는 편리함의 맹점은 바로 이거였나 보다.

여하튼 거의 나만큼이나 거리 풍경에 넋 놓고 있던 오조는 어느 코끼리 형상 앞에서 걸음을 딱 멈추고서 열심히 구경하는 중이었다. 코끼리 형태로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그 커다란 고철덩어리는, 자동으로 녹음된 울음소리를 한 차례씩 흘려보내며 코 부분으로 동그란 공기방울을 퐁퐁 쏟아냈다. 새끼 여우는 그게 신기했는지 지팡이로 방울을 톡톡 터트려가며 간만에 어린아이다운 짓을 하고 있었다.

헌데 비단 오조뿐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 중에도 이 공기방울을 일부러 손으로 터트려 낚아채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손이 닿는 즉시 그 공기방울은 펑 터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풍선껌처럼 옅은 핑크색 흔적을 손에 남겼다. 문득 호기심이 일어서 그 근처로 다가갔다. 쏟아지는 방울 하나를 손가락으로 빠르게 쳐서 터트려봤더니, 갑자기 내 손등 위로 이상한 문구가 새겨져버렸다. 아마도 저 공기방울 자체가 일종의 전단이나 다름없는 듯했다.

아부-게르다의 위대한 맛! <라싸>

개업 기념으로 본 쿠폰 지참자에 한하여 오늘까지만 모든 메뉴가 반값!

손에 남겨진 문구를 지우고 싶으면 그 식당에서 나눠주는 특수 기름을 사용해야 된다는 작은 덧붙임도 적혀 있었다. 오조는 지팡이 끝이 엉망이 되자 잔뜩 울상이었고, 파오는 내 손등에 새겨진 문구를 들여다보더니 어딘지 착잡해진 표정으로 웃었다.

“네 덕분에 점심은 어쩔 수 없이 꼭 여기 가서 먹어야겠네.”

“점심 정도야 어디에서 먹든지 상관없잖아요. 아님 뭐 따로 봐둔 곳이라도 있습니까?”

“그 꼬장꼬장한 관음존자께서 내어준 종단 법인 카드를 처음으로 마음껏 그어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그러니 반값 점심 식사 따위는 내 계획에 전혀 없었단 말이야. 현아, 여기 어디쯤에 내가 예전에 잘 가던 고급 요릿집이 있는데…….”

“카드에 한도 걸려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관음존자께서 어떤 분인데 그걸 그냥 곱게 내어줄 리가 없죠.”

“한도가 얼만데?”

“……차라리 모르시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여차해서 돈 다 떨어지면 전 탈영이라도 할까 하고요.”

파오가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코끼리 콧구멍에서 퐁퐁 튀어나오는 공기방울을 화풀이하듯 손으로 터뜨려버렸다. 점심이 반값인 것은 쿠폰 지참자에 한해서니까.

“근데 우경이 녀석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파오가 언급하자 나도 잠시 잊고 있던 녀석의 존재가 떠올랐다. 도시 경관에 정신이 팔려 손우경의 부재를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놈을 찾았다. 거리마다 아부-게르다를 찾아온 관광객들과 현지인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넘쳐났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파오가 미어터지는 사람들 틈에서 손우경을 먼저 발견했다.

파오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손우경이 보였다. 다만 녀석은 혼자가 아니었다. 자그마치 세 명의 여자가 손우경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구릿빛 피부와 이마에 찍힌 빈디로 짐작컨대 아부-게르다 본토 여성들인 것 같았다. 거리가 멀어 저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리진 않았지만 손우경을 향해 무언가를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듯했다. 나와 더불어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파오가 꼭 나 들으라는 것처럼 상황을 왜곡해 설명했다.

“붉은색 사리를 걸친 여자가 우경이를 맘에 들어 하는 거 같은데? 봐, 얼마나 적극적으로 놈의 팔을 제 가슴으로 끌어당기고 있는지.”

“……길이라도 묻고 있나 보죠.”

“쟤네가 현지인인 거 같은데 뭐 하러 한눈에 봐도 외부 사람으로 보이는 놈에게 길을 묻겠어.”

“피부색도 비슷한 게 잘 어울리네요.”

손우경이 누구랑 뭘 하든지 난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여자들이 달라붙어서 자꾸 귀찮게 구는데도 전혀 곤란해하는 기색 하나 없는 게 짜증 나긴 했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붉은 천을 온몸에 휘감은 여자가 자기 손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손우경과의 키 차이를 재보는 장면을 끝으로 고개를 틀어버렸다. 놈의 커다란 손아귀라면 한 손으로도 움켜잡을 수 있을 듯한 개미 같은 허리를 가진 여자였다.

“옷 입은 것만 대충 봐도 꽤 있는 집 자식들일 거야. 여기 계집애들은 윤택한 생활에 싫증을 느끼는지,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이 지랄맞게도 대단하거든. 그래서 외지 남자에게 유독 흥미가 많더라구.”

“……그런 얘기, 저는 조금도 흥미 없습니다.”

“솔직히 잘생겼잖아? 우경이. 쟤들도 눈이 있겠지.”

“아무 흥미 없으니까요. 그만 좀 하세요.”

“자지도 엄청나게 크고. 안 그래?”

참다못해 폭발했다.

“제발 그만하라고요!”

고개를 돌려 파오를 노려보는데 놈은 의외로 짓궂은 표정이 아니었다. 도리어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놈은 고개를 숙여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더니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찰나였지만 오금이 다 저릴 만큼 살벌한 눈빛이었다.

“너도 그런 표정 지을 줄 아는구나 해서.”

얼떨결에 입술이 살짝 떨려왔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파오가 굳어졌던 안면 근육을 풀며 평소처럼 실실 쪼갰다.

“야아, 뭘 그리 긴장하고 그래. 사람 무안해지게.”

놈은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나란히 서더니 조금 떨어진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팔을 쳐내고 싶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느껴져서 그럴 수가 없었다.

“저 뒤로 쭉 나가다 보면 이 아부 게르다의 진짜 알짜배기가 나오지.”

“알짜배기라면, 설마 그곳 말입니까.”

“하긴 너도 소문 정돈 들어봐서 잘 알거야. 이 반대편에는 오후부터 영업을 시작하는 홍등가가 있어. 주머니에 돈만 두둑하다면 어떤 손님이건 황제처럼 대접해준다구.”

“…….”

“사실 홍등가라고 해봤자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거리에는 이상한 기구와 약을 파는 상점이랑 객실을 빌려주는 여관밖에 없으니까. 그 방이 싸구려냐 고급이냐의 문제지, 정작 황금 알을 낳는 거위는 저거거든.”

내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덜어지더니 놈의 손이 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리켰다. 그 끝에 걸린 것은 이곳의 모든 건축물들을 통틀어 가장 높고 큼직하게 쌓아 올린 어느 건물이었다. 그곳은 외관상으로는 그저 밋밋하기 짝이 없었으나 이곳 아부-게르다의 중심부에 우뚝 서 있었기 때문에 도시 어느 곳에서나 그 성냥갑처럼 생긴 건물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파오가 그것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인간 자판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이어질 다음 이야기에 주목했다. 워낙에 말이 많은 소문의 온상지인데다 이곳 아부-게르다 제일의 명소인 탓에 나 역시 단편적인 풍문들은 많이 접해봤다. 하지만 유경험자보다는 아무래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까 봤던 테트리스 건물처럼 돈을 넣고 자판기처럼 사람을 뽑는 기계야. 자판기 근처에 가면 몇몇 상품들이 본보기로 진열되어 있고, 그 밑에는 주문대와 물건이 나오는 출구 수백 개가 달려 있어. 그러니 아무 주문대나 가서 거기에 있는 조작 버튼으로 자신의 성적 취향과 이상형에 걸맞은 잠자리 상대를 조합할 수 있지. 머리카락 색부터 피부와 눈동자 색, 신장, 몸무게, 목소리, 체형, 성격, 속옷 타입…… 하물며 음모의 수까지도 말이야. 사내놈들 중에는 털 없는 민둥산을 좋아하는 부류도 꽤 많거든. 조심해야 할 게 있다면 일단 출구로 상품이 나오면 반품은 가능해도 환불은 되지 않는단 거야. 완료 버튼을 누르기 전에 다시 한 번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구.”

파오가 자꾸 민둥산 타령을 하며 기묘한 농담을 건넸지만 나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당연히 산 이름은 아닐 거고, 혹시 대머리를 말하는 건가.

“그리고 자판기 뒤쪽으로 가면, 거긴 취향이 좀 이상한 놈들을 위한 고약한 주문대가 있어. 맞거나 때리면서 흥분하는 가학피학성 변태 성욕자들 말고도 배설물을 먹거나 냄새를 맡으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분변 음욕자, 죽은 자를 시간屍姦하거나 딸딸이 치는 놈, 기형아나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만 좆이 서는 또라이,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성도착증 환자들을 위한 안성맞춤의 장소지. 듣기로는 거의 드문 경우지만 수간까지도 취급한다는 모양이야.”

혹시 그곳에 남색가를 위한 자리도 마련되어 있습니까?

하고 되물을 뻔했다. 내가 가보려는 건 당연히 아니었고 문득 어떤지 궁금해져서. 파오는 그 밖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더 들려주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 본심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오늘은 점심만 먹고 이쯤에서 헤어지자는 얘기야. 너야 우경이가 그런 데엔 발도 못 붙이게 할 거고, 그 녀석도 널 놔두고 다른 놈을 찾진 않을 테니까. 남은 한 녀석은…….”

말이 끊김과 동시에 파오와 눈이 마주쳤고, 우리 둘 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조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뭉글이와 더불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중이었다.

파오가 김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쟤는, 숙소로 일찍 돌려보내.”

그러면서 파오는 졸고 있는 오조를 가라앉은 눈빛으로 지켜봤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든 오조의 창백한 얼굴이 햇살을 받아 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불교도인 내가 이런 말을 꺼내긴 좀 그렇지만, 세상에 만약 천사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 꼭 저렇게 생겼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심지어 지나가던 행인들마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오조의 자는 얼굴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과연 파오는 요즘 무슨 생각과 어떤 마음으로 저 아이를 보고 있을까. 손우경과 나 못지않게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관계인 것 같다, 저 둘은.

둥. 둥. 둥―.

때 아닌 북소리가 공기 중으로 울려 퍼졌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파오는 어리둥절하게 서 있던 내 팔을 붙잡아 바닥으로 거의 쓰러뜨리다시피 했다.

“상황 파악 안 되냐. 너도 빨리 엎드려!”

“이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예배 시간이다. 사람들이 고개 숙인 방향에 뭐가 있는지 잘 봐봐. 여기 아부-게르다는 많은 신들을 숭배하는 다신교를 표방하지만 그중 제일 존경과 추앙을 받는 게 바로 저 죽음과 파괴의 여신인 ‘칼리’라고.”

좀 전까지만 해도 인파에 묻혀 눈에 띄지 않았으나 모든 이가 일제히 바닥에 엎드린 덕에 동쪽에 세워진 기괴한 형상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의 피부는 온통 검푸른 색이었다. 그 몸통에는 자그마치 열 개나 되는 팔들이 달려 있었고, 각각의 팔 끝에는 잘린 사람의 목과 피로 물든 칼, 방패, 올가미 등이 들려 있었다.

내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설마하니 칼리 여신에게 경배라도 드리자는 겁니까.”

“융통성을 좀 가져. 외지인인 우리가 아부-게르다에 들어왔으면 일단은 여기 법을 따라야지. 게다가 칼리 여신에게 예를 다하지 않는 놈들은 저 광신도들 손에 제물로 바쳐질 거다.”

다들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웃지 못할 장관이 펼쳐진 가운데, 나 혼자 고개를 슬쩍 치켜든 채 칼리 여신의 모습을 자세히 훔쳐봤다.

그녀는 심약한 사람이 한밤중에 맞닥뜨렸다간 실금이라도 해버릴 만큼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칼리의 짙은 머리카락 위에는 화려한 보석들로 장식된 황금 왕관이 얹혀 있었다. 그러나 목에는 해골이 주렁주렁 엮인 목걸이 하나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중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여신이라고 칭해지는 칼리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의 혓바닥을 가슴께까지 길게 내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충격적인 모습에 말문을 잃었는데, 칼리 여신은 혓바닥을 내밀고서 내게 조용히 속삭여왔다.

메롱.

* * *

길거리에서 공기방울을 이용해 홍보하던 그 <라싸>라는 음식점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문전성시까지는 아니었지만 가게 내부에서는 빈자리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이마에 꽃무늬 빈디를 그려 넣은 젊은 아가씨가 공손하게 인사하며 우리 네 명을 가게 안으로 안내했다. 1층의 4인 이상인 좌석은 모두 만석인 까닭에 자리를 찾아 한 층, 한 층 계단을 오르다 보니 어느덧 3층에 이르러서야 앉을 수 있었다.

종업원은 메뉴판을 건네주고 주문하려면 원형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을 세게 흔들어달라고 부탁하곤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자리에 앉기 전, 눈대중으로 세어보니 의자가 전부 여덟 개나 놓여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손우경이 먼저 착석하기를 기다렸다가 일부러 두 칸 떨어진 곳에 앉았다. 녀석의 옆자리나 맞은편의 마주 보는 자리는 왠지 꺼려졌다.

오른쪽 뺨으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한 채 메뉴판을 펼쳤다. 오전 내내 걸어 다니느라 배가 몹시 고팠는데 이상하게 안에 적힌 내용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거기 앉고 그래?”

“……이 넓은 테이블에서 굳이 불편하게 따닥따닥 붙어서 먹을 필요는 없잖아.”

“난 상관없어. 옆에 와서 앉아.”

그때 파오가 참견하며 말했다.

“현아, 너 지금 메뉴판 거꾸로 들고 있는데?”

“…….”

메뉴판을 제대로 고쳐 쥐는데 속에서 자꾸 짜증이 나고 마음이 울렁거렸다. 입맛도 그닥 없어서 밥이고 뭐고 숙소로 돌아가 잠이나 자고 싶었다. 그사이 파오가 손우경에게 물었다.

“아까 그 여자애들은 뭐였어?”

“별거 아냐.”

“근데 우경이 네가 여기에서 먹히는 얼굴인가 봐. 아니지. 예전부터 이 근방을 자주 와봐서 아는데 넌 확실히 여기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조건이긴 해. 지금도 저기 뒤에 앉은 여자 두 명이 계속 네 뒤통수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거든.”

메뉴를 훑던 내 고개가 자연스레 뒤로 돌아갔다. 직접 확인해보니 아까 길에서 봤던 그 세 명보다 더 성숙미가 느껴지는 여자들이었다. 둘이서 이쪽을 가리키며 연신 뭐라고 떠들어대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중 한 명이 생긋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앉아 있던 위치상 나나 오조, 파오를 보고 있던 건 아닌 듯했다. 그러다가 내게 손을 흔들던 그 여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저기요.”

승려의 신분으로 비구니를 제외한 속세의 여자들과는 인연 맺을 일이 없었던 내가 보기에도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편이었다. 아부-게르다 인 특유의 선이 진하고 강한 인상을 가졌음에도 우아한 분위기가 넘치는 전형적인 미인상이었다.

여자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손우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초면에 정말 실례지만, 괜찮다면 저희와 합석하지 않을래요?”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지 곧이어 여자의 손이 천연덕스레 손우경의 어깨에 얹혔다. 가냘픈 손가락이 녀석의 단단한 어깨를 유혹적으로 쓸어내린다. 어느새 두 눈은 여우처럼 휘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우리가 식사 후에 재미있는 곳들도 안내해줄게요.”

손우경이 담담하게 되묻는다.

“나만?”

여자가 잠깐 눈치를 보더니 바로 영리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 물론 여기 계신 다른 일행분들도 함께 말이에요.”

손우경은 피식 웃더니 여자에게 자기 쪽으로 귀를 가까이 대보라고 손짓했다. 여자가 생글거리며 얼굴을 가까이 기울이자 놈이 뭐라고 귀엣말을 건넨다. 잠시 후, 여자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더니 심한 모욕이라도 당한 얼굴로 몸을 홱 돌려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여자는 불같이 화내는 친구에게서 그 자초지종을 듣더니 기함하며 이쪽을 대놓고 쳐다봤다.

파오가 또 물었다.

“무슨 귓속말을 했길래 저런 반응이야?”

손우경이 턱을 쓸며 무심히 대꾸했다.

“……나는 너보다는 네 친구 쪽이 더 마음에 드는데 혹시 그 여자만 이쪽 테이블로 보내줄 순 없냐고 물어봤지.”

“허, 진심으로 하는 얘기냐?”

“그럴 리가. 다른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도 안 봤는데.”

녀석이 내뱉은 말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지만 그래봤자 아주 잠시뿐인 해방감이었다. 내 몸 어딘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불안과 초조함을 부풀리며 내 심장을 흔들어댔다. 마치 지진의 전조라도 미리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어째서 이런 불쾌한 감정에 휩싸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내 옆에 앉아 있을 오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따라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싶었는데. 새끼 여우는 테이블 시트에 이마를 박은 채 광활한 침 바다를 질질 형성하는 중이었다. 자는 애를 억지로 깨워 식당까지 데리고 왔더니, 여전히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듯하다.

녀석을 깨우려고 손을 막 뻗으려는 찰나 오조의 상체가 스프링처럼 테이블에서 튕겼다.

“우리 밥은 언제 먹을 거야, 대체?”

놈이 로브 소매 자락으로 축축해진 주둥이를 쓱 문지르며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내가 말했다.

“너 여태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아니야. 배고파서 기절했던 거야. 배고프다아. 그만 밥 좀 먹자, 응?”

파오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종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우리 옆 테이블의 주문을 받았던지라 한 여종업원이 부리나케 3층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호흡을 고르는 동안 파오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주문을 넣었다.

“방금 이 옆 테이블에서 시킨 것대로.”

“저, 손님, 옆 테이블엔 아홉 분이나 앉아 계신데요. 그걸 네 분이서 드시려면 양이 조금 많지 않을까요?”

“별걱정을 다 하네. 모자라면 더 시킬 테니까 일단 배 채울 수 있는 거면 뭐든지 갖다달라구.”

종업원이 잘 훈련된 미소로 화답하며 계단으로 급하게 방향을 트는데 파오가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종업원이 네? 하면서 돌아보자 놈은 한쪽 손을 펄럭이며 껄렁하게 말했다.

“……그전에 이 빌어먹을 문구를 지우는 기름인가 뭔가부터 당장 가져와.”

옆 테이블에선 우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듯했다. 그건 자기네가 장장 몇 십 분 동안 고심해 고른 주문 목록을 눈 뜨고 모방당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들뿐만 아니라 3층의 모든 사람들이 우릴 힐금거리며 수군거리는 중이었다.

종업원들이 테이블 주변에 쌓여가는 빈 접시를 치우느라고 벌써 다섯 번이나 왔다 갔다. 채소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전부 고기류만 위장에 착착 쑤셔 넣는 손우경과 음식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흡입하는 파오의 ‘위대’한 공헌 덕분이었다.

먹는 것에 무슨 한이라도 맺혔는지 몰라도 벌써부터 계산서 보기가 두려워졌다. 그동안 제대로 된 장소에서 묵었던 적이 없었기에 간신히 파산만은 면해왔던 모양이다.

물론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건 비단 놈들만이 아니었다. 나는 좀 전부터 내 몫의 식사를 마치고서 다른 사람들처럼 새끼 여우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나는 턱을 괸 채로 진심을 다해 물었다.

“오조야, 그렇게 맛있냐.”

기상천외한 소리까지 내며 음식을 냠냠거리고 먹던 오조 녀석이 젖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나, 이, 이런 건 단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어…….”

걸쭉하게 끓인 붉은 커리에서 포크로 푹 찍은 닭고기 조각을 새끼 여우가 얼마나 맛있게 음미하는지 정말 눈물 없이 지켜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래봐야 크게 대단할 것도 없는 메뉴였다. 이곳은 아부-게르다의 보편적인 전통 음식점 중 하나였고, 여기서 나오는 것들이라곤 끽해봐야 양념을 달리 한 갖가지 커리와 난, 양고기 및 닭고기를 굽거나 튀겨서 만든 고기류뿐이었다.

돼지같이 처먹고 있는 파오마저도 맛에 대해선 별 볼일 없다는 혹평을 아끼지 않았는데, 오조는 뭐라도 하나씩 집어 먹을 때마다 애가 너무 충격받은 표정을 짓는지라 내가 다 깜짝깜짝 놀라고 말았다. 식탐이 많은 건 알았지만 이 반응은 대체 뭐라고 해야 되지…….

오조가 밥을 먹다 말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에 탄두리 치킨 반 마리를 양손에 들고 주둥이로 게걸스레 밀어 넣던 파오가 순간 흠칫거렸다. 새끼 여우가 훌쩍대며 중얼거렸다.

“내 인생은…… 대체 뭐였을까…….”

오조는 아부-게르다의 한 음식점에서 인생 최대의 회의감을 맛본 듯했다. 그것도 커리 한 스푼을 떠먹으면서.

나는 새끼 여우가 환영제야단으로 망명한 이후를 곰곰이 떠올려봤다.

포타라카의 티뷸라 궁에서 나오는 음식들은 대부분 위장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자극적인 양념들을 최소화하고 주로 야채와 콩, 쌀 등의 식재료를 기반으로 하여 무척이나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나처럼 부처님께 완전히 귀의한 몸이 아니고선 다들 뒤에서 육류 등을 조금씩 입에 댔다. 나도 아주 어릴 적에는 몸이 몹시 허약해서 어머니께서 온갖 산해진미는 다 만들어 먹이셨기에 티뷸라 궁의 심심한 음식에는 그다지 큰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오조는 정말 이런 음식들은 난생처음 먹어봤단 얼굴로 감격에 겨워하고 있었다. 서쪽에서는 대체 뭘 먹으며 자랐기에 고작 이 정도 가지고 저렇게까지 슬픈 반응이 나오는 걸까.

게다가 엄청 예쁘게 생긴 애가 음식을 채 씹지도 않고 다람쥐처럼 입안에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울고 있으니 지켜보던 사람들이 우릴 무슨 유괴범 보듯이 쳐다봤다. 정말 돌아버리겠다. 그래요, 애한테 만두만 먹이면서 키웠습니다.

빈 접시를 치우러 왔던 종업원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남몰래 훔치더니 오조에게 요거트 한 잔을 서비스로 가져다주었다. 오조는 그것을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시다가 다시 훌쩍거렸다.

“이거 너무 시어…….”

종업원이 얼른 꿀이 담긴 잔을 가져다주며 사과했다.

“안에다가 꿀을 좀 넣어 드셔야 해요.”

그러곤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더니 종이로 포장된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염소젖을 발효시켜서 만든 버터란 음식이에요. 빵에 발라 드시거나 녹여서 기름처럼 사용할 수도 있답니다. 일주일 간 개업 기념행사로 모든 손님들께 1인당 하나씩 증정해드리고 있어요. 아까 저쪽에 앉아 계신 분께서 손에 새겨진 문구를 지우는 기름부터 가져다달라고 하셨는데, 본래 식사 후에 선보여드리는 깜짝 행사였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좀 늦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불편하셨다면 정말로 죄송해요. 아참, 그 글씨는 오직 이 버터 기름으로만 지워지도록 만든 특수한 성분이니까 버터 조각을 조금 떼어서 손등을 한 번 문질러보세요.”

머리가 제법 좋은 가게로구나. 손등에 강제적인 문구를 새겨놓고서 반값 식사 및 글자를 지우는 특수 기름으로 손님을 유도한 뒤, 사은품을 건네어서 손의 낙서를 기분 좋게 무마시키다니 말이다.

나는 내 코앞에 놓인 버터의 포장을 벗겨 손톱으로 내용물을 조금 긁어낸 뒤 손등을 문질렀다. 암만 문질러도 지워질 기미조차 안 보이던 홍보 문구가 단숨에 쓱 사라져버렸다. 밥을 다 먹고 맞은편에서 배를 두드리고 있던 파오에게 버터 한 덩어리를 던져주곤 곁에 앉은 오조에게도 하나를 나눠주었다.

“난 왜 안 줘?”

손우경의 물음에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버터를 쓱 밀어주었다. 그러자 손우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팔목을 잡더니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너 잠깐 나 좀 봐.”

놈은 계단 아래로 나를 끌고 내려가다가 중간에 마주친 종업원에게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종업원이 일러준 방향으로 주저 없이 나를 데리고 간 놈이 마침내 화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이어서 총 여섯 칸으로 나뉜 화장실 칸막이 가장 구석자리에 나를 집어넣더니 자신도 그 좁아터진 공간으로 밀고 들어왔다.

녀석과 이런 비좁은 공간에 같이 있다는 게 너무 불편했다. 얼굴을 쳐다보기가 싫은 건지, 혹은 쳐다보기가 민망한 건지. 나는 고개를 숙이고 어떻게든 손우경의 시선을 피하려 했으나, 허사였다.

벽으로 사정없이 밀쳐진 등이 아팠다. 눈동자를 녀석의 목에 고정했다. 놈이 고개를 더 숙여왔다. 이젠 눈을 감는 것 외엔 별다른 도리가 없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사나운 눈매가 내 얼굴을 갉아내듯이 집요하게 훑어 내린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뭐하는 짓이긴. 대체 이유가 뭐야.”

“……무슨 이유.”

“나한테 뭣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말을 해야 알 것 아냐.”

“너한테 화나지 않았어.”

녀석이 나에게 큰 실수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내가 화낼 만한 상황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녀석과 사소한 접촉이라도 일어나면 내 가슴에서 화르르 타오르는 어떤 감정 때문에, 그것의 정체를 대면하기가 무서워서 일부러 손우경을 무시하고 있었다.

손우경은 코웃음을 치며 얘기했다.

“그럼 티 나게 행동하질 말든가.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 나랑 한 번이라도 눈 마주친 적 있었어?”

“너랑 눈 마주쳐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어?”

손우경의 검은 동공이 삼백안처럼 눈의 윗부분으로 불쑥 솟아 올라갔다. 나를 응시하는 놈의 시선이 싸늘해진다. 놈은 한쪽 입가를 실룩였다.

“없지, 그런 법은.”

그와 동시에 녀석의 손이 내 바지와 속옷을 발아래로 너무 쉽게 끌어내렸다. 아침에 그동안 더러워진 제복과 밀린 빨랫감을 전부 세탁기에 넣어놓고 나와서 지금은 비교적 간편한 차림새였다. 얇은 면바지가 두 다리 사이에 걸리면서 내가 당황하는 사이, 옆 칸에 다른 손님이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녀석이 나에게 종용했다.

“엎드려.”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놈을 노려봤다.

“싫어.”

“도와달라고 소리라도 지르든가.”

한번 내뱉은 말은 융통성 없이 수행하려고 드는 손우경이 완력으로 내 몸을 틀어 벽으로 밀어붙였다. 놈의 손가락이 항문 주름을 더듬는다. 설마 이런 장소에서 내게 그런 짓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기에 몸 전체가 긴장으로 부들부들 떨려왔다.

녀석이 내 귓가에 속삭여왔다.

‘걱정하지 마. 적어도 여기선 안 할 거니까.’

적어도. 그건 안 할 생각은 없다는 말이었다.

놈은 한쪽 무릎을 두 다리 사이에 밀어 넣어 가랑이가 더 벌어지게 만든 다음 본격적으로 구멍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내게서 얕은 신음이 간헐적으로 흘러나왔고, 그때마다 혹시라도 옆 칸 사람이 눈치챌까 봐 온몸의 피가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손우경은 봐주는 것 없이 아래쪽을 난폭하게 길들여갔다.

잠시 후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그에 내심 안도하는 것도 잠시, 이번엔 손가락이 아닌 찐득거리는 뭔가가 항문 안으로 꾹꾹 쑤셔 넣어졌다. 너무 놀라 고개를 돌려서 보니 놈이 아까 식당 종업원이 개업 선물이라며 준 버터를 손으로 뭉갠 후 내 엉덩이에 통째로 밀어 넣고 있었다.

“너, 뭐, 뭐하는 거…….”

손우경은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참을성 있게 손안의 버터를 내 엉덩이 안으로 정성껏 흡수시키고 있었다. 좁은 구멍에 잘 들어가질 않는지 남은 손으로 입구를 쫙 벌린 후 말랑말랑해진 버터를 꾹꾹 쑤셔 넣었다. 마침내 버터가 거의 남지 않게 되자 손우경이 발목까지 내려온 내 속옷과 바지를 다시 입혀주고는 어깨를 잡아 돌려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손우경은 아직 버터가 묻은 손가락을 나직이 핥더니 곧 내 입가에도 가져다대며 말했다.

“핥아봐, 꽤 고소한 맛이 나는 윤활제라고.”

윤활제라니 무슨 소리…….

‘빵에 발라 드시거나 녹여서 기름처럼 사용할 수도 있답니다.’

이 미친 새끼가 진짜.

내장 안을 휘젓던 손가락이 이번엔 내 입안으로 침입했다. 혓바닥에 손가락이 휘감기면서 달콤한 버터향이 퍼지자 침샘의 분비가 더욱 활발해졌다. 입 밖으로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걸 지켜보던 손우경은 흥분감에 잔뜩 도취한 눈초리였으나 자신이 공언한 바가 있어 섣불리 행동하진 않았다.

녀석이 내 입안에서 손가락을 빼내고서 가볍게 입술을 쪽 맞추더니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부드러운 질감의 고체 상태긴 한데, 내가 널 침대 위로 데려갈 때쯤엔 아마 먹음직스럽게 잘 녹아 있을 거야.”

순간 힘이 빠져 주저앉으려던 걸 놈이 허리를 붙들어 받쳐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음성이 작위적이기 그지없었다.

“저런, 조심해야지.”

그 직후 손우경은 매정하게도 먼저 화장실을 휙 나가버렸다. 헌데 놈에게 툭하면 이런 심한 짓들을 당해도 결코 녀석이 밉거나 하지 않은 걸 보면 나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라싸의 여종업원들은 길가에 버려진 가련한 아기 고양이에게 우유라도 주듯 가게를 나서려는 오조에게 사탕이나 과자 같은 주전부리들을 바리바리 들려주었다. 오조의 로브 소매에서 자꾸 삐져나오는 사탕들을 녀석의 서비터들이 힘을 모아 챙겨주고 있었다. 무슨 먹잇감을 옮기는 개미 떼를 보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라싸에서 계산을 마친 우리는 오늘 하루 동안만은 각자 찢어져서 아부-게르다 안을 개별적으로 돌아다녀보기로 결정했다. 물론 오후에 인간 자판기 안의 그녀(들)와 아주 급한 약속이 잡히신 파오 옹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정된 사안이었다. 그래도 출발하는 날부터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로 지긋지긋하게 붙어 다녔던지라 가끔은 이런 개인적인 시간도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파오가 그럼 내일 숙소에서 보자고 인사한 뒤 인파 속으로 사라지자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오조가 느린 걸음으로 그를 뒤따라갔다. 오조를 붙잡을까도 했지만 나는 그저 두 사람의 방향이 같은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속여야 했다. 그야 지금 내 코가 석 자인데 남을 신경 써줄 겨를이 없었다. 오후부터는 각자 찢어지자고 했지만 나한테는 해당 사항 없는 말이었다.

손우경과 딱 둘만 남게 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리를 걸었다. 특별히 대화는 없었다.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들이 뇌리에 여전히 생생해서 손우경을 대하기가 한층 어색했다. 팔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있음에도 누구보다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 답답한 마음은 해소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이 꽤 늦은 점심을 먹긴 했지만 안에서 머문 시간이 상당히 길었던 모양이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순 없었지만 하늘빛이 많이 어둑어둑해진 게, 금방이라도 해가 저물어 사라질 것 같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한참을 놈과 보폭을 맞춰 걷다 보니 어느새 홍등가에 진입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거리의 끝에는 인간 자판기가 있었다. 그것은 쾌락의 달콤함을 무기로 마치 거대한 자석인 양 사람들의 심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꿀벌이 향기로운 꽃향기에 이끌리듯 모두가 그 자판기를 향해 넋 놓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손우경이 발걸음을 딱 멈추곤 내게 말했다.

“시간 낭비하지 말자.”

“…….”

“유리 돔에서 나온 뒤로는 한 번도 안 했잖아. 너도 슬슬 한계를 느끼고 있겠지만.”

“…….”

“솔직히 아부 게르다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내 머릿속은 너하고 그걸 할 생각밖에 없었어.”

간혹 잔인한 눈빛을 할 때도 있지만 놈이 이런 식의 이야기를 꺼낼 땐 어딘지 모르게 소년 같은 얼굴을 했다. 손등으로 차가워진 내 뺨을 슬그머니 어루만지며, 녀석이 말했다.

“네가 조르는 걸 기대했다간 숨넘어가겠다.”

나는 녀석의 입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머리에서 자꾸 나쁜 말들이 떠올랐다.

“있잖아.”

“…….”

“많이 급한 거면 너도 한번 저길 이용해보는 건 어때. 파오의 말론 ‘남자 전용’도 있다던데.”

인간 자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손우경의 뒤바뀐 표정을 보는 순간,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짧은 순간, 날 바라보던 그 표정이 잘 잊히지가 않는다.

인간 자판기를 향해 차갑게 돌아서는 손우경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 움직였다. 제멋대로 놈의 팔을 붙잡아버린 내 손이 당황스럽고 원망스러웠지만, 엎질러진 물이라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집스레 손우경의 팔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드는 내 이중적 면모가 스스로도 몹시 어처구니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뒤를 돌아보고도 남았을 녀석이 내 손길을 느끼고도 잠잠했다. 조금 전 내뱉은 말로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식당을 나선 뒤 처음으로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으나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것 외엔 달리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냥 투정 같은 거였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넌 절대 내게서 떨어지지 못할 거란 얄팍한 자만심 같은 거. 그리고 온종일 네 옆에서 내가 느껴야 했던 마음의 균열을 너 역시도 경험하길 바랐다.

때마침 땅으로 떨어지는 태양과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어둠이 한 번에 맞물리며 검붉은 물결을 만들어냈다. 노을은 낮과 밤이 동시에 만나 일으키는 짧은 순간의 기적이었다.

해 질 녘이 되면 더 화려해지는 홍등가의 간판들이 은하수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부-게르다의 홍등가에서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를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바쁘게 움직이는 인파 속에 오직 나와 녀석의 시간만 그대로 정지해 있는 듯했다.

손끝에서 땀이 흥건히 배어날 정도로 드물게 긴 적막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줬으면 좋겠는데 계속 침묵을 고수하는 손우경이 못내 야속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녀석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리깐 눈빛이 내 얼굴을 거쳐서 내가 꼭 붙들고 있던 본인의 팔로 흘러갔다. 잇따라 놈이 사막처럼 건조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왜 잡았는데.

애당초 그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면 이리 막막하게 시간을 끌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대답을 유보한 채 그저 주변 풍경을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손우경의 뒤편에는 아부-게르다 제일의 매춘 업소인 ‘인간 자판기’ 건물이 보란 듯이 우뚝 서 있었다. 이 거리를 찾은 사람들의 목적은 명백하다. 저 인간 자판기에 환전소에서 바꾼 코인을 넣고 자기가 원하는 이상형을 조합해 최적의 잠자리 상대를 뽑아내는 것.

저 거대한 자판기는 수천 명 이상의 매춘부를 고용하고 있었다. 인간의 취향은 저마다 다양하면서 어느 정도는 일치하는 부분―가령 스무 살 미만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지닌 동양인 여자아이―도 존재하기에, 선호도가 높은 인기 조합은 늘 품절 사태가 빚어진다고 한다(반면에 상대적으로 흔한 서양인 여성의 경우 항상 재고가 넘쳐난다나).

지금도 살이 뒤룩뒤룩 찐 중년 남자가 자기 허리의 반절도 안 되는 늘씬한 흑발 미녀를 뽑아 거친 숨소리를 내며 어두운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똑같은 인간임에도 자판기에서 물건을 뽑듯 매춘이 손쉽게 조장되는 현실을 애써 담담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나는 다시 손우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평소 어떤 상황에서도 희로애락의 평범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아서였다. 어려서부터 두려움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쳐서 더는 상처받지 않으려 스스로 감정을 거세해버린 나였다.

하지만 방금 전 내게 등을 돌리고 자판기로 걸어가려던 놈의 뒷모습에 별의별 해괴한 상상을 다 하고 말았다. 타고난 남색가이니 여자를 사거나 하진 않겠지만 문득 음식점에서 손우경에게 치근거리던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며 놈이 그녀와 발가벗고 뒹구는 장면이 그려졌다. 녀석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몸을 섞는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눈 안에서 불꽃이 번쩍 튀는 것 같았다. 가슴 한구석에서 지끈거리는 통증까지 느껴졌다.

그럼에도 내 서투른 표현 방식으로는 놈을 이런 식으로 붙잡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럽고 창피한 기분에 금세 고개가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그때 놈이 허리를 숙인 뒤 고개를 치켜들어 나와 불쑥 시선을 마주쳐왔다. 꼭꼭 숨겨왔던 감정이 단숨에 간파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엄마한테서 버림받기라도 한 어린애처럼.”

“…….”

“나 왜 붙잡았냐고.”

힘이 빠져 잡고 있던 놈의 팔을 스르륵 놓아버렸다. 이미 해답을 제시해준 질문이었다. 손우경은 내 입에서 가지 말라는 대답이 나오기를 원하고 있었다. 내가 느슨해진 틈을 타 그의 긴 손가락이 연약한 부위를 파고든다. 한쪽 뺨을 쓰다듬은 손가락이 귓가를 간지럽게 쓸어 넘기고, 허리를 감싼 손바닥은 금방이라도 나를 품 안에 끌어안을 기세였다.

슬금슬금 둔부를 더듬어오는 손길에 화들짝 놀랐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아래쪽이 상당히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아까 음식점에서 손우경이 엉덩이에 억지로 밀어 넣었던 그 ‘물건’ 때문인지, 녀석이 손으로 아래쪽의 감각을 일깨우자마자 미끌미끌한 액체가 하반신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많은 사람들이 활보하고 있는 거리 한복판에서 마치 손우경에게 희롱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엉덩이에서 흐르고 있는 건 놈의 정액 따위가 아님에도 마치 범해진 후의 더러운 기분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아니.

더러워진 기분이란 건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다. 내 몸은 이제 작은 자극이나 섹스를 연상시키는 상황만으로도 너무 쉽게 달아오른다. 밑에서 자꾸 정액이 스멀스멀 새어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흥분되는 기색을 감추려고 했지만 이성을 유지하기가 점점 더 버거워졌다. 엉덩이를 적신 액체의 존재를 내가 왜 이제야 눈치챘는지 모르겠다. 무슨 질 나쁜 최면에라도 걸린 듯했다.

어느새 어두워진 거리엔 조명이 하나둘씩 켜졌고, 그 불빛을 놈의 눈동자가 붉게 반사하고 있었다. 짐짓 여유로워 보이는 놈의 시선 저변에는 도무지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의뭉스레 도사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큰일이 벌어질 거였다. 언제고 내 목에 기습적으로 날카로운 독니를 박아 넣을 녀석이니까.

확실히 나 같은 놈이 연심을 품기엔 그리 적합한 상대가 아니었다.

놈은 입을 굳게 다문 내 얼굴을 이리저리 어루만지다가 길게 자란 앞머리를 정수리 위로 슬며시 쓸어 넘겨주었다.

“넌 이마가 보이는 게 더 예쁜데.”

“…….”

“특히 네가 누워 있을 때가 가장.”

귀라도 녹일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였지만 그 의도는 적나라했다. 그러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없어서, 목적이 빤히 보이는데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길 하나에 일일이 반응하는 내가 짜증 났지만 더 만져줬으면 하는, 모순적인 바람도 있었다.

녀석은 내 턱을 슬쩍 들어 올리더니 대답을 채근했다.

“할 말이 있으면 가급적 빨리 해줘. 네 말처럼 여긴 ‘아부 게르다’라구. 공연히 길바닥에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사타구니에선 예의 그 미끌미끌한 액체가 계속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손우경은 아까부터 어울리지도 않게 간질간질한 눈길로 날 바라보며 내 얼굴이나 만지작거리려 들었다. 아무래도 놈은 일부러 불합리한 상황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걸려든 상대가 잔뜩 애태우는 모습을 관찰하는 게 취미인 듯했다.

“정말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구석까지 몰아넣었으면서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는 척 심술을 부린다.

“…….”

내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놈의 손길이 우뚝 멎었다. 녀석은 내게 별 미련이 없다는 듯 손을 거두더니 픽 웃으며 최후 통첩을 보냈다.

“그럼 너도 여기서 좋은 시간 보내.”

기가 찼다. 정말로 손우경이 그 한마디를 달랑 남기고서 등 돌려 휙 가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리에 혼자 남겨져 이미 사라져버린 손우경의 빈자리를 보는데 속에서 괜히 울컥하는 심정이 치밀어 올랐다.

비록 이곳이 향락 산업의 꽃, 섹스 특구로 유명한 아부-게르다이며 내 쪽에서 먼저 놈과의 잠자리를 거절했다고 해도 어떻게 날 이대로 버려두고서 가버릴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나 이 자리에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을 수도 없어 잘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애써 움직였다. 힘들게 나아가는데, 저녁이라 더 늘어난 인파로 인해 자꾸만 주변 행인들과 어깨가 부딪쳤다.

서쪽으로 떠나온 후 얼마 만에 맛보는 고독인지 모르겠으나, 그토록 염원했던 것에 비해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속옷과 바지가 녹은 버터로 흠뻑 젖어서인지 걷는 내내 불쾌감만 가중됐을 뿐이다.

이 와중에도 날 두고 가버린 손우경의 행방이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온종일 아부-게르다의 여성들이 놈에게 넋을 놓는 걸 바로 코앞에서 목격했었고, 그때마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누군가 손우경을 쳐다보는 것도 싫었고 혹여 놈이 나 아닌 다른 이에게 시선을 내어줄까 봐 괜스레 전전긍긍하게 됐다.

그러면서도 이 끔찍한 심정을 내가 아는 어떤 단어로도 형언하기가 꺼려졌다. 가능하다면 내 마음에서 통째로 도려내고 싶을 만큼 추악한 감정이었다. 커다란 암 덩어리나 진배없다. 그러나 내가 감정을 무시하고 억누를수록 그것은 더욱 고개를 치켜들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잔뜩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웬 더럽고 으슥한 장소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아마도 매음굴이 아닐까 싶은데, 화려한 아부-게르다의 어두운 이면이 이곳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지저분하고 좁아터진 골목에는 전자 아편 기구의 전선을 머리에 연결한 채 마약에 찌들어가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구닥다리 입체 안경과 헤드셋을 끼고 길바닥에서 환각 섹스를 즐기는 정신병자들도 더러 있었다.

어쩐지 재수 없는 곳에 발을 들인 것 같아 서둘러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며 발길을 붙들었다. 혹시나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날 보며 생긋 미소 짓고 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터번을 쓴 남자였다. 전자 아편에 취한 건지 눈동자가 흐릿하게 풀려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분위기가 풀풀 풍겼다.

사실 이런 애송이쯤이야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공인된 중립 지대다. 환영제야단 소속의 내가 함부로 힘을 사용할 경우, 문제가 필요 이상으로 심각해질 수 있었다. 자칫 이곳 현지인에게 상해라도 입히게 되면 나중에 종단으로 복귀했을 때 시말서 한두 장으로는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생각들을 머금으며 조용히 물러나려던 차였다.

갑자기 터번의 남자가 덜컥 몸을 껴안아왔다. 육중한 무게가 실렸다. 단순히 몸을 기대는 정도가 아니라 불룩해진 제 아랫도리를 내 둔부에 살살 문질러대기까지 했다. 손우경 외에 다른 남자에게서 이런 식의 대우를 받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었기에 깜짝 놀라 온몸이 굳었다. 심지어 남자에게서 풍기는 체취가 역겹기 짝이 없었다.

“너 아까 자판기 거리 앞에서 키 큰 남자랑 딱 붙어 있던 애 맞지?”

“…….”

“둘이 그대로 오센 구역으로 가버릴까 봐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설마 거기서부터 날 따라온 건가.

“한참 실랑이했던 걸 보면 그 녀석이랑은 계산이 안 맞았던 모양이지? 괜찮아, 내가 더 좋은 조건으로 귀여워해줄 테니까.”

명백한 내 실수다. 아무리 빨래에 눈이 멀었어도 종단 제복조차 갖추어 입지 않고 이 아부-게르다를 돌아다닐 생각을 했다니. 너무 간만에 맛본 문명의 이기에 잠깐 정신이 해이해졌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이런 냄새 나는 새끼한테서 남창 취급이나 받고 말이다.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 뒷골목이니 단번의 일격으로 놈을 처리해버리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이런 버러지에겐 환살 부적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왼손에 정신을 집중하고 몸 안의 기를 끌어 모아 잠시나마 손끝을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다음 등을 돌려서…….

“!”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쳐왔다. 뒤돌아본 순간 남자는 바닥으로 픽 쓰러져버렸다. 여차하면 기절이나 시킬 요량으로 그의 급소를 노렸던 손이 무색해졌다. 남자를 대신해 내 시야를 채운 것은 바로 손우경의 잔악무도한 얼굴이었다. 처참하게 박살 난 남자의 뒤통수를 차마 내려다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방금 사람을 죽인 손이 내 얼굴로 음산하게 뻗어와 멱살을 쥐었다.

“……내가 그냥 내버려뒀으면 대체 어디까지 허락할 참이었어?”

협박이나 하자고 붙잡은 게 아닌지라 순식간에 숨통이 조여왔다.

“저 새끼 말고 차라리 네 얼굴이나 터트려버리는 건데.”

녀석의 다른 손이 내 바지 뒤편으로 쑥 밀려 들어와 이미 엉망으로 젖은 한쪽 볼기를 꽉 움켜잡았다.

“엉덩이에서 버터 기름이나 질질 싸는 주제에.”

모욕적인 언사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손우경은 버터가 녹아내린 구멍을 손가락으로 푹푹 쑤셔대며 막무가내로 굴었다. 바지가 거의 벗겨지다시피 무릎 사이에 걸렸고, 놈은 날 어두운 골목으로 밀어 넣고서 몸을 굽히고 엎드리게 만들었다. 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쳤지만 양쪽 손목을 뒤로 꺾여 잡히면서 어찌할 도리가 없어졌다.

“너보다 더 예쁘고 좆도 기막히게 빨아주는 애랑 해볼까도 싶었는데.”

벽으로 밀어붙여져 엎드린 자세 때문에 녀석의 손가락이 뒤쪽을 수월하게 유린하기 시작했다. 눈으로 직접 볼 순 없지만 버터가 윤활제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는지, 놈의 팔뚝까지도 쑥 미끄러져 들어올 태세였다. 내부를 한참이나 휘저어대던 손이 빠져나가자 이번엔 예고도 없이 더 굵고 단단한 것이 확 쏠려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지만 오히려 놈은 내 몸을 더 힘껏 꿰뚫고 들어와 단숨에 뿌리까지 삽입했다.

“그런 닳고 닳은 애들보다는 네 쪽이 좀 더 낫겠더라.”

내장 안을 관통한 녀석의 여의봉이 사정없이 쭉쭉 늘어나고 있었다. 흥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고문하기 위한 의도적인 움직임이었다. 그 차이를 뒤쪽으로 명백하게 느끼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손우경이 상체를 바짝 붙여오며 아픔에 신음하는 나를 제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덥석 끌어안았다. 놈이 본격적으로 허리를 거세게 움직이며 말했다.

“넌 아무리 박아줘도 이렇게 항상 처녀같이 굴거든.”

아래가 완전히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손우경과 몸을 섞었던 게 벌써 수십 차례인데도 이번만큼 아팠던 적은 드물었다. 울다시피 비명을 질렀지만 도와주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뒷골목에서 전자 아편에 취한 부랑자들이 히죽거리며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놈이 한 번씩 고환을 치댈 때마다 배 속이 몽동이 찜질을 당하는 것처럼 얼얼해졌다. 안에서 페니스의 크기를 얼마나 키웠는지 이대로는 항문 파열로 사망하거나 내장이 다 터져서 죽을지도 몰랐다. 저절로 무릎 꿇린 다리가 놈의 움직임에 휩쓸리며 바닥을 기다시피 했다.

놈의 움직임에선 애정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손우경에게서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너무 비참했다. 쾌감 없이 고통만 가득한 체벌 행위가 연달아 이어졌고, 내가 반쯤 탈진할 때쯤에야 사나운 불기둥이 뽑혀 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내 얼굴로 다량의 정액이 뿌려졌다. 정기를 주기 위해 안에다 사정해주지도 않았다. 하얀 액체가 입술 끝으로 흘러내렸다. 심지어 입을 다물 힘조차 없어서 입속으로 파고드는 정액을 속수무책으로 내버려둬야 했다. 그 맛이 혀끝에 아릿하게 감돌았다. 고약한 경험이었다. 비참한 걸 넘어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손우경의 화를 돋우고 놈이 발끈해서 나를 거칠게 안았던 건 여러 번이지만 이런 식으로 고통만을 남기고 끝낸 건 처음이었다.

손우경은 팔목을 잡아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들었다.

“일어나, 아직 안 끝났어.”

계집애들처럼 울음이라도 터트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흔한 눈물 따위가 고이지 않았다. 순간 손목을 붙들고 있던 손이 느슨해진다. 녀석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푹 꽂혀왔다.

“정말로 할 수만 있다면.”

“…….”

“널 죽여버리고 싶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놈이 바닥에 무릎을 굽혔다.

“하지만 그랬다간 네 썩어가는 시체를 끌어안고 내가 어떤 미친 짓을 벌일지 짐작도 안 가.”

“…….”

“그 정도야.”

바닥에 맥없이 널브러진 내 몸을 녀석이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회유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그냥 네가 포기해.”

이건 단순하게 포기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설마 서쪽까지 갈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

비슷한 생각을 했던 건 사실이지만 뉘앙스는 조금 달랐다.

“행여나 그딴 생각 품고 있다면 집어치워. 네 팔다리를 잘라서라도 내 옆에서 꼼짝 못하게 만들 거니까.”

녀석이 벗겨졌던 바지를 입혀주고서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는 나를 끌어안았다. 내 허리를 불안하게 더듬어오는 손길이 놈답지 않았다.

“날 그렇게 책망하는 표정으로 봐도 너한테 사과하지 않을 거야.”

내가 널 책망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고.

“나는 네가 나 말고 다른 남자랑 서 있는 것만 봐도 꼭지가 도니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늘 하루 종일 내 마음을 심란하게 휘저어댔던, 떠오를 듯 말 듯 애매하게 맴돌던 단어가 이제야 떠올랐다. 놈에게 달라붙던 여자들을 신경 쓰느라 속절없이 빼앗겨버린 내 에너지들이 지금에야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실성한 놈처럼 비식거리자 손우경이 인상을 쓰며 날 바라본다. 한 가지 확신이 드는데, 난 아무래도 미친 게 맞는 것 같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어 손우경의 뺨을 쓰다듬으며 비린 웃음을 지었다. 내 돌발적인 행동에 손우경은 아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야 이런 식으로 내가 먼저 놈의 얼굴을 만진 적이 없었으니까.

“그럼 나는.”

“…….”

“다른 남자랑 얘기할 때마다…… 너한테서 이런 취급이나 받아야 하나?”

분명히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 다른 손으로 놈의 바짓가랑이를 살살 더듬으며 불룩해진 앞섶을 꽉 움켜잡았다. 더 강한 흥분을 유도하기 위해 밭은 숨을 내쉬며 놈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너 때문에 굉장히 화가 나는데 그럼 이런 짓, 아무 데서나 해도 되는 거냐구.’

놈의 물건을 잡고 있던 손아귀 안쪽이 뱀처럼 꿈틀댔다. 아래에서 뭘 키우고 있는 건지. 하여튼 괴물 같은 자식.

손우경은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내게 확인해 물었다.

“정말로 화났어?”

“…….”

“내가 심하게 대해서?”

그 이유는 아니다. 네가 화난 것과 같은 이유라면 몰라도.

말없이 손에 힘을 더 주자 손우경이 눈가를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갑자기 요부처럼 구니까 좋긴 한데.”

녀석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를 힘껏 짜냈다.

……우리 이 얘기는 좀 나중에 하자.

나는 뭔가를 잡고 있던 주먹이 저절로 펴지는 신기를 봤다.

* * *

싸구려 여관방의 문을 채 열기도 전에 손우경이 뒤에서 다급하게 덤벼들었다. 당황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내 무방비한 입술을 한입에 집어 삼킨다. 혀가 밖으로 뽑혀나갈 듯이 아프게 빨아 당겨졌다. 입술은 금세 서로의 타액으로 범벅이 됐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손우경이 내 바지와 셔츠를 동시에 공략하며 성기와 유두를 애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떨어져서 옷을 다 벗고 시작하면 더 빠를 일을 몸을 딱 붙이고서 비비고 애무해가며 탈의까지 꾀하려니 진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몸에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게 된 것은 침대 위에 눕혀진 다음이었다.

놈이 내 배 위로 올라타선 머리 위로 셔츠를 벗어던졌다. 위에서 내리쬐는 조명에 탄탄하게 갈라진 놈의 복근이 섹시하게 비쳤다.

녀석이 상반신을 숙여 내 가슴 부위를 핥는 동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근처에 있는 아무 곳에나 급히 들어오느라 객실 상태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촌스러운 무늬의 벽지와 원색적인 침대 시트의 색상이 이 들짐승 같은 남자와 절묘하게 조합되면서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했다. 실로 우아하고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저속하고 천박한 행위를 벌이는 데 적합한 방이었다.

그때 도무지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페니스가 놈과 내 복부 사이로 불쑥 밀려들었다. 그것은 결국 내 턱까지 자라났고 탱탱하게 차오른 귀두 끝 구멍에선 말간 액이 찔끔찔끔 쏟아졌다. 손우경은 귀두로 내 입술을 문질러왔다. 입에 담기엔 지나치게 버거워진 사이즈라 빨거나 하진 않았지만 액이 쏟아져 나오던 귀두가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차라리 구강 성교를 해주는 편이 더 나았을 뻔했다.

갈라진 두 다리가 가슴 양옆으로 고정되었다. 손우경이 허벅지를 좌우로 틀어쥐고서 삽입을 위해 잠시 크기를 줄인 페니스를 내 항문 근처로 가져다댔다. 줄였다곤 해도 여전히 경악스러운 사이즈인 건 마찬가지였다.

“먼저 한 번 빼고서 천천히 제대로 할게.”

무성하게 자란 수풀 사이에서 굵직한 핏줄이 잔뜩 도드라진 검붉은 생명체가 내장 안으로 용솟음치듯 빨려 들어왔다. 초반부터 속도가 너무 빨랐고 놈의 건장한 허릿심을 정상 체위로 견뎌내기 버거워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 시트를 마구 쥐어뜯었다.

“아읏, 앗, 그만, 싫어, 그만해!”

하지만 내장 안이 규칙적으로 마찰되어가자 고통은 점점 쾌락으로 변모해갔다. 음란한 목소리로 흐느끼듯 신음할 때마다 손우경은 허리를 힘차게 돌리면서 더 거센 자극을 가하려 들었다. 아래가 있는 대로 뻥뻥 꿰뚫리며 공중에 뜬 두 다리도 요동을 쳤다. 어느새 놈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손톱을 세우며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리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언제나 경건한 마음으로 예불을 드리고 혼자서는 불경스러운 자위 한 번 시도하지 않았던 내가, 지금은 커다란 사내 아래 깔려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양물을 몸으로 가득 받으며 교성이나 지르는 꼴이라니.

배 속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몸 어딘가에서 황홀한 기분이 피어올랐지만 한편으론 일종의 죄책감이 들었다. 승려 신분이면서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해버린 것 같아서. 더불어 정말 이 남자 없이는 앞으로 살아갈 자신이 생기지 않을 듯해서. 하지만 그 금기에 반하고 있다는 인식이 오히려 말초 신경을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중간부터는 서로 부둥켜안고 절정을 향해 몸부림치다시피 했다. 놈이 상체를 들어 올리더니 마지막 피치를 올리려는 듯했다.

눈앞이 새하얘지며 슬슬 끝이 보이는 듯했다. 조금만 더 하면 이제…….

“!”

극락의 문턱을 막 넘어서려는 순간, 아랫도리가 불쑥 조여졌다. 눈을 뜨고 밑을 보니 손우경이 분출 직전인 내 페니스를 가죽 끈 같은 것으로 묶어버리고 있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철저한 타의에 의해 제어당한 사정의 고통이 훨씬 강력하게 몰려들었다.

“무, 무슨 짓이야.”

손우경은 내 엉덩이에 아직 제 좆을 박은 채로 내 부풀어 오른 성기의 밑기둥을 세심하게 묶는 것에만 신경을 쏟았다. 손발을 비틀어대며 괴로워했지만 그래도 놈은 그만둬주지 않았다. 거길 꼼꼼하게 묶는 작업이 끝나자 이번엔 내 발목을 붙잡아 직선으로 들어 올렸다. 놈이 내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 갈기며 느닷없이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주사기로 방금 때린 볼기에다가 무언가를 투여했다. 엉덩이로 차가운 것이 주입되는 게 느껴졌다.

그런 뒤 놈은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얘기했다.

“넌 아까 정신없어서 간판을 자세히 보지 않은 모양인데, 여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반적인 여관이 아니야.”

주사를 맞아서 따끔거리는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슬슬 쓸어주며 손우경이 계속 말했다.

“슬슬 가져올 때가 됐는데.”

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며 아까 카운터에서 카드를 긁어주던 험상궂은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양손에 동물을 가둬놓는 철창 우리와 목줄, 그리고 정체불명의 기구들을 들고 들어왔다. 문 앞에 그것들을 전부 내려놓은 그는 무뚝뚝하게 즐거운 시간 되시라고 말하더니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손우경이 그 물건들을 가지러 가는 동안 나는 페니스에 묶인 가죽 끈을 어떻게든 풀어보려 애를 썼다. 그러나 고환과 뿌리에 걸쳐 몇 바퀴나 단단하게 감긴 끈을 공연히 잘못 건드려 아래가 더 조여졌을 뿐이었다.

손우경은 끙끙거리는 내게 허튼짓 해봤자 소용없다며 귀띔했다.

“그거 칼 아니면 절대 안 풀린댔어.”

정말이지, 극락과 지옥을 넘나드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은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나는 침대 위에 바짝 엎드려서 내 하반신을 부여잡고 있었다. 손우경이 그런 나의 고개를 들어 올린 후 손가락 하나로 턱을 받치며 생글거렸다.

“착하게 주사 맞았으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이제 약 기운이 돌 거야. 물론 아래가 편해지는 약은 아니고 여긴 콘셉트 여관이라서 아까 주인장이 이걸 추천해줬어.”

놈은 내 목에 개목걸이 같은 가죽 벨트와 목줄을 채웠다.

“주인장 말로는 권태기인 커플들이 찾아와서 가장 즐겁게 놀다 가는 콘셉트라던데. 일명 ‘주인님과 개’라고. 네가 엉덩이에 맞은 주사는 아부 게르다의 연금술사들이 만들어낸 작품이야. 자기 자신을 마치 발정난 개처럼 느끼는 약이래. 효력은 약 두어 시간 지속된다던데?”

손우경이 별안간 목줄을 침대 밑으로 끌어당기더니 폭군처럼 군림했다.

“미안, 고의였어.”

바닥에 제일 먼저 부딪힌 턱 때문에 눈앞에서 별이 보였다.

“오늘의 너는 별로 다정하게 안아주고 싶지가 않아서.”

놈의 발가락이 내 중심부를 꼬집으며 비열하게 웃었다.

“하윽……!”

“가엾어라. 얌전하게 굴면 곧 해방시켜줄게. 참, 그 약 지속 시간은 두어 시간인데 내가 여분으로 주사기를 몇 개 더 받아 왔거든. 그러니까 좀 이따가 강아지 흉내를 잘 못 내면 네 그곳도 계속해서 풀어주지 않을 거야.”

약 기운이 도는지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정신이 또 가물가물해지는 와중에 생각했다. 난 왜 하필 이딴 놈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 걸까 하고.

손우경은 침대 가장자리에 허벅지를 벌린 채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고분고분해졌다. 그가 시키는 대로 손우경의 사타구니 앞에 야한 자세로 엎드려 발기해 솟아오른 남자의 좆을 혓바닥으로 정성껏 핥아대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게는 목줄뿐만 아니라 개의 꼬리 같은 털이 엉덩이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항문으로 밀어 넣어진 부분은 흉측한 모양의 딜도였는데, 내부에 모터가 장착되어 있어 내장에서 덜덜거리며 연신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엎드린 자세로 손우경의 거대한 좆을 빨아댈 때마다 그 반동으로 꼬리의 털이 허벅지를 간지럽게 스쳐 지나갔다.

“귀두는 혀끝을 살살 돌려가며 핥고 자지 기둥은 사탕을 빨아먹듯이 애무해줘.”

페니스의 두께에 턱이 빠질 것 같았는데 나는 그의 주문을 순종적으로 이행했다. 헌데 내가 뭔가 잘못 했는지 갑자기 머리카락이 휘어잡혔다. 머리통이 앞뒤로 흔들렸다. 목젖에 귀두 끝이 닿을 때마다 구역질이 났지만 손우경이 또 화를 낼까 봐 참아야 했다. 근데 왜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지? 그러던 중 정액이 입안에서 터져 나왔다. 손우경은 내게 그걸 한 방울도 뱉지 말고 전부 삼키라고 말했다. 나는 손우경의 기둥을 양손으로 잡고서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정액을 꿀꺽꿀꺽 삼켰다. 입안에 더 이상 액체가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쪽쪽 빨아 먹자 손우경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현아, 내 좆물이 그렇게 맛있었어?”

보라색으로 부어오른 아랫도리가 한계에 임박했다. 바닥에 대고 성기 끝을 열심히 문질렀더니 손우경이 날 자기 무릎 위로 올려놨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손우경의 배에 내 하반신을 미친 듯이 비벼댔다. 해갈되지 않는 갈증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제, 제발.”

무엇을 부탁하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혼자 헉헉거리며 반응 하나 없는 손우경에게 들러붙어 있는데 무슨 목석하고 같이 있는 줄 알았다. 페니스도 묶여 있는데다 엉덩이에서 딜도 겸 바이브레이터까지 쉼 없이 움직여대서 그런지 잔뜩 달아오른 몸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음란함의 절정이었다. 발정난 개도 이런 짓은 안 할 텐데, 기어이 바닥으로 내려가 엉덩이를 놈에게 들어 올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손우경은 그런 나를 방 한구석에 있던 작은 철창에 가둬버렸다. 그 안에 웅크린 채로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밖에서 관찰하듯 지켜보았다.

“주사 한 방 맞았다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하나.”

차가운 중얼거림에도 나의 간절함은 꺾이지 않았다. 아래를 꽁꽁 묶은 가죽 끈을 풀어서 어서 빨리 시원한 해방감을 느끼고 싶었다. 아니, 그것보다 놈의 가랑이 사이에 매달린 저 커다란 좆으로 내 뒤쪽을 마구 쑤셔주길 고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손을 뻗으며 애원하는 눈으로 놈을 바라봤다.

손우경이 말했다.

“넣어줄 테니까 그 안에서 내 쪽으로 구멍이나 가져다 대.”

좁은 우리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엉덩이를 크게 치켜들고 간신히 철창에 바짝 붙어 섰다. 손우경은 내 엉덩이에 박힌 딜도를 빼내더니 철창 위로 허리를 숙이고는 자기 좆을 두 개의 철창 사이로 밀어 넣었다. 딜도로 은근하게 자극되어 있던 엉덩이에 손우경의 진짜 페니스가 들어오자 마침내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손우경이 철창을 사이에 두고 몇 번 삽입해보더니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일단 물건을 빼낸 다음, 우리를 통째로 걷어냈다.

내 목줄을 잡아채서 침대까지 끌고 간 손우경은 나를 매트리스의 측면에 기역자로 걸쳐놓고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후배위를 시도하려 했다. 이미 뒤가 많이 헐거워져서 손우경의 페니스가 단번에, 아무 무리 없이 푹 꽂혔다. 그는 내 허리를 양손으로 붙들고 신나게 제 좆을 박아댔다. 얼마나 힘이 좋은지 침대가 조금씩 밀려나갔다. 찰싹거리며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를 질척하게 때려댄다. 내장 안에 들어찬 이물감은 이미 나와 한 몸이 된지 오래였다. 그러나 단단하고 기다란 육봉이 내벽의 가장 민감한 부위를 은근슬쩍 피해 가는 기분이었다. 그 안쪽을 더 세게 문질러줬으면 하는데 그저 닿을락 말락 하게 스치고 지나가버리기 일쑤였다.

“아앗!”

잠시 툭 닿기만 했는데도 전기에 감전된 듯이 짜릿함이 아랫배부터 발끝까지 내달렸다. 나는 급한 마음에 소리쳤다.

“거, 거기 더 문질러줘!”

하지만 손우경은 부러 못 들은 척했다. 애가 타서 허리를 흔들며 어떻게든 안쪽에 놈의 페니스를 닿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자 손우경이 목줄을 잡아당기며 내 자세를 바꿨다. 이윽고 놈의 품에 안긴 채 섹스를 이어나갔다. 성기가 터져나갈 듯이 팽창했지만 이상하게 고통이 커질수록 쾌감도 증폭되어가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과 체액으로 젖어 끈적끈적했다. 손우경에게 붙어서 엉덩이나 뚫리고 있지만 지금은 영원히 이 순간과 기분이 지속되길 바랐다. 나와 맞물려 있는 저 단단하고 뜨거운 몸이 기분 좋았다. 내 정신 상태는 점점 더 아득해졌고, 손우경은 체위를 여러 번 바꿔가며 아까 예고한 것처럼 나를 거칠게 안아댔다.

은회색 눈동자에 투명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놈이 내 배 속 깊숙이 처박았던 페니스를 급박하게 빼내려 들기에 그의 몸을 팔과 다리로 꽉 껴안으며 외쳤다.

“빼지 말고 안에다가 싸줘!”

손우경은 내 소원대로 안에다 질퍽하게 방사하더니 몸을 마구 흔들어댔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쥐어짜 내고서 지쳐버린 몸을 내게로 푹 쓰러트린다. 엉덩이 안으로 상당한 양의 정이 뿜어 나와 흡수되자 전신이 에너지로 충만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이걸로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

나는 손우경의 분신을 아직 물고 있던 항문에 힘을 줬다. 그러자 손우경이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픽 웃는다.

“넌 어떻게 된 애가 약만 썼다 하면 천하에 둘도 없을 창부처럼 변해.”

금세 팔팔해진 손우경의 아랫도리가 미약한 불씨만 남아 있던 내 몸에 장작개비처럼 던져졌다. 불길은 금세 온몸으로 번졌다.

손우경이 뜨끈해진 페니스를 쭉 뽑아냈다. 얼마나 많은 양의 정액을 내부에다 쏟아냈는지 그중 얼마는 안에서 미처 흡수되지 못하고 동그랗게 벌어져 다물리지 않는 구멍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 그 창피한 장면을 손우경이 놓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쉴 틈 없이 가해졌던 아찔한 쾌감 속에서도 사정하지 못하게 꽁꽁 묶어놓은 내 분신 때문에 나는 이제 숨조차 쉴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방금 전 말도 안 되는 체위를 소화하다가 다 쉬어버린 목으론 말 한 마디조차 뻥끗할 수 없었다. 심각한 호흡 곤란에 이르러서야 손우경은 내 양다리를 잘 붙잡으라고 말하곤 내 성기와 고환을 묶고 있던 가죽 끈으로 칼을 가져다댔다.

툭, 툭.

끈이 풀리면서 억눌려 있던 욕망도 한꺼번에 분출됐다.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순간 정수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며 귀두 끝에서 공중으로 총알 같은 정액이 분사되었다. 나는 그대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고여 있던 정이 방사되자마자 전신이 나른해졌다.

손우경은 초라하게 시들어버린 내 분신을 입으로 애무해주었다. 세우려고 든다기보다 간지럽게 핥아대는 게, 살짝살짝 키스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발정난 개처럼 된다던 약 기운이 이제 거의 가신 후라 뒤늦은 후회와 수치심이 거센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목도 다 쉬어버렸고, 참기 어려운 근육통에 삭신이 다 쑤셔왔다. 내 목에 채워졌던 벨트와 줄을 풀어주며 손우경이 목덜미를 핥아댔다. 목에 자국이 남았다고 말해주었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다. 내일 아침 거울을 보기 전까지는 모든 걱정을 잠시 유보해두고 싶었다.

“많이 아팠어?”

녀석이 목을 어루만지며 물었지만 나는 멀거니 천장만 올려다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약에 취해 있었다곤 해도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고 또 어떤 행동을 했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그냥 날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는데 상대방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손우경은 내 옆에 머리를 괸 채 모로 누워서 말했다.

“너한테 잘 대해주고 싶어.”

“…….”

“근데 그게 잘 안 돼.”

말이 많아진 걸 보니 본인도 오늘 나한테 어떤 몹쓸 짓을 했는지 알긴 하나 보다.

“네 얼굴은 가학 심리를 불러일으켜.”

기도 안 찼다. 계속 개처럼 네발로 기게 만들면서 차마 입에 담기도 거북한 말들로 나를 능욕했던 주제에, 그게 다 내 얼굴 탓이라니. 너무 뻔뻔하지 않은가.

동이 트려는지 방 안이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피차 뭐라고 이야기할 기운도 없었지만, 지금은 별생각 않고 푹 잠들고 싶었다. 눈을 스르륵 감자 놈이 나에게 팔베개를 해줬다. 귀찮게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걸 내버려두고 잠의 세계를 영접하려고 하는데, 내 귓가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반쯤 선잠이 들었던 터라 처음엔 뭐라 지껄이든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려고 했다.

-근데 그거 알아?

손우경이 악마처럼 속삭였다.

-너에게 놨던 그 주사약, 실은 지속 시간이 30분도 채 안 됐던 거. 부작용 때문에 원래 일인당 하나씩밖에 안 줘.

파도처럼 밀려오던 잠기운이 일순 싹 가셨다. 잇따라 작은 웃음소리를 감지한 내 귀를 뜯어내고 싶었다.

* * *

아침에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손우경이 불룩해진 이불 속에서 내 사타구니를 핥아댔다. 결국엔 한 번 더 합체하다가 기절하고는 느지막한 시간이 다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손우경은 숙소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근처에 급한 볼일이 생겼다며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같이 있는 것보다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할 것 같아 내버려뒀다. 전날 저녁부터 아침까지 눈만 뜨면 섹스를 해댔는데도 녀석의 정을 흡수해선지 여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죽을 만큼 쑤시던 허리의 통증도 자고 일어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증발했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우선 새끼 여우를 찾으려고 건물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녀석은 통 보이지 않았다. 녀석의 방을 비롯해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본인 숙소 창틀에 앉아 아부-게르다산 잎담배를 뻐끔거리던 파오에게 오조의 행방을 물었지만, 놈은 내가 묻는 말엔 대답도 안 하고 역질문 공세를 퍼부어댔다.

“어젯밤에 목에다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현아?”

“우경이 자식이 설마 목 조르는 기벽이 있는 건 아니겠지?”

“목을 조르면 순간적으로 질이 수축돼서 남자 입장에선 물건이 쪼여져 더 큰 쾌감을 느낀다고 하던데, 넌 항문이라도 수축되는 거야?”

내 귓구멍에 억지로 쓰레기를 퍼 담을 필요는 없어서 문을 닫고 돌아서려는데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질문을 차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 질문으로 맞대응하는 것이다. 그것도 상대방이 대답하기 곤란할 만한 것으로 말이다. 관음존자 밑에서 이런 일을 수도 없이 당했다. 재차 문을 열고 들어가 놈 근처까지 걸어갔다.

“오조 어딨냐구요.”

파오가 내 얼굴로 매캐한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대답했다.

“걔를 왜 나한테 와서 찾아.”

“……직감적으로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아서?”

“이놈이나 저놈이나 생사람 잡는 건 마찬가지군.”

“예나 지금이나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떼는 건 여전하시군요. 어제 오조가 당신을 뒤따라가는 걸 봤습니다. 이제 됐습니까?”

파오가 담뱃재를 창 밖으로 탈탈 털어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따라오는 걸 봤으면 네가 좀 말리지 그랬어.”

“…….”

“잠깐 상대해줬던 건 사실이지만 그다음엔 걔가 어디로 갔는지 나도 잘 몰라.”

“상대라뇨, 애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파오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크게 나무랐다. 장난으로 받아치지 않는 걸 보니 분명 뭐가 있긴 한 듯한데.

“내가 왜 너한테 그런 얘기까지 시시콜콜 털어놔야 하지? 어제 저녁 누구랑 어디 가서 뭘 했냐고 물어보면 너도 자세하게 대답해줄 건가? 목덜미엔 묶인 자국이나 달고 다니는 주제에.”

“……실례했습니다.”

문을 닫고 나오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실은 파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켜줘야 하는 법이다. 게다가 나 자신도 떳떳치 못한 주제에 남을 파렴치한 것으로 취급했으니. 잘못 행동했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내가 어제 저녁 손우경과 변태 같은 행위를 벌였던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사이 오조가 혹시 돌아왔나 싶어 새끼 여우의 방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한숨을 쉬며 다시 나가려는데 침대 우측에 달려 있는 벽장에서 익숙한 색상의 로브 끄트머리가 문 틈새로 삐져나와 있었다. 숨소리를 죽이고 조심조심 걸어가 벽장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선 새끼 여우가 뭉글이를 껴안은 채 고이 잠들어 있었다. 어디 멀리로 가버린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왜 이렇게 불편한 장소에서 잘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침대에 눕혀주려고 녀석을 안아드는데, 오조의 눈꺼풀이 조용히 들려 올라갔다.

내가 물었다.

“너 왜 이런 데서 자고 있어?”

오조가 속눈썹이 길게 자란 눈꺼풀을 반쯤 내리뜨고서 대답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삼장.”

“어?”

“오늘도 밥 먹으러 어제 그 집 또 가면 안 되나.”

오조는 기운이 없는지 축 늘어져선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구나…….”

무엇을 말하려는지 그 의중을 제대로 이해할 순 없었지만,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오조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

“내가 조금만 더…… 살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러면 여태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을…… 더 많이 해볼 수 있을 텐데…….”

그 말만 남겨놓고 잠든 오조를 벽장 안에서 주인을 위해 손발을 잔뜩 웅크린 채 기다리고 있던 뭉글이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 숙소에 묵게 된 것은 오늘로 벌써 이틀째인데 침대 시트는 누군가가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옛날 생각이라.

* * *

모두들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우린 현재 아부-게르다에 놀러 온 게 아니었다. 당초 쿠르게오르 사막을 횡단하여 ‘균열’의 장소인 무간도를 직선으로 통과하자는 황당한 주장을 밀고 나갔다가 여러 난관에 부딪쳤지만, ‘서쪽’으로 가야 한다는 본래 목적엔 변함이 없다. 중간에 그 괴상한 유리 돔 안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 그렇지, 그 일만 아니었다면 벌써 서쪽 땅을 밟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본래 목적을 상기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내가 유일한 것 같다. 그간 너무 오래 굶었던 파오는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었고, 오조는 아부-게르다의 맛집 탐방을 제 남은 인생의 새로운 목표로 삼으려는 듯했다.

그리고 손우경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있었다. 파오 말에 의하면 뭘 열심히 찾고 있는 것 같다는데, 새벽에 남의 침실로 불쑥 침입해 옆에서 잠시 눈을 붙이다가 아침 일찍부터 나가버리니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오늘도 어김없이 인간 자판기로 출근 도장을 찍으러 가는 파오를 막아섰다. 파오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며 내게 떨떠름하게 말했다.

“대장부의 앞길은 함부로 막아서는 게 아냐.”

“서쪽에 가실 마음이 있긴 한 겁니까?”

“음, 지금 생각해보니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인생 뭐 있나, 다들 한 번 왔다가 가는 거지. 그러니까 가려던 길 좀 계속 가게 옆으로 비켜줄래?”

“그러지 말고 오늘은 저랑 같이 항구에 다녀와주십시오. 조만간 서쪽으로 출항할 예정인 선박들을 좀 알아봐야겠습니다.”

“배를 찾아보려면 항구에 갈 게 아니라 무역선을 지휘하는 선장을 찾아봐야 해. 여객선 같은 관광 목적의 선박이 아니라서 따로 배편을 알아볼 만한 장소가 항구 안에는 없을 거야. 일단 선술집 같은 데 가서, 넌 술 종류는 쥐약이니 귀엽게 주스라도 한 잔 시켜놓고 정보를 수집해보든가.”

거기까지 말해준 파오가 날 지나쳐서 가던 길을 마저 가려고 했다. 난 얼른 그의 팔을 잡아챘다.

“같이 좀 가자니까요!”

“내가 왜? 귀찮단 말야. 정 알아보고 싶으면 너의 우경이보고 같이 가달라고 해. 왜 걔하고는 꿀이나 쪽쪽 빨아 먹으면서 나한테는 성가신 일을 떠맡기려고 하냐구.”

하, 꿀 같은 소리 하네. 비유가 왜 이리 거슬리냐.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인간한테 무슨 부탁을 합니까. 그리고 평소에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면서 저하고 배 좀 알아보러 다녀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파오가 흠 하며 날 지그시 내려다봤다.

“이래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들은 대화가 안 통하는 법이지.”

“그딴 식으로 생색이나 내실 거면 그냥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빈정이 상해 돌아서려는데 파오가 날 붙잡는다.

“너, 내가 방금 여객선 개념이 아니라고 했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구. 저 항구에 널린 배들은 모두 무역을 위한 초대형 화물선이나 간이 운송선이잖아. 만일 네가 저 배들의 선장이라면 우리같이 신원도 불분명한 사람들을 자기 배에 태우겠냐?”

거기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나는 얼른 반문했다.

“그래도 여객과 화물을 동시에 취급하는 화객선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파오는 하하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서쪽으로?”

“…….”

골치가 아파왔다. 나는 부루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아부 게르다엔 뭣 때문에 온 겁니까.”

파오는 아랫입술을 삐쭉거리며 낸들 아냐는 식으로 말했다.

“잠시 착각했나 본데 내가 오자고 한 거 아니야. 손우경이었지.”

“그래서, 시도해봤자 안 될 일이니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 손 놓고 계시겠단 얘긴가요. 관음존자께서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되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라고 해. 제 아무리 관음존자라도 이 넓은 대륙에서 날 어떻게 찾아내겠어. 내가 지난번에도 분명 말했었지? 세상이 멸망할 징조 따위는 없다니까. 이왕 아부 게르다에 왔으니 네 퍽퍽한 인생에도 기름칠 좀 해가며 즐기란 말야.”

“그게…… 만약 진짜라면요.”

파오가 긴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너라면 이 세상이 쫄딱 망해버려도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은데.”

“…….”

“하긴 너도 어찌 보면 참 대단한 놈이지. 티뷸라 궁에선 큰스님이었던 네 부친의 설법을 듣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을 텐데. 종단 내에서 그토록 존경받던 네 아버지가 그런 꼴을 당했는데도 관음존자 밑에 여직 붙어 있다니 말이야. 나라면 그렇게 남의 눈치 보이는 가시방석에서는 단 하루도 못 버텼을 거야.”

예전부터 남의 아픈 구석을 아무렇지도 않게 푹푹 찔러대는 이 남자가 정말 싫었다. 죽을힘을 다해서 버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일도 오늘과 같은 하루가 반복될 것을 미리 알고서 기대도, 희망도 없이 살아왔을 뿐이다. 그나마 표면적으로는 관음존자의 가피를 받는 특별한 존재였기에 주위 사람들에게서 이유 없는 괴롭힘을 당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나 완전히 투명인간처럼 취급됐었으니까.

뭐 이제는 다 지나가버린 옛일이다.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파오에게 다시 물었다.

“파오, 당신 말이 다 사실이라고 칩시다. 그럼 관음존자께서 굳이 우리 네 명을 묶어서 서쪽으로 보내시려는 까닭이 뭐죠? 뭔가에 수긍하려면 그에 걸맞은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첫날부터 이미 견적이 딱 나오지 않던? 종단의 군사적 비밀을 모조리 꿰고 있는 전직 미남 대원수와 관음존자에게 원한이 깊은 죄수 출신의 문제적 인물, 또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를 상관으로 모시고 있는 말단 직원까지. 앞으로 파란과 하극상을 일으킬지도 모를 잠재적 불안 요소들을 싹 제거하려면 이렇게 한곳에 모아두는 편이 편하겠지.”

전직 미남 대원수? 하.

“……그럼 오조는요.”

“길잡이. 그리고 어차피 죽을 놈이니 함께 버리는 패겠지.”

파오는 침묵하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넉살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너무 전전긍긍하지 마. 세상은 어차피 순리대로 흘러가게 돼 있으니까.”

하지만 옆에서 아무리 별별 얘기들을 다 쏟아낸대도 내게는 양 갈래로 나뉘는 선택지 따윈 없었다. 나는 모 아니면 도가 될 수도 없었다. 외길 인생은 늘 외로운 법이다.

이 정도 이야기에 금세 마음이 흔들릴 거였으면 오늘 이때까지 제대로 버티지도 못했을 거다.

“……얘기는 잘 들었으니 전 이만 배를 구하러 나가겠습니다.”

파오가 혀를 끌끌 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말도 안 되게 고지식한 놈이군.”

놈은 마뜩찮다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다가 넓은 등짝을 보이며 말했다.

“따라와. 이곳 지리에 대해서라면 적어도 너보단 잘 아니까.”

궁전같이 으리으리한 건물 앞에 멈춰 선 나는 파오에게 의아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오늘 하루는 정보들을 수집하러 아부-게르다 곳곳을 힘들게 돌아다닐 것을 예상했는데, 파오가 제집 찾아가듯 거리와 골목들을 능숙하게 휘저으며 이곳까지 날 안내했기 때문이다.

“여긴 어딥니까.”

“앞으로 약 삼주 후에 서쪽으로 출항하게 될 마하데바 호의 선장이 살고 있는 집이다.”

“그걸 어떻게…….”

“이 정도야 껌이지. 이 도시에 들어온 둘째 날 선술집에 잠깐 들렀거든. 술에 떡이 된 선원들에게 물어봤더니 슬금슬금 알려주더라고.”

내 계획을 뻔히 파악하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이거지. 상대가 시치미를 뗄 때에는 같은 방법으로 응수해줘야 했다. 나는 달리 내색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출항이 삼주 후면 너무 늦지 않습니까.”

“그게 현재로선 가장 빠른 배야. 서쪽으로 가는 배들은 그리 많지도 않을뿐더러 심하면 넉 달에 한 번씩 항해 일정이 잡힌다며 선원들 불만이 폭주하던걸.”

“그래서 이제 어쩔 거죠?”

“뭘 어째. 들어가서 선장하고 담판을 지어야지.”

길이가 삼 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건물 입구에서는 웃통을 훌떡 벗은 남자 열댓 명이 창을 든 채 보초를 서고 있었다. 우리가 입구로 들어서려 하자 당연히 그 보초병들의 저지를 받는다. 파오가 대강의 사정을 설명한 뒤 선장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대답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파오는 내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봤지? 세상은 정말 각박하고 냉정한 곳이라는 걸.”

나는 파오를 옆으로 밀치고 보초병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서 내 바지 주머니를 뒤져서―혹시나 현금을 쓸 일이 있을까 해서 며칠 전 출금해둔―꼬깃꼬깃해진 만 원짜리 지폐 열 장을 꺼내 그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내 돈을 받아 든 남자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 안으로 슉 빨려 들어갔다.

나는 파오를 돌아보며 일부러 한쪽 눈을 찡그리며 얘기했다.

“그러네요. 세상은 정말이지 돈 없는 자들에겐 각박하고 냉정한 곳인 것 같습니다.”

파오가 허를 찔린 듯 입을 쩍 벌렸다.

잠시 후, 뇌물을 받았던 남자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걸어 나왔다. 내가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만나주겠다고 하시던가요.”

“선장님께선 출항 전에는 부정을 탄다고 외부인을 함부로 만나지 않으셔. 그래서 내가 선장님께 너희 사정을 설명드리고 혹시 일반인 승객 네 명을 마하데바 호에 태워줄 수 있는지 여쭤봤는데…….”

“여쭤봤는데?”

보초병이 도움을 청하듯 주위의 동료들에게 긴급한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순식간에 놈들이 내 주위를 에워싸며 창끝을 들이댔다.

“당장 여기서 썩 꺼지든가, 일인당 사백만 원의 승선비를 가져오면 생각해보시겠다고.”

내 석 달치 월급을 싹싹 긁어모아도 어림 반 푼어치 없는 액수였다. 일단 선장과 얘기할 테니 잠시라도 만나게 해달라며 보초병들을 뚫고 가려는데, 그만 문 반대쪽으로 확 밀쳐지고 말았다. 팔짱을 낀 채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파오가 내심 유쾌해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축하한다. 너도 내가 살고 있는 각박하고 냉정한 세상에 들어온 것을.”

억울해서 통 잠이 오질 않았다.

돈 십만 원을 허무하게 날려버린 건 둘째치고, 말 한 마디조차 꺼내보지 못한 채 파오의 열화와 같은 비웃음 속에서 돌아온 길이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이렇게 포기할 순 없었다. 목표가 확실해진 이상, 밥이 되든 죽이 되든 일단 뜸이라도 들여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혹시라도 깜빡 잠이 들까 봐 나는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계속 정신을 각성시켰다.

이쯤이면 슬슬 녀석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달칵.

얼마 후 예상대로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와 내 침대에 지친 몸을 털썩 뉘였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내게 아예 등까지 돌리고 잠을 청하려 드는 손우경에게 팔을 뻗어 허리를 감쌌다.

미안, 내가 널 좀 이용해야겠다.

놈의 단단한 허리를 휘감은 팔에서 움찔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 타이밍에서 얘가 다른 마음이라도 먹게 되면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하니 절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등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게다가 놈이 뭐라고 지껄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나는 자다가 깬 듯한 음성으로 손우경에게 얘기했다.

우경아, 나 내일 마하데바 호 선장 만나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줘.

…….

혼자 가기 싫어.

자, 이제 놈의 허리를 끌어안고 최선을 다해 잠들면 된다.

일은 속전속결이었다. 입구의 보초병들을 비롯해 선장의 호화로운 저택 안 경비들은 손우경의 주먹에 허수아비처럼 픽픽 쓰러졌다. 오조는 요즘 다시 온종일 잠에 빠져들어 지내는지라 숙소에 두고 왔고, 구경 삼아 따라온 파오 녀석은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서 손우경에게 얻어터져 바닥으로 쓰러진 경비병들을 징검다리 삼아 꾹꾹 밟아가며 현재의 상황을 맘껏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파오가 이런 난동을 벌였다면 포타라카에 주민번호가 등록되어 있는 탓에 금방 신원 조회가 됐을 터였다. 하지만 손우경이라면 다섯 개의 검 수용소에 갇혔던 순간부터 주민번호가 전부 말소되었을 테니 이 정도 소동쯤이야 애교로 넘어갈 수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여자 한 명을 낚아채서 선장의 방이 어딘지를 물었다. 그녀는 중앙의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맨 꼭대기 층 전체가 그의 거처라고 알려주었다.

파오가 계단을 올라가다가 손우경에게 물었다.

“너 왜 한숨도 못 잔 표정이냐.”

손우경이 뒤따르고 있던 나를 힐끗 쳐다보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럴 일이 좀.”

난 아침이 되자 새벽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척했기 때문에 손우경이 지금 저기압인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사실 놈이 그동안 바쁘게 돌아다닌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날’ 이후로는 얼굴 보기가 많이 민망해져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새벽에 내가 했던 말 때문에 놈은 이곳에 같이 와준 것이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공존하는 가운데 너무 오랜만에, 그것도 벌건 대낮에 손우경의 얼굴을 쳐다보려니 공연히 쑥스러워졌다. 새벽엔 대체 어떻게 그런 남세스러운 짓을 저질렀던 거지.

손우경은 선장의 방문 앞에 서서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좀 이따가 급한 용무라도 있는지 녀석은 어서 이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하는 듯했다. 요즘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길래.

나의 눈앞으로 화려한 방 안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 방의 주인은 금사로 수놓여 멀리서도 번쩍거리는 푹신한 소파 위에 여유롭게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눈에도 마하데바 호의 선장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헌데 그 황금빛 터번을 쓴 중년 남자의 발밑에서는 작은 꼬마가 엎드린 채 그의 발 쿠션을 자처하고 있었다. 남자는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 한심한 것들, 뭣들 하느냐. 어서 손님을 접대하지 않고!”

그의 불호령에 벽 쪽으로 등지고 서 있던 수많은 호위병들이 감추고 있던 라이플을 일제히 우리에게 겨눴다. 솔직히 총 자체는 별거 아닌데 지금 이곳이 완전히 막혀 있는 공간인 게 문제였다.

그러나 손우경은 망설임 없이 방 한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 나가 차분하게 선장을 응시했다.

이윽고 녀석이 손바닥을 위로 치켜들며 여차하면 여길 모두 불살라버리겠다는 듯이 새빨간 화염의 불꽃을 만들어냈다.

선장은 턱을 쓸며 잠시 생각하더니 우리에게 겨눠졌던 수많은 총구를 뒤로 물렸다. 어딘지 노련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실제로도 상황 파악이 무척 빠른 듯했다.

그는 손가락을 까닥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동방의 주술사로군……. 내게 할 말이 있다면 이리 가까이 와서 해보도록 하게.”

일단 선장을 만나는 것까진 그럭저럭 대성공이었다.

선장은 우리의 얘기를 전부 듣고 난 뒤, 소파 근처의 서랍장에서 한 뭉텅이의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로 던져주었다. 만일 사백만 원을 낼 수 없다면 해당 계약서상의 조건을 수락하면 된다며 말이다. 우리 중 제일 먼저 손우경이 그 계약서를 주워들고 안에 적힌 내용들을 읽어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놈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처음에는 건성인 손동작으로 계약서 뭉치를 산만하게 휙휙 넘겨보더니, 이내 다시 첫 페이지로 되돌아와 마지막 장까지 꼼꼼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을 마친 손우경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계약서가 아니라 무슨 희망 사항을 적어놨네.”

손우경의 손에서 반쯤 구겨진 종이 뭉치를 파오가 곧장 넘겨받았다. 놈의 얼굴 역시 계약서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 잔뜩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봐, 선장.”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무게감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미안하지만, 이 계약서에 적힌 19조항의 내용 말인데.”

놈이 무표정한 얼굴로 목소리를 깔자 선장을 호위하던 주위의 덩치들이 금세 긴장하며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하긴 천봉대원수직에서 내쫓긴 이후 꼴사나운 얼간이 짓이나 하고 다녀서 그렇지, 목소리 하나만 멀쩡하게 내도 파오는 저절로 그럴싸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편이었다. 약 2미터에 육박하는 장신에다가 체격까지 훤칠한지라 놈이 평소 그저 말없이 인상만 쓰고 있어도 주변에서 함부로 범접조차 못했었다.

파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의식한 듯 흠흠 목청을 가다듬더니 다시 단호해진 눈빛으로 선장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서쪽으로 떠나온 지 장장 몇 개월 만에 저 녀석이 처음으로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따지고 보면 일행들 중 가장 연장자일뿐더러 왕년엔 종단군부까지 호령하던 대원수 출신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겨우 이 정도의 협상 따위를 해결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내 부푼 기대심을 한 몸에 받던 파오가 느닷없이 자기 우측에 서 있는 손우경의 팔뚝을 꽉 쥐더니 사뭇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암만 생각해봐도 내 손목은 도저히 안 되겠으니 얘 손목을 담보로 걸게.”

“…….”

흠, 생각해보니 너에게 잠깐이라도 뭘 기대했던 내가 병신이었다. 내가 허파에 가득 찬 비웃음을 푸시식 빼내고 있던 사이, 얼결에 손목을 걸게 된 손우경이 정색하며 맞받아쳤다.

“그보다 여기 힘 좋은 동양인 노예는 어때? 벌써 삼십년도 넘게 쓴 중고품이지만 아직은 새것처럼 꽤 쓸 만하다구.”

파오는 결코 지지 않으려 들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오래된 나보다 내 옆에 있는 이 녀석이 훨씬 나을 거야. 듣자하니 여기 상단에선 뒷구멍으로 장기 밀매도 서슴지 않는다던데, 이왕이면 얘처럼 땅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육체를 팔아먹는 편이 더 좋지 않겠어? 아직 젊으니까 안구나 장기 등도 튼튼하고 건강한 편이지.”

“봤지? 여기 이 포타라카산 희귀 노예는 힘이 좋은데다가 입으로 뱉는 말마다 듣는 사람 열 뻗치게 만드는 놀라운 재능을 가졌거든. 장기간의 항해로 누적된 피로에는 이 노예를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사용하는 걸 추천할게. 장담하건대 세상 어느 곳에 내놔도 결코 손색없을 맷집이니 당신이 아무리 고문하고 때려도 쉽게 죽지 않을 거야.”

“무릇 노예란 함부로 막 다뤄도 뒤탈이 없을 자연산 잡종 노예가 최고 아니겠어? 죄수 출신에 아무 데서나 막 굴러먹은 놈이야. 이미 세상사를 모두 초월한 듯 흐리멍덩해진 저 회색 눈동자를 좀 보라구!”

“좋아, 선장이 원한다면 여기 계약서에 적힌 내용과는 별개로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헐값으로 양도해주겠어. 아니, 내가 웃돈이라도 더 얹어줄 테니 제발 좀 데려가줘.”

선장이 저 미친놈들이 네 동료냐 하는 얼굴로 내 쪽을 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나도 차라리 아니었으면 좋겠으니까…….

약 삼주 후 서쪽으로 출항하는 무역선을 얻어 타기 위해 뱃삯을 흥정하는 자리였다. 협상은 시작도 하기 전에 난항이 거듭됐고, 적은 원래 내부에 있는 법이라더니 세상에나 처치 곤란인 암초가 두 개나 있었다. 담판을 지으러 온 건지, 노예를 팔러 온 건지. 대체 계약서에 뭐라고 적혀 있기에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저 한심한 짓거리들을 하는지 모르겠다.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파오는 팔짱을 끼며 끝끝내 안하무인처럼 굴었다.

“흥, 어쨌든 우린 일인당 사백만 원이나 낼 수 없어.”

선장은 후후 웃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럼 꺼져.”

나를 제외한 다른 두 명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는 게 훤히 보였다. 놈들의 불같은 성격이라면 벌써 이 자리를 뒤엎고도 남았겠으나, 그깟 머리들에도 생각은 있는지 아직까진 잘 버티고 있었다. 사방에서 우릴 노리는 총구들도 한몫 했겠지만 솔직히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미지근한 밥을 얻어먹어도 상관없으니 우린 무조건 그 배에 타야만 했다.

듣자하니 삼주에 단 한 번뿐인 출항이었다. 비록 폭력을 통해 얻어낸 협상 자리였지만 여기서 더 큰 문제를 일으켜 출항일이 늦춰지거나 해선 안 된다. 그러니 마하데바 호의 총책임자인 선장에게 미운털이라도 박히게 될 시엔 이제까지의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파오는 성질 같아선 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이내 멀쩡한 표정으로 돌아와 선장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소파 맞은편에 허락도 없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실제로 이곳 선박을 운용하는 주인들은 따로 있는 걸로 아는데, 너희야 그저 부탁받은 물건이나 날라다주는 하수인 격 아니던가? 진짜 주인도 아닌 주제에 뱃삯으로 그런 어마어마한 금액을 요구하는 건 상당한 월권 행위란 말이지. 그러니 우리 융통성 있게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자구. 저 큰 배에 고작 사람 네 명 더 태우는 것쯤이야 그리 까다로울 것도 없잖아?”

선장은 하품을 쩍 하더니 손가락으로 자기 귀를 후볐다. 하긴 일행인 내가 봐도 부탁하는 태도가 한참은 글러먹었다. 공손한 저자세로 나가도 들어줄까 말까인데 파오 녀석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리 당당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물론 잘나가던 시절에야 가는 곳마다 자기 명령 한마디에 사람들이 군말 없이 머리를 조아렸겠지만, 지금은 가진 거라고는 불알 두 쪽이 전부인 주제에 말이다.

선장은 면도하지 않아 까끌까끌한 아래턱을 연신 쓸면서 우릴 마치 원숭이 구경하듯 쭉 넘겨보았다.

그가 물었다.

“너흰 진짜 뭐하는 놈들이냐.”

“……우린.”

파오가 뒷말을 삼키며 잠시 뜸을 들였다. 아무러면 뭐 하나 믿는 구석도 없이 저리도 당당하게 굴었을 리 없기에 과연 뭐라고 대답할지가 은근히 궁금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의 헛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파오 놈이 자기 뒤편에서 멀뚱거리며 있던 내 팔을 대뜸 붙잡아 끌어당기더니, 선장을 향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응답했다.

“그런 건 얘가 전부 설명해줄 거야!”

나는 팔을 붙잡힌 채 처진 눈으로 놈을 내려다봤다.

설마 믿는 구석이 나였냐…….

일부러 의도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하필 파오가 붙잡은 곳은 만자 문양의 자수가 새겨진 제복의 완장 부근이었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대외적으로 활동하거나 공식적인 석상에 설 때에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압감을 주기위해 이 완장 착용이 필수였다. 실은 조직의 후광이라도 좀 받아볼까 해서 오늘 간만에 차고 나왔는데 효과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선장은 그런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하나하나 뜯어보더니 마침내 딱 잘라서 말했다.

“바깥에서야 그 환영제야단의 표식 하나로도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었겠지만, 여긴 중립 지구인 아부 게르다다. 상부로부터 너희에게 협조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도 없고, 설령 그런 명령이 내려왔다고 해도 나는 너희 불교도 놈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나 역시 아부-게르다의 이교도들을 좋아하진 않지만, 만인에게 언제나 자비로우신 부처의 뜻에 따라 잠시 합장하며 상대방의 편견 어린 적대감을 정화시키기로 했다. 합장은 몸과 입으로 짓는 업들을 모두 거두어들이는 한편, 열 손가락을 한데 모아 마음을 순수하게 일치시키려는 행위로써 종국에는 상대방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상징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 아부-게르다에서도 이 합장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쓰이는 일반적인 인사법이라는 점이었다.

이쪽에서 먼저 예를 갖추자, 외지인이자 침입자였던 우리에게 내내 배타적으로 굴던 선장의 뾰족한 태도도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별로 나설 마음은 없었지만 더 이상 저 녀석들에게 협상을 맡겼다간 공연히 엉뚱한 불똥이 나한테까지 튈 것 같았다.

“죄송한 얘기지만 선장께서 저희 측에 제안하신 뱃삯은 현실적으로는 준비하기가 불가능한 금액입니다. 이 정도 일에 그런 막대한 예산을 끌어다 쓸 명분도 없고요. 이번 임무가 대외비라 자세하게 설명드릴 순 없지만 저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삼주 후 출항한다는 그 배에 반드시 탑승해야 합니다. 정말 어떻게 해도 방법이 없겠습니까?”

선장은 굉장히 성가시게 됐다는 표정으로 콧잔등을 찡그리더니, 뱁새처럼 쪽 째진 갈고리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뭐, 전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

“니들이 돈이 없다면 몸으로라도 때우는 수밖에. 우선 이 도시 밖으로 나가서 동쪽으로 반나절가량 더 가면 땅굴잡이 놈들에게는 꽤 유명한 장소가 있어. 이곳 아부 게르다 일대의 사막은 대종말 이전에 크샤트리아나 바이샤라고 불리던 부유층들이 은신했던 돔들이 밀집한 구역이거든. 덕분에 땅속엔 아직도 진귀한 보물들이 많이 묻혀 있지. 이 도시도 그 자원들을 바탕으로 크게 성장한 것이나 다름없고.”

파오가 삐딱한 포즈로 되물었다.

“당신 말은 지금 우리더러 땅을 파서 보물이라도 가져오라는 얘긴가.”

선장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내가 니들한테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땅굴잡이 두엇을 붙여줄 테니까 어딜 좀 다녀오라는 얘기야”

내가 물었다.

“어디를 말입니까?”

선장은 탁자 가장자리에 놓였던 물담배 항아리를 끌어와 호스로 연결된 파이프를 물었다. 이내 그는 황소처럼 뿌연 연기를 뿜으며 이야기했다.

“아마 한 이십 몇 년쯤 됐을 거야. 당시엔 땅굴잡이들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착굴 작업에 매진했지. 돔마다 뭐가 나올지 모르니 위험 부담은 상당했지만 재수가 좋으면 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재물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물담배를 뻐끔대던 선장이 별안간 자기 발밑에서 자잘한 시중을 들던 꼬마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아이가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갔다. 곧이어 벽 한쪽을 전부 가린 다홍빛 암막 뒤에서 라탄으로 짠 바구니를 들고 돌아온 꼬마가, 테이블 위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놓았다. 고사리같이 자그마한 손이 상당히 익숙하게 담뱃대 위의 철판에다 새로운 숯을 갈아 넣었다. 그 후 담배 항아리 안에 담뱃잎과 향료를 마저 더 채워 넣은 다음, 바구니를 원래 있던 장소로 가져다놓고는 다시 선장의 발아래 재빨리 몸을 숙였다.

처음 방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저 아이의 정체가 퍽 궁금했는데. 이곳 아부-게르다는 돈만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상 천국이라더니, 그게 참말이었나 보다. 또한 인간 자판기라는 몰상식한 매춘업과 더불어 인권 자체가 굉장히 낙후된 곳이기도 한 것 같다.

선장은 담배를 가는 동안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파이프를 입에 머금으며 남은 설명을 덧붙였다.

“그것들은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생겨났다. 땅속에서 입구가 솟았고, 문 안에서부터 기상천외한 괴물들이 빠져나왔지. 놈들은 사막 위를 지나다니는 생명체라면 가리지 않고 공격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우리는 그곳을 일컬어 나라카의 입구, 혹은 지옥의 던전이라고 부르고 있어.”

가만히 듣고 있던 손우경이 선장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이어받았다.

“균열 때문에 다른 차원들의 입구가 무차별적으로 끌어당겨지는 거야. 꼭 아부-게르다 일대의 사막이 아니더라도 통상 ‘게헨나’라고 불리는 차원 입구가 열리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비일비재한 광경이지.”

그에 선장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선을 그었다.

“말조심해. 거긴 너 같은 애송이가 함부로 판단할 곳이 아니야. 균열에서 파생된 덩치 큰 돌연변이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곳이란 말이다. 우리라고 무슨 수를 안 써봤겠나? 하지만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땅굴잡이를 자처하던 아부 게르다의 사내들은 이제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이 됐거나 홍등가의 포주 노릇이나 하고 있는 형국이지.”

근데 듣자하니 선장이 이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많은 건 알겠는데 포주는 그렇다 쳐도 아무러면 도굴꾼보다는 선원 쪽이 더 나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 거슬렸던 건 바로 손우경의 태도였다. 졸지에 애송이 취급이나 받게 된 놈은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기억으론 쟤가 저런 얼굴을 할 때마다 좋은 일은 그다지 안 생겼던 것 같은데. 특히 나한테 말이다.

선장이 계속 말했다.

“당시 나는 수많은 땅굴잡이들 중 하나였고, 내겐 피를 나눈 형제가 있었다. 동생은 지하 벙커를 해체하는 일류 기술자라 주로 섬세한 작업을 담당했고 난 그 밖에 힘쓰는 일들을 도맡아서 나름대로 합이 잘 맞는 짝이었지. 나라카의 입구가 열렸다는 소문이 시끄럽게 떠돌았지만 우리가 작업하던 곳은 그곳과는 제법 떨어진 장소였어. 안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지.”

기억을 되짚던 선장의 눈에 어느덧 과거의 전율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날도 나는 내 동생과 함께 땅굴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아주 순식간이었지. 땅속에서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바위가 뿜어 나오더니 그중 하나가 내 안면을 세게 후려쳤다. 기억나는 거라곤 그 거대한 괴물의 피부가 새빨갛고 온몸에 징그러운 눈동자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는 것뿐. 동생의 자지러지는 비명을 뒤로한 채 난 피범벅이 된 얼굴로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운 좋게 살아남은 나는, 혹시 동생의 시신이라도 거둘 수 있을까 싶어 다시 한 번 그 자릴 찾아갔지만 이미 그곳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어. 아무래도 동생은 괴물의 배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게 아닐까 생각하네.”

선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의 입이 길게 찢어지자 위아래 할 것 없이 번쩍거리는 금니가 드러난다. 당시 안면을 강타당한 흔적인 듯했으나 그 모습을 보고도 손우경은 전혀 감흥 없다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나라카로 끌려들어간 동생의 시체라도 회수해달라는 건가?”

선장이 고개를 저었다.

“고라토라고 부른다, 던전 안에 살고 있는 그 괴물의 이름은. 물론 그 안에는 다른 괴물도 많겠지만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목격된 것들 중에선 가장 위험하고 소름 끼치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 내 조건은 오직 하나다. 실력에 자신 있다면 내게 고라토의 목이나 그것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가져오너라. 만에 하나 너희가 그렇게 해준다면 당연히 배는 공짜로 태워주지. 물론 너희 넷 모두 짐칸 신세를 져야겠지만 말이야.”

우리 중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자 선장은 슬슬 본색을 드러내며 무리한 제안 속에 감춰져 있던 진실의 칼을 불쑥 꺼내 들었다.

“웬만큼 한가닥씩 하는 놈들인 건 알겠는데, 거기서 공연히 개죽음이나 자초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라. 애초에 일인당 사백이나 되는 금액을 부른 것도, 지금 고라토 얘길 꺼낸 것도 너희를 절대 내 배에 승선시킬 마음이 없어서니까. 아무리 우리 선단이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다지만, 주 거래처나 다름없는 룸버린의 항구로 적대국 출신의 놈들을 태우고 갈 순 없는 노릇이거든.”

확실히 아까 선장이 했던 말처럼 환영제야단의 후광은 이 도시 바깥에서나 통하는 효과인 듯했다. 어쩌면 종단의 제복이 오늘 협상에서 주도권이나 특혜를 얻는 데 큰 힘이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지만, 도리어 내가 환영제야단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더 큰 차질이 빚어진 거다.

여하튼 선장이 분명하게 거절 의사를 표명해버린 이상, 이제는 다른 대책이 없는 듯…….

“혹시 당신의 동생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는 물건 같은 거라도 있어?”

손우경의 기습적인 질문에 선장은 잠시 당황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 목 뒤로 손을 집어넣어 웬 낡아빠진 목걸이를 끌르더니 공중으로 휙 집어던졌다.

“별 얘깃거리도 안 되는 흔한 사연이지만 가족 대대로 내려온 유품 같은 거다. 동생은 항상 그것과 똑같은 목걸이를 차고 있었지. 만에 하나 유골이라도 찾게 된다면 그것만이 내 동생임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되겠지.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런 게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가 있겠나.”

손우경은 공중에서 바로 낚아챈 목걸이를 제 눈앞에서 이리저리 살펴보며 혼자 키득거렸다. 놈이 즉시 대꾸했다.

“잘 모르나 본데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이계의 것들은 어지간해선 인간을 잡아먹지 않아. 생긴 게 좀 그렇긴 해도 은근히 식성이 까다로운 놈들이라 인간의 육체처럼 병균도 많고 불결한 건 입에 잘 대려 하지 않지. 인간이 음식을 먹듯이 뭔가를 섭취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영혼을 흡수해서 자신의 힘을 키우려는 것뿐이니까.”

목걸이가 놈의 손가락에 걸려 공중에서 휙휙 원을 그리며 돌아간다.

“그리고 너희가 나라카라고 부르는 그 장소는 사실 시간의 흐름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는 곳이야.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할지 모르겠는데 현재가 현재를 낳아서 지금 이 순간만이 쉴 새 없이 반복되는 곳이거든. 막말로 선장 당신 동생이 사막의 모래에 묻히지 않고 그 눈알 괴물에게 끌려갔다면 아마 유골 정도는 나라카 안에 썩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커.”

녀석은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려대던 목걸이를 다시 선장에게로 던져주며 짤막하게 덧붙였다.

“일주일.”

“뭐?”

“고라토인지 고릴라인지 하는 놈에다가, 네 동생의 유품 내지는 생사 확인까지 얹어서 우리에게 짐칸 말고 배에서 제일 깨끗한 선원실을 내줘. 그리고 매 끼니마다 적어도 항해사급의 식사를 보장해주고.”

선장은 만면에 큰 비웃음을 내걸었다. 어디 한번 할 테면 해보라는 결기마저 느껴졌다.

“그리도 죽음을 재촉하고 싶다면 네 녀석 좋을 대로 해라.”

허락이 떨어지자 손우경은 제 뒤에 서 있던 나를 챙겨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얼결에 끌려가다가 녀석이 문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놈의 등에 얼굴을 부딪치고 말았다. 손우경은 선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어울리지 않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마지막 안부 인사를 남겼다.

“그럼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몸조리 잘하며 쉬고 있으라고.”

녀석은 문고리를 돌리다 말고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그것은 선장에게 건네는 말이라기보다 한동안 억눌려 있던 녀석의 인격이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것에 불과했다.

-……근데 나중에 딴 말이라도 했다간 앞으로 금니 대신 잇몸으로만 밥을 씹어 먹게 해줄 거야.

그 말은 너무 나지막이 흘러나와 바로 뒤에 서 있던 내 귀에만 들려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잡혀 있던 팔을 뿌리치며 따져 물었다.

“제정신이야? 누구 마음대로 그런 걸 수락해?”

허풍이 심한 것도 정도가 있었다. 고라토라는 괴물을 처치하는 일은 어찌어찌 가능하다고 쳐도,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선장 동생을 찾는 것은 지옥 던전이라고 불린다던 나라카에 들어가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시무시한 괴물들로 우글거리는 던전 안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겠다니. 선장마저도 허무맹랑한 일임을 알고 우리에게 제안했던 것인데, 고작 그것에 발끈해서 무리한 계획을 잡고 말았다. 더구나 상대방 측에선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시간 제약까지 내걸었다.

손우경은 흥분해서 터지기 일보 직전인 내 얼굴로 손을 뻗더니, 한쪽 뺨을 쭉 잡아당기며 몰라줘서 서운하다는 듯이 웃었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

“지금 잘난 척할 때가 아니잖아!”

“난이도가 제법 있을 것 같긴 한데 위험 부담이 커질수록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

뒤따라온 파오가 얼른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 네 훌륭한 도전 정신은 인정해주겠는데 네 섣부른 판단으로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이진 말아주라.”

손우경이 귀찮다는 투로 쏘아붙였다.

“괜한 걱정이라면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어둬. 거긴 애초부터 나 혼자 갔다 올 작정이었으니까.”

그러자 파오가 눈만 생긋거리며 비꼬듯 말했다.

“그거 참 다행이다. 난 폐소 공포증이 있어서 막힌 공간에는 잘 못 들어가거든.”

쿠르게오르 사막에선 벌레 혐오증이 있다 했었고, 이번엔 뜬금없는 폐소 공포증까지 앓고 있단다. 상상 속의 병은 이제 그만 앓고 그냥 불치병에나 걸려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근데 그거 아냐? 난 네 그런 점이 짜증 난다구. 본인 실력에 대한 자만심이 넘쳐서 주변 사람들까지 우습게 보는 거. 다들 너에게 방해만 되지, 그다지 도움은 안 될 거라고 여기면서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게 전부 느껴지거든.”

손우경은 대꾸할 가치도 없단 표정으로 파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난 딱히 누굴 우습게 보거나 한 적 없어. 남들보다 힘이 좀 세다고 해서 주변인들을 쓰레기 취급한다는 건, 자기 그릇이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니까. 뭐 그런 시기라면 이미 열 살쯤에 졸업했거든.”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어느 누구도 쓰레기란 말은 꺼내지도 않았단 점이었다. 손우경이 열 살 무렵에 얼마나 재수 없는 꼬맹이였을지 상상조차 안 됐다.

“어쨌든 내가 혼자서 행동하겠다는 건.”

손우경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우선 내 멋대로 이번 일을 크게 벌인 까닭도 있지만. 던전 내부가 이계의 공간인 이상, 괴물 대 괴물의 싸움을 벌여야 하는 오조의 소환술은 어차피 무의미해지기 때문이고.”

오조가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저 말을 들은 뒤에 지팡이를 붕붕 흔들며 뭐라고 대답했을까.

배고파?

“사형의 경우엔.”

녀석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걸 목격했다.

“이유야 정확히 모르겠지만 단순한 육탄전 이외엔 항상 지나치게 본인 기술을 숨기려고 드니까, 전력상 어느 정도나 도움이 될지 선뜻 파악이 되지 않아서야. 그 밖에도 별로 사형하고는 던전에 나란히 들어가고 싶지가 않아.”

파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손우경이 씩 입가를 찢으며 답했다.

“난 송장 치우는 취미가 없거든.”

툭하면 저렇게 싸워대면서도 실제로는 주먹다짐이 오고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게 어찌 보면 신기했다. 둘 다 웃는 낯으로 서로를 강하게 빈정거리고 있는데, 그 모습이 항상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결코 어떤 선을 넘거나 하진 않았다. 어느 한쪽에서 좀 심한 얘기가 나왔다 싶으면 어김없이 다른 쪽이 그 말에 대꾸하지 않는 게 저 둘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어쨌든 파오에게서 더 대꾸가 없자, 손우경이 이번엔 내게로 시선을 고정하며 불길한 음절을 내뱉었다.

“그리고.”

설마하니 나에 대한 평가라면 한사코 사양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놈의 입을 틀어막을 재간이 없었다.

“우리 법사님은 털끝 하나라도 다쳤다간 내 마음이 아플 테니까.”

너무 예상 밖의 이야기였다. 놈의 입에서 어떤 저평가가 나올까 싶어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만 어깻죽지가 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될지 감이 안 잡혀 몸이 경직되어 있는데, 파오가 차마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얼굴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댔다.

“뭐어, 생각나면 네가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게 기도 정돈 해줄 테니, 마저 수고해라.”

그렇게 파오가 도망치듯 자리를 뜨자 손우경과 다시 둘만 남게 됐다. 몹시 부담스러운 심정이었다. 오늘 새벽의 일도 그렇고……. 요즘 들어 녀석이 원체 바쁘게 돌아다니는 터라 얼굴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기도 했지만, 나 역시 엔간해선 단둘이 있게 되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날의 낯 뜨거운 기억들이 하필 이 순간에 부메랑처럼 되돌아와서 나를 괴롭혔다. 순간적으로 양뺨에 뜨거운 불이라도 붙은 듯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태연함을 가장해봤지만 불과 며칠 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손우경이 바닥에 고정된 내 고개를 쓱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 일주일 채우기 전에 돌아올게.”

“……내가 왜 니 걱정을 해.”

“새벽엔 잠 한숨 못 자게 만들어놓더니 또 이러기야? 내가 누구 때문에 사서 이 고생을 하는데.”

“…….”

“어쨌든 에너지라면 얼마 전에 충분히 채워줬으니까.”

설마 일주일의 한정된 기간을 스스로 언급한 게 나 때문인가. 내 몸의 에너지가 전부 바닥나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놈이 손바닥으로 내 앞머리를 넘겨 이마에다가 살짝 키스하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다른 데 한눈팔지 말고 얌전히 나나 기다리고 있어.’

이마에 입술이 닿는 감촉이 부끄러워져서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 녀석은 내 시야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장난이라도 치나 싶어서 주변을 샅샅이 둘러봤지만 손우경의 털끝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진짜 이대로 가버린 거야?

설마 이렇게 곧바로 떠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나는 적잖게 당황하고 말았다. 허탈해진 기분에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날씨가 구름 한 점 없이 빌어먹게 좋았다. 이제 더 이상 할 것도 없는데 숙소로 돌아가서 부족한 잠이나 보충하든가 해야겠다.

뭔가 아쉬운 마음에 이미 온기조차 남지 않은 내 이마를 매만지는데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정말 일주일이나 못 보는 건가…….

그때 내 왼쪽 가슴으로 전기가 흐르는 듯 저릿저릿한 통증이 전해졌다.

뭐지, 이 느낌은.

* * *

늦은 새벽, 잠이 통 오질 않았다. 아까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만 초저녁에 눈이 뜨여, 상황이 아주 고약하게 돼버렸다. 이불을 끌어안고 몸을 뒤척이다가 암만 해도 다시 잠들기는 글러먹은 듯해,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방을 나섰다.

이곳은 아부-게르다 변두리에 위치한 허름한 숙박 업소라 우리 일행이 묵는 층에는 진짜 딱 우리 넷밖에는 없었다. 조용한 복도를 거닐다가 불현듯 유리 돔에 갇혔을 때에도 우리가 건물 한 층을 통째로 쓰던 생각이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났다.

이불이 더러워지면 그냥 옆방 이불을 가져오고 어쩌다가 갈아입을 옷이 생기면 여태 입던 옷들은 아예 쓰레기통에 처박는가 하면 나중엔 하다하다 다른 건물에까지 쳐들어가서 겉보기에 그럴듯한 물건들은 싹 쓸어다가 자기 방 안에 보란 듯이 장식해뒀었다. 아, 그러고 보니 파오가 알토란같이 모으던 패물들은 그날의 탈출 상황 때문에 하나도 가져오지 못했다. 후에 그것을 깨달은 파오가 자긴 다시 거길 들어갔다 와야 한다고 생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어차피 이젠 출구도 다 아니까 공연히 무거운 짐을 만들지 말고 서쪽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회수하러 오자고 설득하느라 무진장 애를 먹었었다.

어느 날은 손우경이 어디서 참치 통조림 한 박스를 구해 왔는데 설레는 마음으로 따보니 내용물이 다 고약하게 썩어 있어서 다들 엄청 실망했었다. 그때에는 손우경이랑 파오랑 죽이 잘 맞아 맨날 어딘가를 함께 쏘다니다가 되게 쓸데없는 걸 훔쳐 오곤 했었는데.

갇혀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 상황을 제대로 즐기진 못했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저 지겹기만 한 시간은 아니었구나. 아니면 내 머리가 사실과는 다르게 기억을 미화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애초에 추억 같은 게 별로 없는 사람이니까.

숙소 근처를 산책하며 왜 내가 돌연 감성적으로 변했는지 원인을 찾아보는데, 생각나는 이유라곤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외면하고 싶은 것일수록 의식은 점점 강박적으로 변해 자유로운 사고 능력을 완전히 박탈해버린다.

하지만 나의 울적한 기분은, 손우경의 부재와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옷을 얇게 입고 나왔더니 새벽 공기가 너무 찼다. 슬슬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멀리서 보이는 익숙한 숙박 업소의 5층 창문에서 새까만 인영이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저 방의 위치는 분명 파오의 숙소인데. 누가 대체…….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려왔다.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멍청하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방의 주인인 파오가 굳이 문을 놔두고 창문으로 나다닐 리가 없다. 아니, 만약 그런 경우라면 그 의도는 자신의 ‘새벽 외출’을 숨기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니 조금 전 봤던 그 인영의 정체가 파오든 혹은 다른 녀석이든, 수상하다는 사실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주먹을 꽉 쥐고 정신을 한껏 가다듬었다. 숙소에 두고 온 환살 부적들과 금강저가 아쉬웠으나 그걸 챙겨 나왔다간 저 그림자를 영영 놓쳐버릴지도 몰랐다. 급한 대로 엄지를 물어뜯어 흘러나온 피로 나 자신에게 임시용 호신 결계를 쳐두고 그 인영이 사라져간 골목길로 힘껏 내달렸다.

누굴까, 대체.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휘감았지만 애써 떨쳐내려 했다. 실체가 불분명한 것들은 원래 두 눈으로 그 정체를 직접 확인해야만 막연한 불안감이 싹 가시는 법이다.

이곳은 아부-게르다의 판자촌격인 동네라 정돈되지 않은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인영의 속도는 야생마처럼 날렵했다. 간발의 차로 그것의 흔적을 놓쳐버리고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다가 내가 그만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아무래도 내가 자길 뒤쫓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고의적으로 날 이런 장소로 유인한 것 같았다. 낮의 청명함과 달리 먹구름이 잔뜩 낀 어두운 새벽의 밤거리였다. 조용하다 못해 내 귀가 멀기라도 한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큼 기이한 적막감이 자리했다. 이런 낯선 곳을 헤매다가 역공을 당하게 될 가능성도 컸기에 나는 추적을 즉시 포기하고 숙소로 귀환하기로 마음먹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서 골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왔던 길을 하나하나 되짚어 갔다.

-그에에엑!

그때 골목 틈 사이로 사람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죽이고 그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살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

목이 졸린 남자가 온몸이 꽈배기처럼 뒤틀려 혀를 쭉 빼고 조금씩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는 중이었다. 골목이 너무 어두워 양쪽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몸이 저렇게까지 꼬였는데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목을 조르던 남자가 낮게 웃으며 익숙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엔 놓쳐버렸다, 라. 이 병신 같은 새끼가.”

순간 꼬여가는 몸의 압력을 더 견디지 못하고 남자의 두 눈알이 잔인하게 터져나갔다. 나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대로 있다간 나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나갈 것 같았다. 남자의 뇌수가 터지고 온몸이 마치 걸레처럼 쥐어짜이면서 선혈과 진액이 역겹게 흘러나왔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싱긋 웃으며 이미 피범벅이 된 인간 껍데기를 바닥으로 휙 던져버렸다.

남자는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인 후 바닥에 내버려진 시체도 마저 태웠다. 불이 붙는 순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담배 연기를 자욱하게 뿜어내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후 하고 웃으며 저승사자 같은 몰골로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침이 꿀꺽 삼켜졌다. 얼굴을 본 순간, 너무나 기막히고 놀라서 차라리 내가 잘못 본 것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간 윤곽이 불분명했던 현실이 더없이 잔인한 색상들로 빈틈없이 칠해졌다.

본적 없는 차림새, 본 적 없는 살인 기술.

하지만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

“너, 너는…….”

남자가 평소 같은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새벽에 그런 꼴로 돌아다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가 지독한 피 냄새가 물씬한 손을 내게로 뻗어왔다. 허리를 숙이자 윗 단추를 풀어둔 검은 셔츠가 벌어지면서 그의 왼쪽 가슴에 문신처럼 새겨진 한자가 언뜻 보였다.

劉죽일 류, 성씨 중 하나이기도 함.

뭐라고 읽는 거지.

그때 피로 얼룩진 손이 내 뺨과 입술을 상냥하게 어루만져왔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방금 사람을 죽인 새빨간 손이 너무 끔찍하고 무서웠다. 이미 전신의 세포들이 공포심으로 마비될 지경이었다. 남자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백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관음존자 이후로 이런 두려움을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남자는 계속 곤란하다는 듯이 웃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의 손아귀가 내 목을 거칠게 졸라왔다.

쉬어가는 페이지 6 <현>

★ 이웃의 형아는 언제나 요주의 대상입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에 꽉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슬그머니 한쪽 눈을 떠봤다가 후다닥 다시 감아버렸다. 뭐, 뭐가 위에서 날 쳐다보고 있어. 평소에도 기가 몹시 허한 터라 가위에 눌리거나 악몽 따위에 자주 시달리는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정도가 대단히 심각했다. 그것은 입술이 거의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날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치 빨려 들어갈 것같이 새카만 두 눈동자였다.

그런데 귀신이라고 하기엔 뭔가 좀 이상했다…….

억지로 용기를 쥐어짜 내서 간신히 실눈을 떠봤다.

“…….”

다행히도 그것의 정체는 귀신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얼굴 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나보다 훨씬 더 연장자로 보이는 어느 소년이었다.

비록 귀신이 아니었다곤 하지만 크게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숨 쉬나 확인해보고 있었어.”

왠지 그러려던 게 아닌 거 같은데. 그는 내 얼굴 양옆에 기대고 있던 팔과 푹 숙였던 상체를 멀찌감치 떼어내고는 조금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부모님과 나를 돌봐주는 주치의, 그리고 집안 가솔들 외엔 나와 또래는 아니지만 이렇게 어른이 아닌 사람을 만난 적이 드문지라 나도 겸연쩍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 수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지만 온종일 침대에서 잠만 자느라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툰 나였었다. 낯선 이의 침입에 잔뜩 경계하며 이불을 얼굴까지 푹 끌어당겼더니 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 내가 초면인데 실례가 많았어.”

“…….”

“혼자서 저택 안을 구경하다 보니 네 방까지 흘러 들어왔는데.”

“…….”

“이런 대낮에 너무 죽은 듯이 곤하게 자고 있길래.”

나는 이불 사이로 눈만 동그랗게 내놓고서 무안해진 표정으로 뺨을 긁적이는 그 형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나 온몸에서 자신만만한 분위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거기다 반듯하고 다부진 이목구비의 조화가 뭇사람들의 눈길을 절로 잡아끄는 훤칠한 외모였다.

은은한 푸른색이 섞인 검은색 두루마기가 귀티가 물씬 나는 그의 외향과도 잘 어울렸다. 내가 알기로는 이곳 포타라카의 어린 소년들 중, 저런 값비싼 천으로 옷을 지어 입을 만한 형편은 정말 몇 안 될 것이었다. 꽤 좋은 옷차림을 한 걸 보니 분명 어느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인 모양인데 대체 누구길래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온 거지.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다가, 문득 어제 잠결에 부모님이 내 머리맡에서 나누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던 이불자락을 손에서 내려놓고서 힘들게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아, 그러고 보니 아버님께서 오늘 귀한 손님들이 오신다고.”

“…….”

또다. 넋을 잃은 듯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 몸을 등 뒤로 빼고서 괜스레 주뼛거리고 있자니 잠시 후 저쪽에서 다시 말을 걸어왔다.

“있잖아, 너…….”

“파오 군.”

그때 문가에 촘촘하게 드리워진 발을 거두며 아버지께서 내 방 안으로 들어오셨다.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찾아다녔지 뭔가.”

방금 우리 아버지에게서 파오 군이라고 불린 소년은 얼른 예의 바른 몸짓으로 돌변해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대법 큰스님. 잠시 집을 구경해도 좋다는 말씀에 그만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버지에 이어서 내 어머니, 그리고 역시 누군지 잘 모르겠는 중년의 남녀 두 분이 함께 들어오셨다. 누군가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중년의 두 남녀는 정황상 저 파오라는 소년의 부모님인 것 같은데, 겉보기에 파오는 근엄한 인상을 한 부친 쪽의 분위기를 많이 닮아 있었다.

파오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우리 부모님께 다소 친근한 태도로 웃으며 의외성 짙은 얘기를 꺼내었다.

“그런데 따님이 너무 예쁘셔서 데려다가 제 동생 삼고 싶네요.”

아버지가 난처해진 얼굴로 미적지근하게 말을 흐리셨다.

“파오 군, 우리 현이가 저래 보여도…….”

우아한 자태의 중년 부인이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아버지께 변명하듯 말했다.

“저, 우리 아이가 원체 이성에 관심이 많아서.”

아버지가 손을 내저으며 이해한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어릴 때에는 다 그런 법이죠.”

내 일상 속에서 흔치 않게 벌어지는 장면들을 신기하게 구경하다가 그만 쿨럭 하고 큰 기침을 뱉어내고 말았다. 어머니가 황급히 침대로 달려와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이마에 손을 얹더니 바로 열의 유무를 확인하셨다. 어머니는 나를 다시 침대에 눕힌 후, 두꺼운 이불을 목까지 잘 덮어주며 상냥하게 말씀하셨다.

“지금 새로 들여온 탕약을 달이고 있으니 저녁때까지는 아무 생각 말고 푹 쉬렴.”

아버지도 파오의 어깨에 손을 올려서 서둘러 이 방에서 나가려 드셨다.

“파오 군, 자네도 이제 그만 나가도록 하지. 아래층에 사람들을 시켜서 자네가 아까 구경하고 싶다던 천륜연월도를 준비해뒀다네.”

그의 어머니까지 합세하여 아들의 팔을 붙잡고 문밖으로 이끌어댔다. 반쯤 끌려 나가다시피 하던 파오가 방문이 닫히기 직전 슬쩍 뒤돌아보며 나를 한 번 더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거의 반쪽만 보이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덧그려졌다.

솔직히 처음엔 조금 무섭긴 했지만, 파오라는 사람하고 더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텅 빈 방 안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려고 해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육체에서 면역 기능이 너무 저하된 편이라 우리 부모님께서는 내가 가급적이면 타인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다각도로 과잉 보호를 하고 계셨다. 때론 야속한 마음도 들었지만 단순한 외출 한 번에도 석 달 열흘 동안 정신을 잃고서 끙끙 앓아대니 어쩔 수 없었다.

기침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목구멍 안쪽이 날카로운 바늘에 찔린 듯이 콕콕 따끔거려왔다. 몸이 또 으슬으슬 떨려왔다. 이불 안에서 팔다리를 움츠리며 몸의 한기에 바르르 떨고 있자니 순간 서러운 마음이 복받쳐 올라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난 왜 항상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건강한 몸으로 내 또래의 아이들처럼 바깥세상을 마음껏 뛰어다녀보고 싶었다.

그날은 한참을 울다가 그렇게 잠이 들었었다.

오늘로 벌써 다섯 번째나 되는 방문이었다. 가족 단위로 우리 집에 방문했었던 그다음 날이었다. 2층 높이나 되는 내 방 창문을 통해서 파오가 몰래 들어왔을 때에는 정말이지 기절하는 줄 알았다.

도둑인가 싶어서 도움을 요청하려는 내 입가에 그가 얼른 자기 손을 대며 쉿 하고 나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이틀 혹은 적어도 사나흘에 한 번씩, 집안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가장 조용한 시간대를 틈타서 파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와서 딱히 별다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주변이 별로 없는 나에게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던지, 아파서 침대에만 누워 있는 내 옆에 앉아 그냥 말없이 얼굴을 보다가 내가 잠들면 가버리는 일들이 잦았다.

무슨 용건으로 나를 자꾸 찾아오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런 그의 방문이 싫지가 않아서 나는 어느새 창문을 느슨하게 열어놓고 파오가 오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침대 옆의 작은 간이 의자는 그의 지정석이 되어버렸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여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자, 이거 너 가져. 쿤룬에서 들어온 고가의 천안석으로 만든 염주 팔찌인데 난 이런 낯간지러운 거 잘 못하니까.”

내가 그의 선물을 선뜻 받아들지 못하자 이불 안에 감춰져 있던 내 손목을 자기 마음대로 가져가더니 손수 염주 팔찌를 채워주며 이야기했다.

“천안석은 신의 눈동자라고 불리는 원석인데 사람의 몸과 마음을 보호해주는 한편 액막이용으로도 좋다고 하더라.”

팔찌를 다 채우고도 손목을 놓아주지 않던 파오가 내 이름을 불렀다.

“현아.”

“…….”

“너 손목이 가느다래서 힘주면 부러질 것 같아.”

내 신체에 대한 지적에 창피한 마음이 들어서 손을 빼내려고 들었지만 오히려 더 단단히 붙잡히고 말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일도 내가 왔으면 좋겠어?”

눈을 쳐다보기가 쑥스러워서 시선을 떨군 채로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응.”

파오가 생긋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 저녁까지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는 날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더니 창문을 훌쩍 넘어서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렇게 신경 써서 이불을 덮어줘봤자 항상 열린 창문을 닫아야 하는 것은 결국엔 내 몫이었다.

침대 안에서 비척대며 일어나 창문가로 걸어가는데 아직 파오가 가지 않고서 내가 있는 2층 창가를 지그시 올려다보고 있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내가 하는 배웅을 바라는 건가 싶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특유의 웃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 * *

그런 만남이 약 일 년째 지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파오가 길게 자란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손가락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기분은 그리 좋지가 않았다. 올해로 만 열일곱 살이 되는 파오가 느닷없이 삼일 후에 있을 종단 군부 입단 소식을 알려왔기 때문이었다.

“……자리는 어차피 떼놓은 당상이야. 우리 아부지도 삼년 정도만 밑에서 꾹 참고 개고생하라고 하셨으니까.”

“…….”

“근데 우리 현이가 왜 기분이 안 좋을까.”

군부에 지원하는 만 이십 세 미만의 동자승들은, 우선 까까머리를 할 수 있는 특전과 함께 삼년 동안 몇몇 휴가일수를 제외하고는 바깥출입이 엄금되어 있었다. 그건 달리 말해 앞으로는 그의 얼굴을 보기가 당분간 어려워질 거라는 말이었다. 친구라고는 오로지 파오 하나밖에 없는 내가 일상의 모든 대인 관계를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순간이었다.

“형네 집은 굳이 그런 거 안 해도 아무 상관 없는 집이잖아.”

파오가 설명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잠시 뜸들이다가 말했다.

“인생은 작은 노력도 없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어. 더군다나 아버지 성격상 낙하산은 어림도 없거든.”

“그래도…….”

파오가 후후 웃음을 삼키며 자기도 아쉽다는 투로 얘기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으면 탈영이라도 해서 가끔 만나러 올게.”

“…….”

“아님 내가 삼년 후에 제대하면 나한테 시집올래?”

“나, 나는 남자라서 형한테 시집 같은 거 못 가.”

파오가 어깨를 으쓱대며 날 짓궂게 놀려댔다.

“농담한 걸 가지고 뭘 그리 정색해. 나도 네가 남자인 거 알아.”

괜히 쓸데없이 반응해버린 내 얼굴만 빨개져버렸다.

“근데 아버지가 예전에 그런 얘길 하긴 했었어. 대법 현장 스님의 유일무이한 아이가 만약에 딸자식이었으면 서로의 공존 관계가 더 돈독해졌을 거라고. 사돈 맺기만큼 서로 주고받는 게 확실한 동맹 조건은 없으니까. 그 점에 있어서는 나도 아쉽게 생각해.”

아쉽다는 얘기는 내가 여자아이가 아니니 우리 집과는 전략적인 사돈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는 것 때문일까. 나는 시무룩해진 투로 대꾸했다.

“우리 어머니께서 파오 형네 부모님은 분명 훌륭하신 분이지만, 그 집 외동아들의 행실은 좋지 않다고 하셨어.”

파오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거야. 밖에서 날 잘 아는 녀석들이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아마 크게 놀라고 말걸?”

파오가 내 뺨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일부러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시선을 다시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유도했다.

“그래봤자 너희 집이랑 우리 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거든. 어찌 보면 종단 내에서도 머리와 힘을 맡는 양대 축이니까.”

그동안 나와 공들여서 친분을 쌓아왔던 게 다 그런 이해관계 때문인가 싶어서 더 우울해지려던 찰나였다.

“자세한 얘기가 네 귀까지는 잘 안 들어오겠지만 환영제야단의 주인이 바뀐 이후로는 요즘 바깥 사정이 좀 시끄러워.”

파오가 염주 팔찌를 채운 내 손목을 슬며시 붙잡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삼년 안에 초고속 승진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무리일 것 같고, 한 오년 정도만 기다려주면 내가 너 하나 책임질 위치쯤은 충분히 될 거 같거든.”

오늘의 파오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파오는 꽉 잡았던 손목을 슬그머니 놓아주면서 조금 쓸쓸한 눈빛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럼 아프지 말고 잘 지내고 있어.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내가 꼭 지켜줄게.”

구태여 나를 지켜준다는 말을 왜 했는지 그때에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당분간 파오를 오랫동안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퍼서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그가 무슨 얘길 하든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괜한 고집이나 부리고 있었다.

파오는 첫 휴가 때 나를 제일 먼저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는 늦은 밤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항상 침대 옆에 세워놓고 그가 비스듬히 앉아 있던 의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허전해 보였다.

그것은 관음존자에 의해 오직 나를 제외한, 모든 일가 친족이 억울한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전부 몰살당하기 약 한 달 전쯤에 있었던 일이었다.

쉬어가는 페이지 6 <현> 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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