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8)

홀 어디에서도 제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상심해서 저택을 떠난 게 분명했다. 그녀에게 미안한 만큼 갑자기 끼어들어 방해한 아서를 향한 분노가 커졌다.

짜증을 삼키느라 새 샴페인 잔을 들고 홀 가장자리에 섰다. 다시 한번 빠른 눈길로 사방을 살폈다. 어디에도 제인의 흔적은 없었다. 한편으로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파렴치한은 나야.’

먼저 추파를 던져 놓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남자와 붙어먹은 막돼먹은 놈이 바로 자신이었다. 더러운 습성을 못내 떨치지 못하는 자신에게 제인 플레커 같은 여성은 과분했다.

‘아니, 모든 여성이 과분하겠지.’

남은 샴페인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지나가는 하인을 붙잡아 다시 샴페인 잔을 바꾸었다. 우울한 기분으로 돌아서자 홀 반대편에 있는 릴리벳과 눈이 마주쳤다.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살짝 들며 이쪽에 신호를 보낸 릴리벳은 다른 곳을 바라보는 윌리엄의 팔을 툭툭 쳐서 엘리엇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반가운 기색이 만연한 동생 부부는 이쪽으로 오겠다는 신호를 다시 보냈다.

‘그럴 필요 없어.’

엘리엇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샴페인을 들어 시간을 잘 보내라고 신호만 보낸 다음 서둘러 자리를 떴다. 제인 플레커와의 조우보다 더욱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건 이런 부정한 모습으로 릴리벳과 마주 서는 일이었다.

연거푸 샴페인 두 잔을 비워 냈는데도 아직 입 안엔 아서의 존재가 이물감처럼 떠돌았다. 이대로 차마 릴리벳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가정을 가진 여인으로서 어쩌면 엘리엇보다 더욱 어른스러울 그 애는 아직 순진한 소녀 같았다.

동생이 아무리 남편과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며 많은 아이를 낳아 기른대도 엘리엇 안에서는 영원히 사랑스러운 소녀로만 남을 터였다. 화려한 무도회 뒤에서 남자의 자지를 빠는 오빠를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만큼 그 애에게 제 부도덕한 모습을 감추고 싶었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계속 자신을 찾는 동생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무슨 걱정이 있는지 신경 쓰여 굳이 다가올 게 뻔했다.

‘하는 수 없지.’

하는 수 없이 사람들 사이에 어울리기로 했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릴리벳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제인 플레커가 엘리엇이 타인과 춤추는 광경을 본다면 굉장한 모욕감을 느낄 게 분명했다. 아울러 품성에 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날 가능성도 컸다. 특별히 로드니안 시즌이라고 불리는 사교계 활동기 동안 으레 누군가의 소문이 쉽사리 퍼지지 않던가.

그래도 당장 릴리벳은 마주하기보다는 한결 덜 무서웠다. 마침 군무곡 첫 악절이 끝났다. 쉬려고 빠져나오는 사람과 다음 악장을 노리는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실례.”

엘리엇은 손쉽게 끼어들었다. 마침 아주 어린 여성과 첫 파트너가 되었다. 박자에 따라 스텝을 옮기면서 그녀와 손을 마주하고 빙글빙글 돌았다. 조금 놀란 듯한 상대에게 의례적으로 싱긋 웃자, 곱슬머리를 리본으로 예쁘게 장식한 소녀가 뺨을 발그레 붉혔다.

제 아들과 딸이 만들어 내는 군무를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관찰하던 중년 부인들이 반쯤 편 부채로 입을 가리고선 빠르게 속삭였다.

“저 청년은 누구지요?”

“모르겠습니다. 백작님의 연회에서는 처음 보는군요.”

“대단히… 대단히 매력적이군요.”

아까부터 장내를 뒤흔들고 있는 아름다운 청년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는지 서로 묻느라 바빴다.

마침 그들 가까이에 있었던 아서의 귀에 작은 속삭임이 몽땅 들렸다. 눈에 힘이 들어가고 하악 관절이 딱딱해진 지 오래였다. 아까부터 샴페인 잔을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추위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무슨 생각인 거야, 엘리엇 데일.’

엘리엇은 마치 보란 듯이 거대한 홀을 휘저었다. 일견 날카로운 이목구비에 화려함을 더하는 금발, 화장하지 않아도 도자기같이 하얗고 매끄러운 뺨의 살결에는 얼핏 홍조가 서렸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뿜어내는 빛의 무리는 엘리엇을 더욱 돋보이게 비췄다. 군무가 만들어 내는 무수한 움직임도 엘리엇에게 쏠리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어지럽히긴 힘들었다.

남자도 여자도, 갓 사교계에 입성한 애송이부터 지긋한 나이를 바라보는 노련한 중년들도.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아서의 신경을 몹시 건드렸다.

아서의 불만은 단순히 즐겁게 추는 군무에만 있지 않았다. 황금과 백금을 적절히 섞어 빚은 매끄러운 금발과 똑같은 광택을 뿜어내는 풍성한 속눈썹이 팔랑거릴 때마다 최상급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보였다 말았다 하는 건 문제가 아니란 뜻이었다.

아서의 심기를 가장 거스르는 건 웬만한 루주로는 흉내도 못 낼 고혹적인 빛깔을 머금은 입술에 걸린 미소였다. 언뜻 순수한 호의의 표시 같으면서도 때로는 고혹적인 유혹의 기미가 보이는 미소에 마주치는 사람마다 반쯤 혼이 나가는 중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엇은 부단히도 많은 접촉을 이어 갔다.

군무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리가 바뀌고 그때마다 상대 여성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를 훔쳐보느라 박자를 놓치는 사람은 여성만이 아니었다.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 몇이 그와 스쳐 지나가다 넋을 놓았고 그 바람에 앞뒤 사람과 부딪히기도 했다.

“이런.”

그럴 때마다 엘리엇은 친절하게도 엉킨 스텝에 민망해하는 놈에게 기꺼이 상냥한 고갯짓을 보냈다. 그러면 놈뿐만 아니라 갑자기 스텝이 엉키는 바람에 당황한 놈의 상대까지도 발그레한 뺨을 손으로 식히며 활짝 웃어 보였다.

여차하면 남자도, 여자도 당장 발가벗고 엘리엇의 침대에 뛰어들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음험한 욕망을 가진 놈은 한둘이 아니었다. 완력이 있는 남자도 위험했고, 완력 대신 타고난 매력을 과시하는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아서는 남은 샴페인을 입 안에 훌렁 털어 넣었다. 가만히 있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탁.

지나가던 하인이 들고 있는 은쟁반 위에 빈 잔을 올려 둔 뒤에 아서는 앞으로 나갔다. 곧 악장이 끝날 때였다.

짝짝짝!

사람이 급격히 늘면서 원래 원과 달리 안쪽에 작은 원이 생겼다. 엘리엇은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대적 소수로 이루어진 안쪽 원을 도는 여성들은 매우 즐거운 듯 움직임이 더욱 발랄해졌다.

“안녕하세요.”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인사를 하는 사람도 생겼다.

“안녕하세요.”

생긋 웃은 여성은 곧 다음 남성 파트너에게로 옮겨 갔다. 남자는 왼쪽으로 한 걸음, 여자는 오른쪽으로 한 걸음 걷기 때문에 두 칸 간격을 두고 움직였다. 다음 파트너는 실상 다다음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몸을 돌려서 제 옆 옆 남성을 본 엘리엇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흰 장갑을 낀 고운 손을 능숙하게 끌어당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서였다. 그는 방금까지 엘리엇의 파트너였던 여성에게 정중한 인사를 한 뒤에 엘리엇을 슬쩍 보았다.

툭.

“아.”

“저.”

넋을 놓는 바람에 박자를 놓쳤다. 벌써 다음 파트너가 엘리엇 앞에 서 있었다. 굳은 표정을 억지로 풀며 다리를 움직였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파트너는 별다른 말을 걸지 않았다. 만약 인사를 건넸다면 아주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말없이 동작을 따라가다가 다음 파트너로 옮겨 갔다.

은은한 상아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아서의 손을 잡은 뒤 흩날리는 목련 꽃잎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오.”

“아름다운 한 쌍이군요.”

상대적으로 어둠에 물든 아서와 대조적인 진주 빛깔의 여성은 아까와는 달리 인사를 건넸다.

“저는 클레어라고 해요.”

“저는 아서입니다.”

“알고 있어요. 글래스턴 씨.”

“영광이군요. 아름다운 레이디.”

반짝이는 눈동자엔 아서를 향한 호기심과 호의로 가득했다. 모두가 한 사람에게 매료된 순간에도 무관심한 소수는 있게 마련이었다. 클레어가 그런 경우였고, 그녀가 누구에게 더 흥미를 느끼는지는 확연했다.

작은 원을 돌고 도는 사이 클레어는 다시 엘리엇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입을 꾹 다물었다.

“저는 엘리엇이라고 합니다.”

“그런가요?”

예의 바르게 반응은 했지만, 이름을 알려 주진 않았다. 하지만 아서와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분명히 뭐라고 속삭였다.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아서 몹시 거슬렸다.

“저, 엘리엇?”

동작이 또 멈추자 이번 파트너가 엘리엇을 불렀다. 뒤늦게 다시 정신 차린 엘리엇은 그녀에게 싱긋 웃으면 춤을 이어 갔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이번 악장이 끝나자, 엘리엇은 손을 들어 빠지겠다는 의사를 내보였다.

“실례합니다.”

순간 다음 차례를 기다리던 여성의 표정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군무를 추던 엘리엣은 사과의 뜻을 전하고 자리를 떴다. 홀 가장자리로 가는 사이 등에 달라붙는 시선을 느꼈다. 그 안에 아서의 시선도 있을까.

아니. 그는 아마 클레어를 바라보고 있을 터였다. 엘리엇에겐 욕설과 비웃음을 퍼붓던 입술로 영광을 운운하며, 그녀와 속삭이느라 엘리엇이 무엇을 하든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터였다.

‘내 입술을 뜯어먹을 것처럼 키스를 퍼부을 때는 언제고 잘도… 잘도 레이디라는 말이 나오는군. 천박한 사기꾼 같으니.’

화가 치밀다 못해 숨이 막혔다. 뒤늦게 샴페인 기운이 치밀었다. 급작스럽게 토기가 쏠렸다.

“실례.”

엘리엇은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빠르게 홀을 빠져나갔다. 시끄럽고 답답한 홀을 벗어나 상대적으로 고요한 복도에 이르렀다. 모퉁이에 놓인 장식용 테이블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전에 내 입 속에 사정했으면서.’

자신과는 아무런 일이 없는 듯이 뻔뻔하게 여성과 어울리는 아서의 모습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웠다.

가까운 화장실에 뛰어 들어갔다.

“웨엑!”

변기를 붙잡은 엘리엇은 샴페인과 위산에 뒤섞인 놈의 정액을 토해 냈다.

엘리엇이 빠지자 아서는 군무에 흥미가 뚝 떨어졌다. 언뜻 보기에도 홀 안의 빛이 반쯤 사라졌다. 엘리엇이 홀을 벗어났음이 분명했다. 이번 악장이 끝나면 자신도 빠질 생각이었다. 아니, 그전에 빠져도 살짝 무례할 뿐 특별한 문제는 아니었다. 현재 파트너를 막 보내고 빠지려는 찰나 익숙한 모습이 다가왔다.

“아서.”

“릴리벳.”

내민 손을 반사적으로 잡았다. 릴리벳은 아무렇지도 않게 춤을 추면서 입을 열었다.

“잠시 시간 있어?”

“물론.”

“그럼 나가자.”

남녀 한 쌍이 동시에 빠지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그러라고 만든 군무였기 때문이었다. 릴리벳을 에스코트하면서 가장자리로 나왔다.

“남편은?”

“백작님의 말 상대가 되고 있어.”

그러면서 릴리벳은 다른 쪽에서 신사 여럿과 함께 서 있는 윌리엄을 가리켰다. 그가 이쪽을 돌아보기 전에 릴리벳은 아서를 재촉했다.

“이쪽으로 가면 작은 응접실이 나와.”

아서는 그녀와 함께 응접실로 갔다. 문을 완전히 닫는 대신에 살짝 열어 두었다. 그걸 본 릴리벳이 웃었다.

“로드니아식 예절에 익숙하구나.”

“여기서 산 지 오 년은 넘었으니까.”

“그렇구나.”

소파에 풀썩 앉은 릴리벳은 악의 없이 웃었다. 아서는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아서도.”

“내가?”

“그래.”

의아해하는 아서를 향해 릴리벳이 즐겁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서투르기도 하고. 또 괜한 오해를 즐기잖아.”

“나와 거래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놀라서 자빠지겠군.”

“사업가 아서 글래스턴의 위명은 로드니아에 와서 많이 들었어. 나는 그쪽을 얘기하는 게 아니야.”

“사업자 아서 글래스턴이 아니면?”

“내 의붓오빠 아서를 말하는 거지.”

그 말에 아서는 잠시 말을 잊었다.

“나를 아직도 오빠로 생각하는 건가?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물론이야. 당시에는 매우 혼란스럽고 무서웠지만.”

거짓이 아닌지 릴리벳은 마치 홀가분한 짐을 덜어 낸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드레스를 차려입은 성숙한 여성이 보일 모습은 아니었다. 대신 원피스 위에 하얀 놀이용 앞치마를 걸친 소녀 같았다.

“아서가 떠난 뒤에 바로 얘기하지 못한 걸 깊이 후회했어.”

“뭐를?”

“사실은 아서가 오빠를 만나러 그 방을 찾아왔다는 걸 말이야.”

순간 아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제 무릎을 톡톡 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때 난 자지 않았어.”

“뭐?”

일어선 아서가 휙 돌아보자 릴리벳은 늘어뜨렸던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그래서 아서가 하던 말을 다 들었어.”

릴리벳은 약간 난처한 듯이 들고 있던 부채를 꼭 쥐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아서를 쳐다봤다.

“아서는 나를 노리지 않았어. 처음부터 오빠가 아서를 그 방으로 오라고 부른 거 맞지? 그렇지?”

아서는 침묵했다. 뭐라고 하든 아서가 곤히 자는 릴리벳을 건드린 건 사실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그날 들어오자마자 아서는 오빠 이름을 불렀으니까.”

정말로 그랬는지 아서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속에서 자세한 기억은 풍화되었고 엘리엇을 향한 응어리만 남았다. 그저 엘리엇에게 받은 쪽지와 그의 방에 들어갔던 순간에 느낀 두근거림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침대가에 앉아서 자는 날 흔들었잖아. 그 바람에 깼어.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았고. 다음에는 아서가 나를 오빠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깰 수 없었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군.”

“조용히 얘기하던 아서가 이불을 확 걷는 바람에 비명을 질렀어. 큰 소동이 벌어지고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어.”

명확하게 따지자면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애초에 엘리엇의 잘못이 컸다. 그리고 멍청하게도 이불 밖으로 살짝 보인 금발 고수머리만 보고 엘리엇이라고 착각한 아서의 잘못도 있었다.

“늦었지만. 정말 미안해. 아서가 겪었던 끔찍한 고통을 생각하면 내 사과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사과하고 싶어.”

그런데도 아서는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신 맹렬한 비난이 튀어 나갔다.

“결혼하고 부유하게 살게 된 마당에 내가 나타나서 아주 심란했겠군그래. 그래서 알량한 사과를 하고 죄책감을 덜고 싶었나?”

“아니야. 예전부터 사과하고 싶었어. 단지 아서를 만날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럼 결혼식에서는 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 내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때 말이야.”

지적에 릴리벳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그날 얘기를 하려고 했어. 하지만 오빠가 너무 완강해서. 그리고 바로 신혼여행을 떠났거든. 편지라도 썼어야 했는데. 내가 몸이 좋지 않았어. 이후로 계속 사과할 기회를 찾았어.”

“정식으로 만남을 요청할 생각은 없고 이렇게 남편 몰래 만나서 말이지. 윌리엄 체셔가 지금 우리 둘을 발견하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덕분에 나는 또 정숙한 부인을 꾀어낸 개망나니가 되겠군.”

“그런 뜻은 아니었어.”

“릴리벳. 네 미안함은 잘 알겠어. 하지만 이런다고 내 끔찍하고 피비린내 나는 과거가 장밋빛으로 바뀌진 않아.”

순간 릴리벳이 입을 떡 벌렸다. 손으로 턱을 만진 그녀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나는 태도로 물었다.

“과거가 힘들고 끔찍했어?”

“내가 어떻게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다고 생각해? 그것도 빈민굴만도 못한 신대륙에서 말이야.”

“오, 아서.”

정말로 마음이 아프기라도 한지 릴리벳은 다가와 한 손으로 아서의 뺨을 어루만졌다. 고개를 돌려 뿌리치려 했으나 그녀는 끈질겼다. 기어이 아서와 다시 눈을 마주한 뒤에야 릴리벳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재차 안타까움을 표했다.

“과거를 보상해 주진 못해. 하지만 적어도 앞으로는 아서에게 상처와 슬픔을 주지 않겠어.”

“그런 얘기를 네가 해서 무슨 소용이야.”

아서는 릴리벳의 손목을 잡아 천천히 내렸다. 놀랍게도 릴리벳을 향한 감정은 별로 나빠지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꽤 좋은 축에 속했다. 비슷하게 생긴 누군가와 달리 릴리벳은 아서에게 늘 상냥했다.

“그날 비명을 지른 건 네 탓이 아니야. 오히려 너임을 빨리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이불을 걷어 버린 내 탓이지.”

“내가 오빠라고 생각했잖아.”

“그래. 아마도 그랬던 것 같아.”

씁쓸하게 답했다.

“왜? 왜 설명하지 않았어? 뭔가 오해가 있었다면 그날 외숙부에게 얘기했으면 되었을 텐데.”

릴리벳은 안타까운 듯이 물었다. 아서가 침묵하자 릴리벳은 재차 물었다. 활화산 같은 엘리엇과 조금 다른 의미로 많이 닮아 있었다.

“다음에 얘기하지.”

“아직 오해가 있으면 풀어.”

“풀어서 무슨 소용인데? 양부는 이미 돌아가셨어. 나는 영원히 쫓겨난 양자에 불과하고. 과거는 되돌릴 수 없어.”

“그래도… 그래도 오해를 풀면 오빠와 화해할 수 있잖아.”

그에 아서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릴리벳은 사이 나쁜 두 사람을 어떻게든 화해시키려 들었다. 예전에 그녀를 가운데 두고 사사건건 부딪치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그때 아서와 엘리엇은 정말 사이 나쁜 순수한 소년에 불과했고, 어쩌면 사과하고 사이가 좋아졌을 수도 있었다.

과연 지금도 그럴 수 있을까?

순수함은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는 질척하고 어두운 정욕이 감돌았다. 거친 폭력과 맹렬한 비난으로 점철된 관계에도 과연 릴리벳이 원하는 화해의 여지가 있을까.

“아마 힘들 것 같은데.”

“해 보지도 않았잖아.”

“엘리엇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어. 그는 다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날 더러운 사생아 취급했어.”

희망에 찼던 미인의 안색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것만은 반박하기 어려운지 그녀는 머뭇거렸다.

“오해 때문에 그래. 오빠는 나를 너무 과보호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도 이젠 남편이 있는 어엿한 성인이라고. 오빠도 슬슬 그걸 알아 가고 있어. 그러니 오빠와 대화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사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서는 그와 벌써 수십 차례 언쟁을 벌였다. 입으로 하는 대화가 아닌 몸으로 하는 대화도 여럿 시도했다. 하지만 엘리엇의 태도는 좀처럼 누그러질 기세가 아니었다. 그는 아서와 구음을 하고서도 보란 듯이 홀을 뒤집었다.

그렇게까지 무심할 수가 있을까. 릴리벳과 있었던 일의 오해를 푼다손 치더라도 엘리엇에게 아서는 그저 성욕의 배출구 이상은 아닌 게 분명했다. 굳이 의미를 더한다면 나이트스톤을 노리는 불쾌한 탕아 정도?

저를 무시하는 게 심사가 뒤틀려서 가까이 다가가자 엘리엇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사소한 사교의 즐거움을 조금도 공유하기 싫다는 듯이.

돌이켜보니 온통 쓴웃음뿐이었다.

“글쎄. 엘리엇도 그렇게 생각할까?”

“오빠는 내가 설득할게.”

아서의 물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릴리벳은 다시 희망에 부풀었다.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릴리벳을 마주하자 어쩐지 옛날 생각이 물씬 났다. 그때 사이좋게 지내라는 릴리벳의 충고를 순순히 들었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더불어 릴리벳에게는 못내 미안함이 컸다. 그녀는 어쨌든 그날의 피해자가 아니었던가.

“네가 그렇게 오해를 풀고 싶다면.”

“정말? 정말 내 부탁을 들어주는 거야?”

“하지만 내가 먼저 그날 사건에 관해 말을 꺼낼 순 없어.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 들어도 변명에 불과하니까 말이야. 게다가 그 일을 공공연하게 꺼냈다가 네 명예에 해가 될 수도 있어.”

“그건 괜찮아. 난 아서의 진심을 알아.”

“순진하긴. 네가 무엇을 알든 중요하지 않아. 로드니아 사교계가 어떻게 믿는지가 중요하지.”

아서는 낮게 코웃음 쳤다. 그러자 릴리벳이 부아가 치밀었는지 발끈하려 들었다. 하여간 쌍둥이 아니라고 할까 봐 성질이 비슷했다. 물론 엘리엇에 비하면 릴리벳은 훨씬 유하지만.

“네 명예는 곧 윌리엄 체셔의 명예야. 나아가 로우드 남작 부인의 명예이기도 해. 네 멋대로 먹칠을 해선 안 된다는 뜻이야.”

“맞아. 그분은 굉장히 엄격하시지.”

로우드 부인까지는 생각이 못 미쳤는지 릴리벳은 끙 앓았다.

“또 조용히 살고 싶은 내 입장도 생각해 줘. 난 아직 사교계에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어. 구설수는 치명적이야.”

“그런 생각도 미처 못 했어.”

릴리벳은 제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하며 탄식했다.

“그런 것 같군.”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정작 화해시키겠다고 한 사람이 아서에게 방도를 물었다. 평소라면 알아서 하라고 일갈했겠지만, 엘리엇과 마찬가지로 아서는 이상하게 릴리벳에게 큰소리치기 어려웠다.

뭐라고 꼭 찍어 얘기할 수 없지만, 릴리벳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면을 향해 있었다. 어린 시절, 괜히 괴롭혔을 때부터 릴리벳은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아서를 응시하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선 보통 결백을 믿는다고 한다. 하지만 릴리벳은 진심을 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무엇을 제 진심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아서는 그러지 못했다. 대신 좀 더 에두른 제안을 했다.

“엘리엇과 먼저 얘기를 해 보지그래. 둘이서만 말이야.”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내가 시켰다고는 하지 말고.”

“그 정도 눈치는 있어.”

“엘리엇이 과하게 화를 내거든 굳이 더 설득하려 들지 마. 괜히 사이가 더 나빠질 뿐이니까.”

“좋아.”

만족했는지 릴리벳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털었다. 그리곤 아서에게 다가와 두 팔을 벌렸다. 무슨 의도인지 몰라 가만히 있자 그녀가 거리를 좁혔다.

작고 말랑한 몸이 품에 살포시 안겼다가 떨어졌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 아서. 외숙부께서도 오해를 푸시고 기뻐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언젠가 같이 외숙부의 묘지에 같이 가자. 안내해 줄게.”

“엘리엇이 길길이 뛸 거야.”

“그럼 오빠는 빼고 가지 뭐.”

말괄량이처럼 코를 찡그리며 대담하게 엘리엇을 속이려 드는 모습에 아서는 풋 웃고 말았다. 릴리벳도 마냥 순진한 어린애는 아니었다.

전혀 변하지 않았어도 변한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엘리엇도, 자신도. 그리고 릴리벳도. 그러니 대담하게 남편을 속이고 외간 남자와 단둘이서 응접실에서 시간을 보낸 게 아니겠는가.

“언젠가 아서를 초대할 기회를 줘.”

“네 초대라면 거절할 이유는 없어.”

“고마워, 아서.”

릴리벳은 기쁜 듯이 아서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순수한 애정의 뜻으로 나누는 키스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훈훈해졌다.

“그럼.”

릴리벳을 다시 에스코트하여 홀로 가려는 순간, 누군가의 그림자가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났다.

삐걱.

밀린 문이 천천히 열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나누던 아서와 릴리벳은 동시에 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검은 정장을 단정히 차려입은 남성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려한 금발에는 어쩐지 물기가 묻어 있었다.

“둘이….”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낯빛은 이내 납빛으로 변했다. 뺨에 떠오른 붉은 기는 홍조가 아니라 냉기를 밀어 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는 핏줄의 흔적이었다.

“둘이…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묻는 음성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오빠.”

딱딱한 목소리와 반대로 엘리엇의 몸은 물이 흐르듯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아서의 팔에서 제 동생의 손을 떼 냈다. 그리곤 동생을 제 뒤로 숨기자마자 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퍽.

아서의 고개가 돌아갔다. 놀란 릴리벳이 입을 떡 벌리는 순간 엘리엇이 두 번째 주먹을 휘둘렀다.

턱.

이번에는 아서에게 잡혔다. 잇따라 다른 주먹이 날아들었고 아서는 재빨리 비켜서서 피했다. 그러면서 꽉 잡은 엘리엇의 손목을 비틀어 등 뒤로 꺾었다.

“윽!”

아서는 힘으로 엘리엇의 등을 꾹 눌러 허리를 숙이게 했다. 그러자 아서는 다른 손으로 아서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게 여의치 않자 구두 뒤축으로 아서의 발끝을 우악스레 짓밟았다.

“놔! 더러운 새끼!”

“오빠!”

릴리벳이 엘리엇에게 달려들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다른 놈이 또 나타났다. 윌리엄 체셔였다.

“릴리벳! 엘리엇!”

놀란 그는 다가와 아서를 밀쳤다. 그 바람에 엘리엇을 놓쳤다. 윌리엄이 아서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릴리벳이 소리쳤다.

“아서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에게 화를 내지 말아요.”

“뭐라고? 방금 엘리엇을 공격했잖아.”

막 몸을 일으키는 엘리엇을 부축하면서 릴리벳은 고개를 저었다.

“오빠가 먼저 오해한 거예요. 아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놈이 왜 너와 함께 있었던 거지? 그거 자체가 불순해!”

엘리엇이 씩씩대면서 금방 아서에게 달려들 듯이 거리를 좁혔다. 릴리벳이 그의 팔을 잡고 매달리자 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윌리엄이 일단 아서를 놓고 엘리엇을 막아섰다.

“봤지? 릴리벳?”

아서는 구겨진 옷을 털면서 심드렁하게 뱉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아서를 향했다.

“엘리엇은 처음부터 나를 혐오했어.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는 글래스턴이 되고 너는 체셔 부인이 되었지만. 우리의 친애하는 엘리엇 데일만큼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군.”

“어디서 더러운 입에 내 동생의 이름을 올려?”

엘리엇이 짖어 댔다. 반박하는 대신에 아서는 냉랭한 눈길로 릴리벳을 응시했다. 그녀는 곤혹스러워했다.

“아서.”

“약속은 약속이니까.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어울려 주겠어. 하지만 별로….”

그러면서 아서는 엘리엇을 물끄러미 봤다. 파란 사파이어빛 눈동자엔 불신과 혐오가 가득했다.

“별로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군. 이만 실례.”

아서는 릴리벳과 윌리엄에게만 가벼운 눈인사를 했다. 엘리엇에게는 어떤 눈길도 가벼운 언질도 없이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오빠. 갑자기 왜 그래?”

셋이 남은 후에야 릴리벳은 속상한 듯 엘리엇을 타박했다.

“그 자식이랑 무슨 얘기를 했어?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았고?”

뒤늦게 동생의 요모조모를 살핀 엘리엇이 못내 의심을 떨치지 못하자 릴리벳은 진저리를 쳤다. 그리곤 어리둥절한 윌리엄의 곁에 섰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저 옛날이야기를 조금 했을 뿐이야.”

“그런데 왜 단둘이서만? 윌리엄은 어쩌고?”

“윌리엄은 백작님과 얘기하느라 바빴어. 난 어린애가 아니야. 내 친구와는 언제든지 내 마음대로 얘기할 수 있어.”

“아서가 네 친구라고? 허튼소리! 그 자식이 네게 한 짓을 잊었어?”

엘리엇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릴리벳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때도, 지금도. 아서는 내게 늘 신사였어. 아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건 오빠잖아!”

“네가 그 자식의 정체를 몰라서 그래! 그놈은 파렴치한에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양심과 도덕심이 아예 없는 인간쓰레기란 말이야! 그런 놈이 내 동생과 함께 있는 걸 어떻게 두고 봐!”

“나는 하늘에 맹세코 내 남편을 걱정시킬 만한 어떤 짓도 벌이지도, 당하지도 않았어! 도대체 오빠는 뭘 바라는 거야? 내가 아서에게 무슨 짓을 당해야 속이 시원해?”

“엘리자베스 데일!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엘리엇이 기겁하며 펄펄 뛰었다. 보통 여기까지 이르면 릴리벳이 물러나곤 했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 버린 릴리벳은 아주 새침한 투로 그를 끝장내고 말았다.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난 이제 엘리자베스 데일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체셔라고! 언제까지나 오빠의 어리숙한 동생이 아니란 말이야!”

“뭐?”

“단 한 번도 내 얘길 제대로 들어 주지 않았지. 뭐든 멋대로 하고 말이야.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제발 내 말도 좀 들어!”

“릴리벳.”

놀라서 반문한 사람은 윌리엄이었다. 엘리엇은 말문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혼식 날도 내 말을 듣지 않았지. 오늘도 내 말은 조금도 듣지 않고 말이야. 이제 지긋지긋해.”

“아니, 여보. 그래도 그런 말은 너무… 엘리엇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걱정하는 줄 잘 알잖아.”

“알아. 알아서 지금껏 참은 거야.”

숨이 차는지 릴리벳은 창백한 얼굴을 찡그리면서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가 가라앉혔다.

“오빠가 나를 위해서 많이 희생했다는 걸 알아. 신혼여행 때도 도와주어서 고마워. 나도 오빠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어.”

숨을 고른 릴리벳은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냉정한 시선으로 엘리엇을 응시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그날. 아서는 처음부터 오빠를 찾아왔어. 아마 노크도 했던 것 같아. 내가 잠결에 못 들었지만. 오빠 방이고 자고 있던 게 오빠라고 생각했을 테니 스스럼없이 들어왔겠지.”

“무슨… 말이니?”

엘리엇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꺾였다. 분명히 충격이 크다는 반증이지만 릴리벳은 그를 달랠 수가 없었다. 말을 꺼낸 김에 끝을 맺어야 했다.

“아서는 날 오빠로 알았어. 그래서 침대 곁에 앉아 몇 번이고 오빠 이름을 불렀어. 유령인 줄 착각해 내가 지레 겁을 먹고 숨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래서 아서가 이불을 걷어 내지 않았다면 그날 아서가 두들겨 맞고 떠나는 일은 없었을 거야.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 숨겨 온 게 미안했고 아서에게 사과하려 했어. 아서는 더는 꺼낼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말이야.”

“아서가… 너인 줄 몰랐다고?”

“그래.”

엘리엇은 동생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그렇다면 그때 아서가 왜 말을 하지 않았겠어? 오해를 풀 수 있다면 말이야!”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아서가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잖아. 난 놀라서 비명을 질러 버렸고. 그가 조금 혼날 줄만 알았지 그렇게 두들겨 맞고 쫓겨날 줄은 몰랐어.”

“그건 말도 안 돼! 그놈은 네게 흑심을 품고 있었단 말이야!”

“아니! 아서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늘 오빠였어!”

“뭐?”

이번에도 윌리엄이 먼저 놀랐다. 흥분한 아내와 그 오빠를 어떻게 말려야 할지 난감하던 차에 해괴한 얘기를 들은 탓이었다.

“옛날부터 몇 번이나 말했잖아. 아서는 오빠와 친하게 지내길 원한다고.”

“그럴 리가!”

“또 내 말을 듣지 않아. 그렇다면 나도 더는 얘기하기 싫어.”

그러면서 릴리벳은 윌리엄의 팔에 팔짱을 꼈다.

“일단 두 사람 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지그래.”

새침하게 돌아선 아내를 에스코트하기 전 윌리엄이 남매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 사람 다 대답하지 않은 통에 머쓱해진 그는 릴리벳과 함께 응접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엘리엇은 혼란스러움을 감당하지 못했다. 비틀거리며 소파로 다가가 등받이를 짚었다.

“아서가 릴리벳이 나인 줄 알았다고?”

그때 분명히 릴리벳인 척 쪽지를 썼다.

오늘 밤에 내 방으로 와.

그래서 방을 바꿨다. 릴리벳 방으로 찾아오면 소리를 질러 그를 곤경에 빠트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둘이 방을 바꾼 사실을 교묘하게 알아채서는 릴리벳이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릴리벳을 나라고 생각했다고? 뻔히 함정인 줄 알았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왜 순순히 내 방으로 간 거야?”

제 쪽지 따위 찢어버려도 좋을 것을… 도대체 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엘리엇은 서둘러 홀로 달려갔다. 하지만 커다란 홀 어디에도 아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릴리벳도 사라졌으나 그녀의 곁에는 윌리엄이 있을 터였다.

‘당장 만나야 해.’

너무 급하게 나서는 바람에 옆 사람과 부딪혔다.

“어머!”

“실례.”

“엇!”

“죄송합니다.”

불만과 호기심에 찬 시선을 떨치고 엘리엇은 저택 밖으로 달렸다. 거의 달리듯 나오는 엘리엇을 보고 코트를 관리하는 하인이 보관실 문을 열었다.

“이봐! 자네!”

“데일 씨?”

“아서, 아서 글래스턴을 봤나?”

“네. 조금 전에 나가셨습니다.”

“역시!”

“코트를 꺼내 오겠습니다. 데일 씨.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지만 그가 코트를 입혀 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데일 씨?”

하인이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길거리까지 뛰어갔다. 가스등이 즐비한 거리엔 마차가 쭉 서 있었다. 모두 노스필드 백작 저택을 방문한 손님의 마차였다. 하나하나 짚어 가며 안에 든 사람을 확인했다. 그럴 때마다 마차를 지키는 마부가 의아한 눈빛으로 엘리엇을 관찰했다.

“아서, 아서 글래스턴!”

크게 고함치자 각 마차를 지키는 마부들이 고개를 길 쪽으로 빼꼼히 내밀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서 글래스턴?”

재차 소리치자 나중에 고개를 내민 마부 하나가 엘리엇이 바라보는 쪽을 가리켰다.

“마차 위치는 작위 순입니다. 글래스턴 씨 마차는 저쪽 골목에서 찾으실 수 있습니다.”

“고맙네.”

빠르게 걷는 속도로는 성에 차지 않아 반쯤 달렸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한 마차가 막 움직였다. 마차의 외형이 언뜻 보기에도 익숙했다. 마차 뒤창에는 실크해트를 쓴 남성의 그림자가 비쳤다.

“기다려!”

소리를 치는데도 들리지 않는지 마차는 곧 큰길로 섞여들었다. 늦은 밤길은 방해물이 거의 없었고 엘리엇을 훨씬 앞선 마차는 점점 속도를 더해 그를 따돌렸다.

글래스턴을 태운 사륜마차는 금방 가스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예 보이지 않을 때쯤 엘리엇은 멈췄다.

“후욱. 후욱. 후욱.”

허리를 굽히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미적거릴 틈이 없었다. 엘리엇은 주변을 돌아봤다. 도심지에 가까운 덕에 모퉁이마다 손님을 기다리는 빈 마차가 있었다.

금방 마차를 발견해 올라탄 엘리엇은 마부에게 아서의 집 주소를 외쳤다. 서두르라는 지시에 마차는 금방 속도를 높였다.

덜컹덜컹.

딱딱한 마차 좌석에 앉아 숨을 골랐다. 눈앞이 핑 돌 만큼 빠르게 뛰던 맥박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당장 여유가 생기자 다시 의문이 정신을 빠르게 점령했다.

‘왜 나를 찾은 거야? 왜?’

어린 시절 아서는 고약한 심보를 가진 심술쟁이였다. 어린 여자애의 관심을 끌려고 머리카락이나 앞치마 자락을 잡아당기곤 했다. 릴리벳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도 빼앗아 수풀 속으로 휙 던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릴리벳은 소리 높여 울었고 그 소리를 들은 엘리엇은 아서에게 달려들었다.

릴리벳도 이해 불가였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고도 아서가 용서가 되나? 백번 양보하여 어린 시절의 못된 장난으로 여긴다손 치더라도 말이었다. 당시 아서는 사춘기에 든 소년이었다. 풋사랑이라는 걸 느끼기 충분한 나이였다. 나이에 비해 조숙했던 소년이 다른 남자애의 관심을 끌려고 유치한 짓을 했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었다.

‘분명히 릴리벳을 좋아했어. 그렇지 않으면 왜 그렇게 집적거렸겠어?’

성인으로서 한없이 유치한 사춘기 소년의 행위를 다소 너그러운 시선으로 본다손 치더라도 아서가 릴리벳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건 부정하기 어려웠다.

‘설마 릴리벳도 아서를 좋아했나?’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웃어넘기기 어려울 만큼 신빙성이 있기도 했다. 혹시 자신이 제멋대로 끼어든 바람에 두 사람을 갈라놓았고, 그에 아서가 깊은 원한을 가진 걸까? 다른 사랑에 빠진 후에도 릴리벳은 엘리엇을 향한 미움을 채 버리지 못했고.

“아.”

소름 끼칠 만큼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다. 멍청하게도. 동생을 지킨다는 알량한 사명감에 매몰되어 두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걸지도 몰랐다. 엘리엇이 참견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면 아서가 나이트스톤을 물려받았을 테고,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그래서 릴리벳이 그렇게 화를 낸 거였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아서가 끝끝내 릴리벳을 향한 호의를 간직한 것도. 모조리 그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만 아서의 일방적 집착이라고 생각하고 릴리벳과의 관계를 파탄 내고 말았다.

뒤늦게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꺄아아아악!’

날카로운 여자아이의 비명에 놀란 외숙부가 먼저 방으로 뛰어들었다. 옆방에서 기다리던 엘리엇도 잠옷에 맨발로 뛰어갔다.

이불을 든 채 굳은 아서를 발견했을 때 외숙부는 다짜고짜 손을 휘둘렀다.

짝.

‘이게 무슨 짓이냐, 아서 렌튼! 너 같은 놈을 내 집에 들이는 게 아니었어!’

외숙부는 뺨이 붉게 부푼 아서를 질질 끌고 나갔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충격받았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건 아서도 마찬가지였다.

외숙부에게 팔이 붙들려 끌려 나오면서 아서가 문가에 선 엘리엇을 스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검은색에 가까워지고 있는 소년의 눈동자엔 배신감이 선명했다.

‘네 짓이지?’

그날 놀라 굳은 자신을 향해 아서가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릴리벳은 아직 어렸고 육체적 관계를 생각할 단계가 아니었다. 아무리 아서를 좋아한다손 치더라도 비명을 지른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릴리벳은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여전했다. 함정인 줄 뻔히 알면서 왜 쪽지대로 행동했을까? 만약 반대로 자신이 아서의 쪽지를 받았다면 모두가 있는 장소에서 보란 듯이 쪽지를 갈기갈기 찢어 면상에 뿌렸을 터였다. 당시 둘의 관계는 그러했다.

어느덧 마차가 도착했다. 마차 삯을 치르자마자 엘리엇은 아서의 저택 현관으로 뛰어갔다.

탁탁.

늦은 밤이라 골목 전체에 노커가 울렸다.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엘리엇은 재차 두드렸다. 다급함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현관문을 두드리려 들 무렵 문이 열렸다.

철컥.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길퍼드였다. 그는 엘리엇을 보고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데일 씨. 늦은 밤에 무슨 일이십니까?”

“아서를 만나러 왔어.”

“주인님은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안에 있는 걸 알아. 당장 만나야겠으니 나오라고 해.”

“정말로 안 계십니다. 늦은 밤이니 돌아가십시오.”

한결같이 딱딱한 길퍼드의 태도가 몹시 불쾌했다. 다른 때였다면 주제를 알라고 따끔하게 충고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가 없었다.

“비켜.”

엘리엇은 그를 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는지 길퍼드가 당황한 기색이었다. 차마 손으로 엘리엇을 잡지도 못했다.

“아서! 아서 글래스턴! 있는 거 알아! 나와!”

저택의 고요함을 깨고 고함을 쳤다. 문득 아서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감정이 이성을 앞서고 있어서 거기까지 궁리하진 못했다. 그저 만나서 그날의 일을 자세히 캐묻고 싶을 뿐이었다. 지겨울 만큼 사사건건 훼방을 놓던 주제에 하필이면 왜 그 쪽지만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는지 꼭 알아야 했다.

“데일 씨!”

길퍼드가 따라붙으며 말리려 들었지만, 엘리엇은 그를 완전히 무시했다. 대신에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랐다. 침실의 위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벌컥.

“아서 글래스턴.”

문을 열자마자 아서를 부른 엘리엇은 방 안 광경을 보고 우뚝 굳었다.

“꺅.”

방 안에 서 있던 여자가 실내용 벨벳 가운을 여미면서 휙 돌아봤다. 잠자리 준비를 위해 푼 풍성한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아직 화장을 지우지 않은 그녀는 다름 아닌 제인 플레커였다.

“엘리엇?”

“아.”

너무 놀란 나머지 목이 굳어 버렸다. 문고리를 잡은 채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당혹감을 먼저 갈무리한 사람은 제인이었다.

“이거 놀랍군요. 여긴 어떻게 왔죠?”

“여긴… 아서의 침실인데.”

“아, 아서를 찾아왔군요.”

붉은 입술이 삐죽거렸다. 섬세하게 손질한 풍성한 속눈썹이 깜빡거리면서 적의 어린 눈동자에 윤기를 더했다.

“저를 바람맞히고 결국 아서를 찾아온 건가요?”

“아니. 그. 저.”

“아까 굉장히 실망했어요.”

제인은 저택에 있었던 일을 따졌다. 가운을 여몄던 팔을 풀면서 고운 손끝으로 곁에 있는 테이블 표면을 살짝 만졌다.

“화장과 옷차림을 고치는 사이에 문이 잠기다니. 그런 모욕감은 처음이었어요.”

“미…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뜻밖의 일이 발생해서.”

“뜻밖의 일이 뭐죠? 늦은 밤 제 약혼자의 방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인가요?”

분노를 꾹꾹 누른 제인의 음성은 비교적 차분했다. 하지만 별안간 날아든 충격적인 선언이 엘리엇을 강타했다.

‘제 약•혼•자•.’

음절 하나하나가 분쇄되었다. 각 글자가 강력한 관통력을 지닌 총알로 변해 엘리엇의 명치를 꿰뚫었다.

“뭐… 라고?”

“약혼자를 외면하고 다른 남자를 돌아본 벌이라고 생각하겠어요. 하지만 당신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진 않군요. 아서에겐 찾아왔었다고 전해 주죠. 그러니 이만 가 보세요.”

물속에 잠겼을 때처럼 귀가 먹먹했다. 그래서 상대의 말이 똑똑히 들리지 않았다.

아서에게 약혼자가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결혼한다면 자신이 먼저 할 줄 알았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몸을 휙 돌리자마자 빠르게 계단으로 향했다.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다.

도대체 어쩌자고 아서를 쫓아온 걸까. 그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릴리벳과의 사이를 망쳐서 미안하다고? 미안하면 또 어쩌겠는가. 릴리벳은 이미 결혼했다. 윌리엄을 속이고 둘이서 사이가 다시 좋아질 수 있도록 협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인가? 아서와 자신은 이미 수없이 많은 밤을 함께 보냈다. 그런 상황에서 아서를 릴리벳에게? 심지어 아서에게는 약혼녀도 있었다. 그것도 엘리엇과 서로 추파를 주고받던 여자였다.

도대체 이게 뭐야?

도무지 정리되지 않았다. 아니 정리를 할 수나 있는 건가? 정리하면 또 어떻게 될 건가. 무엇 때문에 정리하는 건가.

‘애초에 여긴 왜 온 거지?’

근본적인 의문이 떠올랐다. 그날의 일을 캐물어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정신이 반쯤 나갔다. 아니 반 이상 나갔을까. 놀랍게도 다리는 계단을 놓치지 않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단숨에 현관에 이르자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향했다.

“후욱.”

차가운 겨울의 밤공기를 맡고서야 엘리엇은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제대로 숨을 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귀는 아직 멍한 덕분에 맥박이 귓가에서 천둥처럼 쾅쾅 울렸다.

저택 현관에 선 길퍼드가 엘리엇을 지켜봤다. 엘리엇은 타운 하우스식으로 꾸민 작은 벽돌 길을 지나서 큰길가에 이르렀다. 다리가 휘청거리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가로등이 잡혔다. 거기에 몸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차박차박. 쩔그럭.

무거운 밤의 기운을 가르고 검은 마차가 나타났다. 엘리엇이 기댄 가로등 가까이에 선 마차에서 아서가 내렸다. 그는 처음부터 엘리엇을 발견했는지 곧장 이쪽으로 왔다.

“엘리엇?”

아까 몸싸움을 하느라 화냈던 사람 같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다소 무표정하게, 그리고 조금은 반가운 기색으로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나를 찾아왔나?”

그리 묻는 음색엔 기쁨이 스며들었다. 그가 원하는 건 도대체 뭘까. 엘리엇은 그를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다.

릴리벳과 서로 좋아했어? 내가 방해되었나? 그 때문에 릴리벳 대신으로 나를 원했나?

“아.”

처음부터 방점은 엘리엇이 아니라 릴리벳에게 찍혀 있었다. 그는 엘리엇에게 대역을 원한 것이었다. 이젠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이제는 영원히 제 손을 벗어난 릴리벳의 대신으로. 누가 보기에도 닮은 쌍둥이니까.

그 외에 약혼자가 있는 멀쩡한 남성이 동성에게 무리한 성관계를 요구할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는가. 정부라는 이상한 얘기를 꺼낸 일도. 결혼 얘기에 불쾌감을 표시했던 일도.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걸 방해한 일도. 대역을 원했다면? 모두 이해가 갔다. 저를 향한 이상한 집착마저도.

단순한 미움도, 과거에 속은 일에 남은 분노도 아니었다. 은은하게 불타고 있는 뒤틀린 집착을, 그는 엘리엇을 통해서 해소하고자 했다. 더불어 동생에게 손끝 하나라도 댔다가는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협박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엘리엇이었다. 아서는 친절하게도 엘리엇의 요구에 응했다. 그래서 릴리벳이 아닌 엘리엇을 택했다.

“엘리엇? 안색이 좋지 않은데?”

아서가 천천히 다가왔다. 무슨 생각에선지 그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아직 화가 났나 보군.”

“…….”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거리를 좁힌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를 믿지 못한다면 릴리벳에게 확인해 봐도 좋아. 나는 그 애에게 어떤 해를 끼칠 생각도 없어.”

“아… 알아.”

이젠 알았다. 아서는 진심으로 릴리벳을 걱정했다. 그 애를 위해서 혹독한 희생을 치렀던 그가 지금에 이르러 릴리벳의 행복을 깰 이유는 없었다.

“드디어 알아주니 고맙군.”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진심 어린 기쁨이 슬쩍 엿보였다.

“릴리벳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러 왔나? 코트도 없이.”

그러면서 아서는 벗은 코트를 엘리엇에게 내밀었다. 손을 움직이지 않자 아서는 코트를 펴서 엘리엇에게 둘러 주려다가 말았다. 대신에 불이 켜진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늦었으니 내 집에서 자고 가는 게 어때?”

순간 침실에 있던 제인 플레커가 번쩍 떠올랐다.

“아니. 괜찮아.”

“이대로 가려고? 따뜻한 차라도….”

“됐어.”

빠르게 말을 잘랐다. 아서가 의아한 눈빛으로 엘리엇을 응시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군. 네 약혼녀에게도 큰 실례를 범했으니 미안하다고 사과를 전해 주게. 직접 하고 싶지만 그건 좀… 아무래도 적절치 못한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약혼녀?”

“그래. 약혼녀가 있으니 이제 우리 관계는 끝난 거지?”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일방적인 절교를 선언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너와 끝낼 생각 없어.”

되돌아오는 어투가 딱딱했다. 예상한 바와 같이 아서는 부도덕한 관계를 청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험악한 기세에 눌려 뒤로 주춤 물러나자 아서가 손을 뻗었다.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진저리치며 그 손을 밀쳐 냈다.

너무나도 무서웠다. 저를 수렁으로 이끄는 복수의 손길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엘리엇을 옭아매는 마른 가시덩굴 같은 손길이.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빨리 들어가 보는 게 어때? 얘기는 나중에 하지. 굳이 할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그때였다.

“아서.”

어느새 제인이 현관으로 나왔다. 그녀는 두 팔을 빗장처럼 단단히 걸어 잠근 상태였다. 그녀는 두 사람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봤다.

“내게 변명할 말이 있을 텐데. 아서 글래스턴.”

“내가? 네게?”

“그래.”

허물없는 대화로 보아 정말로 가까운 사이였다. 아서가 제인에게 시선을 던진 틈을 타 엘리엇은 얼른 도로를 가로질렀다. 마침 맞은편에 빈 마차가 서 있었다. 마부에게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라고 소리쳤다.

“엘리엇! 기다려!”

아까 엘리엇이 그랬던 것처럼 아서가 뒤를 쫓으려 들었다. 하지만 어느새 도로까지 나온 제인이 그를 붙잡았다. 몹시 화가 난 그는 제인을 뿌리치지 못하고 엘리엇이 탄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엘리엇을 보낸 뒤에 아서는 험악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자신을 붙잡은 제인에게 경고했다.

“무슨 짓이야, 제인 플레커. 내게 똑바로 설명하지 않으면 큰일 날 줄 알아.”

“너야말로 나를 깜찍하게 속이고 이대로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제인은 가운 호주머니에서 작은 권총을 꺼냈다. 그걸 본 아서는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맞아도 죽을 확률이 적은 작은 총이지만 그래도 운이 없을 경우 급소를 맞아 치명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긴 했다.

게다가 제인의 차림새가 너무 편안했다. 그게 더욱 문제였다. 용의주도한 제인이 치정극을 빙자하여 얼마나 많은 인명을 해쳤는지는 아서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럴 마음을 먹었다면 정말로 끝장을 볼 인물임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들어가서 얘기해.”

제인은 마치 제집인 것처럼 아서를 저택으로 안내했다. 현관을 들어설 때까지 총을 발견하지 못한 길퍼드는 제인이 아서의 뒤를 따르는 걸 가까이에서 본 후에야 마른 숨을 들이켰다.

“주인님?”

“길퍼드. 네가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한다면 네 주인의 척추에 총알을 박아 주겠어. 죽진 않더라도 반신불수로 끔찍한 생활을 이어 가도록 말이야.”

그 말에 아서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등허리에 딱딱한 총구가 닿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악랄하군.”

“그래도 당신처럼 사람을 기만하진 않잖아.”

길퍼드에게 손짓해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제인이 침실을 요구했지만, 거기까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협박하든 말든 아서는 근처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당장 쏠 생각은 없는지 제인은 순순히 서재로 따라왔다. 저 작은 총을 맞았을 때 가장 위험한 척추를 보호하기 위해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의자에 앉았다. 팔걸이에 몸을 최대한 붙이고 다리를 꼬았다. 제인은 반대편에 앉았다. 총구는 이제 얼굴을 향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까 노스필드 저택에서 남자를 하나 꼬셨어. 금발에 아주 예쁘장한 남자였지.”

제인은 늘 얼굴을 따졌다. 로드니아의 사교계엔 예쁜 금발 애송이가 널리고 널렸으니 아까 하나 꼬실 만도 했다.

“그래서?”

“아까 만났던 그 남자. 엘리엇 데일이었다고.”

“뭐?”

그 말을 들은 아서는 인상을 썼다.

‘아까 엘리엇이 기다리고 있던 게 제인이었나. 그때 둘 다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엘리엇이라니. 아서는 입을 꾹 다물고 제인을 사납게 노려봤다. 제인도 만만찮은 눈길로 맞받아쳤다.

“엘리엇을 알고 있었나?”

“아니. 얼굴은 몰랐어. 하지만 이름을 듣는 순간 누군지 알았지. 네가 신경 쓰는 릴리벳 데일의 쌍둥이 오빠.”

“그런데도 같이 어울려?”

화를 꾹꾹 억눌렀다. 망할 총이 아니라면 벌써 제인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랐을지도 몰랐다.

“굳이 손대지 말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게다가 내가 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에뜨와르는 팽개치고 말이야.”

“그렇게 원했으면 직접 갔어야지.”

“그렇지 않아도 후회하고 있어. 그깟 남성 클럽이 뭐라고. 아무나 데리고 쳐들어갔으면 될 것을.”

새초롬하게 한숨 쉰 제인은 고개를 옆으로 까딱 기울였다.

“오늘 저녁까지는 운이 없다고 생각했지. 네가 거짓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날 천애 고아 주제에 있을 리 만무한 사촌을 데리고 온 것도, 그냥 네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상하잖아.”

“뭐가?”

“왜 엘리엇 데일이 그렇게 아름다운 금발 청년인 거지? 왜 에뜨와르 드 루이제와 똑같이 생겼냔 말이야.”

그 말에 아서는 코웃음을 금치 못했다.

“에뜨와르 드 루이제를 직접 보지 못했잖아.”

“아니. 하지만 묘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성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대천사 같은 아름다운 청년이라고.”

“그런 흔한 찬사는 누구에게나 붙을 수 있어. 그리고 금발 애송이는 많아. 실제 에뜨와르는 대륙으로 돌아갔을 거고.”

“허튼소리 하지 마. 에뜨와르가 엘리엇이지?”

아서는 침묵을 택했다.

“그날 넌 클럽에 갔고 에뜨와르를 구했어. 엘리엇을 말이야. 왜 그가 거기서 에뜨와르 행세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지. 하지만 아서, 넌 나를 바보로 만들었어.”

“남자에게 차인 울분을 내게 떠넘기지 마. 한두 번 차인 것도 아닌데 내게 총까지 겨눠야겠어?”

“아니. 총을 꺼낸 건 오늘 있었던 일 때문이야.”

제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붉은 입술이 아주 심술궂게 뒤틀렸다.

“오늘 화장을 고치고 엘리엇 데일이 기다리는 방으로 돌아갔을 때 독특한 향기를 맡았어. 익히 아는 냄새였지.”

“엘리엇이 유행하는 향수를 쓰나 보지. 남성 향수는 대부분 비슷하거든.”

“하지만 당신이 쓰는 건 좀 달라.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를 지우는 데 효과적인 특제 향수를 쓰지. 내가 직접 구해 줬잖아.”

체크메이트. 아서는 몸을 살짝 앞으로 숙였다. 서재엔 전에 없던 긴장감이 감돌았다. 총구를 쥔 여인이 계속해서 추궁했다.

“문을 잠그고 둘이서 뭘 했어?”

“그냥 사적인 대화?”

“그래? 얼마나 사적인 대화를 나눴기에 내 노크에 대답하지 않고 허둥댔어? 쿵 소리까지 났거든. 마치 침대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생각해 보니 기분이 무척 나쁘네.”

탕.

총알이 아서가 앉은 바로 옆 쿠션을 관통했다. 깃털이 삐져나와 펄럭였다.

“미쳤어?”

아서가 험악하게 따지자 제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다리를 꼬았다. 총구는 다시 되돌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아서의 미간이 아니라 가랑이를 겨냥했다.

“총알에 네 알량한 사타구니를 맞기 전에 순순히 털어놔. 둘이 무슨 관계야?”

“정부야.”

“누가 누구의?”

“굳이 따지자면 엘리엇이 나의? 아니, 내가 엘리엇의 정부인가. 결혼의 의지는 그쪽이 강하니.”

꽤 진지하게 답하자 제인이 기가 막힌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총구를 휘저어 공중에 원을 그렸다. 마치 어디를 쏴줄까? 라는 듯했다.

“얼마나 됐어?”

“올 초여름부터.”

“그런데 지금까지 나를 속였단 말이야?”

“속인 게 아니라 그냥 말을 삼간 거지. 나는 누구처럼 침대 사정을 일일이 떠벌리는 습관이 없거든.”

“아니 그래도 어떻게. 배신자!”

제인이 소리치는 바로 그때, 총구가 흔들렸다. 아서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바로 손을 뻗어 제인의 손아귀에서 총을 낚아챘다.

탁!

“앗!”

순식간에 총을 빼앗긴 제인은 제게 겨눠진 총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이 역전되었다. 아서는 엉덩이를 소파 옆자리로 슬금슬금 빼는 제인의 이마 한가운데를 겨냥했다.

“우리 사이에 언제부터 그런 쪽으로 신뢰가 있었다고 배신자라는 거야?”

“물론 처음부터 없었지. 하지만 그렇게 잘생긴 남자를 내 눈앞에서 뺏어 가는 건 너무하잖아. 게다가 난 최악의 방식으로 바람을 맞았다고.”

“그래. 그건 인정하지.”

듣고 보니 제인이 좀 측은하긴 했다. 미남을 밝히는 그녀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남자를 낚았는데 하필이면 서로의 영역을 절대 건드리지 않기로 맹세한 사람과 이미 얽힌 관계라니.

“남자에게 남자를 빼앗긴 내 심정을 네가 알아?”

“빼앗긴 게 아니라 처음부터 네 것이 아니었어.”

“어쨌든! 둘 중 누구라도 쏴 버리고 싶었다고!”

아서는 총구 공이를 당겼다. 방아쇠에 걸친 검지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그걸 본 제인이 바짝 얼어붙었다.

탕!

총알은 제인의 미간이 아닌 머리카락을 스치고 벽에 박혔다.

살랑.

바닥에 흩어진 한 줌 머리카락을 본 제인이 경악했다.

“내가 어떻게 가꾼 머리카락인데!”

“내가 아니라 엘리엇에게 찾아갔으면 넌 시체를 온전히 남기지 못했을 거야.”

“나쁜 놈! 미용실 비용은 네게 청구할 거야!”

“얼마든지. 대신 쿠션과 소파 수리 비용은 네게 청구할 거다.”

아서는 총구를 내렸다. 빠른 솜씨로 장전된 총알을 모조리 빼낸 다음에 빈 총은 저쪽 구석으로 휙 던졌다. 제인이 아쉬운 듯 날아가는 총을 바라보았다.

“만족했나?”

“약간. 노린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한 방 먹인 것 같으니 나를 바보로 만든 건 그만 넘어가 주지.”

아서는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엘리엇이 약혼녀 어쩌고 하는 이상한 말을 했다.

“설마 저택을 나온 후에 엘리엇을 다시 만났어?”

“그래.”

그러면서 제인은 잘린 머리카락 끝을 고르면서 아까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약혼녀라고 말한 부분을 들은 순간 아서는 욕설을 뱉고 말았다.

“망할 제인 플레커! 내 손으로 직접 총을 분해한 걸 다행으로 여겨! 그렇지 않았다면 네 입 안에 남은 총알을 모조리 쏟아 버렸을 테니까.”

“어디 그래 보든가!”

지지 않고 되받아치는 제인에게 터진 쿠션을 퍽 소리가 나도록 집어 던졌다.

“아서!”

터져 나온 깃털을 뒤집어쓴 제인이 발광하든 말든 깡그리 무시한 아서는 그대로 저택 밖으로 달려나갔다. 길퍼드가 무사한 모습으로 나타난 주인을 보고 안도했다.

“마차 아직 기다리고 있나?”

“네. 그렇습니다만.”

길퍼드의 말에 아서는 지체 없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시 나타난 주인을 보고 마부는 고개를 들었다.

“로우드 남작 저택으로!”

우직한 마부는 명령을 받자마자 마차를 출발시켰다.

로우드 남작 저택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 도착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밤인지라 길이 혼잡하지 않아서 그나마 빠르게 도착한 터였다. 마차가 채 서기도 전에 뛰어내린 아서가 저택 현관으로 향할 무렵 다른 마차가 도착했다.

“아서.”

마차에 달린 작은 창으로 밖을 내다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릴리벳이었다. 마차가 멈추자 윌리엄이 먼저 내려 제 아내를 에스코트했다.

“글래스턴 씨.”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체셔 경. 아내분께 용건이 있습니다.”

윌리엄에게 빠르게 사과한 다음 아서는 릴리벳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슨 일이야?”

“엘리엇이 우리 집에 찾아왔었어. 좀 심각한 오해가 생겨서… 당장 얘기를 했으면 하는데.”

“저택에 있었던 일 때문이야?”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아니, 그건가. 제대로 들은 게 없어서. 일단 엘리엇이 나보다 먼저 도착했을 테니 좀 불러 주지 않겠어?”

“집에서 얘기해. 늦었잖아. 괜찮지, 여보?”

릴리벳의 물음에 윌리엄은 “물론.”이라고 답했다.

작은 주인 부부가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딱 타이밍에 맞춰 현관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빠에게 우리가 도착했다고 알리세요. 그리고 손님이 있으니 바로 2층 응접실로 오라고도 전해 주세요.”

그러자 집사가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데일 씨는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뭐라고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집사는 지나가는 다른 하인을 불러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엘리엇이 도착하는 걸 본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하인들이 모두 고개를 저었다. 눈치 빠르게 그들은 방과 서재도 확인했다. 엘리엇은 어디에도 없었다.

“길이 엇갈렸나?”

윌리엄이 건넨 말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들은 아서는 인상을 찡그렸다. 로드니아의 도로는 대부분 격자형으로 되어 있어 밤에는 어느 길을 택해도 비슷한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게다가 아서가 훨씬 늦게 출발하지 않았던가.

“다른 곳에 들른 모양입니다. 노스필드 저택에선 분명히 나갔거든요. 그래서 우리만 마차를 타고 돌아왔죠.”

윌리엄의 친절한 설명이 끝나자 릴리벳이 한숨을 쉬었다. 아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택에서 아서가 나가고 말이야, 오빠와 싸웠어.”

릴리벳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오빠가 아서를 너무 오해하기만 하고, 아니라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아서 화를 냈어. 언성을 많이 높였는데.”

윌리엄이 아내를 위로하듯 어깨를 감쌌다. 그런 남편의 손을 토닥이며 릴리벳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싸운 적은 처음이야. 아서도 알겠지만, 우린 사이가 좋은 쌍둥이였거든.”

“아. 그래서 그런 표정으로.”

“많이 상처받은 것 같았어?”

릴리벳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뛰어다닐 만큼 팔팔했으니까. 하지만 머리를 식히느라 어딜 산책하는 모양이군.”

“늦은 밤인데.”

“남자니까 괜찮을 거야.”

아내의 걱정에 윌리엄이 위로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망할 살롱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잘 아는 아서에게는 위안보다는 불안을 선사했다. 혹시나 망할 변태들에게 뭔가 일을 당했을까 심장이 철렁했다.

“그래. 곧 돌아오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난 그만 가 보지. 밤에 찾아와서 미안해. 체셔 경. 나중에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그럴 수도 있는 문제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럼. 릴리벳.”

빠르게 인사를 마친 아서는 얼른 제 마차로 뛰어올랐다.

로우드 저택을 떠난 직후 아서는 밤새도록 로드니아 곳곳을 뒤졌다. 놈팡이들이 쉬이 출몰하는 뒷골목에서부터 화요일 모임의 주축이 된 자칭 예술가가 있을지 모르는 불 꺼진 극장가까지 샅샅이 헤집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엘리엇의 흔적은 없었다.

로빈슨 살롱에도 없었고 나중에는 윔즈 저택까지 찾아갔다. 이른 새벽에 흐트러진 차림으로 나타난 아서를 보고 찰스는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인가?”

“혹시 여기 엘리엇 왔나?”

“엘리엇이? 아니. 오지 않았어.”

“만약 숨기는 중이라면.”

“아니 아니. 절대 아니야. 살롱 사건 이후로 엘리엇은 내 집에 발을 들이지 않아.”

“그래?”

미심쩍지만 일단 그렇다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찰리는 미련 없이 돌아서는 아서의 등에 대고 외쳤다.

“혹시 그날 이후로 샤를 랭을 만난 적 있나?”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돌려 찰리를 응시했다. 정작 물은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아니 그때 이후로 샤를 랭과 다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서. 로드니아에서 싹 사라진 것 같거든.”

“대륙 놈이니 대륙으로 돌아갔겠지. 그런 더러운 놈들은 사라진 쪽이 더 낫지 않나?”

“그… 그래. 그렇겠지. 아무튼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럼.”

모자도 깜빡 잊고 나온 통에 아서는 고개를 까닥하여 작별을 고했다. 찰리는 약간 어색한 미소로 화답했다.

다시 마차에 오른 다음 아서는 동이 틀 때까지 로드니아 곳곳을 뒤졌다. 하다못해 엘리엇을 태운 마차꾼을 찾아보려고도 했으나, 드넓은 로드니아에서 활동하는 마차꾼이 너무나도 많아 하룻밤 만에 알아내긴 불가능했다.

푸른 새벽빛이 점점 흰 겨울 하늘로 변해 갈 무렵. 아서는 다시 로우드 저택으로 향했다. 주인들은 다 자고 있을 시간이지만 하인들은 바쁜 하루를 준비하느라 한창 움직이는 중이었다.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아서를 맞이한 집사가 그렇게 말했다.

“그렇군. 새벽에 갑자기 찾아와 미안하네.”

“아닙니다. 작은 마님의 분부가 있었습니다. 데일 씨가 도착하면 바로 글래스턴 씨께 소식을 보내겠습니다.”

“부탁하네.”

아서는 그에게 특별히 현금을 찔러주었다. 집사는 거부하는 일 없이 조용히 그것을 받아 챙겼다.

아무런 성과가 없는 채로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부도, 말도 지쳤기에 더는 돌아다니기 힘들었을뿐더러, 아무런 계획 없이 마냥 로드니아를 돌아다닌다고 해서 엘리엇을 찾을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도착하자 길퍼드가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님.”

“혹시 엘리엇 데일이 다시 오진 않았지?”

길퍼드의 반응 역시 예상대로였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제인은?”

“손님방에 계십니다.”

“그래?”

당장 그녀가 있는 방으로 쳐들어갔다.

쾅!

“일어나!”

곤히 자고 있었는지 제인이 깜짝 놀라 베개 아래서 권총을 꺼내 겨눴다. 하지만 아서는 그 총을 냉큼 후려쳤다.

쿵.

묵직한 쇠뭉치가 벽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인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아서를 응시했다.

“이 새벽에 무슨 일이야?”

“엘리엇이 사라졌어.”

“그래?”

“너 때문이야. 네가 약혼녀라는 헛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그 전에 깊은 관계이면서도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 둔 네 잘못이 더 크겠지.”

빈정거림이 돌아왔다. 눈에서 불똥이 튀는 줄 알았다. 제인에겐 어떤 육체적 보복도 소용없었다. 그래 봤자 아서의 등에 총알구멍이 날 가능성만 더 컸다. 대신에 아서는 그녀의 팔을 잡아 끌어 내렸다.

쿠당.

“앗! 무슨 짓이야!”

발끈하면서 벌떡 일어서는 제인을 향해 아서는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찾아내.”

“뭐?”

“엘리엇 데일. 찾아서 내 눈앞에 데려오라고.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은 그대로 말이야.”

“그 작자가 뭐라고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지옥을 같이 헤쳐 온 나에게 이러는 거지?”

“내가 그 빌어먹을 지옥에서 꾸역꾸역 살아남은 이유야. 그러니까 네 혓바닥을 뽑아 버리기 전에 내 집에서 썩 꺼져! 엘리엇 데일을 찾기 전에는 나타날 생각 하지 마!”

언성이 높았으나 제인이 놀란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이유. 아. 그렇군.”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아서와 달리 그녀는 차분하게 흐트러진 잠옷을 정리하고 구석에 떨어진 권총을 주워 들었다. 막 의자를 걷어차는 아서를 보며 그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뭔가 알아내면 소식 전할게.”

“아직 안 꺼졌어?”

윽박지르자 제인은 새침한 눈길로 아서를 훑어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맨발로 터벅터벅 밖으로 향했다. 어느 틈에 제인의 코트를 꺼내 온 길퍼드가 뒤를 따랐다.

“빌어먹을.”

아서는 침실용 보조 테이블을 다시 걷어찼다.

자신과 싸우고 릴리벳과 싸웠다. 분명히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거기서 제인이 제 약혼녀라고 오해까지 했다. 엘리엇이라면 분명히 폭발적으로 화를 내야 마땅했는데 뭔가 충격을 받은 듯이 도망쳤다.

그래. 도망을 쳤다.

평소 화가 나면 흥분해서 돌아버리는 엘리엇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게 못내 걸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왔던 거지?”

아무리 궁리해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거야.”

그것도 오리무중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사실은 꼭지가 반쯤 돌아 버렸다.

“빌어먹을.”

아서는 침대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같은 남성이라고 안심하기에 엘리엇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살롱에서 그 꼴을 당했으면서도.’

그 작자들은 흠씬 두들겨 팬 다음에 신대륙으로 향하는 배에 몰래 실어 버렸다. 배가 대양 한가운데 있을 때쯤 들키도록 말이었다. 밀항자에 대한 선원들의 대우는 아주 참혹했다. 그것이라면

놈들에게 충분한 벌이 되리라.

문제는 엘리엇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꽂히는 눈빛을 늘 곁에 있는 릴리벳을 향한 선망으로 착각하곤 했다. 심한 언쟁 후에도 그를 원하는 아서의 마음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음을, 바보 같은 엘리엇은 절대 눈치채지 못했다.

초조함에 손끝이 떨렸다. 제발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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