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8)

“이 시간에 마시는 뜨끈한 차가 제법 좋단 말이야.”

손님이 빠져나간 홀 구석에 앉은 노스필드 백작이 갓 내린 향긋한 차 향기를 음미했다.

“자네도 어서 들어 보게.”

“네.”

엘리엇은 양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기운이 얼어붙은 손가락을 녹였다. 감미로운 차를 한 모금 머금고 향을 충분히 빨아들인 다음 삼켰다.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굳은 가슴을 어루만졌다.

“자네가 다시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 덕에 나는 차를 같이 마실 사람이 생겨서 좋군.”

사실은 어디에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당장 릴리벳을 보고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다른 곳을 물색했다. 로드니아에는 특별한 지인이 없었으며 유일한 친구인 찰리 윔즈를 방문하는 일은 당분간 삼가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려 추위 속에서 중심가를 조금 걷던 중에 문득 노스필드 저택에 코트를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일단 뭘 걸치고 걷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에 방문했는데, 때마침 엘리엇을 발견한 백작이 차를 권했다.

“코트를 깜빡했습니다.”

“다음번에는 찾으러 오지 않아도 하인이 자네에게 전달할 걸세.”

백작은 껄껄 웃으면서 차를 음미했다.

쓱쓱. 달그락.

여러 명의 하인이 조용히 홀을 정리 중이었다.

화려한 샹들리에를 밝히던 촛대와 가스등이 하나씩 꺼졌다. 유리잔과 접시, 수십 개의 의자가 홀 밖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악단이 사용했던 연단이 조용히 분리되었다. 익숙한 손길에 빠르게 정리되는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어쩐지 쓸쓸해졌다. 혼자 어둠 속에 잠식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꼈나?”

조용한 물음에 엘리엇은 백작을 응시했다. 아꼈다니. 릴리벳? 아니면… 아서?

“무슨 말씀이신지.”

“코트 말이야.”

“아.”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백작이 알 리가 없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예. 아낍니다. 릴리벳의 결혼을 기념하여 새로 맞춘 옷이거든요.”

“그렇군.”

찻잔을 기울이던 백작도 조용히 움직이는 하인을 지켜보았다.

“늘 곁에 있는 사람이 떠나가고 나면 말이야. 그 사람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물건에 큰 의미를 부여한단 말이야.”

“그렇습니까?”

“그래도 자네는 나보다는 행운아야. 행복한 릴리벳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니.”

아내를 잃은 백작이 건네는 위로는 무척이나 따뜻했다.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우리 엘리엇 데일답지 않군.”

“저야말로 사랑해 마지않는 이의, 나아가 다른 무고한 사람의 행복을 깨트린 당사자니까요.”

“그게 무슨 소린가.”

그날의 일은 가문의 수치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제가 저지른 끔찍한 잘못을 백작이 알면 어떤 호통을 칠지 몰랐다.

혼나는 것이 두려워 잘못을 고하지 못하는 어린애처럼 우물쭈물하자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늘 옳은 일만 하는 건 아닐세. 잘못을 떼어 놓고 용서를 구하게나. 자네에게 악의가 없었음을 상대가 알게 되면 용서해 줄 걸세.”

“악의가… 있었어요.”

“뭐라고?”

“제게는 악의가 있었어요. 그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워 쫓아 버리겠다는 악의가. 너무나도 많았어요.”

“이런.”

백작이 낮은 침음을 흘렸다. 누군가를 상처 입히려 드는 악의 자체가 큰 잘못이었다. 본인이 그렇다고 한다면 더더욱. 그렇기에 그는 한참 말을 골랐다.

“후회하고 있지 않나?”

“후회하고 있습니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진실한 자세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좋겠네. 진정으로 후회하며 사과하게.”

“그러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미약한 희망을 품은 엘리엇은 고개를 들어 백작을 보았다. 엄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애로운 눈빛으로 엘리엇을 살피던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누구도 알 수 없지. 상대에게 달린 문제야. 그렇다고 해서 용서를 구하지 않는 건 옳지 않네.”

백작의 말은 도덕적으로 옳았다. 엘리엇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가장 사랑하는 동생에게, 그리고 현재 엘리엇을 가장 뒤흔들어 놓고 있는 남자에게 앞에서 감히 솔직하게 용서를 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비겁한 회피 욕구 또한 백작이 알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엘리엇의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스러운 후회를 알아챌 만큼 나이를 충분히 먹었다.

“상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네를 위해서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그건.”

“본인을 위해서만 용서를 구한다면 매우 비겁한 행위지. 무릇 경전에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악행에 대한 죗값을 치르라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받는 고통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 그 점을 논파한 철학자는 무수히 많지. 하지만 말일세.”

잠시 멈춘 백작은 찻잔에 다시 뜨거운 찻물을 부으면서 말을 이었다.

“일단 한 번은 시도해야 용서를 받을지 말지를 알지 않겠는가. 알 수 없는 결과를 향한 두려움으로 계속 그렇게 후회를 끌어안고 있다면 결국 자신을 좀먹게 돼. 차라리 비난을 받는 편이 나아.”

엘리엇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받지 못한다면요?”

“그러면 용서받지 못한 채로 자네의 악의를 후회하게. 그런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이 있나?”

너무나도 간단한 결론이었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은 없었다. 어차피 동생은 엘리엇에게 깊이 실망하고 분노했다. 아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슬슬 피곤하군. 자네는 좀 쉬다가 가겠나?”

“아닙니다. 저는 가 보겠습니다.”

“이 늦은 새벽에?”

“백작님과 좋은 차를 마시면서 좋은 얘기를 들은 덕분에 정신이 맑아졌습니다. 이 기분이 가시기 전에 얼른 용서를 구하러 가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군. 건투를 비네.”

자리에서 일어서자 백작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결별의 악수를 하면서 백작은 이 시각엔 마차를 잡기 힘들다며 백작가의 마차를 사용하라 일렀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는지만 알려 주게. 늙었더니 괜한 호기심이 일어서 말이야.”

“네.”

농담조로 가볍게 던진 백작은 웃으면서 엘리엇을 배웅했다.

백작가의 고급 마차에 오른 엘리엇은 마부에게 아서의 저택이 있는 거리 이름을 댔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엘리엇은 어둠에 잠긴 거리를 바라보았다.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두 사람이 입은 상처는 회복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나름대로 삶의 길을 찾았다. 릴리벳은 새로운 사랑에 빠져 행복한 삶을 꾸리고 있다.

언젠가는 아서도 릴리벳처럼 엘리엇을 뒤로하고 약혼녀 제인 플레커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엘리엇은 그의 요구에 응해야 마땅했다. 그것만이 엘리엇의 진정한 후회를 전달할 유일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한 사람의 장밋빛 인생을 파탄 낸 자신이 새로운 인연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결혼은 아마 포기해야 하리라.

‘나이트스톤도.’

다음에 또 아서가 나이트스톤을 원한다면 그때는 깔끔하게 팔아 치울 생각이었다. 그가 약혼녀 제인 플레커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는 그에게 나이트스톤을 팔고 그 대금으로 영 다른 곳으로 떠나서 새로 자리를 잡고 싶었다.

‘사과한 뒤에 나이트스톤 얘기를 하는 편이 좋겠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침이 다 되어 도착한 저택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마차를 돌려보내고 엘리엇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현관까지 갔다. 청동 노커가 닻처럼 무거웠다.

탕탕.

두 번 내리쳤다. 놋쇠가 부딪치는 미약한 진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대각선 아래로 틀어졌다. 무척이나 큰 폐를 끼치고 있기에 길퍼드를 똑바로 보기 민망했다.

“늦은 새벽, 아니 이른 아침부터 미안하네만 아서를 만나고 싶네.”

길퍼드는 말이 없었다. 대신에 거친 숨을 거듭 뱉었다. 기세가 바짝 열이 오른 짐승처럼 맹렬했다. 길퍼드답지 않았다. 대각선으로 내렸던 시선을 완전히 아래로 떨어뜨린 후에야 엘리엇은 이유를 알았다.

시야에 들어온 구두는 일개 하인이 신기에는 너무 고급이었다. 우뚝 솟은 아름드리나무의 기둥처럼 굳건한 다리도 길퍼드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어디에… 있었지?”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억누르느라 한 박자 끊었다가 이어진 질문에 엘리엇은 답하는 대신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낯을 대할 줄 알았다. 하지만 상대는 충격적일 만큼 창백하게 질린 채였다.

“아, 코트를 두고 와서 잠시 노스필드 백작 저택에.”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아서가 엘리엇을 잡아당겼다. 꽉 잡힌 위쪽 팔뚝이 그대로 부서지는 줄 알았다.

쾅!

현관문을 후려치듯 닫아 버린 아서는 엘리엇을 질질 끌고 계단으로 향했다. 밤에 만났을 때 그를 피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예상치 못했다.

아마 제인 플레커와의 일 때문일까. 심장과 폐 사이에 서늘한 바람이 깃들었다.

계단을 성큼성큼 걷는 아서에게 붙잡힌 엘리엇은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예상한 대로 침실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는 순간, 제인 플레커가 있을까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지만 방은 비어 있었다.

탕!

문이 닫히면서 진동했다. 그래도 누군가 일어나서 무슨 일이 있는지 내다보는 일은 없었다. 분명히 아침잠을 설쳤을 하인들은 거침없는 주인을 위해서 숨을 죽였다. 그 말은 이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엘리엇을 도울 사람은 없다는 뜻이었다. 평소와 달리 엘리엇은 이 고립된 공간을 몹시 의식했다.

꽉 잡힌 팔이 침대 쪽을 향해서 던져졌다. 그 바람에 엘리엇은 몇 발짝 비틀거렸다. 용케도 쓰러지지 않은 엘리엇이 불안감에 날뛰는 맥박과 호흡을 억지로 다스리는 사이, 아서는 아까보다 더욱 거친 기세를 뿜어냈다.

“새벽 내내 찾아다녔어. 그런데 뭐? 코트를 놓고 와서 백작 저택에 있었다고?”

“믿을 수 없다면 확인해 봐도 좋아.”

“그런 말이 아니잖아!”

아서는 화를 터트리며 성큼 다가왔다.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났는데 그게 상대를 더욱 자극했다. 이미 사방이 막힌 방 안으로 몰아넣고도 모자라는지 그는 다시금 엘리엇의 팔을 붙잡았다. 억센 악력이 근육을 으깰 것 같았다. 하지만 살을 쥐어짜는 고통보다 날쌘 창처럼 퍽퍽 내리꽂히는 시선이 더욱 아팠다.

“너는 정말 네 생각만 하는군. 이기적인 개자식아. 네가 사라진 내내 내가 얼마나….”

“그래서 제일 먼저 여기에 온 거야.”

따지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릴리벳과의 관계며 동시에 약혼녀 제인 플레커의 이야기까지.

“그저 그런 옷 따위를 핑계로 나를 따돌렸다는 변명 따위 집어치워.”

“정말로 코트를 찾으러 갔어. 단지… 아니, 그런데 왜 내게 화내는 거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물론 만나러 갔다가 다른 일에 놀라서 그를 외면하긴 했다. 그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더군다나 둘 사이에?

“그야 당연히!”

“뭐가 당연한 거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 잘못한 것과는 별개로 고작 대면을 피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추궁당할 이유가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아서는 입을 벙끗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후우.”

거친 숨을 두어 차례 몰아쉰 그는 손으로 입매를 문지르며 엘리엇을 노려보았다. 마땅한 이유가 궁색하든가, 혹은 터놓고 얘기하기 곤란하든가.

“늦은… 새벽이라 걱정했어. 로드니아의 밤거리는 위험하니까 말이야.”

“물론 통상적으로 그렇지만 난 다 큰 어른이야. 게다가 남자고.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나?”

“그야 넌….”

말끝을 흐린 아서는 입을 다문 채로 문장을 완성했다. 엘리엇을 힐난하는 듯이 시선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노골적인 시선에 담긴 함의가 소름 끼쳤다.

“미쳤군. 내가 무슨 걸어 다니는 매춘부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내게 그런 추잡스러운 욕망을 품을 자는 이 세상에 아서 글래스턴, 너뿐이야.”

“로빈슨 살롱에서 있었던 일을 잊은 모양이군.”

“그놈들은 특별한 변태였어.”

“이 도시엔 특별한 변태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아. 로드니아를 제대로 모르는 순진한 네가 아무런 방비도 없이 혼자서 돌아다니면서도 제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부득불 혼자서도 괜찮다고 우기니까 더 화가 나는 거야.”

“무슨 어린아이 취급이군.”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과거의 끔찍한 사건을 사과하려던 마음이 싹 가셨다. 어쩌면 아서 글래스턴과 대면하는 자체가 실수일지도 몰랐다.

“재수 없는 자식. 네게 사과하려던 결심 자체를 후회하게 만들어.”

“엘리엇 데일이 내게 사과를 해? 하하하하.”

갑자기 아서가 크게 웃었다. 정말로 우습다는 듯이 어깨까지 떨었다. 비웃음의 정도가 지나쳤다. 그를 대면할 때까지만 해도 가득했던 죄책감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대신에 아서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이 불쑥 치밀었다.

정말로 달려들려던 순간, 아서가 드디어 웃음을 거뒀다.

“어울리지 않게 이상한 짓 하지 말고 평소에 하던 대로 해.”

아직 웃음의 여운이 남은 눈꼬리를 접은 채로 그가 냉소적인 문장을 던졌다.

“뭐?”

“항상 날 증오했잖아. 무구해야 마땅할 어린 시절부터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어떻게든 떨쳐 내려고 갖은 비열한 술수를 서슴지 않았으면서 갑자기 왜 이성적인 어른 행세하려 드는 거지?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만두라고.”

복합적인 편견과 비난에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입을 벙긋하면서도 혀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만큼 심장도 얼음처럼 단단해졌다.

“그래. 그 내가 미워 죽겠다는 표정. 그게 네게 제일 잘 어울려, 엘리엇.”

아서는 천천히 다가와 두 손으로 엘리엇의 어깨를 차분히 붙잡았다. 떨치려 했으나 어깨를 잡은 두 손에 점점 강한 힘이 실렸다. 뒤쪽으로 천천히 밀어붙인 덕분에 엘리엇은 이윽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살짝 벌어진 커튼 사이로 희미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그 빛을 등진 아서는 엘리엇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단단한 무릎이 엘리엇의 다리 사이로 천천히 들어왔다.

“길고 긴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들 한번 맺은 계약은 흔들리지 않아. 그건 알고 있겠지?”

“물론.”

아서는 느린 속도로 고개를 내려 엘리엇의 턱과 귀 언저리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축축한 입김이 기관차 증기처럼 뜨거웠다. 귓바퀴 아래 여린 살점에 혀끝이 닿았다. 곧 경동맥을 덮은 근육과 살갗에 잇자국을 남기고 도드라진 턱뼈에 입을 맞춘 다음 곧장 아랫입술을 깨물려 들 것이다. 그러면 더는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엘리엇은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제가 내렸던 간단한 결론을 차갑게 내뱉었다.

“결혼할 상대가 생기면 파기하기로 했지? 제인 플레커가 네 약혼녀인 줄은 몰랐어.”

“그녀는 내 약혼녀가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사업상 파트너. 그것도 이젠 의미가 많이 손상되었지.”

“제인에게 들은 말과는 다른걸?”

“믿을 수 없다면 확인해 봐도 좋아.”

상대는 아까 엘리엇이 했던 문장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다. 이상하게도 심장에 박혔던 얼음 송곳 하나가 스르륵 녹는 기분이었다. 제인 플레커는 그의 약혼녀가 아니었다. 거짓말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즉각적인 부인이 반가운 건 사실이었다.

아니 왜 기분이 좋은 것일까. 이런 부도덕하고 뒤틀린 관계를 당장 끝내지 못하고 더욱 이어 간다는 얘긴데. 기뻐할 이유가 하나도 없음에도 기뻐하는 자신이 어색했다. 분명히 나이트스톤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정부 계약은 당분간 유지된다는 건가?”

“그래.”

“진짜 약혼녀가 생길 때까지?”

턱을 핥으면서 엘리엇의 셔츠 단추를 푸는 데 몰두하던 아서가 동작을 멈추었다. 진득한 감정이 들끓는 시선이 엘리엇을 향했다.

“내가 빨리 결혼하길 원해?”

“이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언제까지 끌 순 없잖아.”

“끌지 못할 건 뭐지?”

“뭐?”

허를 찔린 듯 엘리엇은 아서에게 되물었다.

“이런 관계를 영원히 지속하면 안 된다고, 누가 정했지?”

아서는 뭇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숨을 죽일 만큼 비열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독하게 사악한, 그래서 폐부가 경련할 만큼 매력적인 미소를.

그 순간 엘리엇은 아찔한 미소와 함께 지독하게 집요한 의도에 숨이 막히고 말았다.

“영원히 지속?”

경악성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오. 맙소사.”

제 위를 점한 상대에게서 뿜어 나오는 압도적인 기운에 전신이 떨렸다. 이미 남성성은 조금씩 침식되는 중이었다. 아서 글래스턴에게 묶인 채로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다가는 온전한 성인으로서의 인격까지 무너질지도 몰랐다.

인간으로서의 지극한 본성이 발동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엘리엇은 거센 힘을 발휘했다. 제 위에 있는 아서를 떠밀고 침대 밖으로 튀어 갔다.

쿵!

“큭.”

막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엘리엇은 뒤에서 가해진 충격으로 인해 문에 전신을 부딪쳤다. 단단한 신체와 벽 사이에 끼인 상태로 엘리엇은 문고리를 열심히 돌렸다. 하지만 잠금장치가 풀리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열쇠로 잠갔어.”

귓가에 흐르는 목소리가 지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섬뜩한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거친 손길이 엘리엇을 붙잡았다.

“놔.”

“안 돼. 더는 도망치게 두지 않아.”

뻗대는 엘리엇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질질 끌고 간 아서는 침대 언저리에 이르러 한 손으로 제 허리띠를 풀어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엘리엇에게는 좋지 않은 징조였다. 사색이 되어 발광했다. 제 손목을 잡은 억센 손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손톱으로 긁고 그것도 모자라 이를 세워 살점을 깨물었다.

“큭.”

허리띠를 풀어낸 아서는 제 손을 마구 물고 있는 엘리엇을 침대 아래에 내동댕이쳤다.

쿵.

“억.”

그는 등을 침대 틀에 세게 부딪치는 바람에 곧장 일어서지 못했다. 찰나를 놓치지 않은 노련한 사냥꾼처럼 아서는 엘리엇의 두 손목을 한꺼번에 잡은 뒤 솜씨 좋게 허리띠로 침대 기둥에 묶었다. 고급 가죽이 손목에 찰싹 달라붙었다.

침대를 바라보는 쪽으로 묶였기에 발길질을 하기도 어려웠다. 곧 잇자국이 선명한 손등이 엘리엇의 뺨을 가볍게 스쳤다. 반항하는 엘리엇의 고개를 억지로 옆으로 돌린 그는 일그러진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얹었다가 뗐다.

“키스하고 싶은데. 재갈도 사용하고 싶지 않아. 무슨 뜻인 줄 알지?”

“제정신이 아니군.”

어금니를 꽉 깨물고 아서를 노려보면서도 엘리엇은 공포에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영원히 지속하는 관계라고? 영원히?

미쳤다. 아서는 미쳤다. 십오 년 내내 엘리엇을 향한 증오를 곱씹다가 완전히 미쳐 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 짓을 영원히 하겠다고 들겠는가.

릴리벳에 대한 마음이 이다지도 깊고 빽빽했던가. 자신이 상상한 이상으로 아서는 릴리벳을 사랑했던 모양이었다.

아서는 필요한 물건을 챙겨 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소리치고 발을 굴러 소란을 피워도 하인이 들여다보는 일은 없을 터였다. 잠시 혼자 남은 사이에 엘리엇은 기묘한 여파에 시달려야 했다.

새삼 명치가 아렸다. 심장과 폐부, 그리고 위장이 동시에 낙하하는 바람에 섬뜩함마저 엄습했다. 내장이 비껴간 빗장뼈 안에 서늘한 공동이 자리를 잡았다.

제인 플레커와 개인적으로 진지한 사이가 아니라고 아서가 단호히 선을 그었을 때와 정반대면서도 기묘하게 닮은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왜?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온몸의 혈관이 제멋대로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면서 말초는 차가워지고 중심부는 뜨거워졌다. 뒷골은 팽팽하게 땅겼고 뇌는 멍하게 척수액 속을 부유했고 반대로 경추는 활활 불탔으며 요추는 바짝 굳어 버렸다. 허벅지 근육은 발발 떨렸고 오금은 화끈거렸다. 발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세계의 모든 철학자가 추앙하는 이성적 자가 진단을 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간신히 파악할 수 있는 건, 지금 휘몰아치는 감정이 대단히 부정적 색채를 띤다는 점이었다. 또한 동시에 외부로 발산하기보다는 내면으로 수렴하길 원했다.

간신히 알아낸 두 가지를 합쳐서 정의한다면 바로 ‘상처’였다. 스스로 내린 결론에 엘리엇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왜 내가 상처받아야 하지? 아서가 릴리벳을 지극히 사랑했다는 점에서 왜? 죄책감 때문인가. 아니면 릴리벳을 향한 미안함 때문? 아니면 영원히 지속할 부정한 관계 때문에? 영원히 릴리벳의 대신이라서?’

궁리가 궁지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해석하기 힘든 제 감정에 떠밀려 패닉을 일으킬 무렵, 마치 구원처럼 들려온 아서의 인기척이 엘리엇을 내면의 세계에서 강제로 끄집어냈다.

저벅저벅.

멀리서 다가오는 확신에 찬 발걸음이 무거운 공기를 진동시켰다. 익숙한 두려움과 저릿한 기대감이 불분명한 감정이 불러온 당혹감을 넘어섰다.

벌컥.

문이 열리고 아서가 낯익은 오일 병을 들고 나타났을 때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뭘 예상했기에 그렇게 안도해?”

빈정거림에 맞받아칠 기력도 없었다. 그저 감정을 압도하는 섹스에 기대 모든 걸 잊어버리길 바랄 뿐이었다. 밤새 주고받은 입씨름만큼 격렬한 행위를 기대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기둥을 잡은 자세가 꼭 말썽을 피운 개구쟁이가 엉덩이를 얻어맞을 때와 비슷했다.

“채찍이라도 들고 오는 줄 알았어.”

엷은 한숨과 뒤섞인 떨리는 음성으로 전혀 마음에 없던 말을 내뱉었다. 딴에는 정신을 팔려고 던진 농담이었는데 아서에게는 남다르게 들린 것 같았다.

다가오던 자세 그대로 우뚝 굳은 그는 딱딱한 눈빛으로 엘리엇을 응시했다.

“뭐?”

“자세가 꼭… 그렇잖아?”

스스로 만들어 낸 어색함을 지우려고 일부러 싱긋 웃었다. 하지만 아서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고, 들고 온 유리병을 침대에 두는 손이 어떤지 가늘게 떨렸다.

‘저 손이 이성을 잃고 엉덩이를 후려친다면 얼마나 아플까.’

무의식적인 상상에 엘리엇의 아랫배가 뒤틀렸다.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려는 사람이 보통 그러듯이 괴상한 상상이 쭉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아서는 엘리엇의 등 뒤에 자리 잡았다. 큰 손은 엉덩이를 후려치는 대신에 엘리엇의 장골을 턱 잡았다. 단단한 손과의 접촉이 가져온 저릿함이 발끝까지 전달되기도 전에 바지와 속옷이 내려갔다. 구두도 양말도 모조리 벗겨져 구석에 처박혔다.

깨끗하게 관리한 고급 카펫 위에 상대적으로 흰 빛깔을 가진 두 발이 나란히 섰다. 그 안에 번드르르한 광택을 발하는 구두가 들어왔다. 아서는 제 오른쪽 구두 뒷굽을 중심축으로 삼아 앞코를 좌우로 움직였다. 딱딱한 밑창이 엘리엇의 안쪽 복숭아뼈를 건드렸다.

“벌려.”

두 발 사이의 간격을 벌렸다. 아서가 장골을 다시 잡았기에 엘리엇은 허리를 숙이고 엉덩이를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셔츠와 조끼를 걸친 상체와 달리 하체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기에 허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도 은밀한 부위를 드러내기엔 충분했다.

“연회에서 써먹지 못했나 보군.”

“그럴 기회가… 윽.”

이럴 때면 늘 오가는 시비에 불과한데 아서의 태도는 전과 달리 냉정하고 거칠었다. 그는 마치 말 사육사가 말의 발정 수준을 가늠할 때처럼 가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고환과 자지를 주물렀다. 성적인 유혹과는 거리가 먼 도축업자의 손길 같았다.

“그래. 오늘은 그럴 기회가 없었지. 제인 플레커와의 은밀한 시간을 내가 방해했으니 말이야.”

“일부러… 그런… 헉.”

혹시 제인과 만나는 걸 미리 알고 들이닥친 거냐고 묻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아서가 엘리엇의 고환을 세게 쥐어짜는 바람에 숨을 들이켜야만 했다.

“일부러 그랬냐고? 글쎄.”

전 같으면 떠보는 듯한 미적지근한 대답에 발끈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급소를 잡힌 육체의 여유는 물론이거니와 폭풍처럼 몰아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심적 여유도 잃었다.

고개를 밑으로 떨어뜨렸다. 거꾸로 된 시야에 제 다리 사이를 주무르는 손이 보였다. 마치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사이에 욕망의 불길이 서서히 번졌다.

“…빨리.”

“네 음탕함은 알아줘야 해, 엘리엇.”

비웃음과 함께 그가 오일 병을 잡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서는 예상을 깨고 엘리엇의 등에 제 가슴을 겹쳤을 뿐이었다. 드러난 엉덩이 골을 누르는 묵직한 성기의 존재감이 대단했다.

가랑이를 주무르던 손은 어느새 셔츠 안으로 들어와 마른 젖꼭지를 거머쥐었다. 양손으로 작은 살점을 꼬집고 비트는 사이, 국부에서 시작된 욕망은 들불처럼 사납게 기세를 올렸다.

“흐읏.”

유두를 희롱당하는 동안 상체가 서서히 늘어졌다. 뒤로 젖힌 엘리엇의 고개 옆으로 아서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귓가에 제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몸을 겹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아.”

“그래서? 안 할 거야?”

나른하게 내려앉은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얇은 시야엔 아서의 짙은 눈동자가 크게 자리 잡았다. 깊은 어둠으로 빚은 듯한 홍채는 늘 그렇듯이 이글이글 들끓었다.

검은 거울 같은 동공엔 금발에, 흰 피부를 가진 사람이 들어 있었다. 형상은 선명해도 너무나도 작아 남녀를 구별하기 충분치 않았다. 실루엣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엘리엇에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쌍둥이 동생과.

입술을 말아 물었다. 다만 상상으로라도 릴리벳과 이런 몰상식한 관계를 연결하고 싶지 않았다. 아서는 제 좌절된 사랑의 찌꺼기를 엘리엇에게 실컷 퍼붓고 싶을 뿐이다.

영원히 지속하리라고 호언장담하지만 모든 감정은 시간을 따라 바랜다. 아서의 지독한 감정도 무수한 성관계 속에서 언젠가는 옅어지리라.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티겠다는 각오를 다질 무렵, 아서가 문득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화가 난 이유를 아직도 모르고 있어. 그리고 나는 어젯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여기로 온 건지 전혀 모르지.”

“그래서?”

“전처럼 이대로 몸을 겹치고 문제를 미뤄 둘까? 아니면 네 조개 같은 입술을 열고 정말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이참에 얘기해 보는 게 어때?”

가슴의 살점을 희롱하던 손이 더 위로 올라왔다. 흉골을 지나 빗장뼈까지 올라왔다. 목으로 이어지는 오목한 부분에 손끝이 걸렸다. 다른 손은 밑으로 내려가 엘리엇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늘 깨물리고 빨렸던 안쪽 허벅지 살을 더듬는 손길에 솜털이 바짝 섰다. 저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예민한 부위를 일부러 비껴가는 손길을 느끼면서 엘리엇은 마지막 남은 이성을 끌어모았다.

“너는 대화를 하기 위해 찾아온 날 강제로 끌고 침실로 들어왔어. 그것도 모자라 내 신체적 자유를 빼앗았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이 하고 싶었는지가 뭐가 중요하지? 넌 결국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거고 나는 그냥 견디는 수밖에 없지. 내가 어떻게 느끼든, 내가 무슨 말이 하고 싶든. 너는 듣지 않아.”

“그건 도리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인걸.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넌 불신하잖아. 몇 번이고 진심을 털어놓아도 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 혹시 몇 단어가 네 고귀한 고막에 닿으면 끔찍한 사기꾼의 역겨운 거짓말이라도 들은 양 진저리를 쳤어.”

날 선 비난과 달리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어깻죽지를 덧그리는 손끝의 움직임에 따라 엘리엇은 갈비뼈를 조였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마른 공기를 들이마신 기관은 곧 젖은 숨을 토해 냈다.

“비겁하게도 너는 단 한 번의 시도가 좌절되었다고 바로 포기했지. 자존심을 무너뜨리면서 전달할 필요가 없는 건 진심이라고 하지 못해.”

“그래? 그럼 진심이 아닌가 보지.”

“그래. 그렇게 나와야 내가 아는 바로 그 엘리엇 데일이지.”

사실은 아니었다. 말을 끝끝내 하지 못한 이유는 자존심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버림받고 결국 혼자 남으리라는 두려움.

‘아. 나는 이미 혼자가 아닌가. 왜 그런 생각이 든 거지?’

아까부터 혼란스럽기만 했다. 죄책감과 당혹감, 그리고 영문 모를 상처까지 뒤섞여 머리가 아팠다. 이대로 불편한 대화를 이어 가다가는 정말 자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다급함에 어투가 거칠어졌다.

“말만 앞세울 거야? 할 게 아니라면 풀어.”

가죽 허리띠에 감긴 손을 흔들어 댔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마구 흔들리는 양 손목을 가만히 가라앉혔다.

“그건 안 돼. 아까 연회에서 못다 한 걸 지금부터 해야 하니까.”

“정부 주제에 말이 많아. 닥치고 네 그 잘난 자지를 내 항문에 빨리 쑤셔 처넣기나 해.

“분부대로 하지요.”

망할 오일을 드디어 쓰기로 마음먹은 아서는 손에 그것을 듬뿍 발랐다.

툭.

오일 병이 카펫 위로 떨어졌다. 엘리엇의 시선이 저절로 거길 향하면서 시야가 아래로 내려갔다. 발치에 기름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허벅지 안쪽으로 타고 흐르는 오묘한 빛깔의 액체를 응시하는 중에, 단단한 손가락이 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추륵. 축. 쵸옵.

상스럽고 난잡한 소리가 났다. 어쩐지 키스할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구멍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부드럽고 축축한 혀가 아니라 단단하고 심지가 곧은 손가락이었다.

“흐윽.”

처음부터 두 개가 들어왔다. 거듭된 관계에 충분히 적응한 구멍은 유연하게 벌어져 아서의 손가락을 빨아들였다. 오일을 바른 딱딱한 손끝과 질긴 피부가 안쪽 여린 살을 자극했다. 솜털 뿌리, 혹은 새로운 대륙에서 얻어 온 상처일지도 모를 자잘한 거스러미가 매끈한 구멍 언저리를 긁을 때마다 엘리엇은 흠칫흠칫 놀랐다.

“이젠 구멍이 금방 열리는군.”

희롱하듯 읊조리면서 아서는 손가락을 바로 네 개로 늘렸다.

“큭. 덕분에.”

세 개로도 충분한데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했다. 엘리엇은 한쪽 눈을 찡그리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 엘리엇 자신도 여태껏 직접 탐구해 본 적이 없는 가장 내밀한 부위를 제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작자의 손가락은 충분히 길었다. 네 개나 쑤셔 넣는 바람에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이 짜릿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난잡한 성욕의 응어리에 닿기에는 부족했다. 조금만 더 안쪽으로 강하게 쑤셔 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서는 그러지 않았다.

“흐윽. 읏.”

안타까움에 저절로 하체에 힘이 들어갔다. 엉덩이 양쪽에 커다란 보조개가 생겼다. 탄력적인 살덩이는 남자의 손을 거머쥐고 거친 자극을 요구했다.

“손가락을 부러뜨릴 셈이야?”

“내 구멍에 넣을 게 고작 손가락뿐이라면.”

“후우. 엘리엇. 넌 정말.”

심호흡하면서 아서가 말을 뚝뚝 끊었다. 구멍을 헤집던 손가락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마른 손이 엘리엇의 허리를 붙잡았다. 달군 인두처럼 뜨겁고 밭은 숨을 뱉는 순간, 굶주린 입구에 드디어 아서의 자지가 닿았다.

“흐으.”

두꺼운 귀두가 입구에 살짝 물렸다. 오금이 바짝 긴장했다. 저절로 엉덩이가 뒤로 물러났다.

“흐으읍.”

깊은 숨을 들이마신 아서는 엘리엇의 안으로 들어오는 데 긴 시간을 들였다. 조금씩 젖은 입구를 열면서도 살짝 각도를 비틀었다. 그럴 때마다 아기 주먹 같은 귀두가 오일에 젖은 살결을 문질렀다.

“하아.”

선연한 감각이 허리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회음이 쿡쿡 쑤셨고 고환이 바짝 오그라들었다. 엘리엇의 자지도 서서히 힘을 받기 시작했다.

“후우.”

척추를 거슬러 올라오는 뜨거운 손바닥과 함께 열기가 어느새 목 언저리까지 뻗었다. 귓바퀴가 홧홧했고 목구멍 안쪽에서 약한 울림이 퍼졌다.

추루웁. 츄욱. 춥.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자지는 느리지만, 단 한 차례도 물러남 없이 똑바로 직진했다. 입구가 비명을 지르고 귀두에 휩쓸린 연약한 장이 찢어질 듯 밀려도 아랑곳없이, 막무가내였다.

이 정도로 공들인 삽입은 처음이었다. 막대한 부피가 제 하체 일부를 헤집는 감각을 잔인할 만큼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어디까지 들어올 텐가. 어디까지 벌려 놓을 텐가. 이러다간 도저히 회복될 수 없으리라는 미지의 두려움마저 들 무렵, 드디어 엉덩이 아래에 까슬까슬한 음모와 함께 딱딱한 근육이 닿았다.

“하아.”

안도감에 한숨을 내쉴 때, 아서가 상체를 기울여 등을 감쌌다.

“후. 다 들어갔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아는 사실을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훤히 드러난 허벅지에 고급 옷감이 닿았다. 겨울용 신사복에 쓰는 천은 모직이라 제법 도톰할 텐데도 두툼한 근육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굵은 허벅지에서 나오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기대감이 물씬 차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손을 뻗어 그 근육을 움켜잡았을 터다.

결합을 완료한 아서는 오일이 묻은 손을 뻗어 꼿꼿이 일어선 엘리엇의 자지를 잡았다. 엄지, 검지, 그리고 중지를 모아 뿌리를 강하게 압박했다.

“하윽.”

정수리에 벼락이 내리쳤다. 막강한 전력이 신경을 타고 사지로 뻗었다. 근육이 움찔거렸고 덩달아 구멍이 오그라들었다.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투명한 하이힐을 신은 것처럼 바짝 긴장한 발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이제 움직일 거야.”

“일일이 알려 주지 않아… 아!”

거친 출납 행위를 예상하고 몸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아서는 그런 기대를 배신했다. 그는 들어올 때처럼 최대한 천천히 자지를 뺐다가 구멍에 귀두가 반쯤 걸릴 때쯤 다시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추으릅.

느릿느릿한 행위가 반복되는 동안, 엘리엇은 처음 느끼는 야릇함에 휩싸였다. 발끝이 저릿저릿하고 회음이 욱신거리도록 단번에 두뇌를 두드리는 쾌락은 아닌 뭉근한 감각은 느린 맥박처럼 전신을 천천히 녹였다.

“왜?”

안타까움을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아서는 더운 숨결은 귓가에 뱉었다.

“가끔은 느긋하게 즐기는 것도 좋잖아.”

“아… 아서.”

그는 엘리엇을 단숨에 불태우는 대신에 서서히 지져 죽일 속셈이었다.

차라리 폭풍이 나았다. 뭉근한 열기는 엘리엇을 마른 육포로 만들 기세였다.

“아서… 좀 더 빠르게… 후아.”

“급한 성미를 고칠 때도 되었잖아.”

“아니 그게 그런 말이… 욱!”

감질나게 느릿느릿 움직이면서도 아서는 성감대를 확실하게 찔러 왔다. 꾹꾹 터트릴 듯이 누르는 바람에 엘리엇은 등을 오목한 접시 모양으로 휘면서 아찔한 한숨을 내뱉었다. 발끝이 달달 떨렸다.

황홀감이 은은한 파도처럼 물결쳤다. 그래서 더욱더 곤혹스러웠다. 당장 절정으로 내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서는 그런 엘리엇의 바람과는 전연 딴판으로 움직였다.

완전히 풀어진 셔츠가 목 뒤로 느슨하게 흘러내렸다. 설핏 드러난 어깨에 뜨거운 혀가 닿았다. 그것이 간지럽게 스치고 지나간 부위에는 곧 탄력적인 입술이 들러붙었다.

쫍.

어린 새가 모이를 쫄 때처럼 어깨와 목에 짧은 키스가 이어졌다. 그동안 셔츠 사이로 훤히 드러난 유두는 아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으읏.”

부드러운 애무로 어깨를 녹이고 있는 남자는 어깨에 비해서 한없이 여린 살점인 젖꼭지를 딱딱한 엄지와 검지로 꼭 붙잡고 세게 뭉그러뜨렸다.

“읏.”

으깨질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앞선 큰 아픔에 엘리엇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깨에 이어 목과 귓바퀴를 헤매는 탄력적인 입술과 혀가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무섭게, 손가락이 유두를 꼬집고 비트는 바람에 엘리엇은 나른한 한숨과 날카로운 신음 사이에서 방황했다.

“으흑! 흣… 하아… 헉.”

등과 가슴이 느끼는 정반대의 자극에 간신히 적응할라치면 아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구멍 깊숙이 자지를 처박았다. 노골적으로 특정 각도와 지점을 집요하게 노렸다. 거북이 속도로 성감대를 꼼꼼히 훑고 가는 자지 덕분에 인내심이 바싹 말라 버렸다.

“아서… 아서… 더는… 제발 평소처럼… 아.”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가냘프게 애원했다. 애석하게도 엘리엇을 사로잡은 상대는 동의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느긋한 대화야.”

“으윽… 핫!”

이게 무슨 대화냐고 물어보려던 말은 막 꼬집힌 유두 때문에 입 속에서 뭉그러졌다.

“아파… 아… 간지러워… 거긴!”

세 군데서 동시에 다른 감각이 전해져서 일일이 반응하기도 버거웠다. 아서는 그것도 모자라 한 손으로 엘리엇의 자지도 문질렀다. 어린아이도 그보다는 힘이 세다고 욕설을 퍼붓고 싶을 만큼 나긋하게 문질렀다.

정말 애태워 죽일 작정인지 아서는 살짝 엉킨 음모를 헤집으며 뿌리를 더듬다가 검지와 엄지로 넉넉한 고리를 만들어 기둥을 슬며시 훑었다.

“흐윽… 하아.”

길고 긴 삽입 내내 자극다운 자극을 받지 못했기에 엘리엇의 자지는 그것도 좋다고 벌떡 일어섰다. 빨갛게 달아오른 귀두가 흐린 시야에 걸렸다.

“아… 서.”

“잘… 느끼고 있잖아.”

계속 신음을 지르던 사람은 엘리엇이었다. 아서는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도 그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쉬어 있었다. 작열하는 증기에 화상을 입은 성대가 간신히 진동하는 듯 거칠게 그르렁거렸다.

구멍을 거대한 성기와 딱 맞붙인 채로 아서가 움직이자 엘리엇의 엉덩이는 부드럽게 흔들렸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물러날 때마다 긴 손가락에 걸린 성기 끝에서 투명한 액이 뚝뚝 떨어졌다.

“하으으… 큭.”

안타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해 달라는 애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 통에 슬슬 부아까지 치밀었다. 완전히 풀려 버린 허리와 무릎과는 반대로 허리띠에 매달린 팔목 때문에 힘이 들어간 어깨와 팔꿈치가 시큰거렸다.

“크윽.”

조임이 반복될 때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숨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호흡에 깃들어 낮게 울리는 신음에서 엘리엇은 아서가 자신만큼 열기에 휩싸였음을 깨달았다.

“엘리… 엇.”

쉰 음성으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움직임이 한층 나긋나긋해졌다.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자 아서를 의식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못된 손이 유두를 문지르다가 꼬집으면 엘리엇은 할 수 없이 허리를 움찔대며 구멍을 조였다. 그럴 때면 아서는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자지도 마찬가지였다. 의도적으로 예민한 선단을 조금씩 긁을 때 엘리엇의 하복부에는 바짝 힘이 들어갔다. 발톱이 하얗게 변할 만큼 힘겹게 버티는 동안 제 안에 든 우람한 자지는 매끄러운 내장을 휘감고 경련을 음미했다.

“으음.”

바리톤에 가까운 비음에선 만족감이 넘쳐흘렀다. 목구멍을 바짝바짝 태우는 은은한 불길 속에서 아서는 대단한 쾌락을 만끽했다.

“아.”

그가 제 안에서 희락을 얻고 있음을 알아채는 순간, 믿을 수 없게도 엘리엇의 쾌감 또한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렸다.

“크읏… 윽!”

아까와 특별히 다른 자극이 가해지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절정이 찾아왔다. 아랫배 근육이 바짝 조임과 동시에 고환이 올라붙었다. 회음이 쿡쿡 쑤시면서 구멍과 연결된 내부가 뒤틀렸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전신을 흔드는 동안 바짝 일어선 자지 끝에선 희멀건 정액이 흘렀다.

“으아… 하!”

“음?”

절정의 속도 또한 느렸다.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릿속이 하얗게 작렬했다.

“너무 갑작스러운데. 기분이 그렇게 좋아?”

의아한지 아서가 물었다. 대답할 여유도 없을뿐더러 그가 자신 안에서 느끼고 있음에 절정을 느꼈다고 설명하기도 싫었다. 대신 엘리엇은 시뻘건 얼굴을 들린 팔 사이로 떨어뜨렸다.

두 발 사이에 멀건 정액 자국이 점점이 흩어졌다. 카펫이 더러워졌음에도 아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직도 단단한 자신의 자지를 다시금 깊숙이 밀어 넣었다.

“크윽.”

쾌락에 겨워 엘리엇은 다시 고개를 뒤로 젖혔고, 마침 아서 또한 고개를 숙여 파르르 떨리는 엘리엇의 눈꼬리를 혀로 핥았다.

흔들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제 안에 자리 잡은 아서의 성기가 폭발하여 질척한 정액을 쏟아 내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저항할 수 없는 행위에 휩쓸려 엘리엇은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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