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서던베리 필즈
로드니아 외곽에 있는 윔즈 가의 별장은 상상보다 훨씬 전원적이었다.
“거대한 도시 옆에 이렇게 조용한 곳이 있다니 놀라워요.”
“일부러 영지 주변을 빙 둘러 빽빽하게 나무를 심었어. 돌담도 세웠고 말이야. 실제로는 보기보다 훨씬 넓은 저택이야.”
찰리는 릴리벳과 윌리엄에게 저택을 구경시켜 주었다. 성채와 비견되는 거대한 저택을 가로질러 후원으로 나갔다. 같은 층인데도 현관과 달리 후원으로 향하는 테라스에서는 계단이 아래로 이어졌다.
“앞과 뒤의 토지 높이가 달라. 저택이 낮은 지대를 감싸고 있어서 사생활 보호에 유리해.”
“그래서 이곳에서 많은 역사가 일어났군.”
“정치 야합뿐이겠나? 외도의 장이기도 했지.”
“여기서?”
“전문 포주까지 있었어. 에드워드 윔즈라고 말이야.”
“자기 조상을 그런 식으로 말하는 후손이 어디에 있나?”
“사실인걸? 애초에 왕에게 여자, 때로는 남자를 대 주면서 세력을 키운 가문이잖아.”
찰리는 대답하기 난처할 정도로 제 가문에 악담을 퍼부었다. 다른 이들이 그저 웃고만 있자 광대를 자처한 그는 신난 듯이 한 발을 축으로 몸을 빙글 돌렸다.
“나도 오늘은 조상의 유지를 받들어 즐거운 파티를 열려고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린가?”
“고귀한 분에게 즐거운 유흥과 안락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 윔즈 가문의 천명일 터.”
“우린 왕족이 아니네만.”
윌리엄의 말에 조금 뒤에 있던 아서가 덧붙였다.
“난 악덕 자본가 행세를 하는 평민이지.”
“평범한 농장주는 여기 서 있는 것조차 황송하군.”
신난 찰스가 고조된 어투로 되물었다.
“그런데 평범한 농장주께서는 얼굴이 왜 그렇나?”
“마차 안에서 찬 바람을 많이 쐬어서 그래.”
“저런.”
시뻘건 얼굴을 손으로 가리는 엘리엇을 보고 릴리벳이 다가왔다. 동생이 고운 손을 올리기에 엘리엇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무릎이 꺾였다.
턱.
아서가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허리를 붙잡았다. 마치 엘리엇이 덤벙대서 그런 듯이 가벼운 타박도 했다.
“조심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린 순간, 릴리벳이 끼어들었다.
“혹시 감기 걸린 거야?”
아리따운 얼굴에 걱정이 서렸다. 엘리엇은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목소리도 쉬었어. 도대체 찬바람을 얼마나 쐰 거야. 날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아직 겨울이라고.”
“열이 나는 바람에.”
아무렇게나 주워섬긴 말에 릴리벳의 걱정은 더욱 커졌다. 장갑을 벗은 하얀 손이 이마와 뺨에 닿았다. 부드러운 손바닥이 시원했다.
“정말 열나잖아.”
“이런.”
그 말에 찰리는 소리쳐 하인을 불렀다.
“친애하는 데일 씨께서 몸이 조금 안 좋으신 것 같군. 침실로 안내해 드려. 뜨거운 목욕을 하고 감기약을 먹는 게 좋겠어.”
“아니. 그럴 만한 일이 아니야. 조금만 쉬면 금방 돌아와.”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데.”
윌리엄마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쉬려고 온 것이니 무리하지 말게. 나중에 다른 손님도 온다고 하니 푹 쉬고 저녁에 보세.”
“그래. 오빠. 올라가자.”
릴리벳이 엘리엇의 팔을 잡아끌려고 했다. 하지만 아서가 자연스럽게 막아섰다. 릴리벳에게서 엘리엇의 팔을 빼낸 아서는 마치 부상자를 부축하듯 엘리엇의 등에 팔을 둘렀다. 너무나도 친밀한 자세인데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엘리엇만 당황스러워 입을 벙끗거렸다.
“내가 할게.”
“아서가?”
“그래. 남편을 혼자 두면 안 돼. 우리 유흥꾼께서 어떤 못된 걸 가르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흐음. 유흥을 즐길 자질이 있을까?”
찰리가 짓궂은 눈빛으로 윌리엄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장난인 걸 알면서도 릴리벳은 찰리를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윌리엄의 곁에 섰다. 아무래도 도박 사건이 있다 보니 영 마음을 놓긴 힘들었다. 윌리엄도 그걸 아는지 제 팔을 꼭 잡은 흰 손을 도닥였다.
“그럼 아서, 오빠를 부탁해.”
가장 못 믿을 인간이자 홍조의 원흉인 줄도 까맣게 모르고 아서에게 사랑하는 오빠를 넘긴 릴리벳은 찰리, 남편과 함께 후원을 둘러보기 위해 테라스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하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방에 들어섰다. 찰리가 시킨 대로 하인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는 사이 엘리엇은 아서를 밀어냈다. 그리곤 낮게 으르렁댔다.
“그러게 티가 난다고 했잖아.”
“감기로 알고 있으니 괜찮아.”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그때 하인이 나왔다.
“짐은 아까 옮겨 두었습니다. 목욕에 필요한 물품도 욕실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감기약은 곧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괜찮네. 감기가 아니라고 하거든.”
아서의 말에 엘리엇은 입을 떡 벌렸다. 차라리 감기라고 우기는 편이 나은데. 여기서 갑자기 감기가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아서는 웃는 낯으로 하인을 내보냈다.
“미쳤어?”
“네 말대로 했을 뿐인데?”
“미친 자식.”
일부러 그런 걸 알고 엘리엇은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화를 내 봐야 자기만 말릴 뿐이었다. 특히 둘밖에 없는 침실에선 더더욱.
“알아서 목욕할 테니 그만 가.”
식식대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옷을 벗고 적당히 뜨거운 욕조 물 안에 몸을 담갔다.
찰랑.
“후우.”
흔들리는 마차에서 소리를 죽여 가며 당하느라 얼마나 긴장했던지.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깨도, 허리도, 목도 아팠다. 다리도 후들거렸다. 긴장을 해소하고 몸에 남은 찝찝한 흔적을 씻어 내는 데는 온욕이 최적이었다.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계속 나왔다. 넘치기 전에 잠가야지 생각하며 눈을 감은 사이, 누군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뭐야?”
어느새 상의를 벗은 아서가 욕조에 기댄 엘리엇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같이하지.”
“뭐?”
깜짝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키는데, 아서가 하의를 훌쩍 벗었다. 거대한 성기가 눈앞에 왔다.
정사의 흔적이 채 지워지지 않은 건 아서도 마찬가지였다. 제 안을 드나들었던 흔적이 역력한 자지를 생눈으로 보니 괜히 떨떠름했다.
“어. 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는 사이 아서는 긴 다리를 움직여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뜨겁군.”
촤아악.
커다란 욕조였으나 성인 남성 둘이 사용하기에는 비좁았다. 아서가 반대편에 앉자 물이 넘쳐서 밖으로 흘렀다. 최신 유행을 따라 바닥에 타일을 깔아 놔서 다행이지 흔한 나무 바닥이었으면 아래층으로 물이 샐 뻔했다.
“하아. 이 맛이 온욕하는 거군.”
하얀 도기 욕조에 두 팔을 걸친 아서는 몸을 천천히 밑으로 내렸다. 그 바람에 자리가 비좁아졌다. 엘리엇은 무릎을 세워야만 했다.
“좁으니까 네 방 욕실을 사용해.”
“이미 담갔잖아. 쩨쩨하게 그러지 말라고.”
뻔뻔하기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남의 공간에서 더욱 대담하게 나오는 아서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아니면 내가 나가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몸이 욕조 밖으로 나가기 전에 큰 손아귀가 엘리엇의 팔목을 잡았다.
철벙.
물 위로 넘어졌다. 사지를 허우적대는 사이 아서가 양쪽 겨드랑이에 두 팔을 끼워 쭉 끌어당겼다. 그는 엘리엇은 제 다리 사이에 앉히면서 물에 젖은 금발을 손으로 넘겨 주었다.
“진정해. 여기서 익사하면 창피하잖아.”
“지금 그게 네가 할…!”
따지려 들던 엘리엇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뜨거운 뭔가가 구멍을 쓰윽 빠져나갔다. 허리 양편에 뻗은 아서의 무릎을 잡고 잘게 떨었다.
“빌어먹을.”
낮게 욕설을 뱉자, 아서가 벗은 등에 든든한 가슴을 포개 왔다. 엘리엇의 어깨에 턱을 얹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엘리엇의 표정을 관찰했다. 왜 그랬는지 들키기 싫어서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 외면했다.
“왜 그래?”
“신경 쓰지 마.”
물보다 뜨거운 팔이 허리를 휘감더니 이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곤 엘리엇도 미처 몰랐던 사실을 일깨웠다.
“헛.”
어느 틈에 꼿꼿이 일어선 자지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엄지와 검지로 귀두를 누르는 통에 엘리엇은 한쪽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 다른 손이 고환을 들추고 그 아래로 내려갔다. 뜨거운 물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섬뜩한 감각이 전해졌을 때, 엘리엇은 아서가 손가락으로 제 구멍을 들쑤시고 있는 걸 알았다.
“무슨… 흣!”
“안에 든 걸 빼야지. 방금 놀란 건 그 때문이잖아, 안 그래?”
“누가… 으음.”
부인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자지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면서 구멍을 헤집는 통에 엘리엇은 신음 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찰랑찰랑.
물이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엘리엇은 고개를 비틀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아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제멋대로에 난잡하고 괴롭히길 즐기는 남자가 제 몸에 집중하는 순간의 모습에 심장이 죄였다.
혀를 내어 그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온수의 습기를 머금어 촉촉해진 입술이 반사적으로 엘리엇을 향해 열렸다. 혀가 맞부딪히고 입술이 들붙었다.
젖은 살덩이의 스침으로 인한 소리가 물소리에 묻혔다.
“으음.”
엘리엇은 아서와 마찬가지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구멍을 헤집던 손가락이 이내 회음으로 올라왔다. 고환을 주무르며 바짝 열이 오른 자지를 애무했다.
“하아.”
절정은 금방 찾아왔다. 뜨거운 정액을 내뿜는 순간 엘리엇은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젖은 숨결은 고스란히 아서가 들이마셨다.
철벙철벙.
마차 안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던 엘리엇의 욕구를 해결한 아서는 이윽고 키스에만 몰두했다. 같은 욕조 안에서 젖은 몸을 마주 비비는 것이 생각보다 기분 좋았다.
쪽.
이윽고 입술이 떨어졌다. 엘리엇은 반쯤 몸을 돌린 채로 아서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공기 중에 드러난 어깨가 조금 식어 추웠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아서는 손으로 물을 떠서 미처 잠기지 못한 몸에 붓는 귀여운 짓을 했다.
“물이 더러워졌는데.”
“어차피 네 것이니까 괜찮아.”
“내 것만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공범임을 강조하자 아서는 눈을 접으며 쿡쿡 웃었다.
“곧 릴리벳이 나를 찾아올 거야. 빨리 나가.”
“싫은데.”
“들키고 싶어?”
“들켜도 상관없는데.”
기가 막힌 대답에 엘리엇은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마차에서도 그렇고. 넌 장난이 너무 지나쳐. 나를 괴롭히는 것이 재미있는 건 알겠는데 말이야. 사람을 놀리는 것도 상식선을 지켜야지.”
문득 아서가 표정을 바꾸었다. 낮은 음성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장난이 아니야.”
“…….”
“너를 괴롭히려는 의도도 없어. 그저….”
한 박자를 쉰 아서는 짙은 시선으로 엘리엇을 응시했다.
“정말로 우리 사이를 들켜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알려져도 괜찮다고? 왜? 뭐 때문에? 동성 간의, 특히 남성 간의 간음은 엄청나게 큰 스캔들이 아닌가. 지방에 작은 농장 하나를 운영할 뿐인 자신은 은둔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로드니아 사교계를 기반으로 삼은 그는 약간 의심스러우나마 명성과 명예가 있는 사람이었다. 동성애가 밝혀지면 사회적으로 매장이었다.
영문을 모를 것을 넘어서서 갑자기 미쳤나 의심이 들었다. 그것도 진지하게.
“로드니아 생활에 진력이 났어?”
“무슨 뜻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네 명예와 평판을 완전히 버릴 궁리를 하는 거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직선적으로 물었다. 아서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진지하다 못해 아주 심각해 보였다.
“그걸 각오할 만큼 진지하다는 뜻이야. 그리고 로드니아 전체에 밝힐 생각은 없어. 사생활을 낱낱이 드러내 봤자 승냥이 떼에게 물어뜯길 뿐이야. 그저 가까운 사람에겐 어느 정도 알려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 물론 네가 찬성한다면.”
“공공연하게 밝히기는 싫고 가까운 사람에게? 그게 무슨… 아.”
철벙.
엘리엇은 욕조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리곤 아서를 빤히 쳐다봤다.
“릴리벳에게 알리고 싶은 거로군.”
“그래.”
똑똑.
턱 아래 고인 물방울이 욕조 속으로 떨어졌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내려온 물이겠지만, 어느 틈에 차갑게 식어 있어 마치 얼음물 같았다.
찰랑찰랑.
가만히 있었는데도 누가 움직였는지 물이 흔들렸다. 아마도 날뛰는 심장 박동 때문일지도 몰랐다. 좁은 욕조 벽에 부딪혀 어지럽게 얽히는 파문을 바라보면서 엘리엇은 멍한 정신을 추슬렀다.
“그건 안 돼.”
“언제까지고 속일 순 없어.”
“끝까지… 끝까지 속여. 아니면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빨라.”
“엘리엇.”
아서가 몸을 일으켜 팔을 잡으려고 했다. 실제로 손아귀에 팔뚝이 들어갔지만, 물 때문에 약간 비틀어서 떨칠 수 있었다.
철벙.
“나가겠어.”
“아직 얘기 안 끝났어.”
“부적절한 곳에서 부적절한 대화를 하는 습관은 이제 고치도록 해.”
엘리엇은 허둥지둥 욕조를 나와서 하얗고 두툼한 목욕 수건을 집어 들었다. 흐르는 물만 황급하게 훔친 다음 허리에 감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기다려.”
철벙.
아서가 뒤따랐다. 닦는 시늉도 없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욕실 밖까지 나왔다. 우람한 나체에서 물이 떨어져 카펫을 적혔다. 급하게 내실용 가운을 걸친 엘리엇은 그를 외면했다. 옷이 든 여행 가방이 마침 침대 옆에 있었다. 그걸 들자마자 출입문으로 향했다.
“이 방은 네가 쓰도록 해. 나는 다른 방을 사용하지.”
어마어마하게 넓은 별장인 만큼 빈방이 분명히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엘리엇이 문을 나서기 전에 커다란 손이 가방을 뺏었다.
텅.
가방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뒹굴었다. 기가 찬 엘리엇이 아서를 응시했다. 물에 푹 젖은 나체의 아서는 한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에서 나온 짙은 시선이 엘리엇을 위험하게 훑었다.
“잠깐만 기다려.”
“그런 모습으로 달려들지 말라고. 진심으로 무서우니까 말이야.”
훤한 대낮에 홀딱 벗은 남자와 대치하느라 폐와 심장이 펄떡 뛰었다. 팔이 잡혔는데 이번에는 가운을 걸친 바람에 비틀어 떨치지도 못했다.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거짓말을 하는 것도 옳지 않아. 언젠가는 말을 해야 해. 당장 오늘이 아니라도.”
“아니. 너와 나 사이를 밝히는 것이 어떻게 옳은 일이 될 수 있어? 차라리 죽을 때까지 모르게 두는 편이 그 애를 위한 일이야.”
“그렇다면 너는 사랑하는 오빠가 평생 독신으로 외롭게 살아가는 일을 곁에서 지켜보도록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
“일평생 독신자로 지내는 사람은 흔히 있어.”
엘리엇은 반박하면서 갑자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아서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내가 독신을 맹세했다고 얘기한 적이 있던가?”
“아니. 하지만 환영할 일이군.”
이번에는 아서가 미간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당연하잖아. 설마 내가 있는데 정말로 결혼할 생각은 아니겠지?”
어떻게 안 건지 몰라도 아서는 이미 엘리엇의 생각을 낱낱이 꿰고 있었다. 어느새 식은 몸이 잘게 떨렸다.
“결혼은 포기했어.”
“잘 생각했어, 엘리엇. 만약 네가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렸다면 그게 남자든 여자든, 난 가만히 두지 않았을 거야.”
아서는 안도하면서 고개를 숙여 엘리엇의 뺨에 입을 맞췄다. 어느새 그에게 안긴 형국이 된 엘리엇은 축축하게 젖은 가슴에 얼굴을 댔다. 쿵쿵.
커다란 심장이 사납게 뛰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네가 원하는 한 다른 사람에게 갈 일은 없어.”
“그럼 죽을 때까지 내 곁에 있겠단 말이군.”
만족스러운 한숨을 쉰 아서는 엘리엇을 끌어안았다. 뭐라도 걸친 쪽은 엘리엇이었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은 정작 아서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의식하는 사람은 엘리엇뿐이었다.
차갑게 식어 가는 몸과 달리 여전히 뜨거운 아서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너무나도 뜨거워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낙인처럼 찍히는 입술에 놀란 엘리엇은 헐떡였다.
“하지만… 네가 결혼할 수도.”
“그럴 일은 없어.”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왜라고 물을 수 없었다. 릴리벳이 아니라면 대용품이라도 가지겠다고 남성을, 그것도 그렇게 앙숙이었던 엘리엇 자신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남자라면 그럴 수 있었다.
입술이 부드럽게 스치는 곳이 쓰렸다. 칼로 저미고 소금물을 뿌린 듯이 못 견디게 아팠다. 대용품 취급을 당하며 영혼을 난도질당하는 일은 이미 각오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달콤한 키스가 목을 지나 어깨로 내려갈 때는 오히려 슬펐다.
그의 고통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전신이 흐물거리도록 퍼부어 대는 진득한 애무가 이어질수록 상처의 깊이만 더해 갈 뿐이었다. 그리고 헐떡일 때마다 허물어지는 엘리엇 자신의 심장도.
“그건 옳지 않아.”
“옳고 옳지 않은 건 내가 판단할 거야.”
“하지만 이미… 이미 떠나갔잖아.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건 결국 너를 파멸 시킬 뿐이야.”
“떠나… 갔어?”
어깨를 잘근 씹던 이가 딱 멈췄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아서는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듯한 시선으로 엘리엇을 노려봤다.
“누구 마음대로 떠나?”
“하지만 그게 사실이잖아.”
“하. 지금 내 눈앞에서 반쯤 헐벗은 채로 떨고 있는데. 그런데 떠나갔다?”
어금니를 꽉 깨문 그는 정말로 양손을 엘리엇의 목 언저리에 얹었다. 금방이라도 숨통을 조일 듯이 손가락을 오므렸고, 엘리엇은 명치에 얼음 송곳이 쿡 박히는 격통을 느꼈다.
눈가가 화끈거렸다.
“나는… 나는 그 애가 아니야.”
“뭐?”
“나는 그 애가 아니라고.”
“무슨 개소리야?”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는 태도에 그만 마지막 빗장이 풀어져 버렸다. 엘리엇은 격한 숨을 내쉬며 제 목에 걸쳐진 두 손을 사납게 쳐 냈다.
“더는 못 하겠어. 아서 글래스턴. 그만 끝내.”
“그렇겐 못 해.”
확 돌아서는 엘리엇을 아서가 붙잡았다.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힘껏 그를 떠밀었다.
“아니! 그렇게 해! 내가 그렇게 해야겠어!”
“엘리엇!”
달려드는 몸을 피하려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쾅.
문에 닿기도 전에 엘리엇은 벽에 밀쳐졌다. 세게 부딪치며 충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곧이어 뒤에서부터 가해지는 압박에 숨을 쉬기 버거웠다. 뜨거운 손이 축축한 가운 자락을 끌어 올렸다. 딱딱한 자지가 엉덩이 골 사이에 닿았다.
“놔. 이래 봤자 더 괴로울 뿐이야.”
“망할 혓바닥 따위 진작에 잘라 버렸어야 했어.”
“아… 서.”
벽과 딱딱한 몸 사이에 끼인 채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성난 남자의 위험한 숨결이 사각지대에서부터 엄습했다.
“애처롭게 애원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내버려 둔 잘못이야.”
딱 맞붙은 엉덩이 골을 헤치고 굵은 손가락이 들어왔다. 약간 여유도 허락지 않고 두꺼운 말뚝이 쿡 박혔다.
“큭.”
몸짓에 배려가 존재하지 않았다. 무자비한 쑤석임에 구멍이 금세 얼얼해졌고 내장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철퍽철퍽.
엉덩이 아래에서부터 거대한 말뚝에 박히는 동안 엘리엇은 이마를 벽에 찧었다.
쿵쿵.
“큭! 앗!”
“차분한 설득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어. 네 잘못이야. 엘리엇.”
이를 꽉 깨문 아서의 음성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퍼져 나왔다.
“앗! 아! 큭!”
두 손으로 벽을 벅벅 긁었다. 등 뒤로 팔을 뻗어 아서의 어깨나 귀를 할퀴려고 했으나 밑에서부터 치받는 힘에 골까지 흔들려 그러지 못했다. 이건 숫제 고문이었다.
“개… 자식!”
“개자식은 너야. 엘리엇.”
“네가 이런다고 사랑받을 것 같아? 너만 비참해질 뿐이야, 아서 빌어먹을 렌튼!”
기어이 금기어가 튀어나왔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갑절 이상 더해지는 걸 엘리엇은 피부로 생생하게 느꼈다.
쿵쿵.
거친 숨소리와 이가 갈리는 소리. 그리고 몸이 부닥치며 울리는 소리만 이어졌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이런 거친 행위는 오랜만이었다. 차라리 아편이라도 먹고 당했으면 나았을 것을. 고통을 쾌락으로 치환하는 탁월한 재능이 지금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육신의 고통이 아닌 영혼의 비명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는 절대… 절대 네가 원하는 걸 얻을… 큭!”
“알아, 이 개자식아.”
귓바퀴를 물어뜯던 아서가 짓씹듯이 이죽댔다. 사나운 짖음과 구별이 어려운 대답 속엔 분노가 가득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미… 안다고.”
뜨거운 숨결 속에 독무처럼 서글픔이 스며들었다. 순간 엘리엇은 제 실수를 깨달았다. 그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고요한 수면 아래 검은 손아귀처럼 흔들리는 엇갈린 감정의 수초가 없는 것처럼 굴면 되는 일이었는데.
하지만… 하지만 그 애만은 이 구렁텅이에 빠트릴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엘리엇이 끔찍한 고통에 잠기더라도. 동생에 대한 사랑이 깊어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이 저주스러운 공간에 누구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저 둘이서만 있고 싶었다.
“큭. 윽.”
괴로운 행위가 이어지는 동안 릴리벳이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아서는 도착적인 집착을 온전히 엘리엇에게만 퍼부었고, 아교 같은 그 감정은 갈가리 찢어지는 엘리엇의 영혼과 심장을 엉망진창으로 덧붙이고 있었다. 흉한 괴물 같은 기쁨으로.
난폭한 행위가 이어지는 사이.
똑똑.
느닷없는 노크가 들려왔다.
“오빠? 괜찮아?”
걱정스러운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엘리엇은 숨을 멈췄다. 당연히 아서도 얼어붙었을 줄 알았다.
철퍽.
행위는 계속 이어졌다. 당혹감과 충격으로 인해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고개를 비틀어 시선을 맞추자 아서는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철퍽. 쿵. 철퍽.
“오빠? 무슨 일이야? 괜찮아?”
숨을 죽인 엘리엇은 이를 꽉 깨물고 타이밍을 쟀다. 그리고 충격이 왔다가 빠져나가는 순간 입을 열었다.
“괜찮아… 윽.”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던 아서가 일부러 박자를 흩트렸다. 보란 듯한 과시에 엘리엇은 당장 뇌가 터질 것 같았다. 그를 때릴 방도도 없고 그렇다고 괴성을 지르며 몸을 뒤틀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릴리벳이 당장 방으로 들어올 터였다.
“오빠? 엘리엇?”
“진짜 괜찮으… 니까….”
숨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려 했으나 아서가 사사건건 방해했다. 그에 대한 근원적인 죄책감보다 살해 욕구가 더 커지려는 무렵, 잠시 기다리던 릴리벳이 입을 열었다.
“거기 아서도 있어?”
헙. 정말로 심장이 뚝 떨어졌다.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눈앞에 점멸했다. 숨도 멈췄다.
“안녕, 릴리벳?”
미친 작자가 명랑한 음성으로 답했다. 세상이 점멸하는 중에도 아서 렌튼만은 반드시 죽여 버리고 싶었다. 저 빌어먹을 악마 새끼의 가슴을 난도질해서 심장을 꺼내 시궁창에 던져야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전신을 지배했다.
어디서 솟았는지 모를 무시무시한 힘으로 벽을 힘차게 밀쳤다. 떠밀린 아서는 뒷걸음치다 구겨진 카펫에 걸려 넘어졌다.
쿠당!
몸 안에서 자지가 빠져나가면서 섬뜩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눈이 돌아간 엘리엇은 넘어진 아서의 배를 깔고 앉아 주먹을 휘둘렀다.
퍽!
광대뼈를 제대로 맞힌 덕분에 주먹이 얼얼했다. 이를 악물고 다시 팔을 휘두르려는 사이 아서가 벌떡 일어나 엘리엇을 뒤로 떠밀었다.
쾅.
뒤통수를 바닥에 세게 부딪혔다. 그 바람에 혀를 잘못 깨물어 피가 터졌다.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에 감도는 찰나 커다란 손바닥이 공중을 갈랐다.
철썩!
철썩!
손바닥에 맞아 휙 돌아갔던 고개는 뒤이어 손등에 후려쳐진 반대편으로 꺾였다.
“아서? 무슨 일이야?”
문고리가 철컥거렸다. 분명 잠근 기억이 없는데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서의 짓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릴리벳! 제발 우리 사이에 참견 좀 하지 마!”
허우적대는 엘리엇을 전신으로 내리누른 아서는 문 쪽을 향해 버럭 고함쳤다.
분명히 문과 벽이 가로막고 있는데도 릴리벳의 당혹감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망할 쌍둥이 새끼들! 너희들은 너희만을 바라보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조금도 없는 이기적인 악마 새끼들이야, 알아?! 둘이서 붙어먹어서 신을 배신할 생각이 아니라면 제발 이젠 서로에게 유아적인 참견 좀 때려치워!”
얼마나 화가 난 건지 아서는 그렇게 숭배하던 릴리벳에게조차 화를 내고 있었다. 그건 엘리엇에게 새로운 파문을 일으켰다.
“엘리엇이 나와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그건 엘리엇의 일이야! 제발… 제발 그만 꺼져 줘! 네 멍청한 남편에게 가 버리란 말이야!”
잠시 후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알았어… 방해해서 미안해.”
엘리엇은 그저 얼음이 됐을 뿐이었다. 아서는 핏발 선 눈으로 엘리엇을 노려봤다.
“너도 마찬가지야, 빌어먹을 개새끼야. 한 번만 더 릴리벳을 꺼내 봐. 내가 어디까지 하나 보게.”
이글거리는 시선이 섬뜩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얻어맞은 뺨이 화끈거렸으나,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가슴을 강하게 내리누르는 손 덕분에 빗장뼈가 삐그덕 댔다.
“진… 정해.”
“닥쳐. 이젠 네 말 따위 듣지 않겠어.”
“아서?”
이어 무릎으로 다리를 내려찍은 아서는 엘리엇이 고통에 신음하는 사이 허벅지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성마른 자지가 다시 식은 구멍에 들어갔다.
철퍽. 철퍽.
“큭! 미쳤… 이 짐승 같은 새끼!”
“이렇게까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너 같은 새끼가 진짜 짐승 아니겠어? 그에 맞는 취급을 해 주지.”
“아서? 악!”
퍽퍽 쳐올리는 아서의 기세는 정말로 사나운 짐승을 길들이는 조련사와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조련사는 채찍을, 아서는 자지를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거친 출납 행위로 인해 구멍에는 금세 화끈 열이 올랐다. 물기는 이리 말랐고 적당한 오일도 없었기에 당연했다. 이런 난폭한 정사에 시달릴 때면 언제나 거짓말 같은 쾌락이 찾아오곤 했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아프기만 했다.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꼴사나운 짓을 하기 싫어 억지로 참았다. 입 안에 번진 찝찌름한 피비린내는 쉬이 가시질 않았다.
철퍽. 철퍽. 철퍽.
어느새 아서의 어깨에 걸린 종아리가 힘없이 덜렁거렸다. 키스 한 번도 없이, 아서는 이를 악물고 하체를 움직였다. 강하게 밀어 붙여진 덕분에 엘리엇의 허리는 둥글게 말렸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붉은 자지가 구멍을 파고드는 난잡한 광경이 훤히 드러났다. 그 아래로는 반쯤 일어선 자지가 찔끔찔끔 멀건 액을 토했다.
“아윽. 아서 렌튼… 큭!”
“그래, 내가 바로 아서 렌튼이다. 저주받을 개자식아. 너는 절대 곱게 죽진 못할 거야.”
욕설을 계속 퍼붓는 상대의 표정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열기를 내뿜는 우람한 신체에 남은 물기는 없었으나, 대신 이마에서 송골송골 땀이 맺혀 흘렀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물방울은 잔뜩 성난 눈가를 스쳤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와 어우러져 마치 눈물처럼 보였다.
그때 성난 자지가 하필이면 예민한 부위에 처박혔다. 아찔한 충격에 입을 벙긋거리자 아서는 일그러진 웃음을 내보였다. 잔인하면서도 슬퍼 보였다. 착각이 분명했다.
“갑자기 왜 벙어리 행세지? 악마 같은 혓바닥이 멀쩡하면 무슨 말이라도 해 보시지.”
엘리엇은 제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서 못지않게 일그러진 것만은 분명했다. 정말로 대답을 원하는지 아서는 잠시 몸을 멈췄다. 제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엘리엇은 어느새 잠긴 목에 힘을 주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 올 거야.”
이기적인 발상이 아니었다. 아서를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성난 남자는 곧이곧대로 듣는 법이 없었다.
“그래? 그럼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나를 엿 먹일 거지? 이번에도 릴리벳을 이용할 생각은 집어치워. 그랬다간 정말로 후회하게 될 거다.”
“그 애는 널… 사랑하지 않아. 윌리엄의 아내라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눈가가 화끈거렸다.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관자놀이를 타고 주르륵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아서는 다소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엘리엇을 관찰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해서 그 애가 조금이라도 너를 돌아볼 것 같아? 릴리벳은 너를 저주할 거라고. 네가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불타기를 바랄 거야, 이 개자식아!”
외침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진심 어린 호소였다.
“얼마든지 원망하고 얼마든지 복수해도 상관없어. 내가 저지른 죗값은 끝까지 치를 거다. 다만 이런 식으로는 누구도 평화를 얻을 수 없어.”
“아니, 갑자기 무슨?”
몸을 찍어 누르던 압박이 스르륵 풀렸다. 아서가 상체를 들었다. 한계까지 벌어져 있던 다리가 그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아래로 스르륵 떨어졌다. 하지만 허리 아래는 아직도 단단한 허벅지가 떠받히고 있었고, 엘리엇은 엉덩이가 떠올려진 이상한 자세로 비참하게 눈물을 떨구어야 했다.
“너를 위해서라도 제발 이런 짓은 그만둬.”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되묻는 말투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아서는 주변에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엘리엇을 내려다봤다.
“네가 나를 혐오하는 건 잘 알겠어. 그렇다고 해서 나를 위해서라도 이런 짓을 그만두라는 위선을 떨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나는 너를… 혐오하지… 않아.”
손등으로 눈을 가린 엘리엇은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짧은 문장을 완성했다.
“끝까지 위선이군. 너는 정말 구제가 불가능한 위선자야. 엘리엇.”
뭐가 즐거운지 아서는 엘리엇을 비난하면서도 웃음기를 거두지 못했다. 어쩐지 서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엘리엇은 바짝 깨물었던 입술을 터트렸다. 동시에 감았던 눈도 떴다.
“너야말로 위선을 집어치우시지?”
“내가 뭘?”
“릴리벳 대용으로 나를 택한 건 위선이 아닌가? 나를 기만할 뿐만 아니라 너 자신도 속이는 한심하고 멍청하고… 썩어 가는 뿌리를 무시한 채 말라비틀어진 열매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천치 같아!”
원인 제공자라는 미안함과 별개로 전혀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는 아서를 향한 원망이 그렇게 몰아칠 수가 없었다. 시퍼런 진실의 칼날을 한번 휘두르기 시작했더니 입에 제멋대로 움직였다.
“나를 유린하고 내게 집착한다고 해서 릴리벳은 너에게 돌아오지 않아. 그 애는 어린 시절과 달리 이젠 성숙한 여인이 되었어.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어. 알아? 윌리엄 체셔의 아내라고!”
분을 이기지 못해 몸을 일으켰다. 아서의 허벅지 위에 반쯤 걸쳐져 있던 엉덩이도 바닥으로 스르륵 내려왔다.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 법칙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지만, 어쩐지 서로의 멀어짐을 은유하는 것 같았다.
‘멍청하게도. 이런 작은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다니.’
엘리엇은 시큰거리는 눈매와 떨리는 입술을 가리기 위해 두 손을 들었다. 차가운 손바닥이 흥분으로 인해 달아오른 뺨을 식히기 전에 숯덩이처럼 뜨거운 손이 다가왔다.
“아까부터 무슨 개소리를 하는가 싶었더니… 하.”
지금껏 주고받았던 독설 그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잔인한 공격을 받았으면서도 아서는 놀랍게도 침착했다. 나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지금껏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이랬던 거야?”
“내 착각으로 치부하지 마. 너무나도 자명해서 그 어떤 멍청이도 알 일이니까.”
벌벌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면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일렁거리는 시야 가운데 있는 아서는 놀라움이 번진 표정으로 엘리엇을 응시했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그렇게 싫어했던 나를, 하물며 남자인 나를 왜 이렇게까지 하겠어? 그렇지 않아? 그건 내가 릴리벳과 닮았기 때문이지. 안 그래?”
쓰디쓴 웃음이 번졌다. 비참함을 상대에 대한 날 선 비난으로 바꾸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뜨거운 눈시울에서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애를 쓰는 것이 다였다.
“엘리엇, 너는 정말….”
작심하고 내지른 악담이었다. 하지만 정작 핵심이 찔린 사람은 화를 내기는커녕 굳어 있던 안면마저 슬며시 풀었다. 그는 기어이 고개를 떨구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엘리엇마저 어리둥절해졌다.
한 손으로 엘리엇의 팔목을 잡은 아서는 다른 손으로는 떨군 안면을 가렸다. 거대한 바위처럼 단단한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설마?”
설마… 이때껏 제 본심을 몰랐던 건가? 릴리벳에 대한 일그러진 사랑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즉각적인 감정에만 반응했던 건가.
“모르고… 있었어?”
조심스럽게 물은 말에 아서는 어깨를 들썩이며 띄엄띄엄 단어를 뱉었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줘.”
지독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기괴했다. 웃음도 울음도 충격도 당황도 아닌, 혹은 그 모두가 뒤섞인 묘한 감정이 전해졌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지금까지 진짜로 모른 건가? 모른 채로 자신에게 감정적 보복만을 감행했던가.
“오, 이런.”
분노가 사라지고 연민과 슬픔이 자리를 대신했다. 미어지는 가슴은 덤이었다. 거만한 만큼 굳센 아서가 가늘게 부서지는 모습을 보는 건 엘리엇에게도 지독한 통증을 선사했다.
“바보 같은 아서.”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고개에 제 이마를 대었다. 귓가에 끅끅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과거는 과거야. 아서. 내게 어떤 짓을 해도 나는 감당할 거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네 상처만 깊어져. 그만 흘려보….”
제 말을 들었는지 아서가 순간 움찔했다. 그리곤 떨림이 한층 심해졌다. 너른 등이 들썩였다. 아서의 고개가 살짝 비틀렸다. 그는 이마를 엘리엇의 어깨에 얹었다. 그의 뻘건 귓바퀴가 잘게 떨렸다.
‘이렇게까지 수치스러워할 줄은 몰랐는데.’
조금은 더 뻔뻔하게 대응할 걸 예상했다. 그래서 뭐가 어떠냐고? 릴리벳과 어그러진 책임을 지라고 흉악스러운 문구가 잔뜩 들어간 계약서라도 내밀 작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나약하게 무너질 줄은 전혀 몰랐다.
‘이렇게 감성적인 모습이 있기에 지금까지도 릴리벳을 잊지 못하는 거겠지.’
미성숙한 시기의 상처는 영혼에 흉터를 남기고 그것은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그 증거가 바로 아서였다.
“…엘리… 엇.”
천천히 기대 오는 남자를 단단히 지탱했다. 해묵은 상처를 헤집은 장본인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무게였다.
감정이 격해졌는지 아서는 숫제 비틀거렸다. 그러더니 결국은 치명상을 입은 맹수처럼 낮은 울음을 터트렸다.
“우으….”
“참지 마. 우는 편이 좋아.”
“그게… 아니라….”
들썩거리는 몸은 적당한 각도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아서는 숨을 고르더니 이윽고 아주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엘리엇은 그의 등을 도닥였다.
“후우우우.”
심호흡을 거듭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뻘건 얼굴엔 땀인지, 혹은 눈물인지 모를 흔적이 남아 축축했다. 얼굴을 훔치는 커다란 손끝이 자잘하게 떨렸다.
“진실을 마주하는 건 힘든 일이야.”
자신도 그랬다. 제가 대용품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을 때의 고통은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그와는 다른 상황이지만 영혼의 비명만큼은 비슷하리라 여겼다. 엘리엇은 흐트러진 남자를 향한 연민을 감추지 못했다.
손을 뻗어 그의 얼굴에 댔다. 뜨거운 뺨이 손바닥 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상대의 물기 어린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치료는 고름 주머니를 터트리면서 시작하는 거야.”
그 말에 아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줘서 고마워…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몰랐을 거야.”
물기 어린 바리톤 음성이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생각보다 아서는 성숙한 남자였다. 깊은 상처가 까발려졌는데도 그는 우아하게 대처했다. 물론 알몸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힘들 땐 나를 찾아. 네가 회복될 때까지 나는 너를 도울 의무가 있으니까.”
“영원히 치유되지 않으면?”
그러면서 아서는 덧붙였다.
“그렇다면 영원히 내 곁에 있을 텐가?”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이건 파멸로 이르는 길이이었다. 하지만 물기에 젖은 채로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두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래선 안 된다고 차마 뱉을 수가 없었다.
“그래.”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엘리엇.”
그러면서 아서는 고개를 돌려 엘리엇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뜨거운 숨결이 손바닥 살을 태우고 깊은 곳에 있는 신경까지 마비시켰다.
애달파하는 아서를 마주한 것 자체가 끔찍할 정도로 아팠지만, 그래도 이것이 옳았다. 아서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
아서는 엘리엇의 방에서 나와서 제 방으로 갔다. 제대로 닦지 않고 옷만 입고 나온 터라 방에 들어서자마자 젖은 옷을 서둘러 벗었다. 그리곤 욕실로 들어가 아주 차가운 물을 틀었다.
벽에 고정된 방식의 샤워기에서 세찬 물줄기가 쏟아졌다. 겨울의 한기를 머금은 냉수가 정수리에서부터 쏟아졌다. 냉기를 감지한 심장이 힘차게 박동을 시작했다.
달아오른 얼굴을 냉수로 문질러 식힌 후 아서는 들썩이는 어깨를 감당치 못했다.
“푸흐.”
참으려고 했으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으하하하하하하.”
우렁찬 웃음소리가 욕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것도 모자라서 아서는 주먹으로 옆 벽을 쾅쾅 내리쳤다.
“정말이지 이건 상상외인데.”
발작처럼 광소하며 아서는 아까 참느라 애를 썼던 눈물을 다시 흘렸다.
심각하기 짝이 없는 엘리엇 앞에서 눈물이 날 정도로 웃음을 터트릴 순 없었다.
“왜 그러나 했더니 정말… 착각도 이 정도면 걸작이야.”
아서는 연민과 슬픔이 어린 엘리엇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사타구니에 힘이 뻐근하게 들어갔다. 당장 돌아가 엘리엇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엘리엇은 멍청한 착각으로 계속 애를 태운 벌을 받아야 한다. 불필요한 오해니 오래 끌진 않아도, 적어도 이 별장에 있는 동안은 잘 이용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두고 보지, 엘리엇.”
누구도 아닌 아서 자신을 걱정하느라 물기 어린 눈매를 잘게 떨면서 입술을 꼭 깨물던 모습을 떠올리며 아서는 우뚝 선 성기를 잡았다. 당장 두어 발 빼지 않으면 바지를 입어도 티가 날 터였다.
사악한 결심을 곱씹으면서 아서는 냉수 사워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