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8)

***

만찬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릴리벳은 그때까지 참지 못하고 다시 찾아왔다. 아서는 아까 나갔고 목욕도 제대로 끝낸 엘리엇은 가벼운 바지와 셔츠를 걸친 채로 문을 열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릴리벳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빠, 얼굴이 왜 이래?”

목욕하는 동안 찬 물수건으로 오랫동안 식혔으나 붉은 기가 완전히 가시질 않은 뺨을 본 릴리벳이 걱정스레 물었다.

“온욕 때문에 그래.”

“얼마나 오래했기에 얼굴에 열이 오른 거야.”

“금방 가라앉을 거야.”

“약은 먹었어?”

“감기가 아니래도.”

뺨을 쓰다듬는 손길을 거부했다. 조금 서운한 듯이 콧잔등을 찡그리는 동생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다른 남자의 아내잖아. 아무리 쌍둥이라지만 형제에게 너무 관여하는 건 옳지 않아.”

“오빠에게 믿음직한 반려자가 생기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급작스러운 얘기였다. 어떻게 답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자, 릴리벳은 몸을 홱 돌려 방 안을 돌아보았다.

“아까 아서와 싸웠지?”

“아니. 그렇지 않아.”

“거짓말하지 마. 아서도 이쪽 광대뼈가 부어 있었어.”

예전부터 릴리벳을 속이긴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주먹질하며 치고받았다는 얘기를 곧이곧대로 하긴 힘들어 그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티격태격할 거야? 이젠 둘 다 어른이잖아.”

“그건 내가 아니라 아서에게 들려주었으면 좋겠는데.”

“이미 아서에게도 하고 왔어.”

“그래?”

명치에 한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 말을 꺼낸 것 같았다. 아니, 언제가 되든 충격이 컸겠지만. 그래도 릴리벳이 없는 곳에서 해야 했다.

“뭐래?”

“뭐가?”

“그러니까 아서가 뭐라고 했냐고?”

릴리벳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성격이었고 아서와 엘리엇의 사이가 그다지 평탄하지 못함을 알았으니 이후로 더욱 신경을 쓸 게 뻔했다. 아까도 아서가 성나서 고함을 질렀으니 마땅히 이런 사태를 예견해야 했다.

“아까와 똑같지. 참견하지 말래.”

“그래? 화를 내거나 혹은… 음, 상처받아 보이거나?”

“상처? 아서가 상처받을 사람이면 그렇게 고함을 질렀을까?”

릴리벳이 버릇없는 투로 코웃음을 쳤다. 윌리엄 앞에서도 저럴까? 가끔 궁금했다. 셋이 같이 있을 때 그러는 모습은 아직 보지 못했다. 어쨌거나 아서가 화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더 큰 상처를 받지 않은 것도.

“어떤 의미에서 오빠와 똑같아. 이상한 고집을 부리면서 일부러 상황을 악화시키지. 처음부터 사이좋게 지냈으면 내가 왜 참견하겠어? 어릴 때부터 말이야. 이젠 지긋지긋해.”

엘리엇이 침묵하는 동안, 릴리벳은 침대에 턱 걸터앉았다. 이제 저런 행동은 더 하지 못하게 주의를 단단히 주어야 할까. 오빠를 너무 편안하게 생각하는 건 여러 가지 구설수를 부른다. 아서도 유치한 참견을 그만두라고 화를 내기도 했고. 어느 정도 박자를 맞추는 편이 궁극적으로 릴리벳을 위하는 길 같았다.

“유부녀가 독신남 침대에 그렇게 마구 걸터앉으면 안 돼.”

엘리엇은 게으른 거위를 쫓듯 손을 휘휘 저어 릴리벳을 침대에서 밀어냈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이런 맘 편한 짓은 윌리엄에게나 해.”

“아서 얘기를 신경 쓰는 거야?”

“아니. 네 평판을 신경 쓰는 거야. 그리고 윌리엄도.”

엘리엇은 진지하고 딱딱한 어투로 이었다.

“너는 내게 어른이 되라고 말하기 전에 너부터 어른이 되는 게 어때?”

“뭐?”

“결혼했어. 그 말은 네 가족은 이제 내가 아니라 윌리엄이라는 거야. 이제 친근한 짓은 그에게 해.”

“아니 침대에 걸터앉는 게 뭐라고. 윌리엄은 내가 오빠와 어떻게 지내든 신경 쓰지 않아.”

“내가 싫어.”

싫다는 말이 충격이었는지 릴리벳은 눈과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리곤 손을 가슴 위에 얹으면서 기가 막힌 듯이 물었다.

“아서도 이상한 고집을 피우더니… 오빠도 물들었어?”

“물들었다고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너도 네가 뱉은 말은 존중해야지.”

“내가 뭘?”

“나보고 결혼하라면서? 네가 내 미래의 아내라고 생각해 봐. 아니면 내가 윌리엄이라고 생각하든가. 만약 윌리엄에게 쌍둥이 여동생이 있고 그 동생이 윌리엄의 침실에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와서는 침대에 턱턱 앉는 걸 용납하겠어?”

움찔한 릴리벳은 입을 삐죽였다. 뭔가 골몰하더니 이내 적당한 반박을 떠올렸다.

“우린 피를 나눈 남매야. 어릴 때는 같이 목욕도 했다고.”

“그건 어릴 때야. 피를 나눈 사이라고 해도 남매는 엄연히 남매지. 어른답게 대우해.”

“그거 때문에 아서와 싸운 거야?”

정말 지나치게 눈치가 빨랐다. 엘리엇은 긍정하지 않은 대신 부정하지도 않았다.

“옛날 일 때문이었어.”

“내가 괜찮다는데 왜 그래? 그리고 아서도 지나쳐. 그렇다고 주먹다짐을 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먼저 쳤어.”

“하여간.”

기분 나쁜 한숨을 쉰 릴리벳은 의연한 태도로 돌아갔다. 일부러 몸짓을 바로 하자 당장 황궁 연회장에 데려다 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기품이 흘러넘쳤다.

“알았어. 가정이 있는 사람으로서 부적절한 언행임에는 동의해. 앞으론 주의할게.”

“고마워.”

“오빠도 아서와 너무 싸우지 마. 둘이 사이가 나쁘면 내가 걱정된다고.”

“그래.”

“그리고 아까 말한 반려자 얘기는 딱히 결혼 얘긴 아니야. 단지 누구든 좋으니 오빠 곁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야.”

“음?”

의미심장한 표현이었다.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릴리벳은 방을 나가 버렸다. 그 바람에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물어볼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나중에 다시 정색하며 물어보는 일도 영 이상할 듯싶었다.

어정쩡하게 서성이는 사이 별장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창문 너머 멀리서 검은 마차가 달려왔다.

“다른 손님이 도착한 모양이군.”

급하게 정장을 다시 차려입은 엘리엇은 손님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 집주인 찰리는 물론이거니와 릴리벳과 윌리엄도 나타났고 무엇보다 아서도 함께 있었다. 릴리벳의 말대로 그의 왼쪽 광대뼈 언저리가 살짝 부풀어 있었다.

“아서.”

“엘리엇.”

머쓱함에 못 이겨 살짝 인사했다. 윌리엄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이쪽을 곁눈질했으나, 릴리벳이 뭐라고 미리 언질을 한 건지 굳이 캐묻는 일은 없었다. 찰리 또한 농담을 삼갔다. 엘리엇보다는 아서의 눈치를 본 듯 했다.

“누군지 아직도 알려 주지 않을 텐가?”

“비밀은 끝까지 엄수해야지.”

현재 일행 외에 세 명의 손님을 더 초대했다고 들었다. 그것이 누군지 찰리는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 히죽 웃는 모양새가 왠지 아리따운 숙녀분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짐작하게 했다. 그건 다만 엘리엇만의 추측은 아니었다.

“미래의 윔즈 부인인가요?”

릴리벳이 묻자 찰리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면서도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윌리엄이 작게 야유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반했을 뿐이야. 몇 번이나 초대를 거절했는데 이번엔 어쩐 일로 수락하더군.”

“우린 그녀를 끌어들이기 위한 핑계로군.”

엘리엇이 나섰다. 갑자기 별장 운운하면서 모두를 초대하는 일이 찰리다워서 의심을 못 했다.

“얼마나 대단한 여잔지 기대되네.”

아서도 거들었다. 찰리의 안색이 시시각각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허옇게 뜨기를 반복했다.

“정말로 내가 일방적으로 반한 거야. 그녀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디서 만난 건지는 얘기해 주지?”

마차가 거의 도착했을 무렵 엘리엇이 던진 물음에 찰리는 “극장.”이라고 대답을 던진 다음 서둘러 현관 밖으로 나갔다.

별다른 문장이 찍히지 않은 검은 마차가 현관 앞에 섰다. 지붕 위에 실린 여행용 짐은 여성의 것임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모자 가방이 있기 때문이었다.

달깍.

하인이 문을 열었다. 찰리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며 얼른 마차로 달려가서 손을 내밀었다. 검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에스코트하는 찰리의 손등 위에 걸쳐졌다.

“어서 오십시오, 레이디 클레어.”

익숙한 이름에 엘리엇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바로 전에 백화점에서 보았던 레이디 클레어였다. 그녀는 찰리와 절친한 사이인지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찰리, 오랜만이야.”

“유제니아 할머님은 여전하시지?”

“그래. 네가 말썽 피우지 않나 늘 걱정이시지.”

뜻밖의 손님은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뒤이어 내리는 보라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어딜 봐도 제인 플레커였다. 붉은 루주를 칠한 매력적인 입술이 찰리를 향해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찰리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우아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윔즈 경.”

“찰리라고 부르십시오.”

“찰리.”

엘리엇이 가진 물음은 아서의 입을 통해 새어 나왔다. 엘리엇은 자신의 속내가 그에게 들렸는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아서는 정말로 놀란 듯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사람이 어떻게 같이?”

제인은 늘어진 드레스 자락이 마차를 제대로 빠져나온 걸 확인한 직후 현관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그리곤 눈을 번쩍 떴다. 그녀도 아서가 여기 있는지 몰랐던 눈치였다.

‘맙소사, 찰리.’

최악의 조합에 엘리엇은 속으로 친구를 원망했다. 미리 참석 명단을 알려 주었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빠졌을 텐데.

그것도 모르는 찰리는 의기양양하게 두 사람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레이디 클레어. 내 육촌 친척이야.”

“안녕하세요.”

릴리벳도 미모로는 누구에게 지지 않을 미인인데, 레이디 클레어는 단순한 아름다움뿐 아니라 압도적인 존재감이 있었다. 릴리벳도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와 가볍게 포옹을 나누었다. 엘리엇과 인사를 한 직후 그녀는 아서를 향해 빙긋 웃었다.

“아서. 여기서 뵙는군요.”

“레이디 클레어.”

시선이 마주친 아서는 익히 아는 두 여인의 등장을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찰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한쪽 눈을 찡끗했다.

“흠흠. 글래스턴. 어서 레이디 클레어를 모시도록.”

마치 숫기 없는 청년 꾸지람하는 할아범처럼 찰리가 목소리를 깔았다. 레이디 클레어가 화답하듯 손을 내밀자 아서는 엘리엇을 슬쩍 봤다.

백화점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꽤 쓰린 기분이 들긴 하지만 모종의 계약이 오고 가는 사이라는데 어쩌겠는가. 아서는 뒤틀린 집착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다른 여성과 어울릴 필요가 있었다. 레이디 클레어라면 그를 수렁에서 구해줄 수 있을 터였다.

아서의 시선을 못 본 척 한 엘리엇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전에 그녀에게 큰 실례를 끼쳤기에 엘리엇은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제인의 손을 잡아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데일 씨.”

“플레커 양.”

이름으로 대신한 인사는 짧고 냉랭했다. 아서가 레이디 클레어를 에스코트한 것처럼 자신도 그녀를 에스코트해야 하나 머뭇거리는 사이 찰리가 얼른 다가왔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고마워요, 찰리.”

제인은 그때 엘리엇에게 했던 것처럼 아주 우아하면서도 위험하게 웃었다.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그녀의 손짓과 눈빛에 완전히 빠져 버린 찰리는 마치 주인님을 맞이한 개처럼 신난 모습으로 그녀의 곁을 지켰다. 찰리의 그녀는 아무래도 제인 플레커 쪽인 것 같았다.

아리따운 손님 한 명이 더 내리지 않을까 기대했다. 기대가 무색하게도 텅 빈 마차는 이내 현관을 빠져나갔다. 짝을 지은 세 쌍은 일단 실내로 들어갔다.

‘숫자가 맞지 않잖아, 찰리.’

다른 사람과 달리 엘리엇은 혼자였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 하나 덩그러니 남지 않도록 손님 수와 짝을 맞추는 일은 주최자의 기본적인 의무였다. 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격식을 차린 자리도 아니라 따지기도 뭣했다.

만찬 시간이기에 격식을 갖춘 정장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지가 느릿느릿하고 무거웠다.

‘피곤하군.’

오전부터 아서에게 시달리다 못해 주먹다짐과 언쟁까지 벌이느라 피로가 쌓였다. 늦은 시간이라 노곤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레이디 클레어가 나타난 시점부터 한층 짙어진 피곤함이라니.

릴리벳을 잊고 현재를 살라고 아서를 꾸짖어 놓고 그가 다른 여자와 걸어가는 모습에 왜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걸까. 잦은 섹스로 이어진 신체가 정신을 잠식한 모양이었다.

‘육신의 친근함이 감정적 소유욕으로 이어진 모양이야.’

마치 아이가 처음 선물 받은 인형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는 것과 같았다. 반복된 습관으로 인해 생긴 일종의 각인. 그렇지 않고서야 이 기분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감상적인지 모르겠어. 정신 차려, 엘리엇 데일.’

스스로 꾸짖으며 엘리엇은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갑자기 쉬겠다고 해 봤자 릴리벳을 걱정시킬 뿐이었다. 그리고 아서에게 괜한 신호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들뜬 찰리에게 실망감을 선사하는 일도.

만찬 동안 내내 멍해서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다행히 짝을 이룬 세 쌍의 남녀는 미운 오리 새끼처럼 동떨어진 엘리엇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음식에만 몰두하는 사이 웅웅 울리는 귀에 선명하게 꽂힌 음성이 있었다. 다름 아닌 찰리의 것이었다.

“자네와 내 육촌이 아주 친밀한 관계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해. 속일 걸 속여야지.”

타박하는 찰리를 아서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은은한 미소로 응대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레이디 클레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녀는 제 옆에 앉은 아서의 팔목에 제 손을 조용히 얹었다는 점이었다.

“호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답변이었다. 공개석상에서 미혼 남녀가 손목을 포개는 일은 웬만한 친밀감을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물론 호사가를 자처하는 사교계 인사나 아랫세대의 번식 활동 증진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가문의 어르신이 없는 개인적인 소모임이었지만 그래도 레이디 클레어의 행동은 대담한 축에 속했다.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아서는 제 손을 덮은 레이디 클레어의 손을 다른 손으로 덮더니 이내 밑으로 살짝 끌어 내렸다. 그러면서 그녀의 귓가에 뭐라고 낮게 속삭였다. 레이디 클레어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는데, 두 사람이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완벽한 연인처럼 보였다.

‘계약 관계라더니. 연기 실력이 좋기도 좋군.’

지켜보기 민망하면서도 어쩐지 부아가 치밀었다. 제 앞에서는 사소한 예의조차 지키기를 거부하고 매번 골탕을 먹이더니 숙녀분 앞에서는 그런 모습은 먼지만큼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완벽한 신사 흉내를 내는 꼴에 저절로 배알이 뒤틀렸다.

달그락.

꼬인 속내 덕분일까. 손질이 사나워졌고 그 바람에 식기가 조금 세게 부딪혔다. 순간 덜컹했다. 시비를 건 것처럼 보일 공산이 다분했다.

“실례.”

급하게 사과했다. 레이디 클레어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아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무슨 의도인지 되묻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는데 어쩌다가 릴리벳과 시선이 마주쳤다.

입매는 분명히 크게 웃고 있는데 눈매는 아니었다. 릴리벳은 레이디 클레어와 아서를 흘깃 보고 다시 엘리엣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사람은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

이쪽을 흥미진진하게 보는 건 찰리와 제인도 마찬가지였다. 제인은 아서와 엘리엇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훑었고 찰리는 그저 흥미진진하게 엘리엇을 빤히 봤다. 의미심장한 시선이 어지럽게 얽히는 식탁 위에서 순수한 미소를 지은 사람은 윌리엄뿐이었다.

조용히 술잔과 은색 식기만 움직였다. 큰 홀에 마련된 만찬 자리였고 늦겨울인 만큼 공기도 제법 서늘했다. 그런데도 엘리엇은 숨이 턱턱 막혔다. 질식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대응하기 쉬운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아니. 별로.”

지적받은 찰리는 아닌 척했다. 하지만 어깨를 으쓱이는 과장된 몸짓과 흥분이 약간 가미된 음성 덕분에 넘어가 줄 수가 없었다.

입가를 닦은 냅킨을 테이블 위에 올린 다음 옅은 금색 술이 든 잔을 들었다. 그러면서 진짜냐고 재차 물으려고 했는데, 찰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실수야. 용서하게.”

“뭘?”

“짝이 맞지 않잖아.”

그러면서 찰리는 만찬 자리를 쭉 둘러보았다. 상석을 기준으로 참석자의 성별이 엇갈리게 자리를 배치하는 건 주인의 몫이었다. 물론 짝이 맞지 않을 때도 많아 남남여여로 앉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찰리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에스코트가 없는 사람이 엘리엇뿐이라는, 결과적으로 혼자서만 외따로 떨어져 있다는 의미였다. 짓궂은 언사였을뿐더러,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별로 응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험악한 눈빛을 던졌다.

“화려한 외모만큼이나 카사노바 기질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이렇게 홀로 계시는 모습을 보니 조금 놀랍군요.”

하필이면 제인이 끼어들었다. 얇은 글라스를 입술에 문 채로 빙긋 웃었다. 루주 자국이 전혀 묻어나지 않은 잔을 곱게 놓고 옆자리에 앉은 찰리를 응시했다.

“아는 사이입니까?”

“네. 전에 노스필드 저택의 무도회에서 대화를 나눴었죠.”

“그렇군요. 그런 말 하지 않았잖아?”

이쪽으로 날아든 찰리의 물음에는 호기심과 함께 경계심이 다분했다. 친구와 경쟁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그 대상이 제인 플레커이면 더더욱 그러고 싶지 않았으므로 엘리엇은 정직하게 설명했다.

“물론 플레커 양과는 안면이 있지. 하지만 자네가 오늘의 손님 명단을 비밀로 했으니 사전에 어떻게 말을 하겠어?”

“그도 그렇지만.”

“데일 씨께서 저를 곤란하게 하셨기 때문에 더더욱 말씀 꺼내기 힘들었겠죠.”

제인이 자꾸 기름을 부었다. 아서의 냉정한 표정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것이 릴리벳의 관심 어린 표정이었다.

“그때는 정말 실례했습니다.”

“사과가 너무 늦었어요.”

독기 어린 미소를 마주한 엘리엇은 난처했다. 그렇다고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딱히 없었다. 그런데 마주 앉아 있던 아서가 끼어들었다.

“공개적으로 사과하는데 끝까지 모욕을 주다니. 심보가 고약하군.”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내 마음이야. 게다가 내 심보보다는 그쪽 심보를 더 신경 쓰지 그래? 적어도 나는 몸과 마음이 따로 놀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의미심장한 지적에 엘리엇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급격하게 굳어 가는 손이 또 요란한 실수를 할까 급히 잔을 놓고 무릎에 얌전히 얹었다.

“두 분이 동업자라고 들었습니다. 도움 없이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성공한 아서도 그렇지만, 플레커 양도 정말 대단하신 분 같아요.”

릴리벳이 적절한 순간에 화제를 전환했다.

“제가요?”

“훌륭한 능력과 지능이 있는 여성도 보통 아내로서, 부인으로서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플레커 양께서는 사업가로서 성공하셔서 남성과 대등하게 경쟁하시잖아요. 존경스러워요.”

어떻게 받아들이면 왈가닥에 우아하지 못하다는 비꼬기로 들릴 수도 있는데, 릴리벳의 태도와 억양에서는 그런 면모가 전혀 없었다. 대신 순수한 감탄과 함께 호의적인 관심이 표출되었다.

기민한 제인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엘리엇에게 대한 것과는 영 다른 상냥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칭찬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혼자서 사업을 꾸리는 일은 어렵죠.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편견을 가지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많답니다. 그 때문에 허우대가 멀쩡한 동업자를 구했건만 최근에는 실망을 거듭하고 있어서 고민이에요.”

“내가 할 소리군.”

아서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제인과 아서는 사이 나쁜 사촌 남매 같았다. 자세히는 몰라도 고생스러운 시절을 함께 헤쳐 나온 동지애가 강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너무 편안하고 친근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는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는 사이라든가.

‘약혼자 행세도 했다더니. 아무래도 후자가 맞겠지?’

그걸 알 리 없는 찰리는 안절부절못했다. 제인이 아서와 대립각을 세우는 광경에 당황한 채로 입만 벙끗거렸다가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동업한 지 오래되었나 보죠?”

“지겨울 정도는 되지.”

“슬슬 악연이 아닐까 싶을 정도예요.”

사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를 두 사람의 대답에 릴리벳이 웃음을 지었다.

“아서는 어떤 사람인가요?”

문득 말을 꺼낸 사람은 레이디 클레어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궁금한지 제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까 마차에서 말씀드린 그 악당이 바로.”

“아하.”

알겠다는 듯이 레이디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진 않았다. 아서가 제인에게 험악한 눈빛을 쏘더니 옆자리의 숙녀를 향해 말했다.

“제인이 무슨 말을 했건 그건 악의적인 모함입니다.”

“악의가 조금 있긴 했지만, 모함 같진 않던걸요. 하지만 당신에 대한 제 평가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 말, 기억해 두지요.”

제인이 맞받아친 덕분에 레이디 클레어와 그녀 사이에도 기묘한 시선 교환이 이루어졌다. 만찬 식탁 위에 폭풍이 몰아쳤다.

“아 참, 찰리. 근처에 서던베리 경마장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번 구원자는 윌리엄이었다.

“그렇지. 아직 경마 시즌은 아니지만. 한창 말을 살찌우고 훈련을 시키고 있다네. 근처에 마사가 있어. 언제 한번 가 보겠나?”

“말이 나온 김에 내일은 어때? 날씨가 나쁘지 않다면.”

“그게 좋겠어요. 저는 말을 좋아합니다.”

릴리벳이 남편을 거들었다.

“승마가 가능한가?”

아서의 질문에 찰리가 반색했다.

“미리 얘기해 두면 몸 상태가 좋은 경기마도 탈 수 있지. 물론 질주하거나 장애물을 넘어서는 안 돼.”

“호오. 경주마라니. 훌륭한 말을 탈 기회를 놓칠 수 없지요.”

제인도 눈을 반짝였다.

“저도 승마를 좋아합니다. 겨우내 승마를 즐기지 못해서 아쉬웠어요.”

레이디 클레어까지 찬성하자, 찰리는 엘리엇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당장 결정을 내렸다. 하인을 불러 내일 오전에 여기 있는 모두가 마사에 찾아갈 것이라고 전문 조련사에게 알리라고 시켰다.

뒤로 자신이 처음 탔던 말과 지금 보유하고 있는 말, 그리고 경마 시즌에 대한 화제로 넘어갔다. 감정싸움이 잦아들자 찰리는 크게 안심했다. 아서와 제인도 말에 관한 의견만큼은 충돌하는 일이 없었으며, 레이디 클레어도 즐거운 듯이 수다에 참여하면서 만찬은 파행 위기를 모면했다.

***

이른 새벽. 아직 쌀쌀한 기운이 가득한 가운데 남녀 세 쌍은 벌써 마사로 출발했다. 마차 없이 모두 도보를 택했다. 엘리엇도 뒤늦게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냉기를 몰아내느라 승마용 코트를 여몄다.

“후우.”

하얀 입김이 부서졌다. 축축한 공기가 봄의 도래가 머지않았음을 알렸다. 곳곳엔 검은 흙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조만간 초록색 싹이 움틀 터였다.

고급 석재를 일부러 쪼개 만든 자갈이 깔린 길을 디딜 때마다 차박차박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시린 하늘과 어우러진 겨울 숲을 지나면 바로 마사였다.

서두를 일도 없기에 엘리엇은 별장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은밀한 사교장으로 오래 사용된 거대 저택인 만큼 사생활 보호에 신경 쓰느라 잎이 빽빽하고 키가 큰 고급 수종을 많이 거느렸다. 개중에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북쪽 수종과 해외 수종도 있었기에 다분히 관심이 갔다.

튼튼한 기둥이 하늘을 모르고 뻗는 것으로 유명한 나무를 발견했다. 오솔길을 벗어나 나무로 다가간 엘리엇은 세 사람이 양팔을 벌려서야 간신히 감쌀 수 있을 만큼 크고 굵은 기둥에 감탄하였다. 손을 대자 껍질에 낀 서리가 녹아 축축해졌다.

“아주 훌륭해.”

이 나무를 장원 경계선에 쭉 심어 두면 보기에도 좋고 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겨울엔 바람을 막을 것이다. 게다가 풍부한 잎사귀가 켜켜이 쌓여 주변 식물을 위한 좋은 부엽토가 된다.

무릎을 꿇고 나무 아래 토질을 살폈다. 검은 승마용 장갑을 낀 손으로도 간단하게 파헤칠 수 있었다. 색깔이 아주 진했다. 그만큼 비옥하단 뜻이었다.

“정말 탐나는군.”

남들이 감탄하는 말보다는 나무와 땅이 더욱 부러웠다.

“찰리에게 부탁해서 가지를 조금 얻어 갈까?”

씨앗에서부터 기르는 건 너무 힘들고 가지를 물꽂이로 기르는 편이 나았다. 서너 개만 가져가도 3년이면 꽤 훌륭한 나무로 기를 자신이 있었다.

“농지와 온실을 정리하러 장원에 돌아가야 하는데.”

곧 작물을 심을 시기가 다가온다. 지금쯤 토질을 파악하고 비료와 거름을 준비해야 땅이 녹자마자 부지런히 가래질을 할 것이다.

“이렇게 한가할 때가 아닌데 말이지.”

귀족과 달리 자신은 장원을 운영하는 농장주였다.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많은 소동이 있었던 데다가 만찬 동안 술을 제법 마셨는데도 간밤에 잠을 설쳤다.

무슨 심리였는지 몰라도 밤에 아서가 찾아올 거라 여겼다. 레이디 클레어나 제인에 관해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낮에 있었던 다툼에 대해 신체적 화해를 청할 줄 알았다. 그러나 푸른 새벽이 터 올 무렵까지 엘리엇은 혼자였다.

새벽을 알리는 하인들의 조용한 인기척이 들릴 무렵 피로에 못 이겨 깜빡 잠이 들었고 늦잠을 자는 바람에 다른 일행보다 늦게 마사로 나서게 되었다.

아서가 다른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는 일은 무척이나 반갑고 고무적이어야 했다. 그가 안정을 얻지 못하고 엘리엇을 찾아와 격렬한 감정을 토로하거나 거친 정사를 통해 해묵은 응어리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없어야 마땅했다. 레이디 클레어의 출현은 좋은 징조였으며, 아서의 관심이 그녀에게 쏠리는 일도 좋은 현상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속에 서늘한 서리가 번졌다.

“곧 봄이 오는데.”

땅과 나무뿌리를 어루만지면서 엘리엇은 긴 한숨을 토했다.

최근 들어 한숨이 잦아졌다. 가슴에 뜨거운 열기와 차가운 냉기가 수시로 도사렸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길 반복했다. 이러다간 내장이 망가질지도 몰랐다. 해결 방법은 제 심리를 골똘히 탐구하는 일이었지만, 시도하기 전부터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드는 탓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어리석은 판단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엘리엇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타닥. 타닥. 타닥.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났다. 엘리엇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거대한 나무 뒤에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워워.”

갑자기 사람을 발견한 말은 약간 놀라서 옆으로 튀었고 그 바람에 말을 모는 사람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검은 승마용 장갑을 낀 손이 아주 훌륭한 자태를 가진 말의 윤기 흐르는 굵은 목을 툭툭 치면서 쓰다듬었다.

흔들린 공기를 통해 향긋한 냄새가 전해졌다. 일전에 맡아 본 일이 있는 향수 냄새였다.

“여기서 뭘 하는 건가요?”

“보시다시피. 농장주답게 비옥한 흙을 부러워하고 있었죠.”

“흠.”

새침하게 턱을 쳐든 사람은 다름 아닌 제인 플레커였다.

특별히 대화를 이어 갈 생각은 없는지 그녀는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막 기분 좋게 달리던 말이 제 등 위에 있는 사람에게 어서 달리자고 조르느라 이리저리 맴돌았다. 그녀는 고집스러운 말을 아주 능숙하게 달랬다.

“승마 실력이 뛰어나시군요.”

“뭘 보고 그러시는 거죠?”

“성질이 사나워 보이는 수말을 택하셨잖아요.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면 다루기 힘드니까요.”

“칭찬인가요?”

“칭찬입니다.”

진심이었다. 제인이 자신을 싫어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지만, 칭찬까지 의심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날, 정말 미안합니다. 제 뜻은 아니었습니다.”

“알아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달가운 기색이 아니면서도 제인은 떠나지 않고 계속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사로 갈까 고민하는 찰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문제는 아서죠.”

“네?”

고개를 들자 하늘을 등진 제인이 엘리엇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승마용 드레스를 착용하고 여성용 안장에 앉았다. 옆으로 늘어진 드레스 자락은 늘 그렇듯이 검은색을 바탕으로 했고 화려한 레이스와 밝은 빛깔의 리본이나 비단 꽃이 달려 있었다.

“정말로 아서를 믿나요?”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내심 집히는 구석이 있지만, 엘리엇은 모른 척했다. 제인이 정말로 알고 그런 얘기를 하는지도 확실치 않고 더불어 안다손 치더라도 공공연하게 긍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등줄기를 스치는 냉기를 감지하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는 성공을 위해서면 뭐든 해치우는 남자죠. 레이디 클레어와는 개인적 호기심이 아니라 사업적 합의에 따른 거래라고 하지만. 글쎄요. 그건 아서만의 생각이죠.”

“무슨 말씀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모르는 척해도 저는 이해해요. 두 사람 간의 일에 굳이 끼어들고 싶진 않았어요. 아서가 제게 총구만 겨누지 않았더라도 말이죠.”

“뭐라고요?”

깜짝 놀랐다. 눈을 휘둥그레 뜨자 제인이 설핏 웃었다.

“어머.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그런 끔찍한 짓을!”

“아서니까요. 보시다시피 사지 멀쩡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총을 꺼내 들고도 결국 쏘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앞으로도 영영 쏘지 못할 거예요. 그만큼 제가 필요하니까요.”

총구를 겨눌 만한 다툼을 벌이고서도 제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엘리엇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작년 초여름만 해도 아서와 자신은 정말로 서로를 죽이려 들었다. 목을 조르고 총을 겨누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수차례 하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은 아편을 먹고 강제로 관계했다.

“음.”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저절로 낮은 신음성이 흘러나왔고 엘리엇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흙냄새가 났다.

“아서는 위험해요. 그만큼 매력적이지만. 가까이하면 할수록 이용당하고 문득 깨달았을 무렵엔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발견하죠.”

“충고입니까?”

“아니요. 그냥 제 감상을 말했을 뿐이에요.”

제인이 엘리엇에게 호의적인지 혹은 적대적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적어도 아서에 대해 아주 깊은 악감정이 있는 건 분명했다.

“아서는 제 열망을 알면서도 저를 막아서기를 거듭했어요. 덕분에 매번 행복과 평화를 찾을 기회를 놓쳤어요. 이번에는 그와 연관 없는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두 번이나 마주치고 말았네요.”

제인이 아서와 엘리엇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장이 쑥 꺼졌다가 다시 올라오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애써 표정을 지우면서 물었다.

“저와 찰리 말입니까?”

“흠. 이번 만남까지 따지면 세 번이에요.”

“이번까지 세 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되묻자 제인은 손사래 쳤다.

“한 번은 기억 못 할 거예요.”

그러더니 그녀는 말고삐를 고쳐 쥐었다. 드디어 이 불편한 대화를 끝내려나 싶은 찰나에 제인은 기수를 휙 돌리더니 엘리엇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질주를 기대하는 말이 콧김을 거세게 뿜었다.

“훌륭하군.”

엘리엇은 아주 용맹해 보이는 말의 콧잔등에 손을 얹으며 기름진 털을 슬슬 쓰다듬었다.

“레이디 클레어는 조만간 신대륙으로 갈 생각이에요. 그래서 이 주 뒤에 떠나는 배편에 선실 두 개를 예약했죠.”

“네?”

영 엉뚱한 소리에 엘리엇이 고개를 들었다. 제인은 연민 어린 눈빛으로 엘리엇을 마주했다.

“아서는 계약으로 치부하지만 그건 위선적인 사업가의 얘기일 뿐이고, 레이디 클레어는 남자와 함께 신대륙으로 탈출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상대가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그걸 왜 제게?”

“제 승마 솜씨를 한 번에 알아보고 칭찬해 주신 데 대한 답례에요. 더불어 이기적이고 사악한 작자가 잘난 계획을 망치는 꼴을 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때였다. 멀리서 다른 말이 다가왔다. 이쪽으로 곧장 달려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찰리였다.

“어쩜. 지치지도 않는다니까.”

제인은 정말로 곤란한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엘리엇을 의식했다.

“저는 귀족은 싫어요. 특히나 자신의 손으로 이룬 것도 없이 가문의 명성만 믿고 으스대는 작자는 더더욱. 탕아로서 가문을 버릴 배짱도 없이 적당히 반항입네 하면서 안전선 안에서만 활개를 치는 남자는 정말이지 끔찍해요.”

굉장히 신랄한 평에 엘리엇은 뭐라 할 답을 찾지 못했다.

“하다못해 외모라도 제 취향이었다면. 우중충한 모색이라니.”

그러면서 제인은 엘리엇의 금발을 탐난다는 듯이 쳐다봤다.

“정말 남다르시군요.”

“칭찬으로 듣지요. 다른 사람은 귀부인이 되어 신분이 상승하길 꿈꾸지만, 저는 분방한 성격과 거친 자유를 포기하지 못해요.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차 버려야 하는데. 곤란하군요.”

묻지도 않은 말을 급하게 한 다음 제인은 찰리가 가까이 오기 전에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말이 힘차게 땅을 박차면서 작은 돌이 튀었다.

“엘리엇!”

뒤늦게 다가온 찰리는 뚜렷한 목적을 가졌으면서도 친우를 무시할 순 없었는지 말을 멈췄다. 갈색 살찐 말은 기분 좋은 듯이 투레질했다.

“플레커 양이 여기를 지나갔나?”

“그래.”

“혹시 그녀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았나?”

귀족은 귀찮고 자유를 포기할 수 없어서 이번 여행을 기회로 찰리 윔즈를 단단히 차 버릴 생각이라는 걸 굳이 다 털어놓고 갔지만, 엘리엇은 엷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잠시 인사를 나눴어.”

“그렇군.”

하지만 싫다는 여자를 쫓아다니는 친우에 대한 걱정이 조금은 들었다.

“제인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점. 제인 플레커와 함께라면 어떤 모험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

“아하.”

부부 동반 모험을 꿈꾸는 미래의 자작은 희망으로 가득 찬 채로 엘리엇에게 당당히 고했다. 가문에서 반대가 극심할 것이라는 뻔한 우려는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누구보다 찰리 본인이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아직은 플레커 양이지만, 언젠가는 윔즈 자작 부인이 될 거야. 그리고 자네는 자작 부인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걸세. 제인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건 나뿐일 테니까.”

“아무렴.”

어제 만찬장에서 본 바로 미루어 제인의 압도적 승리와 찰리의 비참한 패배가 더 가능성 있었다. 그래도 엘리엇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친구에게 행운을 빌어 주었다. 제인이 악담을 늘어놓긴 했어도 찰리의 구애에 못 이겨 초대에 응한 것도 사실이었다. 누가 더 빨리 지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될 터였다.

“올해 내로 결혼식 초대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겠네.”

“물론이지! 경마 시즌이 오기 전에 약혼할 거야.”

호언장담한 찰리는 급히 제인이 간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두 사람이 사라진 쪽을 잠시 지켜본 엘리엇은 다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겨울 숲을 지나자 금방 마사가 보였다. 마사에는 넓은 초지가 딸려 있었는데, 겨울이라 잔디가 노랬다. 그 안을 윌리엄과 릴리벳이 순한 암말에 타서 경쾌하게 달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말을 관리하는 조련사가 엘리엇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엘리엇이 고갯짓으로 인사하자, 그가 승마복을 보고 바로 물었다.

“말을 고르시겠습니까?”

“천천히 둘러보도록 하지.”

마사에는 열두 필의 말이 있는데, 그중엔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암말이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마사가 비어 있었다. 낯선 사람이 다가오자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며 투레질했다.

“이놈 덕분에 사흘간 마사에서 지냈지요.”

“아주 잘생겼군.”

“아비가 재작년 우승마입니다. 어미도 명마의 후손이지요.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조련사는 마사를 돌며 말을 자랑했다. 엘리엇은 즐겁게 그 얘기를 들었고 모든 말을 꼼꼼히 본 다음에 짙은 고동색에 검은 갈기가 인상적인 수말을 골랐다.

“이 녀석은 아주 빠르고 영리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싫어하는 인간은 절대 태우지 않죠.”

“그런가?”

손을 내밀자 말이 다가와 콧등을 움찔거렸다. 엘리엇의 냄새를 꼼꼼히 맡은 녀석은 이내 손에 코를 대었다. 그러자 조련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미인을 밝히는 놈이기도 하지요.”

자칫하면 꽤 기분 나쁘게 들릴 말이지만, 악의가 없어 보이므로 엘리엇은 잠자코 말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굴레를 쓰고 안장을 걸친 말은 곧 엘리엇에게 인도되었다.

마사 앞에서 말을 타고 몇 걸음 걸어 나오자 릴리벳이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곁에 윌리엄도 있었다. 다정한 부부 속에 끼어드는 방해꾼이 되고 싶지 않으므로 엘리엇은 그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한 다음 다른 쪽으로 기수를 틀었다.

오솔길 방향에는 제인과 찰리가 있다. 둘이 궁금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맑은 공기와 함께 어지러운 머릿속을 털어 버리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마사 뒷길을 따라가면 호수가 나옵니다. 아직 얼음이 덜 녹았지만 그래도 주변을 둘러서 달리기엔 좋지요. 땅도 고르고요.”

“고맙네.”

뒤따라 나온 조련사에게 감사를 표한 다음, 엘리엇은 그쪽으로 가볍게 말을 몰았다. 겨울 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말의 근육을 놀라게 하기 싫어서 가벼운 속보를 택했는데도 차가운 겨울 공기가 뺨을 때려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련사의 말대로 뒷길로 가자 높은 나무 기둥 사이로 상당히 큰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를 빙 둘러 산책로가 있었는데, 승마용으로 만든 길이었다.

따각따각.

경쾌한 속보를 이어 가던 말은 엘리엇이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알아서 호수 둘레길로 접어들었다. 평소에 자주 오갔던 모양이었다. 그 덕에 마편을 휘두를 일이 전혀 없었다.

아직 얼음이 남아 있는 호수는 가장자리에서부터 서서히 녹는 중이었다. 작은 나무 선착장도 있었고 그 옆에 작은 보트도 매여 있었다. 덮개가 씌워진 것으로 보아 여름 물놀이용 같았다.

“여름엔 정말 멋지겠는걸.”

지나가는 나무와 아직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관목들을 보며 엘리엇은 여름의 호수 모습을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차가운 바람을 쐬고 싱그러운 장면을 떠올리면서 답답한 가슴을 털어 내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은 그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단순한 계약이 아닌 걸까?’

아까 제인이 던진 말이 계속 머리 한구석을 맴돌았다. 아서는 분명히 계약이라고 했다. 그를 대단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자칭 타칭 악덕 사업가였고 비열한 짓도 제법 했으리라 능히 짐작할 만큼 엘리엇 앞에서 본색을 드러냈다.

레이디 클레어를 두고 제인이 거짓말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두 사람 간에 어떤 감정적 교류가 있든, 아니면 정말로 사업적 합의든 레이디 클레어가 누군가와 함께 신대륙으로 갈 계획임은 확실할 터.

‘아서는 신대륙에 기반이 있으니 신분 차를 고려해서라도 함께 갈 만하지. 만약 둘이 신대륙으로 간다면 적어도 몇 년간은 못 보겠군.’

논리적인 결론이었다. 다만 레이디 클레어가 왜 평안한 삶을 보장하는 모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가기를 택한 건지 의문스러웠다. 물론 단순한 여행일 수도 있지만, 숙녀가 남자를 동반하여 대양을 건너는 건 여러모로 암시하는 바가 많았다.

‘보통은 가출로 생각하지.’

결혼 적령기에 든 사람들이 가문이 정해 주는 정략결혼을 거부할 때 주로 택하는 방법이었다. 대부분 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수도원에 끌려가거나 아니면 억지 결혼으로 마무리되긴 하지만. 몇몇은 완벽하게 잠적하여 신대륙에서 새 삶을 꾸리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관건은 신대륙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였다.

‘아서 글래스턴이라면.’

남자답고 부유하며 신대륙에 탄탄한 기반이 있는 광산주. 그와 함께라면 비교적 안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젊은 남성이 아니든가. 신분만 떼어놓고 보면 훌륭한 남편 후보였다.

‘아니.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잖아. 일단 아서의 말을 들어 봐야지.’

엘리엇은 부끄러운 영역으로 뻗어 가는 상상을 애써 뿌리쳤다. 신선한 바람을 들이마시면서 상쾌해졌던 가슴이 다시 답답해 탁 트인 호숫가를 둘러보며 다시 심호흡을 반복했다.

하얗고 검고 푸르른, 시린 광경 속에 새빨간 점이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그쪽에 눈을 고정했다. 호수 건너 정반대에서 살짝 못 미치는 대각선 지점에 붉은 재킷을 입은 사람이 있었다.

‘레이디 클레어.’

고귀하신 숙녀께서는 하얀 승마 바지에 붉은 재킷, 검은 부츠를 신고 있었는데, 꼭 군복을 착용한 왕족 같았다. 그 곁에는 검은 승마복을 입은 아서가 있었다. 체구가 월등히 컸기에 알아보기 쉬웠다.

두 사람은 엘리엇이 지켜보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주 먼 거리에 있기에 당연했다. 잠시 서성이던 그들은 곧 말을 멈췄다. 아서가 먼저 말에서 내려와 당연한 듯이 레이디 클레어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그를 향해 아래로 두 팔을 내밀던 레이디 클레어는 승마 모자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풍성한 머리카락이 펼쳐졌다. 아서는 그것도 아랑곳없이 그녀를 땅에 내려 주었고, 바닥에 뒹구는 승마 모자를 주워 내밀었다. 두 손을 반짝 들었다가 모자를 받아 들면서 레이디 클레어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가까이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밝게 웃고 있었다.

순간 가슴속에 시커먼 먹구름이 끼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로 승마를 했기 때문일까. 위가 울렁거렸고 아침에 마셨던 홍차와 위액이 뒤섞인 쓴 물이 울컥 올라왔다.

엘리엇은 재빨리 고삐를 당겨 기수를 돌렸다. 하지만 고집스러운 말은 돌아가길 거부했다. 말은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거침없이 뛰어갔고 하필이면 그것은 반대편에 있는 두 사람 쪽이었다.

“워, 워!”

말리면서 몇 번이고 강하게 고삐를 당겼지만, 역부족이었다. 어느새 부아가 치민 말은 전력으로 질주하려 들었다. 아직 말은 땀이 흘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근육이 풀리지 않았다. 이런 때에 함부로 달렸다간 경주마의 귀중한 근육이 망가질 것이 분명했다.

“멈춰!”

강하게 명령하며 고삐를 양손으로 당겼다. 그러자 말이 앞발을 들어 올려 힘차게 공중을 휘저었다.

히이잉!

“어어?!”

말이 뒷발로 꼿꼿하게 일어선 덕에 엘리엇은 저절로 뒤로 미끄러졌다. 이런 때에 고삐를 놓지 않았다가는 말과 함께 넘어져 깔리는 불상사가 발생하기 쉬웠다. 본능적으로 고삐를 놓고 등부터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강한 충격에 정신이 아득했다. 천만다행으로 말은 엘리엇을 짓밟지는 않았다. 대신 제멋대로 달려나갔다.

통증에 신음하면서 사지를 움직였다. 다행히 어디 부러진 곳은 없었다. 일어서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반대편이 보였다. 레이디 클레어만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멍한 물음이 머릿속에 떠오를 무렵, 강한 외침이 들렸다.

“엘리엇!”

찰나에 불과한 시간 동안 호수 둘레 반절을 질주한 아서는 위험하게도 바로 지척에서 말고삐를 당겼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말이 거친 입김을 내뿜은 말은 아까 엘리엇이 타고 있었던 말처럼 앞발을 공중에 번쩍 치켜들었다. 하지만 아서는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말이 안정을 찾고 네 발로 땅을 디디기 무섭게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괜찮아?”

황급히 다가온 그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대답도 듣지 않고 쭉 뻗은 엘리엇의 사지를 더듬었다.

“감각이 없는 곳은?”

“없어. 뼈는 다치지 않았어.”

“다행이군. 목은?”

큰 손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두툼한 천으로 목을 꽉 동여맸기에 목도 이상 없었다. 아픈 것은 바닥에 부딪힌 등과 뒤통수였다.

“손을 움직일 수 있나?”

한 손으로 엘리엇의 목을 받힌 그는 이로 다른 손 중지 끝을 깨물어 장갑을 벗었다. 뜨뜻한 손이 엘리엇의 손목을 쥐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오므리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물론 창백한 낯빛을 한 아서의 입에서.

자신보다 더 놀란 것 같은 상대를 안심시키느라 엘리엇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아. 땅이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고, 또 말에 밟히지도 않았어. 일어나게 좀 도와줘.”

웅웅 울리는 허리에 힘을 주며 두 팔을 그를 향해 뻗었다. 하지만 아서는 엘리엇의 요청을 거부했다. 대신에 굳건한 팔이 등과 무릎 아래로 들어왔다. 몸이 공중에 훌쩍 들렸다.

“어?”

저도 모르게 멍한 감탄사를 뱉고 말았다. 아픈 등도 등이지만, 놀라서 반사적으로 허우적댔다.

“가만히 있어.”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면서 동시에 위협적인 경고가 날아들었다. 그는 엘리엇을 솜씨 놓게 제 말 위에 올려놓았다. 아무리 힘이 세다지만 성인 남성을 훌쩍 들어서 안장 위에 앉히는 게 가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뒤이어 말 등에 오른 아서는 숙녀처럼 옆으로 앉은 엘리엇의 허리를 단단히 감싼 채로 말을 몰았다. 질주하는 줄 알았지만, 느린 경보였다.

“빨리 달리고 싶지만, 그랬다가 통증이 더 심해질 테니까. 조금만 참아.”

엘리엇은 당황한 채로 호수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레이디 클레어가 어느 틈에 거기까지 달려간 엘리엇의 말을 달래면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레이디 클레어는 어쩌고?”

“그녀가 왜?”

“나 따위에 신경 쓰느라 그녀의 기분을 거스를 필요가….”

하던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채로 엘리엇은 입을 다물었다. 제게 내리꽂히는 아서의 시선이 무시무시했다.

“네가 다쳤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말투가 험악했다.

“중요한 사람이잖아.”

“세상에 너보다 중요한 사람은 없어.”

어안이 벙벙할 만큼 단호한 선언에 엘리엇은 대꾸할 말이 궁색했다. 전방을 바라보는 남자의 안면은 딱딱히 굳어 있었고 입술엔 못마땅함이 걸렸다.

“릴리벳을 대신할 사람은 아무래도 나보다는 레이디 클레어가 좋지 않을까?”

조용히 읊조렸다. 따지기보다는 건의였고, 혹은 자조적인 한편 도덕적으로 올바른 의견이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개는 꼿꼿하게 든 채로 눈동자만 흘끗 내린 아서가 이를 바득 갈았다.

“망할 릴리벳 얘기는 그만하라고 했지.”

“릴리벳이 아니라 레이디 클레어 얘기야. 너와 내 얘기기도 하고.”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동시에 아서는 말고삐를 당겼다. 저택을 향해 가던 말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숲으로 향했다. 위험 신호였다.

“어디 가?”

“넌 좀 혼날 필요가 있어.”

정원 안에 호수가 있을 만큼 거대한 저택이라서 오솔길을 벗어나기만 해도 금방 인적이 드문 장소가 나왔다. 수십 그루의 헐벗은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선 숲 가운데 말을 세운 아서는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곤 너무 당연한 듯이 엘리엇을 향해 두 팔을 내밀었다. 마치 레이디 클레어에게 했던 것처럼.

“아.”

멍하니 아서를 응시했다. 갑자기 욱신대는 등의 통증이 심해진 이유는 아무래도 몸통 안에서 날뛰고 있는 심장 때문인 듯했다.

“뭐 해?”

여전히 화가 난 아서가 퉁명스럽게 재촉했다. 무의식적으로 마주 두 팔을 뻗던 엘리엇은 번뜩 정신 차렸다.

“난 여자가 아니야.”

등이 몹시도 아팠지만, 저를 향한 두 손을 거절하고 몸을 돌렸다. 옆으로 앉은 덕분에 제대로 발걸이를 딛지 못하고 바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털썩.

꽤 난폭하게 착지했고, 두 발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충격이 등을 더욱 쑤시게 했다. 덕분에 무릎이 픽 꺾였다. 하지만 땅바닥을 뒹구는 불상사가 두 번 일어나진 않았다.

탁.

바로 뒤에서부터 허리를 감싸 잡은 아서 덕분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눈빛에서 더욱 사나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덤벙대는 엘리엇이 못마땅해서 짜증이 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가 있을까.

“고마워.”

제대로 선 다음에 엘리엇은 제게 들러붙은 아서의 손길을 너무 거칠지 않은 선에서 빠르게 밀어냈다. 그러면서 거리를 조금 벌렸다.

훈련이 잘된 말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가롭게 마른 풀을 뜯고 있었다. 엘리엇은 그 광경을 조금 지켜봤다. 말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아서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멍청하게 말에서 떨어지다니.”

“잠시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어떻게든 분위기를 좋게 끌어가고 싶었기에 엘리엇은 사소한 비난은 얼마든지 감수했다. 막상 이 자리로 끌고 온 아서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엘리엇을 노려봤다. 착 달라붙는 승마용 흰 바지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잘 드러난 굵은 허벅지 옆에 가지런히 놓인 두 손이 꾹 쥐어졌다. 한쪽은 장갑이 없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마디가 하얗게 불거지고 손등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화가 단단히 났군.’

긴장한 엘리엇은 떨리는 가슴을 몰래 진정시키려 애썼다. 아서의 뒤틀린 집착과 고집을 꺾기 어려움은 이미 직감했다. 그런데도 레이디 클레어와 잘 지내는 걸 보면, 희망이 영 없지도 않았다. 물론 엘리엇 자신이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는 차치하고.

“도와줘서 고마워. 하지만 보다시피 나는 멀쩡히 걸을 수 있어. 등에 타박상을 입었지만, 연고 바르고 이틀 쉬면 금방 나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네 자리로 돌아가.”

“내 자리가 어딘데?”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아서를 향해 제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선의 어린 표정을 지었다.

“레이디 클레어는 무척 호의적이더군. 예상보다 훨씬 활동적이기도 하고. 고귀한 신분과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우아한 숙녀분이지. 그런 분의 관심을 사소한 일로 잃는 건 큰 손해야. 너처럼 로드니아를 기반으로 사업을 벌이는 신흥 계급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지금 다친 너를 두고 레이디 클레어에게 가서 아부라도 하란 말인가?”

“그런 의도는… 아니 결과적으로 같은 얘기군.”

자존심이 센 아서의 기분이 더욱 곤두박질치기 전에 엘리엇은 얼른 덧붙였다.

“축복받은 남녀 간의 올바른 결합이기도 하고. 또 그녀는 다감한 성격에 무엇보다 너를 신뢰하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아서는 숫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성난 상대는 쏜힐에서 마주했던 그 모습과 비슷했다. 섬뜩하고 악의 넘쳤다. 여차하면 두 손으로 엘리엇의 목을 거머쥐고 조를 기세였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엇의 혓바닥을 얼어붙게 하진 못했다. 그때도, 지금도.

“나보다는 레이디 클레어 쪽이 릴리벳에 더 가깝단 거야.”

“하하하.”

꼭지가 돌아 버린 사람이 가끔 그러듯이 아서는 보란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눈에는 분노가 있었으며 웃음 또한 딱딱하고 연극적인 톤이었다. 별안간 입을 다문 그는 엘리엇에게 바싹 다가왔다. 무시무시한 안광을 뿜는 눈동자가 코끝이 스칠 거리에서 도사렸다. 맹수와 같은 그것을 마주한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누가 누굴 닮았든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야.”

“하지만 적어도 남자가 아닌 여자가….”

말을 끝맺기 전에 아서의 맨손이 엘리엇의 뒷덜미를 감싸 쥐었다. 다른 손과 합쳐 원을 만들어 목을 조이는 줄 알았지만, 의외로 장갑을 낀 손은 엘리엇의 허리께에 닿았다.

“계속 말했을 텐데.”

“…아서?”

“남자든 여자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빌어먹을.”

“하지만 도덕적으로 잘못되었어. 그리고 신에게서 버림받은… 윽.”

“매음굴의 스타도 되지 못한 세탁부의 아들로 태어난 순간 이미 신은 나를 버렸어. 그리고 이미 즐길 대로 다 즐긴 후에 도덕 운운하는 건 위선이잖아.”

“아무리 늦었어도… 흣…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해.”

어느 틈에 아서와 단단히 밀착한 엘리엇은 등에 가해지는 통증 때문에 신음을 거듭하며 문장을 맺었다. 하지만 원론적인 얘기는 아서에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샌님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 똑바로 말해.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뭐?”

“아니면 내가 말할까?”

대답할 틈을 주지도 않고 아서는 자답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 순간부터 진실은 하나뿐이야. 하지만 넌 그걸 원치 않지. 그래서 항상 핑계를 만들어. 처음에는 복수가 핑계였고, 다음에는 릴리벳을 거론했지. 지금은 레이디 클레어? 하. 네 우스운 착각을 귀엽게 봐주려고 했지만, 더는 참지 못하겠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닥쳐.”

아서는 거의 으르렁댔다.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어떻게 행동해도. 너는 제대로 듣지도 보지도 않지. 그러면서 항상 나를 위한다는 식으로 위선을 떨어. 차라리 내가, 이 빌어먹을 아서 렌튼이 혐오스럽다고 해.”

상대가 먼저 제 입으로 렌튼이라고 부르는 건 재회하고 처음이었다. 그만큼 짙은 눈동자에는 어마어마한 분노가 깃들었다. 하지만 엘리엇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것은 걷잡을 수 없는 노기가 아니었다. 그건 아서의 일그러진 눈가와 떨리는 입매에서 드러나는 깊은 절망감이었다.

“차라리 내가… 역겨워서 견딜 수 없다는… 네 잔인한 진심을 보이라고.”

전신을 휘감은 몸이 가늘게 떨렸다. 엘리엇은 제 몸이 떠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눈치챘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떠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아서였다.

처음에는 그가 미웠다. 재회한 후에도 아서를 제 손으로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고작 일 년이 채 안 되는 동안 그런 감정은 아득한 옛날 일이 되어 버렸다.

눈물 없이 울고 있는 남자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 저절로 팔이 움직여 그를 감싸 안고, 그만큼이나 떨리는 음성으로도 그를 달래야겠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렇지… 않아. 오해야.”

“거짓말하지 마. 빌어먹을 악마 새끼야.”

고개를 들은 아서는 희미하게 웃었다. 엘리엇의 심장이 찢어질 만큼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미소였다.

“넌 항상 나를 내다 버릴 궁리만 하잖아.”

“그런 적 없어.”

“위선자. 너는 이미 한번 버렸어. 15년 전에.”

숨이 턱턱 막혔다. 아서는 엘리엇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가 등을 압박하는 바람에 끔찍하게 아팠다. 하지만 너무나도 절박하게 매달려 와서 엘리엇은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이번에는 안 돼.”

“아서?”

“이번에는 절대로 너를 놓아주지 않을 거야, 엘리엇.”

“무슨…!”

갑자기 누가 누구를 버린다는 건지. 대화가 엇갈렸다. 강한 손아귀가 뒷덜미를 압박했다. 저절로 고개가 뒤로 꺾였다. 턱을 들어 올리자, 마른 입술이 엘리엇의 입매에 닿았다.

“ 엘리엇, 너야말로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인걸. 이제 그만 너도 네 운명을 받아들여.”

말을 마치자마자 아서는 입술을 겹쳤다. 뜨거운 혀가 엘리엇의 입술과 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정복자처럼 쳐들어온 혀는 입 안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막힌 숨은 더욱 가빠졌다. 그러나 아서에게 단단히 잡힌 덕에 엘리엇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으음.”

유일한 저항은 그의 혀를 깨무는 것이지만, 차마 그러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엘리엇은 그가 레이디 클레어가 아닌 자신에게 입을 맞춘 게 몹시 달가웠다.

너무 기뻐서 비참할 만큼.

간절한 입맞춤은 심장에 서린 서늘한 기운을 몰아낼 만큼 길었다. 호흡을 고르느라 잠시 떨어진 사이 가쁜 숨이 새어 나와 하얗게 부서졌다.

“아….”

재차 시작된 입맞춤으로 인해 상대의 이름은 신음으로 변했다. 서로의 입 안을 오가면서 두 개의 혀는 끊임없이 얽혔고, 날숨은 상대의 목구멍 속으로 넘어갔다.

떨림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이제는 제가 떠는 것인지, 아서가 떠는 것인지 엘리엇은 분간하지 못했다. 뜨거운 열기에만 매달렸다.

아서의 집착이 온전히 자신을 향했다면. 처음부터 순수히 엘리엇 데일을 원했더라면.

‘비록 신의 섭리를 어겨 세상에서 버림받아도… 두 번 다시 사랑하는 릴리벳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나이트스톤에 두 번 다시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되더라도. 아서의 곁을 택하리라. 영원한 어둠의 세계로 추락할 때까지도 기쁨에 춤을 출 것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벅찬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눈물을 떨구었다. 차갑고 시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엘리엇?”

입맞춤을 이어 가던 아서가 입술을 뗐다. 어느새 엘리엇의 뺨을 감싼 그는 엄지로 창백하게 떨리는 뺨을 쓸었다.

“왜 울지?”

혼란함 속에 걱정이 내비쳤다. 아서의 순수한 호의가 더욱 마음 아팠다.

“나는….”

더듬더듬 단어를 이었다. 혀끝에서는 아직도 그의 촉감이 느껴졌다. 입술을 적신 그의 타액이 증발하는 것을 느끼면서 엘리엇은 애원하듯 속삭였다.

“못 하겠어.”

“복잡한 생각은 버려. 난 네가 필요하고, 넌 계속 내 곁에 머무를 테니까.”

“그럴 수 없어. 아서. 나는 그렇게 강한 인간이 되지 못해.”

“내가 버팀목이 될게.”

눈물 젖은 뺨에 입술을 댄 아서가 갈라지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네가 무너지지 않도록 내가 버틸게. 제발 그런 말은 말아 줘.”

“하지만 다른 사람을 대신하는 일은 파국만 불러올 뿐이야.”

“너는 누구의 대신이 아니야.”

“아서.”

현실을 보지 못하는 그를 엘리엇은 꾸짖듯이 불렀다. 대답하는 대신 아서는 듣기 싫은 소리를 피하는 아이처럼 엘리엇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해묵은 그림자에 집착하지 말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 아서. 너는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끝까지 내 말은 믿지 않는군.”

고개를 든 아서는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화가 난 눈썹과 달리 입가에는 애수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물기가 스며 나올 것처럼 짙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대신인 적 없었어.”

“…뭐?”

“처음부터. 15년 전 네가 나이트스톤에 나타나던 그 순간부터. 네가 내 정강이를 호되게 차 버렸던 그때부터 말이야.”

그러면서 아서는 고개를 기울여 엘리엇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한 점 흠이 남을까 두려워하는 숭배자처럼 경건하고 애정 어린 키스였다.

“너만을 원했어.”

제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아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엘리엇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애달픈 남자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찬 바람이 뺨을 스칠 때까지 엉킨 머릿속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엘리엇은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나를… 원했다고?”

마치 끔찍하게 복잡한 수식으로 이루어진 어려운 암호 같았다. 그 음절을 통해 아서가 무엇을 의도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난해한 질문을 아서는 간단하게 답했다.

“첫눈에 네게 반했으니까.”

“뭐?”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너를… 너만을 사랑하니까.”

주변이 갑자기 일렁이더니 까마득하게 뒤로 후퇴했다. 공간이 영원까지 확장되고 그를 따라 빛이 아득한 시간 속으로 달아났다. 느껴지는 것은 아서의 뜨거운 체온, 들리는 것은 아서의 잔잔한 음성, 보이는 건 아서의 다감한 눈동자뿐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서가 자신을? 첫눈에 반한 후에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실이 이렇게 달콤할 리가 만무했다. 설마?

“말에 떨어질 때 머리를 다쳤나? 그래서 마지막 환상을 보나?”

“그럴 리가.”

아서는 엘리엇의 손을 들어 제 뺨에 가져다 댔다. 뜨거운 실체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내가 찾은 자리는 네 곁이야, 엘리엇. 제발 나를 거부하지 말아 줘.”

“오, 아서.”

애원에 엘리엇은 격정을 참지 못하고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두꺼운 몸통을 완전히 감싸고도 모자라 양손으로 등을 꽉 움켜쥐었다.

“사실은 그러길 바랐어. 네가 온전히 나를 원하기를. 미움도. 원망도, 열정도. 모조리 나를 향하기를 바랐어.”

“드디어.”

순수한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머금었다. 입술이 더운 숨결과 함께 맞붙는 순간, 갈기갈기 찢어지던 심장도 천천히 본래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추웁. 쪽. 쪽.

겨울 숲의 찬 공기가 수시로 불어닥치는데도 조금도 추위를 느낄 새가 없었다. 고개를 엇갈리며 떨어졌던 아서는 금방 엘리엇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다가왔다. 혀부터 맞붙은 깊고 진한 키스의 순간에 푹 빠져든 엘리엇은 등의 통증도 까맣게 잊었다.

긴 키스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다시 끊겼을 무렵, 아서는 무척이나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엘리엇.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눈을 반쯤 내리뜬 엘리엇은 아서의 입술만을 응시했다. 두어 번의 키스로는 그간 속을 태웠던 갈증을 해소하기 부족했다. 질문은 나중에 해도 좋았다. 다시 키스가 이어지길 바랐다. 하지만 아서는 다가오는 엘리엇의 입술을 살짝 피했다. 안타까움에 애가 닳았다. 저도 모르게 원망 어린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때 절박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도 나를 원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원하기 때문에 그저 맞춰 주는 거야?”

짙은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는 선고를 앞둔 죄수처럼 두려움에 차 있었다.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아서가 황급히 덧붙였다.

“어떤 대답을 하든, 너와 떨어질 생각은 없어.”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말에 엘리엇은 실소를 터트렸다. 눈가에 맺혀 있던 마지막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감상적인 눈물을 보이기가 창피해 이마를 그의 어깨에 댔다. 그리곤 조용하면서도 확신에 찬 어조로 천천히 설명했다.

“네가 다른 사람, 특히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그게 네 앞길을 망친다고 해도. 나는 거짓으로라도 내 연인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 않아.

“뭐?”

연인이라는 말에 아서가 깜짝 놀란 듯 반문했다. 고개를 다시 든 엘리엇은 그를 바라보며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네가 다른 사람과 있는 모습을 보면 음울한 감정이 생겨. 속이 쓰리고 잠을 못 이루지. 그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려고 애썼어. 하지만 네 인내심이 닳아 버렸듯, 내 인내심도 그렇게 오래가진 못했지. 레이디 클레어를 보는 순간 알겠더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네 옆에 서 있는 꼴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어.”

조금 전의 자신만큼이나 얼어붙은 아서를 보며 엘리엇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원랜 그렇지 않았는데 어느 틈에 네가 그렇게 만들었어. 그 책임을 져 주길 바라. 앞으로 영원히.”

“그… 말은?”

“아무래도 내가….”

한 박자 쉰 엘리엇은 바보처럼 웃었다.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아서 빌어먹을 글래스턴.”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아까 쓰러진 엘리엇을 옮길 때와 비슷하게 번쩍 들어 올린 아서는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무슨?”

쫓기는 사람처럼 사방을 둘러본 아서는 노랗게 마른 잔디가 촘촘하게 돋은 곳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그리곤 엘리엇을 그 위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아서?”

대답도 없이 두꺼운 승마용 재킷을 황급히 벗은 아서는 그것을 바닥에 넓게 깔고 그 위로 엘리엇을 쓰러트렸다.

“엇?”

아무리 푹신한 토질에 마른 잔디가 빽빽하게 돋았다고 해도 겨울 땅은 겨울 땅이었다. 등부터 닿자 딱딱해서 절로 신음이 터졌다.

“으, 무슨 짓이야.”

갑작스러운 행동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개를 들자 어느 틈에 아서가 그늘을 드리웠다. 딱딱한 낯짝을 한 그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아서?”

재차 부른 말에 그는 대답도 없이 엘리엇의 입술을 탐했다. 그리곤 손이 엘리엇의 승마복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무슨?”

“당장… 당장 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이렇게 갑작스… 아!”

다급한 손이 셔츠를 빼낸 다음 허리 틈을 통해 바로 들어와 엉덩이를 거머쥐었다.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바짝 들자 샅에 딱딱한 돌덩이가 쿡 내리꽂혔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아서의 눈빛만큼이나 흉흉한 성기가 바지를 뚫을 기세였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엘리엇은 벌써 임전 태세에 들어간 아서를 달래 보았다.

“여기서는 좀 곤란한데.”

딱히 아늑한 침대가 아니라도 적어도 사방을 가린 벽이라도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헛간이나 혹은 다 허물어져 가는 폐허 같은 건 없었다.

“엘리엇.”

상대가 다시금 엘리엇을 종용했다. 지독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리자 거짓말처럼 사타구니에 힘이 들어갔다. 저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스쳤다.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문 엘리엇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면서 따르게 속삭였다.

“등이 닿지 않는 자세라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아서가 달려들었다. 흥분을 도무지 자제하지 못하면서도 그는 엘리엇이 엎드리도록 도왔다. 사각거리는 마른 풀 위에 겹쳐진 아서의 재킷에 얼굴을 묻으면서 엘리엇은 뜨거운 숨을 토했다.

짐승의 교미처럼 이어진 정사는 생각만큼 난폭하지 않았다. 결합만으로도 두 사람은 금세 절정에 올랐다.

“하윽.”

무릎을 대고 엎드린 자세로 엘리엇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텼다. 뒤에서부터 밀어붙이는 강한 힘 덕분이 꼬리뼈에서부터 목뼈까지 쿵쿵 울렸다. 등이 몹시도 쑤셨지만, 그보다는 제 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우람한 자지의 존재감이 더욱 컸다.

“엘리엇.”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목소리가 끊임없이 귓가에 들렸다. 키스하고 싶은데 등이 아파서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아서의 뜨거운 입김은 빨갛게 달아오른 귓가와 턱뼈, 그리고 목을 배회했다.

“사랑해.”

발정 난 짐승처럼 붙어먹는 도중에 들린 고백 덕분에 엘리엇의 체온이 한층 올라갔다. 지금껏 많은 정사를 벌였지만 이 순간만큼 부끄럽고 간질거린 적은 처음이었다. 서로가 온전히 서로를 원한다는 사실이 그 어떤 행위보다 달콤한 애무였다.

“아서.”

“엘리엇.”

딱딱하고 차가운 풀밭 위에서 급하게 이루어진 투박한 섹스를 하는 동안 엘리엇은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최상의 기쁨을 맛보았다. 이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져도 좋을 만큼 황홀한 쾌락의 홍수 속에서 엘리엇은 자신과 연결된 남자의 심장을 고스란히 느꼈고, 그리고 힘차게 이어지는 맥박에 휩싸인 채로 정신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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