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백은후도 생각이 있으니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나은 방법이라는 것은 알 것이다. 모준영이 직접 방문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온 게 분명할 테니까.
“둘이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입니까? 나름 잘 어울리는데.”
“난 그런 적 없어. 모준영이 항상 날 경계했지.”
“그거야…….”
백은후가 심보를 더럽게 써서 그런 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백은후는 만들 때부터 그런 캐릭터라 그런 거다. 결국, 둘 사이의 다툼도 자신이 캐릭터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인 것이다. 성주안은 한숨을 쉬며 결심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오늘 둘을 어떻게든 붙여 놓는다. 앞으로 무슨 위협이 닥칠지 모르는데 틈만 나면 으르렁거리는 것도 문제니까.
“백은후 씨, 저 진지합니다. 지금 당장 전화하세요.”
“젠장.”
백은후는 낮은 목소리로 욕을 짓씹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은후와 둘만 있기 곤란했는데 잘됐다. 근데 진짜 모준영은 왜 갑자기 온 거지?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모준영이 정색하자,
“나 원 참, 별 소릴 다 들어 보겠군.”
백은후가 맞장구를 쳤다.
“둘이 손잡고 나란히 앉으라는 말이 어려워요?”
백은후가 성주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말을 알아들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모습이 정말 뻔뻔스러웠다.
“저 말고요. 모준영 씨 손 잡으라고요.”
“……왜지?”
“그러게요. 별 이상한 요구를 다 하시는군요.”
둘이 고분고분하지 않을 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나 다 방법이 있었다. 성주안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모준영을 향해 외쳤다.
“금강불괴 씨!”
“…….”
“제 요구 안 들어주시면 앞으로 이름 대신 별명 부를 겁니다.”
백은후는 억지로 웃음을 참는 듯 턱 근육에 힘을 주고 있었고 모준영은 얼굴을 엉망으로 구겼다. 성주안이 다시 이름을 부를 것처럼 어깨를 들어 올리자 모준영이 백은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자, 손 내밀었습니다. 됐습니까?”
금강불괴라는 별명이 그렇게 싫은가? 나름 멋있는 것 같은데……. 사실 다 큰 성인 남자들을 억지로 악수시키고 나란히 앉힌다고 해서 진짜 친해질 거라는 기대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제 앞에서라도 둘이 으르렁거리지 못하게 하려고 조련할 목적이 더 컸다. 그래야 앞으로 파티를 이끌어 나가기도 쉬울 테니까.
“백은후 씨, 뭐 합니까? 손잡아 주셔야죠.”
“하,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약속했지 않습니까?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것도 배신입니다.”
성주안은 최대한 큰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백은후가 뭐 씹은 표정으로 손을 맞잡았다. 은근히 속이 간질거렸다. 둘 다 무시하면 될 걸, 들어주네? 하지만 악수를 했으면 좀 흔들 것이지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손을 뗐다.
“뭐 합니까? 둘이 손잡고 나란히 앉으라고 했지 악수만 하고 떼라는 말은 안 했습니다.”
“여기까지 합시다.”
“그래, 그만하면 됐어.”
둘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고집 센 두 사람이 이 정도까지 맞춰줬으면 많이 양보한 거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으니.
“그럼 이제 나란히 앉으세요.”
손잡고 앉는 것보단 그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두 사람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성주안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커다랗고 잘생긴 남자 둘이 나란히 앉아있으니 확실히 보기가 좋았다.
“자, 이제 말씀해 보세요. 왜 오신 겁니까?”
주안의 물음에 모준영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던전 들어가기 전에 장비를 점검해야 할 것 같아 들렀습니다.”
백은후가 콧방귀를 끼었다.
“내 채찍은 길드 안에서 수리할 수 있어. 뭐 그런 거로 직접 오기까지.”
“백은후 씨는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저렇게 묻는 걸 보니 단순한 수리가 아닌 것 같았다. 파티원들 몫으로 마석을 남겼으니 그것을 이용해 무기를 강화할 모양이었다. 백은후 바보네.
간단한 수리야 길드 안에서도 가능하지만 마석을 활용한 무기 강화는 신의 손 스킬이 있는 S급 대장장이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워낙 귀한 직업인 탓에 헌터 협회에 한 명만 존재한다고 모준영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백은후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점검이 아닌 강화인가 보군.”
그러곤 머쓱한 표정으로 인벤토리에서 채찍을 꺼내 모준영에게 건넸다. 모준영은 채찍을 받아 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흘 후에 뵙도록 하죠.”
성주안은 급히 모준영을 잡았다.
“모준영 씨, 저녁 식사하셨어요?”
안 들어도 뻔하다. 협회로 가지고 오라고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까 봐 본인이 직접 무기를 수거하는 중이니 못 먹었겠지. 백은후를 미워하니까 여기에 가장 마지막에 들렀을 거다.
“아직 식사 전입니다.”
“그럼 치킨 드시고 가세요. 아직 한 마리 반이나 남아서요.”
모준영이 치킨을 잠시 보다가 다시 백은후를 보고선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집에 가서 먹겠습니다.”
“아무래도 여긴 불편하겠지. 어서 가.”
“금강불괴 씨!”
모처럼 둘이 오래 붙어 있을 기회인데 이대로 놓칠 순 없지.
“좋은 말 할 때 저녁 드시고 가세요.”
이왕 밥 먹고 가는 거 백은후와 오손도손 대화도 좀 나누고.
모준영이 미간을 구기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새 젓가락을 건네자 흠흠 헛기침을 하고 마라맛 치킨부터 맛을 보더니 그 이후로 빛의 속도로 치킨을 없애기 시작했다.
밥 먹는 애를 보는 부모 마음이 이런 걸까? 흐뭇해서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렀다. 그래, 모준영. 네가 우리 파티의 미래다. 많이 먹고 불끈불끈해져서 괴물들 다 막아내라.
“성주안.”
모준영을 보며 웃고 있는데 갑자기 백은후가 싸늘한 얼굴로 이름을 불러왔다.
“왜요?”
물었음에도 대답이 없었다. 진짜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었다.
“왜 불렀냐니까요.”
“네 지팡이도 강화해야 할 거 아냐? 모준영 있을 때 맡겨야지.”
“아아…….”
뭐 때문에 저런 표정으로 쳐다봤나 했더니 무기 강화 때문인가 보다. 직접 싸우는 헌터가 아니다 보니 제게도 무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렸다. 인벤토리에서 버퍼의 지팡이를 꺼내서 모준영 옆에 두고 다 먹으면 챙겨달라고 했다. 그러자 모준영이 치킨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잘 먹는단 말이지. 하긴 저 덩치를 유지하려면 많이 먹어야겠지. 한참 모준영이 먹는 걸 쳐다보고 있는데 백은후가 뉴스를 틀었다.
―……백용석 국회의원은 S급 성주안 버퍼가 기부한 500억을 이번 사고로 인해 다친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고 밝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주안 버퍼의 선행은 계속 이어지는데요. 각성자 관리센터 모준영 센터장에 따르면 이번 기부금은 성주안 버퍼를 주축으로 한 파티에서…….
TV에서 기부금과 관련된 기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시에 백은후가 추천해 준 정장을 입고 기자들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제 모습도 자료화면으로 나왔다. 옷보다 표정에 자신감이 없어서 바보 같아 보이는데 백은후와 모준영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화면발을 꽤 받는군.”
“그러게요. 좀 의외입니다. 앞으로 각성자 인터뷰는 모두 성주안 씨에게 맡기는 게…….”
성주안은 화들짝 놀라 모준영의 말을 막았다.
“아니 말이 되는 소리 좀 하세요. 그리고 백은후 씨, 왜 기사에 제 이름만 나가는 겁니까?”
“무슨 말이야. 모준영 이름도 나왔잖아.”
동문서답이 따로 없었다. 모준영이 언급된 건 센터장이기 때문이잖아. 성주안은 지지 않고 따졌다.
“우리 모두의 이름으로 기부를 해야지 왜 제 이름만…….”
백은후가 습관적으로 성주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성좌들 보라고 그런 거야. 우리가 네게 호의적이라는 걸 알아야 성좌들이 널 무시하지 않겠지. 게다가 네 얼굴이 최대한 노출 되어야 해. 그래야.”
뒷말은 모준영이 이었다.
“성주안 씨는 약하니까요. 얼굴이 많이 알려지면 혹시 우리가 없을 때 외국 헌터가 당신을 납치해 간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 줄 겁니다.”
말을 듣고 보니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그래도 500억이나 기부한 기부자로 이름을 알리는 건 더 위험한 거 아닌가? 원래 세계였다면 저런 뉴스가 나가면 이상한 놈들이 붙어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할 텐데…….
하긴, 무슨 상관이겠어. S급 헌터와 떨어져서 혼자 있는 시간은 없을 텐데. 치킨을 다 먹은 모준영이 재킷을 걸치며 말했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모시러 오겠습니다.”
잘 가라고 인사하니 다시 백은후와 단둘만 남았다. 아까부터 제게만 고정된 백은후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괜히 테이블도 치우고 씻고 오겠다고 욕실로 도망쳐 샤워하고 나와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샤워를 할 때 백은후도 씻고 나왔는지 그는 회색 가운을 걸친 차림이었다. 가운 사이로 설핏 보이는 근육이 살벌해서 주눅이 들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저는 먼저 자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방을 향해 발을 돌렸다. 백은후가 바짝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이쪽엔 방이 하나밖에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이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백은후는 제 뒤에 붙어 있었다.
“안 가십니까?”
“어딜?”
“……백은후 씨 방에요.”
“여기서 잘 거야.”
“네?”
성주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백은후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내가 아까 말했지. 은신술을 쓰는 헌터들이 있다고.”
“아아…….”
그렇다면 방 안에 있다고 안전이 보장된 건 아니었다. 누군가 몸을 숨기고 방까지 들어온다면 지켜줄 사람이 최대한 가까이 있는 게 나을 테니까. 근데 침대가 하나밖에 없는데……. 넓긴 하지만 한 침대에서 다 큰 남자 둘이서 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