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부
-서막
아주 커다란 뱀이었다. 비늘은 차가운 청록색이고 입에는 천옥([天玉]용의 구슬)을 물고 있었다.
내리는 빗속에서 처음 만난 터라 스승님은 그걸 ‘우사[雨蛇]’라고 불렀다.
우사는 낯을 많이 가리고 소극적이었다.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 많은 거였다.
어느 날인가, 스승님이 우사에게 글귀 몇 줄을 읽어 줬다. 내가 일찍이 뗀 책들이었다. 스승님은 우사가 먼저 청한 것도 아닌데 그를 기꺼이 제자로 들였다.
첫 번째 제자가 나였으니 우사가 내 사제가 된 셈이다. 내 나이 열두 살 때의 일이었다.
그 뒤 처음 몇 년 동안은 우사가 있는 늪지에 작은 학당을 세워 거기서 공부했다. 내가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그랬던 것 같다.
그 무렵의 나는 속에 늘 짜증이 가득했다. 우사를 미물이라고 욕하며 걔 때문에 이런 곳에서 공부해야 하는 처지를 한탄했다. 그때의 우사는 늘 음울했다.
음침한 늪지대와 음산한 분위기, 그리고 음울한 우사까지.
그 당시의 우사는 인간으로 잘 변하지 못해서 대부분 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고, 잘 쳐줘 봐야 정령으로 보이는 정도다.
뱀 정령.
나는 뱀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냥 그 애 자체가 꺼려졌다.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상처 주는 말만 하고 가끔은 돌을 던지며 구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돌이 끝내 생채기를 낸 건 우사가 아닌 내 손바닥이었다. 돌을 너무 꽉 쥔 탓에 난 상처였다.
내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무렵, 우사가 인간화에 완전히 성공했다. 완벽히 인간의 모습으로 변용한 우사는 내 예상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 외모에서 빛이 날 정도로 몹시 수려했다. 그래서 우사가 더 싫었었다. 내심 그 애가 추하고 못생겨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나는 단 한 번도 우사에게 사형답게 군 적이 없다. 미워하고 괴롭히며 못살게만 굴었었다.
그 마음의 근간에 무엇이 있었는진 내 약지만이 알았다. 그러나 그 약지 손가락은 우사의 마지막 유언에 의해 이미 잘렸으니, 나는 그저 두 눈을 감을 뿐이다.
차오른 눈물이 감겨진 눈꺼풀 아래로 흐른다.
이제 나는 이 세계에 이미 정해진 ‘서사’가 하나 있단 걸 안다. 제3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꼬여진 운명이 천명이 된 것을 ‘서사’라고 일컫는다.
내게 그 사실을 알려 준 이는, 내가 갇혀 있는 천옥[天獄] 바깥에서 한참을 망연히 서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울면서 빌었다. 이대로 끝낼 수 없다고, ‘회귀’를 시켜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그’가 내게 말해 줬었다.
내가 태어난 이 세계에는 이미 정해진 운명의 서사가 하나 있다고. 이대로 회귀해 돌아가 봐야 마찬가지일지 모른다고.
그의 입으로 들은 운명의 서사는 생각보다 간단하고도 처참했다. 우사의 과거를 불행으로 점철시키는 못된 사형의 역할, 내겐 그것 외엔 없었다.
실제로 내 삶은 그 서사가 내게 부여한 역할과 엇비슷하게 흘러갔다. 스승님이 천병으로 죽을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나와 우사는 스승님이 천병으로 죽은 뒤 각자 제 갈 길로 흩어졌다. 사형제의 연은 그때 완전히 끊어졌었다.
서로 간 접점이 없는 시간 속에서 우사는 천룡이 되었고, 나는… 죽고 싶었다. 시도 때도 없이 습관처럼 죽고 싶단 생각을 했지만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진 않았다. 아주 가끔 긴 천을 천장에 매달아 보기만 했다.
아마도 많이 우울했었나 보다.
그렇게 나는 지나온 삶을 후회하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내고만 있었다.
그런데 우사는 아니었다. 생을 후회와 미련으로만 채우는 나와 달랐다.
다시 재회했을 때의 우사는 그 누구보다 고귀해져 있었다. 어린 날의 음울하고 소극적이었던 우사는 없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 머리카락과 흑포를 두른 넓은 어깨. 그리고 청록색 눈동자. 여전히 수려한 외모는 빛바랜 기억 속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그래서 재회한 첫날엔 그 아름다움에 잠시 압도되었었다.
이어, 날 내려다보는 우사의 청록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좀 전보다 더한 충격에 짓눌려 숨도 쉬지 못했었다.
우사의 청록색 눈동자는 마치 그 늪지대 같았다. 음울하고 음산했으며 음침했다.
그래서였나 보다. 그때에 내가 우사에게 가졌던 모든 감정이 일시에 끌려 나왔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제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애초에 우사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재회였으니까. 옛적에 연이 끊어진 악질 사형을 다시 만나려 한 이유로 짐작되는 건 복수심뿐이었다.
그 첫 재회의 순간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양 뺨의 흥건한 눈물이 턱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천옥 바닥을 짚고 있는 왼손의 잘린 약지 부분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잘린 약지의 밑 부분엔 아직 반지 흔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우사가 이 손에 반지를 끼워 줬던 그때의 기억 역시 내 가슴에 잔흔처럼 남아 있다.
천옥에 갇힌 내 삶은 ‘우사’란 이름에 의해 끝맺어질 거다. 내가 죽어 마땅한 이유로 그 이름이 가장 먼저 꼽힐 테니까. 하지만 나는 정말 이게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옥으로 날 찾아온 ‘그’가 ‘배웅’이 아닌 ‘마중’이란 단어를 입에 담았었으니, 분명 내 삶은 ‘회귀’로 다시 시작될 거다.
……그럼으로써 나는, 이전의 것이 될 이 삶을 전부 ‘꿈’이라 치부하고 싶다.
실재하지 않았던 것을 꿈이라 하기에.
-01
드르륵- 탁!
겹문을 힘껏 열어젖히는 소리에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뒤이어 입가에 흐른 침이 느껴졌다.
“진연, 너, 게으름 그만 피우고 일어나거라.”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스승님의 목소리에 놀란 가슴이 차츰 진정된다. 손등으로 입가의 침을 문질러 닦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스승님은 그런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찬다.
나는 여전히 드러누운 채 몸만 옆으로 데굴 굴려 스승님을 올려 보았다. 올해 백 하고도 여든 살이지만 겉보기엔 20대 중반인 스승님은 ‘선인[仙人]’이다.
도를 통달해 천기를 꿰뚫어 보는 사람을 선인이라고 하는데, 나는 스승님이 ‘외선’이라고 생각한다. ‘바깥’의 것을 감싸는 데 도통하니 내 나름 생각해 둔 스승님의 별칭이었다.
이 세계에서 ‘바깥’이란 귀신, 요괴, 정령을 통틀어 칭하는 말이다. 스승님의 존명은 ‘오연’이고 곤륜산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우횡산에서 은거 중이시다.
나는 아이였을 때부터 스승님 슬하에서 자랐다. 한때는 스승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도 있었지만, 스승님은 끝까지 나와 부자의 연을 맺지 않았다.
대신 사제지연을 맺고 날 수석 제자로 두었다. 그래 봐야 스승님 문하에 제자가 나까지 포함해 단둘이지만 말이다.
“저 예지몽 꾼 것 같아요.”
옆으로 누운 채 멍하니 말했다. 스승님은 그런 내 이마를 쥘부채로 때렸다. 찰싹! 소리만 요란하지 하나도 안 아프다.
내가 실실 웃자, 스승님이 천하에 다시없을 게으름뱅이 보듯 날 본다.
그 한심한 시선에 못 이겨 비척대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해도 안 떴잖아요.”
내 힘없는 반항에 스승님이 혀를 찬다.
“그럼 해 뜬 뒤에 일어나랴?”
그럼 해 뜬 뒤에 일어나지, 해가 졌을 땐 잠을 자고. 그게 이치에 맞는 거 아닌가.
속으로 툴툴대며 입만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괜히 대들어 봐야 본전도 못 찾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엉금엉금 기어 겹문을 넘었다. 폭이 짧은 복도 너머에 장지문이 있었다.
스승님은 어딜 다니든 꼬리를 남기는 법이 없는지라 장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문틈으로 서늘한 새벽 공기가 스며들었다. 장지문의 얇은 창에 어슴푸레한 빛이 비쳤다.
장지문까지 엉금엉금 기어가는데 뒤에서 스승님이 내 엉덩이를 걷어찬다. 발끝으로만 툭툭 걷어차는 걸 무시하며 꿋꿋이 기어가 문을 열었다.
“징한 놈.”
뒤에서 못마땅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장지문 너머로 나갔다. 그 바깥의 마루 끝까지 기어가선, 그 아래로 두 다리를 내렸다. 마루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엉덩이가 시려 두 손을 깔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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