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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2화 (2/141)

<2화>

“하아-.”

숨을 내쉬어 봤다. ‘숨결에 서리가 이며 희게 만개하다’. 스승님이 쓴 시에서 본 구절이었다.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별거 아니다. 그냥 입김을 운치 있게 묘사한 것뿐이다.

가볍게 내쉬는 입김조차 스승님 눈에는 특별해 보이나 보다. 그러니 그런 미물에게도 마음을 주고 있는 거겠지.

사실, 나도, 스승님도 이 우횡산에 이렇게까지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없는데 스승님은 도중에 마음을 바꿨다. 우횡산의 뱀, 우사 때문이다.

그 우사 놈을 떠올리니 간밤에 꾼 꿈이 다시 생각났다.

“스승님, 저 꿈 꿨다니까요?”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신발에 발을 꿰며 말했다. 아직 졸음이 남아 있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여상했다. 잠에서 깬 순간부터 빠르게 흐려진 꿈의 여운이 이젠 그 잔상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충격과 공포는 어느새 가시고 잠기운만이 몸에 남아 있었다.

“예지몽 같았…… 아니, 예지몽… 예지몽이었어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자 긍정한 뒤, 고개를 뒤로 젖혀 스승님을 올려다보았다. 내 등 뒤에 서 있는 스승님은 그야말로 오연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찬 기운이 서린 바람이 스승님의 긴 소맷자락과 새하얀 옷 끝단을 흔든다. 그 풍모가 속세를 아득히 벗어난 신선 같았다.

“예지몽? 또 무슨 개꿈이겠지. 신경 쓸 거 없다.”

작은 코웃음과 함께 스승님이 말했다. ‘개꿈’이란 단어로 대화를 일축한 스승님은 부채로 내 이마를 한 번 더 때렸다.

“일어났으면 몸가짐을 단정히 하거라. 또 머리 삐쳐서 오지 말고.”

그 말만 남기고 곁을 쌩하니 지나치는 스승님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못 박혀 있었다. 굳이 그 시선 끝을 쫓지 않아도 이젠 그 끝에 뭐가 있는지 충분히 안다.

우횡산 뱀이겠지. 그 미물을 안 이후로 스승님은 늘 정신이 어디 가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그냥 커다란 뱀이잖아.

애초에 그걸 내가 발견하는 게 아니었다.

우사를 처음 발견한 건 나였다. 덩치만 큰 게 빌빌거리고 있기에 산삼 한 뿌리를 가져다줬었다. 스승님이 광에 두고 아끼고 있던 천년 묵은 산삼이었다.

산삼의 행방을 찾는 스승님에게 있어 난 유일무이한 용의자였고, 아주 쉽게 탈탈 털렸다. 나는 모든 걸 고백했다. 그 모든 것엔 당연히 우사의 존재도 있었다.

여하튼 그게 우리의 첫 만남 비화였다. 결국 내가 내 무덤을 판 거였지.

“나 먼저 가 있으마.”

벌써 저만치 걸어간 스승님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어딜 간다는 건진 굳이 안 물어봐도 된다. 이 꼭두새벽에 스승님이 갈 곳이야 어차피 뻔하다. 또 우사겠지.

“아… 무슨 새벽부터…….”

낮게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속에서 우글거리는 짜증에 두 발을 동동거리다가 순간 멈칫했다. 간밤에 꾼 꿈이 또 떠오른 탓이다.

“…예지몽 맞는데.”

그런 범상치 않은 꿈이 일반 개꿈일 리가 없다. 스승님은 콧방귀만 뀌어 댔지만 그건 꿈을 꾼 당사자가 아니어서 그렇다.

당사자인 난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이건 기묘한 확신에 가까웠다.

그 꿈은 그야말로 ‘예정된 운명’을 길게 나열한 것과 같았으니까.

꿈에서 본 운명은 내가 먼 훗날 우사에게 죽는다고 알려 주었다.

벌어질 일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이제껏 내가 우사에게 쌓아 온 업을 보면 딱히 이상하지도 않은 결말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과도 크게 다르지도 않다. 더 의심할 거리도 없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나는 분명 내가 꾼 그 꿈대로 살아가고 같은 결말을 맞이할 거다.

그러니 이건 분명, …예지몽이다.

그렇게 단정 지은 나는 꿈속의 내용을 좀 더 세밀하게 되짚어 보았다.

스승님은 내가 죽기 한참 이전에 천병으로 먼저 돌아가신다.

꿈속의 스승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우사만 따로 방으로 불렀다. 단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진 모른다.

내가 들어갔을 땐 이미 돌아가신 후였고, 결국 스승님의 임종을 지킨 건 내가 아닌 우사였다. 스승님은 침상 위에서 고요히 영면에 들어 있었다. 더없이 평온한 모습이었다.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스승님의 곁을 지켰다. 그때 우사가 내게 먼저 다가와 말했었다.

무표정한 낯빛에 무감한 눈으로 아주 담백하게,

‘진연.’

내 이름을 불렀다. 우사가 내 이름을 부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때까지 그는 나를 ‘사형’이라고만 불렀다. 물론 그것도 극초반 때뿐이고, 내 괴롭힘이 길어지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부득이하게 내게 말을 걸어야 할 때에는 지그시 바라보거나, 아니면 ‘어…’ 또는 ‘음…’ 하고 침음만 흘렸다.

‘이제 당신은 내 사형이 아니야.’

나와 먼저 절연한 건 우사였다. 그러고는 몇 년 뒤에야 날 제 곁으로 납치해 와 죽이려 들었다. 아마 절연할 당시부터 날 죽이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때가 아니라 생각해서 잠시 물러났었던 거지.

그래, 그게 확실하다.

뒤로 드러누우며 양팔을 대[大]자로 벌렸다. 마루에 배인 한기가 몸에 스민다. 이제 겨울의 초입인데 그 뱀 놈은 왜 동면을 안 하는 거지? 영물이라서 그런가.

내가 볼 때는 미물인데 스승님은 첫눈에 그놈이 영물이라고 했다.

언제나 그렇듯 스승님의 안목은 딱 절반만 맞았다.

꿈에 본 바에 따르면, 우사는 영물은 영물인데, 근본적으로는 그보다 한 단계 위인 신수였다. 본래는 하늘에 속한 이였고 어쩌다 늪지대로 떨어져 빌빌대고 있지만, 후에는 천룡이 될 존재였다. 그야말로 주인공 같은 운명이다.

예지몽의 주인은 나인데, 그 안에서 나는 고작해야 스쳐 가는 조연급이고 모든 이야기의 궤는 우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래, 주인공. 내가 꾼 게 정말 예지몽이 맞다면 이 세계엔 이미 정해진 일종의 서사가 하나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주인공과 조연으로 갈리는 이야기 서사 말이다.

주인공인 ‘사제’와 그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질 조연 ‘사형’이라.

무슨 삼류 무협 소설 속 인물들 같다. 분명 킬링타임용도 되지 못할 그 소설은 ‘비룡전’과 같은 제목이나 달고 있을 거다.

‘비룡전’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괴롭힌 사형을 죽이고 후에 천하를 통일한 제일인이 되니까.

‘비룡전’의 악질 사형과 다를 바 없이 나도 우사와 재회하자마자 그에 의해 죽었다. 그게 예지몽의 끝이었다.

내가 죽은 뒤 우사는 분명 앞길 창창한 일생을 보냈을 테고.

“…….”

그나저나 ‘킬링타임’이라니. 이 세계에선 들어 본 적도 없는 말인데 예지몽을 꾼 직후부터 자연스럽게 내 안에 자리 잡았다.

그 단어를 운용하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내 태초의 근본과 맞닿아 있는 듯한 친숙한 느낌이다.

의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단어들이 떠오를 때면 혼에 남아 있는 잔흔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잔흔은 말 그대로 무의식 안에 남아 있는 잔재일 뿐이었다. 본능적으로도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져서, 상세히 알아볼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냥 당연하게만 느껴진다.

아무튼, 내가 꾼 꿈과 내 주관을 통틀어서 따져 보자면 내 세계의 주인공은 두말할 필요 없이 우사다. 세상 자체가 우사를 편애하니 말이다.

예지몽으로 추정되는 꿈에서 우사는 홀로 빛났다. 모든 기연과 서사는 우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전부가 주인공인 우사에게 몰빵되어 있었던 거다.

다른 것들은 전부 우사를 떠받치기 위해 존재하는 미물이었다. 결국 여타의 조연들은 자연히 우사의 발밑에 있는 셈이 되는 거고, 예지몽의 주인인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우사의 불우한 어린 시절의 상징일 뿐이었다.

즉, 나, 진연은 일명 ‘악역 엑스트라급 조연’인 셈이다.

우사의 과거를 불행으로 점철시킨 못된 사형 역할을 맡은, 그의 과거를 불행으로 점철시키기 위해 존재하다 그의 손에 의해 죽임을 맞게 되는 인물.

이게 정말 예지몽이 맞다면, 내가 이 예지몽을 꾸게 된 이유가 뭘까. 한 번 운명을 바꿔 보라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바꾸고 싶은 운명은…….

심상이 복잡해진다. ‘이거, 이거다!’라고 바로 뚜렷하게 말할 수가 없다. 당연히 내 자신의 죽음을 피하는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이 목 언저리에 걸려 가슴이 답답해진다.

“……죽음을 피하는 것보단,”

‘내가 원하는 방향의 죽음을 맞고 싶다.’

불현듯 치민 뒷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어쨌든 그 예지몽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예지몽까지 꿨는데 그대로 답습해서 사는 것도 어리석고. 이 정도면 정해진 대로 살지 말라고 떠먹여 주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설령 이 세계에 정말 주인공이 따로 정해져 있고, 그 주인공을 위한 서사가 필요하다 해도 나는 ‘악역 엑스트라’나 ‘악질 조연’으로 살지 않을 거다.

…나는 썩 괜찮은 사람이고 싶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도 싫고, 후회와 미련만 쌓는 것도 싫다.

가장 싫은 건, ‘그런’ 사형이 되는 거다. 그리고 ‘그런’ 사형으로 끝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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