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그래. 자신이 지은 죄로부터 도망칠 요량이었는지 어떤지 몰라도, 결국은 그 생강시들과 함께 이 아래에서 합장됐어.”
“생강시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빙옥의 그 시체들을? 하지만 왜? 어째서? 형님에겐 그럴 이유가 없는데…….”
빙옥 아래에 시체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남소위가 그걸 강령술에 사용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 시체들이 생강시가 되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걸 보면 말이다.
남여연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끝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애초에 형님은 그렇게 죽을……, 난… 죽기까지 바란 건 아니었어! 네 말을,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저 자식이 죽인 거 아니야?! 형님이 이대로 자신의 목숨을 끊을 리가, 나는, 내게 형님은……!”
“네가 아는 모습이 남소위의 전부였다면, 네가 예상치 못했던 모습으로 가진 않았겠지.”
“…….”
남여연은 입만 뻐금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날 노려보는 눈매가 이지러졌다.
“넌 남소위가 마지막에 이런 유언을 남길 거라고 짐작하긴 했어?”
“……사해필성.”
이제 남여연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뭔가 지레짐작 되는 게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그에 대한 확신은 없는지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남여연의 무릎 위에 남소위의 유품인 목걸이를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사형.”
우사가 그런 나를 부르며 내 오른손을 가져갔다. 방금까지 남여연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이다. 제 소맷자락을 찢어 내 손바닥을 닦았다.
“상처에 균이 들어갈 수 있어요.”
마침 벽을 쳤던 손이라서 손등에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우사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는데 남여연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해필성. 형님이 강령술을 한다는 곳도 사해필성이었는데……. …사해필성, 사해필성으로 가자! 지금 당장! 형님이 왜 그랬는지 반드시 알아야겠어.”
남여연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같이 갈 거지?”
나와 우사를 보며 남여연이 물었다.
확신이 없는 목소리에 반해 우리를 보는 눈빛은 강경했다. 어떻게든 우리와 함께 가겠다는 게 보였다.
나와 우사가 바로 대답이 없자 남여연은 아랫입술을 한 번 짓씹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오연의 혼 일부가 쓰인 이상, 다른 자들이 갖고 있는 나머지 조각에도 반응이 왔을 거야. 나와 가든 안 가든 너희는 이미 이 일에 관련된 거라고! 적어도 지금 나와 같이 가면,”
“네가 갖고 있는 오연의 혼을 준다면 같이 가줄게.”
남여연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말했다. 어떡할 거냐는 뜻으로 턱 끝을 살짝 치켜들었다.
“……좋아.”
남여연이 소매에서 목걸이를 꺼내 내게 던졌다. 허공에서 선뜻 낚아채 손에 쥐었다. 지하 감옥에서 남여연이 마지막에 보여 줬던, 아마도 진짜일 ‘오연의 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남소위가 갔어야 할 곳이 사해필성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나머지 오연의 혼을 가진 자들도 그곳을 가장 먼저 짚을 테니 알아서들 몰려들면 길이 엇갈리진 않겠네.”
나직이 말을 이으며 오연의 혼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꽉 쥔 주먹 안에서 검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번지더니, 둔중한 파공음이 웅- 하고 울렸다.
이어서 주변 공기가 요동치며 작은 돌풍이 일었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세차게 흔드는 바람은 곧 멎었다.
이건 진짜 오연의 혼이 맞았다.
오연의 혼이 우리와 공명한다고 하지만 나는 부수기 전까지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확신이 들었다.
주먹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펼쳤다. 손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혼까지 파괴되어 소멸한 거다.
텅 빈 손을 내려 보며 속으로 뇌까렸다.
‘내가 없앴어.’
문득 빙옥에서의 참극이 떠올랐다.
빙옥에서도 나는 생강시들을 베고 또 베었다. 그 참극을 베었고, 방금은 그 참극을 만들어 낸 오연을 손안에서 부쉈다.
나는 남소위와 다르다.
내가 쥐여 준 검을 잡고 있던 남소위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나는 그와 달라.
뇌리 한편에서 사학당의 비극을 되새기며, 더는 오연과 관련된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뇌까렸다.
그러기 위해선 오연의 혼을 전부 찾아내 남김없이 멸해야 한다. 그래야만 답답한 숨이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 같다.
‘네 검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냐?’
……그러고 나면 이 환청도 더는 들리지 않겠지.
“백아, 그럼 우린 사해필성에서 그들을 기다리자.”
텅 빈 손에서 우사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입꼬리 끝만 올려 지은 내 미소에 우사의 눈이 약간 커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눈매가 갸름하게 접히며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다정한 화답이었다.
“네, 사형.”
-03
사해필성은 남해 바깥의 수림에 있는 작은 도성이다.
남해와 사천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징검다리처럼 둘 사이를 수교하는 역할로 존재했다. 그래서 외지인의 출입이 많고 번화해 있었다.
현재 그곳의 성주는 ‘정소양’이다.
‘정소양’은 사해필성 내 ‘정씨 세가’의 인물로, 그가 사해필성의 성주가 된 데엔 그의 성 씨 덕이 컸다.
정씨 세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해필성에 터를 잡고 성의 부흥을 함께 했다. 도성 내 백성들에게 인망도 두터워서 어느 순간부터 대대로 성주 위를 세습하기 시작했다.
최근 백 년 사이에 정씨 세가는 각지의 무인들과 도인들을 스스로 받아들여 ‘현교당’을 세우고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다. 안팎으로 한층 입지가 넓어지니 그야말로 사해필성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남여연은 아주 어릴 적에 그곳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고는 없다고 했다.
“……형님을 진짜로 처음 만난 건 사해필성에서였어. 언제부터인가 형님이 사해필성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해서. …우연히. 아니, 그 우연도 형님의 안배였겠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남여연이 말했다. 앞뒤 두서없는 읊조림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덜컹- 덜컹-
울퉁불퉁한 산길을 달리는 마차가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덜컹거린다. 말 두 마리가 이끄는 사륜마차였다. 마부석에는 소매치기가 앉았다.
남해검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선 뒷길로 돌아가야 하는데, 소매치기가 근방 지리를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마차를 빌릴 수 있었던 것도 소매치기의 덕이 컸다. 유일하게 쌈짓돈이 있었던 게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소매치기의 이름은 ‘유계’다.
유계가 우리와 동행하게 된 데엔 그 본인의 고집이 가장 컸다. 그 고집을 받아 준 건 남여연이었고.
무너진 빙옥 위에서 사해필성으로 떠나려 할 때, 유계가 느닷없이 무릎을 꿇었다. 소매치기하려 했던 것에 대한 벌을 자처하며 속죄하고 싶다고 말했다.
‘순간의 욕심에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 잘못을 속죄하지 못한다면 제 평생에 얼룩으로 남을 겁니다.’
몹시 진중한 어투였다.
괜찮다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머리를 깊이 숙여 땅에 이마를 댔다. 그 고집에 넘어가 준 게 제3자인 남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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