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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36화 (36/141)

<36화>

멱리는 비싸서 인원에 맞춰 살 순 없단 유계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멱리는 애초에 안 되는 거였네.

남여연이 가면을 쥔 손을 흔들며 어서 가져가라고 재촉한다.

어디 보자……. 하나는 심술궂게 생긴 귀신 가면이고, 다른 하나는 코가 삐뚤어지게 취한 노인 가면이다.

하나같이 선택지가 뭐 이래?

취향의 문제인가 싶었지만 둘이 쓰고 있는 가면은 비교적 정상적이다.

남여연은 갯과 동물 가면이고, 유계는 토끼 가면을 썼다. 뭐, 개나 토끼 가면도 딱히 끌리는 건 아니지만…….

뭐, 좋아. 어쨌든 이 중에서 하나는 고르란 거지?

“…백아, 너는 뭐로 하고 싶어?”

가면 두 개를 두고 고심하다가 우선 백아에게 선택지를 주기로 했다. 사형으로서 나름 인심을 베푼 셈이다.

오십보백보 같아 보여도, 잘 보면 둘 중 더 나은 게 있을 거다.

어디 보자……. 으음, 코가 삐뚤어지게 취한 노인 가면이 더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으음…….

백아가 옆으로 더 가까이 다가와선 내 손에 들린 가면을 들여다보았다. 백아도 나름 신중해진 눈치였다. 이렇게 내 쪽으로 더더욱 몸을 바짝 붙이는 걸 보면 말이다. 서로 간에 틈이 없을 정도다.

백아와 나란히 서서 가면을 살피다가, 슬쩍 시선을 들어 백아의 옆얼굴을 힐끔 보았다. 백아가 어느 가면에 더 관심이 있는지 살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곁눈질하기 무섭게 눈이 딱 마주쳤다. 백아의 눈매가 반달로 접히며 눈웃음 짓는다.

그 눈웃음에 순간 멍해졌다.

미소 짓고 있는 백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심장 어느 부분이 꽉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느낌은 금방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가 가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어때?”

술에 취한 노인 가면을 잡고 있는 손을 들며 말했다.

“좋아요.”

백아가 내 쪽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가면을 씌워 주기 쉽게 자진해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 순간 묘한 기시감을 받았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때는…….

어느새 나는 다른 가면을 쥔 손을 좀 더 올리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인 귀신 가면이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백아의 얼굴에 그 귀신 가면을 씌워 줬다. 그 순간 머릿속이 어질거리더니 또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빗자루 기억’, ‘추락 기억’과 달리 이번엔 노이즈가 끼지 않은 선명한 기억이었다.

기억 속, 묵색 장포를 두른 남자가 내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기운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는 그의 얼굴에 막 귀신 가면을 씌운 참이다.

가면이 그의 얼굴을 가린 상태였지만, 나는 이미 그를 잘 알고 있다. 내 손이 가면의 무늬와 윤곽을 덧그리듯 매만진다. 가면에 나 있는 눈구멍으로 손끝이 스쳤다. 그 너머로 보이는 녹색 눈에는 즐거운 기색이 서려 있다.

문득 시선을 돌려 남자의 넓은 어깨 너머를 보았다. 어지럽게 걸린 붉은 등과 바람에 날리는 휘장, 그 위로 펼쳐진 밤하늘의 별빛이 아름답다.

야시장이었다.

‘형.’

남자가 나를 부른 순간, 그가 누구인지 분명해졌다. 그는 어른이 된 우사다.

가면을 씌운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치며 우사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반가면이어서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매와 매끄러운 턱선이 고스란히 보였다.

우사가 나직이 입을 열어 말했다.

‘세 번 절을 올리자. 천지께 한 번,’

그 순간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이 새까맣게 꺼지며 그 아래로 떨어졌다.

우사의 손과 겹쳤었던 내 손의 약지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부모에게 한 번,’

끝없이 추락하며 우사를 올려다봤다. 어느새 그 위는 절벽으로 변해 있었다. 벼랑에 선 우사가 나를 잠시 돌아봤다가 그대로 가 버린다.

‘서로에게 한 번.’

떨어지면서 내 손에 무언가 쥐어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천옥([天玉]용의 구슬). 우사의 천옥이다.

‘이제 우리는 부부야, 형.’

부드러운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서려 있다.

나는 손안의 천옥[天玉]을 보고, 또 보았다. 천옥을 쥐고 있는 내 손이 온통 붉다. 마치 누군가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피에 젖어 있다.

내 손을 뒤덮은 피가 천옥에 묻어나는 걸 망연히 보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충격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숨이 잘……,

“…허억-!”

깊이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을 번쩍 떴다. 두 눈에 맺힌 눈물이 핑 돌았다. 처음엔 흐렸던 시야가 점차 초점이 돌아오며 또렷해졌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누워 있는 침상은 내가 흘린 땀으로 축축했다.

“……하아…….”

깊은 탈력감을 느끼며 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꿈이구나.

멍한 머릿속은 금세 온갖 상념으로 난도질되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보다, 방금 그게 꿈이란 사실이 더 중요하고 날카롭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백아에게 술에 취한 노인 가면이 아닌 귀신 가면을 씌워 준 시점에서 기절했었나 보다.

그래서 그런 꿈을 꾼 거고. ……내 잊혀진 기억일지도 모르는 환영이 뒤죽박죽 섞인 꿈을.

두 손을 들어 앞뒤로 확인했다. 피도 안 묻었고, 반지도 없다.

…우사의 천옥[天玉]도 없고.

이전과 다르게 또렷한 상념이 여전히 잔기운을 남겼다. 방금 그 기억들이 진짜라면, 그 천옥은…….

“……게다가 부부의 연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그게 정말 있었던, 잊혀진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든다.

나는 그 생각을 내리누르려 애썼다.

그래, 애초에 우사는 내게 원한이 있던 상태였잖아. 그런데 왜 나와 혼인을…….

그냥 개꿈… 아닐까?

“…….”

부정은 회피로 이어지다가 끝내 쓴웃음으로 맺어졌다.

부정해 봤자, 사실 나도 이미 알고 있다.

그 가정은 진작 힘을 잃은 상태란 걸 말이다. 언제까지고 스스로 눈 가리고 아웅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이미 한번 예지몽의 형태로 회귀 전을 떠올리기도 한 상태다. 그러니 ‘꿈’을 아무런 의심 없이 꿈으로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런 마당에 ‘사랑’과 연관된 꿈이라니…….

좋지 않다.

자고로 꿈이란 무의식의 발현이니까. 그러니 회귀해서 단애약수를 마신 내가 ‘혼인’이란 주제가 나온 꿈을 꿀 수 있을 리 없다. ‘혼인’과 밀접한 감정을 단애약수를 통해 전부 잊었으니까.

이 정도로까지 도망칠 퇴로가 없다면 계속 개꿈이라고 우기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벌떡 상체를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우스운데, 꿈의 내용이 전혀 웃기지 않아서 말이지.

“아니, …그래도 말이 안 되잖아.”

힘없이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헛된 항변인 걸 알지만, 그래도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의 기억이라면, 내가 왜 부부의 연을 맺은 우사의 천옥을 갖고 있었느냔 말이다. 그것도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

이어지는 상념은 불길하기만 하다. 차마 그 상념을 구체화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안 되겠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잊은 ‘회귀 전의 기억’이 뭔지 반드시 알아야겠다. 그 기억을 좇다 보면 회귀한 이유도 알 수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드문드문 떠오른 기억 조각들이 너무도 찜찜했다. 이 꺼림칙함을 그냥 넘길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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