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기억을 되찾는 방법은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다. 오연의 혼을 파괴해 소멸시키는 것.
이제까지 기억이 떠오른 상황을 생각해 보면 전부 오연의 혼 조각들을 없앤 후였다. 그러니 오연의 혼을 전부 없애 버리면 내 기억도 완전해질 가능성이 컸다.
설령 이 추측이 틀렸다 해도 상관없다.
나는 내 삶에서 오연을 뿌리째 들어내 없앨 거다. 시선을 내리깔아 내 두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손으로 직접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정말 내 추측이 맞다면…….”
대체 잊혀진 기억과 오연의 혼이 무슨 연관이 있기에…….
오연의 혼을 소멸시켜야만 되찾을 수 있는 기억이라니.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오연의 혼을 소멸시키는 게 필연이자 나의 업 같다.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에 손끝을 오므려 꽉 주먹 쥐었다.
깊어지려는 상념을 애써 잘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아래로 내려갔다. 주변을 살펴보니 전체적으로 고즈넉한 분위기가 흐르는 넓은 방이다.
적재적소에 놓인 가구들을 한 차례 훑어본 뒤 내가 일어난 침상을 돌아봤다. 침상 근처에 놓인 의자에 잠시 시선을 뒀다가, 그 옆의 탁자에 놓인 대야와 수건을 봤다. 누군가가 간호해 준 흔적이었다.
백아인가?
당연하단 듯 백아를 떠올렸다가, 곧바로 그런 스스로의 생각에 놀라 흠칫했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백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우리는 서로를 위하는 사형제지간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회귀한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저 흔적의 주인으로 짚이는 건 백아뿐이다.
우리 사이가 정말 많이 바뀌었단 거겠지.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을 일별하며 미묘한 감상에 휩싸였다. 코끝으로 가벼운 숨을 내쉬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가 금세 지웠다.
침상가의 낮은 단 두 개를 내려가, 길게 쳐 놓은 가림막을 돌았다. 고아한 무늬가 수놓아진 넓은 가림막 너머엔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양탄자의 섬세한 무늬며 곳곳의 장신구들까지, 전부 고급은 아니지만 준수한 편이었다.
한 손을 뒷짐 진 채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적막한 공간은 공기마저 가라앉아 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어디 갔지? 백아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던 문제가 떠올랐다. 바로 돈 문제다.
멱리도 넉넉하게 사지 못할 만큼 수중에 여윳돈이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이 정도 수준의 객실을 빌린 거지?
드륵-.
때마침 등 뒤로 겹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막 방 안으로 들어온 이가 내게 달려왔다.
“사형!”
백아였다.
스스럼없이 날 끌어안는 백아를 보았다.
“사형.”
침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연신 나를 불렀다. 나를 찾는 그 어조는 평소보다 높고 격앙되어 있었다. 그래서 백아가 느꼈을 감정, 가령 침통함이라던가, 애틋함 그런 것들이 더욱 크게 와닿았다.
“몸은 어때요? 괜찮아요?”
“아……. 응.”
나직이 대답하며 뒷짐 지고 있던 손을 풀었다.
“괜찮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백아를 밀어내며 말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 의식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다 그 꿈…, 잊혀진 기억으로 추정되는 그 꿈 때문이다.
우리가 부부라는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맴돈다.
대체 어쩌다가…. 부부라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천옥을 쥐고 있던 손에 묻은 피가 아른거린다.
정말, 정말 우리가 부부였다면…, 나는 부부의 연을 맺은 우사를 해친 걸까.
……역시 회귀 전의 나는 우사에게 폐만 끼치는 폐물이었다. 사제보다 잘하는 것도 없고, 사형답지 못하고, 삿된 감정이나 품은 찌질한 루저.
‘연아, 정진하거라.’
다시 떠오르는 오연의 말에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다.
밀려난 백아가 조금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다. 맞닿는 시선에 쓰게 웃었다.
“난 정말 괜찮아.”
“…….”
백아는 말없이 날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여긴 어디야?”
“사해필성 내의 여관이에요.”
들으나 마나 한 대답이었다. 어딜 봐도 여관 객실이었으니까.
그리고 내 질문의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 기절해 있는 동안 무슨 일 없었냐고 묻고 싶었는데……. 머릿속을 가득 채운 그 기억에 어떤 식으로 말문을 열어야 할지 주저되었다.
“……넓고 좋은 방이네. 그런데 좀 비쌀 것 같은데…….”
백아의 눈치를 힐끔 보며 어색하게 꺼낸 말은 주변 분위기를 더욱 가라앉혔다. 백아의 낯빛이 먹구름이 낀 것처럼 침울해진다.
“……사형, 거리에서 제게 가면을 씌워 주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신 거… 알아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백아가 말했다. 백아의 살짝 내리깐 긴 눈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지만, 궁금증 하나는 해소되었다.
역시 그때 기절했구나.
이제 내가 여기 있게 된 일의 정황은 알겠다.
현재 상황을 속으로 침착하게 정리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사형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백아가 내게 말했다.
어느새 내리깔았던 시선을 바로 해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 알 수 없는 울분에 찬 눈은 묘하게 화난 것 같기도 하면서,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사형.”
입을 꾹 다물었다가 떼며 백아가 나를 불렀다.
“만약 지금 제가 묻는다면,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주실 수 있나요?”
지극히 조심스런 물음이었다.
뭐를 물어볼 건지 말하진 않았지만, 이제까지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맥락과 흐름만으로도 대충 짐작이 간다.
갑자기 기절했으면서도 왜 그렇게 태연하냐는 거겠지.
“제가 보기에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닌데…, 사형은 아무렇지 않고 태연자약하니,”
“…….”
“…왜 서로가 이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지, 백아에게 답을 주세요. 사형.”
정말 드물게 3인칭 어법까지 쓰며 백아가 내게 간청했다. 그만큼 간절해 보였다.
내가 말하지 않고 숨기는 게 뭔지 알려 달라는 백아의 눈에 고집이 서린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본인이 어떻게든 직접 알아낼 기세다.
“…….”
나는 말없이 침묵했다.
잊혀진 기억이니, 꿈이니 그런 것들에 대해 백아에게 만큼은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잊혀진 기억과 꿈은 회귀 전의 나와 얽혀 있기 때문에 하나만 꺼내도 감자처럼 줄줄이 엮어 나오게 된다. 게다가 바로 직전에 알게 된 기억이 그와 혼인… 을 했다는 것이니 더더욱 말할 수 없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