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47화 (47/141)

<47화>

나는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바로 우사와 거리를 벌렸다. 그와 동시에 전각 위에 서 있던 소년이 휙 몸을 돌리며 사라졌다.

…대체 뭐지?

설마 이렇게 그냥 가 버릴 줄은 몰랐다.

우사는 그런 소년의 자취를 눈으로 좇을 뿐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흥미가 가신 낯이었다.

소년이 사라지자 우사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형은 정말 운이 좋아. 좋은 동생을 두 명이나 뒀잖아.”

우사의 수려한 얼굴에 걸린 미소가 묘하게 가볍다.

“…좋은 동생 둘?”

어이없어하는 내 되물음에 우사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다.

“형한테 순종하는 동생과, 형을 돕는 동생.”

손가락으로 본인과 아까 소년이 서 있었던 곳을 번갈아 가리키며 우사가 말했다.

그러니까, 전자의 ‘형한테 순종하는 동생’은 자신을 뜻하는 거고, ‘형을 돕는 동생’은 그 의문의 소년을 뜻하는 거였다.

순종? 기가 찬다. 따지자면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다.

지금까지 우사의 어디에 순종이 있었느냐는 차치하고, 일단 가장 신경 쓰이는 것부터 물었다.

“아까 말한 ‘이미 졌다’는 건 무슨 뜻이야?”

“‘순종’의 또 다른 이름은 ‘순응’, ‘복종’이니 나는 형한테-,”

“나한테 지는 동생이라고?”

“이기고 지고로 나눌 생각은 없어. 난 형이랑 싸우자는 게 아니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는 동생’이 아니라, ‘받드는 동생’이라는 거야.”

우사의 말을 듣는 와중에도 속에선 갖은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미 ‘지는 동생’란 말이 머리에 박혀 다른 말은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네가 나한테 지는 동생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재차 말했다. 혼잣말에 가까운 뇌까림이었다.

우사가 나한테 지는 동생이라니. 그 정반대겠지.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우사를 이긴 적 없다. 그 어떤 걸로도 앞서지 못했다. 우사는 늘 나를 능가하고 내가 쫓을 수도 없을 정도로 멀리 나아갔다. 나는 그 그림자조차 밟을 수 없었다.

나야말로 늘 무능한, …‘지는 사형’이었다.

그런 나한테 ‘이미 졌다’고 말해 봐야, 나는 한 번도 사형다운 사형이었던 적이 없고, 좋은 사형이었던 적도 없다.

나도 내 자신이 이렇게 보이는데, 네 눈에 별다르게 보일 리가. 그런데 ‘이미 졌다’고?

헛소리!

내가 반박하려는 찰나,

“내가 그런 동생이 되고 싶은 건, 형이 내게 좋은 사람이어서야.”

우사가 먼저 말했다. 나는 섣불리 뗐던 입을 망연히 벌렸다.

쟤가 지금 뭐라는 거지? 나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혹시 비꼬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천룡으로 승천하면서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너, 천룡 되면서 머리가 이상해진 거…….”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니냐고 물으려는데 우사가 갑자기 내 쪽으로 비스듬히 허리를 숙인다. 가까워진 거리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바라보고 있으니, 우사가 눈매를 갸름하게 접으며 눈웃음 짓는다.

“그럴 리가. 난 전부 제대로 알고 있어. 뭐, 형이 내 간식을 지저분하게 흐트러트리고, 일부러 차를 쓰게 우리고… 심지어 저번엔 덜 익은 돼지고기를 주기도 했지만.”

이어지는 우사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그냥… 고도의 비꼬기인 건가?

그나저나 생각지도 못했던 걸 알았다. 바로 돼지고기가 덜 익혀졌단 걸 말이다.

“…그 돼지고기, 덜 익은 거였어?”

간식이랑 차는 일부러 지저분하게 망치고 쓰게 우린 거였다. 하지만 돼지고기를 덜 익힐 생각은 없었다.

덜 익은 돼지고기를 먹으면 몸에도 안 좋고, 배앓이를 하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최대한 바싹 구웠다. 열과 성을 다해서 정말 열심히 구웠는데, 아무래도 겉만 타고 속은 안 익었나 보다.

“바보같이. 덜 익은 돼지고기를 왜 먹은 거야?”

내 말에 우사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린다. 내 물음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저 순순한 호응이었다. 우사의 입술 위로 엷은 미소가 그려진다. 호선으로 휘어진 입매가 유하다.

“…뭐야. 뭐가 좋다고 웃는 거야?”

우사가 이해되지 않아서 미간을 찡그렸다. 날 직시하는 눈에 이채가 떠오른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난다, 형.”

이윽고 우사가 말했다. 동문서답이었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옛날 일이라 봐야 내가 우사를 괴롭혔던 과거들뿐이다.

긴장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우사는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며 두 손을 뒷짐 진 채 나를 바라봤다.

“예전에 말이야-,”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며 싱긋 웃는 얼굴 위로 얕게 그늘이 드리워진다.

“가끔 나한테 돌을 던졌잖아. 그런데 매번 돌을 던지기 전에 꼭 먼저 손안에서 여러 번 던졌다 받아 보고. 그게 형 나름의 무게를 가늠하는 방식이란 걸 알고 있었어. 형은 속이 텅 빈 가벼운 돌만 내게 던졌으니까. 여의치 않으면 흙을 뭉쳐서 던지고. 그 탓에 손이 꾀죄죄해져선 혼자서 벌 받고 말이야. 하하하-.”

“…….”

왜 남의 행동을 멋대로 넘겨짚느냐고 화내기엔 이미 얼굴이 홧홧하다. 아까처럼 머리에 피가 몰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속이 간파된 기분이다.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상기되었을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나한테 이런저런 조언도 많이 해 줬지. 내 몸에 묻은 게 더럽다고 말한 날에는 호수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고, 약용 약초도 많이 던져 줬잖아. 이걸로 씻어 내라고.”

“……조언이 아니라 시비였어.”

참다못해 반박했다. 그러나 우사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양이 이만큼은 됐던 것 같은데.”

우사가 뒷짐 지고 있던 팔을 풀어 양옆으로 넓게 벌린다.

“그만한 양이 그냥 저절로 생겨났을 린 없을 테고. 모른 척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뻔한 고생이지 않아? 형.”

더는 들어줄 수가 없어서 손으로 우사의 입을 막아 버렸다. 우사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어떤 말을 덧붙이든, 내가 널 괴롭히고 상처 줬단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내가 말했다. 우사는 그런 날 물끄러미 보다가 한껏 낮춘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형.”

손바닥에 우사의 입술이 스치는 감각이 간지럽다. 흠칫 어깨를 굳히며 불에 덴 것처럼 손을 뗐다. 그러곤 그 손을 다른 한 손으로 감싸 쥐며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바보 같아?”

우사가 이어서 말했다.

담담한 목소리는 지나치게 무미했다. 메마른 어투에 불온함이 스민다.

“아니면 내가 눈치 없길 바라?”

“…….”

“난 형한테 괴롭힘당한 적 없어. 오히려 그 반대겠지. 괴로운 건 늘 형이었으니까. 괴롭히는 사람도 형이고, 괴롭힘당하는 것도 늘 형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처음에 한 말 기억해? 우리가 처음 재회했을 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