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우리가 처음 재회했을 때 우사가 내게 한 말? 그야 당연히 기억한다.
‘앞으로는 곁에 두고 내가 직접 교화시키겠다.’
내가 기억하는 눈치자 우사가 가는 숨을 내쉬며 내게로 손을 뻗는다. 곧 우사의 양손이 내 어깨를 가볍게 움켜잡았다.
“나는…….”
날 바라보는 우사의 눈빛에 서린 건 절박함이었다.
“형이 자꾸 스스로를 놓으려고 해서 데려온 거야. 내가 교화시키고 싶은 건 그 빌어먹을 짓들이라고!”
점점 격앙되어 가는 그 목소리에 나는 멍해졌다.
……빌어먹을 짓들?
설마… 너, 알고 있었어?
그 말이 순간적으로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날 한 번만 받아들여 주면 안 돼?”
내 어깨를 잡은 우사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형이 내 형일 수 있게 해 줘.”
우사가 내게 말했다.
“형.”
“……사형제지연은 이미 끊어졌어.”
침묵 끝에 내가 한 말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 마디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그게 네가 바란 거였고. 아니야?”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일그러진 눈매에 열기가 몰리는 게 느껴진다.
“……맞아.”
곧 우사가 답했다. 그 긍정에 난 입꼬리를 휘어 조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우사가 다급히 뒤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 사이엔 인연이 남아 있어. 사형제지연은 끊어지고 버려졌지만…, 아직 우리 사이에 남아 이어진 인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함께 있는 거야.”
하. 저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함께? 나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네게 곁을 내준 적 없어. 착각하지 마.”
날 보는 우사의 눈매가 일그러지며 눈가에 붉은 기가 감돈다. 그런 우사를 보는 내 눈의 시야가 뿌옇게 어른거린다. 눈물이라도 고인 건가. 혹시라도 들킬까 봐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너는 네 멋대로 사형제지연을 끊어 놓고, 나한테는 남은 인연을 저버리지 말라니. 스스로 보기에도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가 네 멋대로 굴릴 수 있는 괴뢰(꼭두각시)로 보였어?”
시선을 내리깐 채 이를 악물며 말했다. 눈에 고인 눈물은 금세 메말랐다. 다시 힐끔 시선을 들어 본 우사는 굉장히 절박하고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먼저 절연 당했을 때의 내 심정도 그에 못지않았다.
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우사를 보다가, 날 붙잡고 있는 그 손을 떼어 냈다. 우사의 손엔 이미 힘이 풀려 있어 생각보다 더 수월하게 떼어 낼 수 있었다.
힘없이 떨어진 우사의 손을 일별한 뒤 그대로 뒤돌아섰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한없이 지치는 기분이다.
“이제 됐으니, 형이라 부르든 말든 마음대로 해. 더 이상 ‘형’이란 단어에 아무 의미 두지 않을 거니까.”
“…….”
“…외행은 마무리되었으니 그만 돌아가자.”
우사를 뒤에 두고 걸음을 내디뎠다. 앞으로 채 몇 걸음 내딛지 않아 우사에게 오른팔을 붙잡혔다.
“……그럼 그렇게 하자.”
“…….”
“내가 그 단어에 둔 의미를 나 스스로 잘 안다면, …나 또한 그걸로 됐으니까.”
바로 내 옆으로 와 서는 우사를 곁눈으로 봤다. 우사는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이제 돌아가자, 형.”
“…….”
“돌아가면… 다과 여섯 종류를 준비하고 연잎 차를 연하게 우려서 갖고 와야 해.”
나직한 목소리로 느닷없는 심술을 부리는 우사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우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먹도 갈고, 서책도 읽어야 하고.”
“…….”
“책상 위의 두루마리들도 전부 정리해야 해. 그리고 또-,”
날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정면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우사가 말했다.
“…아까 내가 한 말은 잊어, 형.”
우사는 잊으라고 말했지만, 오늘 우사와의 대화는 이미 내 상념 중 하나가 되었다. 내가 미간을 구긴 채 대답을 않자, 우사가 짐짓 장난스럽게 말한다.
“그럼 나도 아까 형 눈에 뭐가 들어간 거 잊을게.”
아까 내 눈에 눈물이 고였던 걸 봤나 보다.
“…난 너처럼 속눈썹이 길지 않아서 눈에 뭐가 자꾸 들어가.”
대충 맞받아치자 우사가 피식 웃는다.
“그럼 내가 숨을 불어 줄게, 형. 그러면 안에 있는 게 무엇이든 날아가거나…… 아니면, 마르겠지.”
내 팔을 쥐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려 내 손을 맞잡는다. 우사에게 잡힌 손을 그냥 내버려 뒀다. 괜한 신경전을 더 하기엔 피로했기 때문이다.
겉보기엔 우리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유하게 풀렸으나, 그 속사정은 달랐다. 미처 할 수 없는 말들이 각자의 가슴 안에 쌓여 갔다.
* * *
남여연과 유계는 가면을 쓴 채 객잔 1층에 마주 앉아선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남여연은 탁자에 한 팔을 올린 채 턱을 괴고선 창 너머를 보고 있었고, 유계는 팔짱을 끼고선 다리를 꼬고 정면을 보고 앉아 있었다.
축제 전야제의 객잔이었다.
사람들로 떠들썩하고 붐볐지만 남여연과 유계의 탁자는 그 분위기와 유리되어 있었다. 얼핏 보았을 때 그 둘의 자리엔 무료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실상은 달랐다. 답답하면서도 무거운 공기가 고여 있었다.
우사가 사해필성 내 대부분의 의원들을 데려온 게 한 시진 전이었다. 돈이나 협박 같은 수완을 써서 의원들을 모은 게 아니었다.
진연이 기절한 직후에 우사가 맨 처음 한 건, 전각 위로 뛰어 올라가 사방을 살피는 거였다. 거리 곳곳을 살피며 무언가 확인하더니, 곧장 으슥하고 외진 골목 안으로 뛰어내렸다. 그다음엔 단순히 허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허공에다 대고 이리저리 손끝을 휘젓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손끝에 누군가의 멱살이 잡혀 오더니, 그 멱살의 주인이 단번에 끌려 나온 것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던 외진 골목은 우사에 의해 멱살이 끌려 나온 의원들로 하나둘 채워졌다. 대부분 이 근방 약방과 의료원에서 일하던 의원들이었다.
갑작스런 일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던 의원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렸다. 우사는 그런 의원들에게 진맥 한 번만 해 주면 얌전히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의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금세 우사의 뒤를 쫓았다. 뭐가 뭔지 몰라도 우사가 선사인 건 확실하니, 선사의 뜻에 거슬려 봐야 좋을 것도 없고, 우사가 부탁하는 게 그렇게 큰일이 아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고분고분해진 의원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사를 ‘귀인’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의원들과 우사가 2층으로 올라간 지 이제 반 시진이 지났다. 처음 시켰던 찻물은 식은 지 오래였다.
수중의 돈은 객잔의 방 하나를 얻느라 다 썼다. 그러니 찻물 말고 다른 걸 또 시킬 만한 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점원이 먼발치서 자꾸만 눈치를 줬다. 가뜩이나 축제 전야제 밤이라서 붐비는 식당은 자리도 부족했다. 그야말로 돈 안 되는 손님이 자리만 축내고 있는 꼴이었다.
유계는 한쪽으로 꼰 다리의 발끝을 떨다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르륵-
뒤로 밀리는 의자 소리에 창밖을 보던 남여연이 눈만 굴려 그런 유계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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