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나로 하여금 다른 모든 것들을 놓게 했으면서, 내가 나 자신마저 놓으려 할 때에서야 다시 찾아와선 그렇게 말했다.
스스로를 놓지 말라고.
“…마음에 안 들어.”
씹어뱉듯 말하며 근처 나무에 화풀이했다. 주먹으로 기둥을 강하게 후려치자, 그대로 우지끈 부러지며 넘어간다.
콰앙-!!
먼지가 자욱이 일며 주변으로 바람이 강하게 휘몰아친다. 바람에 거칠게 나부끼는 옷자락과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시야를 잠시 가렸다. 크게 펄럭이는 멱리 너울 사이를 노려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곧 바람이 잦아들며 멱리 너울도 가라앉았다. 전방에 기둥이 부러진 나무가 보였다. 쓰러진 나무를 괜히 발끝으로 툭툭 몇 번 쳤다가 관두었다.
손에 남은 저릿함 감각이 낯설다. 내력을 두른 주먹을 쓰는 것도 간만이다.
오랜만에 운기한 단전의 내공은 전보다 줄어 있었다. 그리고 이전보다 많이 탁해져 있었다. 심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탓이다.
내친김에 운기조식을 할 요량으로 방금 쓰러트린 나무 위에 걸터앉았다. 어차피 지금 상태론 허공답보를 오래 하지 못한다. 우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니 추적 범위를 최대한 넓혀야 한다.
깊게 심호흡한 뒤 곧장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 차례 운기조식을 마친 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운기조식을 하는 동안은 기감을 닫아 두는 탓에 바깥의 기척에 둔감해진다.
근처 나무 뒤에서 나를 기웃거리고 있는 소년을 뒤늦게 발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공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선 무공을 깊이 연마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속단하기엔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청아하고 맑다. 선문세가 자제라 해도 믿을 정도다.
소년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무 뒤로 몸을 숨기긴 했지만 숨을 생각 자체는 없어 보였다. 저렇게 대놓고 쳐다보는 것 자체가 자신을 발견해 달라는 거니까.
무늬 없는 반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소년을 마주 보다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최근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 사해필성에서 잠시 마주쳤던 그 애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속단할 수는 없다.
사해필성의 그 애나, 지금 여기 우횡산에 있는 이 소년이나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흐리다. 인상 자체가 옅으니 동일 인물이라고 확신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다른 인물이라고 분명히 구분 지어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눈썰미가 없었나?
나와 눈을 맞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년이 점점 나무 뒤에서 몸을 드러냈다.
곧 소년이 먼저 수줍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안녕, 소협.”
화답해 주자 소년은 나무 뒤에서 완전히 나왔다.
“혼자야?”
소년이 입고 있는 옷을 살피며 물었다. 티 하나 없는 백의다. 특정한 문양이나 표식은 없었다.
보통 세가의 자제라면 속한 가문의 표식이나 문양을 달고 있기 마련인데. 그냥 평범한 여염집 아이인가? 하지만 그렇다 치기엔 혼자 우횡산에 있다는 점이 걸린다. 이곳은 쉬이 발을 들일 생각을 하기 어려운 곳이니까.
“네.”
소년은 얌전히 답하며 내 쪽으로 조금 더 다가왔다.
“다른 어른들은? 산세가 험하고 위험한 짐승들도 많은데, 애를 이런 곳에 혼자 두다니.”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외행을 나온 거라 괜찮습니다.”
“외행?”
그러고 보니 외행에 나갈 나이는 되어 보였다. 이르면 13살 때부터 외행을 나가기 시작하니까. 하지만 느껴지는 기운이 이렇게 작고 희미한데 혼자 돌아다니다간 요괴나 귀신의 밥이 되기 딱이다.
“다른 사형제들은?”
“…없습니다. 혼자예요.”
차분하게 또박또박 말하긴 하는데 어딘가 긴장한 기색이다. 내색은 안 해도 겁에 질린 게 분명하다. 하기야 어른이나 사형제도 없이 혼자 외행 중이니 겁에 질리는 게 당연하다.
“혼자 다니기 안 무서워?”
내 물음에 소년이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무섭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무섭다고 바로 인정하고. 솔직하네.
낮은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이리 와.”
내 말에 소년이 바로 내 곁으로 달려온다. 곁에 선 소년을 내려다보며 그 머리를 투박하게 쓰다듬었다.
“어느 문파의 문하생인진 몰라도, 뭐, 어쨌든 넓게 보면 이 강호에선 내가 네 선배 격이니까.”
그러니까 이 정도 오지랖은 괜찮겠지.
“네, 선배님.”
바로 돌아오는 대답에 한쪽 눈썹을 까닥이다가 이내 작게 웃어 버렸다.
“좋아. 그럼 후배님의 외행 목적지는?”
이것도 인연이니 목적지까지만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소년은 날 물끄러미 올려다볼 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어서 말하라고 눈짓하자 그제야 천천히 입술을 달싹여 말한다.
“…딱히 정해 두진 않았습니다. 세상 경험을 쌓는 게 목적이라, 괜찮다면 선배님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주저하며 잇는 말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세상 경험을 쌓는 게 목적이라고? 무슨 외행이 이렇게 애매모호해?
대개의 외행은 그 기간과 목적이 뚜렷한 ‘심부름’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당연히 명확한 목적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는 내가 가는 길을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내가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르는데, 그 길이 어떤 길이 될 줄 알고 데려간단 말인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고민했다.
우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동행을 만들 순 없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게다가 나름 시급한 사안이기도 하니 서둘러야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 꼬맹이를 여기에 두고 가자니 내키지 않는다. 내가 거두지 않으면 보나 마나 이런저런 풍파에 휩쓸릴 텐데.
함부로 책임지자니 걸리는 게 많고, 그렇다고 내버려 두자니 마음이 쓰인다.
말 몇 마디 나눈 것도 정[情]이라고.
“선배님.”
내 고민이 길어지자 소년이 내 옷자락을 잡아 오며 나를 부른다.
“제가 선배님을 곤란하게 했나요?”
뒤이어 이어지는 조심스런 말에 흔들리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래, 내가 아무리 폐물이어도 이 아이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다.
“아니.”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소년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가 놨다. 날 올려다보는 소년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양 뺨이 스르르 붉어진다. 내게 뺨을 꼬집힌 게 부끄럽나 보다.
내가 너무 스스럼없이 굴었나.
“그런데 나와 다니는 게 네 외행에 도움이 될까? 난 지금 하는 일이 끝나면 곧바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거든. 그러면서 너도 네 문파로 바래다줄 거고. …물론 그 일이란 게 좀 지지부진하게 길어질 수도 있지만…, 찰나에 끝날 수도 있는 거라.”
“괜찮아요.”
“…아니면, 나와 다니다가 나보다 더 괜찮은 선사가 나타나면 그 사람이랑…….”
“저는 선배님이랑 동행하고 싶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확고한 대답에 살짝 놀랐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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