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한 손을 뒷짐 진 채 얕은 비탈을 훌쩍 뛰어넘었다. 앞의 커다란 바위에 오른발을 딛는 것과 동시에 살수를 날렸다.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나무에 내 공력이 부딪치며 나무껍질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산개하는 나무껍질 사이로 윗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나무가 보였다. 거칠게 잘려나간 그루터기 단면 위로 성큼 올라가 섰다. 단 1초식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루터기 위에서 주변을 가볍게 둘러봤다. 기감에 잡히는 기척은 여전히 하나뿐이다. 그새 다른 곳으로 숨은 기척을 쫓아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 끝의 진기가 사방으로 쇄도해 날아갔다.
쾅! 우지끈-, 콰왕-! 퍽!
내가 날린 공력에 일대의 나무들이 산발적으로 터져 나갔다. 일각도 안 되는 사이에 인근 나무들이 쑥대밭이 되었다.
이제 사각지대는 없다.
폭발의 여파로 쌓여 있던 눈들이 허공에 흩날린다. 그래서 마치 지금 눈이 내리고 있는 것만 같다.
돌풍에 멱리의 너울이 어지럽게 나부낀다. 옷에 묻은 나무껍질 잔해를 툭툭 털어 내며 곁눈으로 내 목에 드리워진 것을 봤다. 검집이었다.
검도 아니고, 검집째라.
그 건방진 작태에 나는 피식 웃으며 비스듬히 돌아섰다. 느껴지는 청아한 선기로 보아 분명 대어인데, 식견이 짧은 선인인가. 방심도 이런 방심이라니.
속으로 조소하며 돌아본 등 뒤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면사를 쓰고 있었다. 면사 위로 드러난 두 눈과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 놀랐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심상 때문이었다.
‘……백아?’
속으로 뇌까렸다가 지레 놀라 손끝을 움츠렸다. 당혹스런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벙찐 채로 망연히 남자를 보았다. 그러다가 남자의 눈가에 역린이 없단 걸 발견했다.
“…너…, 뭐야?”
반쯤 넋이 나간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
동시에 남자가 내게 말했다. 이어서 오른 소매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 내 눈앞에 대고 보여 준다.
“찾으러 왔소?”
물음과 함께 바로 코앞에 들이밀어진 봉인구보다, 남자의 목소리가 더 신경 쓰였다. 아까 여화 객잔의 그 남자에게서 느꼈던 기시감과 같다.
내 기억 속 그 목소리와 흡사하다. 11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그 11년간 끝없이 꿈속에서 되풀이되었다. 그래서 날 부르는 백아의 목소리는 뇌리에 깊이 박힌 지 오래였다.
면사 위로 보이는 두 눈도, 목소리도 낯익다. …하지만 눈가에 역린이 없다. 느껴지는 분위기도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다.
나는 인상을 쓰며 겉으로 드러난 동요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눈앞의 이가 ‘백아’ 같다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함이 든다. 불편하다.
나는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눈앞의 남자를 전체적으로 훑어봤다. 흑의 차림의 장신인 남자는 느껴지는 기품이 무척 빼어났다. 대어라면 분명 대어다. 그것도 특[特]대어.
그런데 어딘가 낯이 익는 건……. 아까 여화 객잔에서 본 그 남자와… 동일인물인가.
불현듯 든 의심에 슬쩍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머리 장식을 보면 알 듯도 싶은데.
내가 움직이기 무섭게 남자가 움찔 몸을 굳힌다. 우리가 구면이라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내 기도가 위협적이어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무척 수상쩍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가 구면인가?”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야, 쌍방일 테고.”
나직한 목소리로 남자가 대꾸했다.
“아니라면 일방일 터. …귀존[鬼尊].”
‘나’를 ‘귀존[鬼尊]’으로 안다는 그 말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이제 보니 동동을 이용해 그 주인인 ‘나’를 꾀어내려 했던 거였군. 애초부터 내가 목적이었던 거다.
결국 동동이 미끼가 되어 낚인 건 나였다.
“선인이 그 사혈귀존과 구면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입에 담다니.”
“…내가 오늘날 속계에 나온 것은 선군으로서가 아니오.”
“그러면?”
“귀존에게 거래를 하나 제안하고 싶소.”
작은 봉인구를 보란 듯이 내보이며 남자가 말했다. 집게손가락으로 잡고 있는 저 봉인구 안에는 동동이 갇혀 있다. 그래서 시야가 검게 변해 보이지 않았던 거다.
“…네가 누구인 줄 알고.”
봉인구를 스치듯 일별한 뒤 남자를 보며 말했다.
“면사로 가리고 있어서 전혀,”
말을 하는 도중에 남자에게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 저 면사를 벗겨서 이 미심쩍음을 해소할 생각이었다.
손끝을 갈고리처럼 구부린 채 남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남자는 힘껏 내뻗어진 내 손을 피하지 않았다.
날 곧게 응시하는 남자의 눈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날 직시하는 남자의 눈을 마주 노려봤다. 그가 조금도 피하지 않았기에 나는 쉬이 그 품 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너무나 수월하게 남자가 쓰고 있는 면사 지척까지 다다랐다. 그런데 우습게도 내 손은 바로 그 앞에서 멈췄다.
‘면사로 가리고 있어서 전혀, …모르겠는데.’
바짝 들어간 힘 때문에 손끝이 잘게 떨린다.
차마 이 면사를 벗겨 낼 수가 없다. 눈에 힘을 주며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는 그런 날 가만히 주시하기만 했다. 내게 모든 선택권을 맡긴 듯한 초연함이었다.
날 보는 남자의 눈빛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걸 보며 나는 악문 잇새로 혀를 한 번 찼다.
결국 면사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그 대신 남자의 옷깃으로 손을 가져가 단번에 움켜잡았다.
내 심경이 반영되어 다소 거친 손속이었다.
내게 멱살이 잡힌 남자의 낯은 여전히 초연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남자를 끌어당겼다. 내 멱리의 너울 안으로 남자가 성큼 들어오며 서로의 얼굴이 바짝 가까워졌다.
“…너, 누구야?”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면사를 걷어 내 직접 확인하지 않고 굳이 남자에게 물은 것은, 이대로 물러가도 될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완전 ‘눈 가리고 아웅’이란 걸 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대치에서 기세는 내가 우위를 점했다 해도 내심은 아니었다. 그냥 어서 여기를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면사로 가져갔다. 느닷없는 그 행동에 깜짝 놀랐다.
“……! 야!”
크게 당황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호통을 쳤다.
설마 지금 내 앞에서 면사를 벗어 버릴 생각인 건가? 대체 왜?
내가, …네가 너인 걸 알게 되면 그때는……!
그 찰나의 순간에 갖가지 상념이 밀려들었다. 머릿속을 번잡하게 만드는 심상에 가슴이 선뜩해진다.
‘안 돼!’
나는 잡고 있던 멱살을 놓고, 면사로 향하는 남자의 손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 손끝이 남자의 손목에 스치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그대로 팔목을 뒤틀어 도리어 내 손목을 잡았다.
“…어?”
예상치 못한 전개에 벙찐 소리를 냈다. 심장이 쿵쿵 뛴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란 탓이다.
남자에게 잡힌 내 손은 어느새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을 마주 잡고 있었다. 그러자 서로 이어진 듯한 형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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