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94화 (94/141)

<94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그럼에도,”

남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한 번 보는 것보다 백 번 문답하는 게 더 좋다면 그렇게 하리다.”

…백 번의 문답이라니.

그 말에 나는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반면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직시하기만 했다.

“…내가 고작 널 알아내는데 그만한 심력을 소모할 것 같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잖소.”

미약하게 웃음기가 담긴 눈으로 날 주시하며 남자가 말했다. 나를 놀리는 것 같으면서도, 그 이면에는 어쩐지 의미 모를 호소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아, 나는 인상을 썼다.

빌어먹을.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다시금 살펴본 눈앞의 남자는 눈가에 역린만 없을 뿐, 백아와 흡사했다.

남자가 정말 백아라면, 우리는 왜 이렇게 마주하게 된 거지?

…대체 나와 뭐 하자는 거야? 기어코 내가 널 죽이길 바라?

씨근덕거리는 내심을 애써 억눌러 숨겼다. 그리고 겉으로나마 평정을 유지하려 최대한 노력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나와 거래를 하나 해 주시오.”

남자의 말 하나하나에 휘둘리고 있다고 광고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선인이 귀신에게 먼저 거래 제안이라. 말세로군.”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뒤 한껏 비아냥댔다. …남자에겐 조금도 통한 것 같지 않았지만.

“대가로 내가 뭘 바랄 줄 알고.”

“뭐든.”

“선인의 정기라 해도?”

거침없는 대답에 괜히 심기가 뒤틀려서 독기어린 말을 했다.

선인에게 정기란 본원진기에 준하는 생기이다. 그걸 달라는 건 네 명줄을 내가 틀어쥐겠단 뜻이나 마찬가지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남자는 내 도발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소.”

초탈한 반응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겉으로나마 꾸며 내고 있던 평정을 집어치웠다.

잡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놓으며, 나를 잡고 있는 남자의 손마저 뿌리쳤다. 남자의 손이 내게서 툭 떨어졌다.

“동동!”

내가 외쳤다.

남자의 말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이런 바보 같은 조우는 그만 끝내고 동동만 회수한 뒤 돌아갈 생각이었다.

내 신경질적인 외침에 남자의 소매 안쪽에서 미미한 동요가 느껴진다. 그새 저 안에 넣어뒀나 보다. 동동이 있을 소매로 성큼 손을 뻗었다. 동시에 남자가 빙글 몸을 돌려 내 옆으로 물러났다. 뻗은 내 손끝은 남자의 소맷자락을 아슬아슬 스쳤다.

“내놔.”

남자를 노려보며 내가 말했다. 말하면서도 틈틈이 그를 향해 손을 휘둘렀지만 번번이 남자의 손날에 가로막혔다.

순식간에 수십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이건 내어줄 수 없소.”

휘둘러지는 내 팔을 몸을 틀어 피하며 남자가 말했다.

“왜, 그걸 가지고 있으면 무슨 좋은 꼴이라도 볼 수 있을 것 같아?”

“…적어도 이것의 주인과는 계속 이어져 있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좋소.”

“…!”

나는 뭐라 선뜻 입을 뗐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심기가 뒤틀리는데, 그걸 말로 무어라 내뱉어야 할지 모르겠다. ‘바보’니, ‘멍청이’ 같은 욕설만 목 끝까지 치밀었다.

“우리 사이에는 인연이 없어서 나는 이것에 기대야만 하오. 그러니 이것만은 내어줄 수 없소. 하지만 이외에 다른 것이라면…, 가령 선인의 정기라든지.”

은근한 목소리로 떠보듯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휘두르던 손의 궤적을 틀었다.

동동이 든 그 소매가 아닌, 남자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윽.”

단말마의 신음과 함께 남자의 미간이 설핏 찡그러졌다.

나는 남자의 목을 움켜쥔 팔을 높이 들었다. 남자의 두 발이 허공에 뜨며 낯빛이 희게 질려 간다. 그 모습을 보며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려 했지만, 잘 안 된다. 동요로 인해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남자의 목을 조르고 있는 내 손을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남자의 안색보다 더 희게 질린 내 손을 가늠하듯 바라보다가 돌연 손에 힘을 풀었다.

남자가 다시 지면에 안착하는 것과 동시에 손바닥으로 그 가슴을 세게 쳤다.

퍽-!

내 장력을 고스란히 받아 낸 남자의 신형이 비틀거린다. 내력은 싣지 않아 피는 토하지 않았다. 남자는 이 와중에도 동동이 든 제 소매만 사수했다.

“난 너와 거래 안 해.”

스스로의 몸을 돌보지 않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 싸늘한 일갈이 마지막 일별이었다.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됐다, 저깟 동동따위. 저런 얄팍한 끈을 손에 쥐고 놓지 않겠다고 한들, 내가 무시하면 그만이다.

내 등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알았소. 앞으론 내 정기를 주겠다고 하지 않겠소.”

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한 손을 들어 휘휘 저어 보이기만 했다. 너와는 더는 상종하지 않을 거란 뜻이었다.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이어서 나지막한 외침이 뒤따라왔다.

“내 이름은 ‘심마’라 하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앞으로 내딛는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남자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 분명 그뿐일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걸음을 빨리해 거리를 벌릴수록 다리가 천추근을 매단 것처럼 무거워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감을 날카로이 세워 등 뒤의 기척을 살펴보았다. 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 또한 없었다.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제자리에 멈춰 서선 흘낏 곁눈으로 뒤쪽을 응시했다.

‘네가 너라는 걸 알면 그때 나는…,’

아까 한 생각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때 끝맺지 못한 뒷말을 속으로 낮게 뇌까렸다.

‘내 안의 원한이 너무 커, 널 죽이지 않을 수가 없어.’

하지만 나는 역시, 널 죽이는 것보다 나 자신을 죽이는 게 더 쉽다.

깊이 심호흡한 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턱 끝을 살짝 치켜든 채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고선 다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오연히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꽉 쥔 주먹에 들어간 힘이 좀처럼 풀어지질 않았다.

* * *

연연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오자 그곳엔 커다란 눈덩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크고, 나머지 하나는 그보다 조금 작았다.

설마 벌써 다 굴렸을 줄이야.

뒷짐 지고 있던 손을 내리고 눈덩이에게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얼마나 열심히 굴렸는지, 그 근방으로 눈덩이를 굴린 흔적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흰 눈이 걷히고 지대가 드러난 부분도 드문드문 보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며 양팔을 가볍게 돌려 다시 뒷짐 졌다. 소매가 크게 펄럭이며 이는 바람에 눈이 얕게 날렸다.

“연연?”

소리 내 부르며 곁눈으로 눈덩이 너머를 보았다. 둘 중 비교적 커다란 눈덩이 뒤쪽에 연연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머리를 내 쪽으로 슬그머니 기웃거리는 걸로 보아 숨바꼭질 놀이 중인 모양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터라, 내 쪽에선 그런 연연의 행동 하나하나가 훤히 보였다.

그런데 연연은 제가 진작 들켰다는 것도 모르고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잘 숨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본인의 시야에서 보이는 내 다리만 흘끔흘끔 훔쳐보고 있다.

이래서야 머리만 숨은 새 꼴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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