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96화 (96/141)

<96화>

‘형.’

자동반사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그 목소리가 귓가에도 아른거리는 것 같다. 한 손을 들어 귓불을 매만지며 다른 한 손으론 연연이 내민 눈덩이를 같이 받쳐 들었다.

연연이 내 팔 높이를 쫓아오려고 뒤꿈치를 든다. 애쓰는 게 보이지만 역시 키가 부족하다. 손끝만 간신히 갖다 댄 수준이다.

작은 눈덩이를 비교적 큰 눈덩이 위에 올리자 마침내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기실, 나는 마지막에 손만 얹은 수준이라, 연연 혼자 완성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연연은 눈사람 꾸미기에도 앞장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부러 나서는 적극적인 자세에 나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뒤에서 이런저런 훈수만 좀 뒀다. 퍽 신이 난 연연이 제가 알아서 눈사람 꾸미기를 도맡았기 때문이다. 아주 공을 들인다.

이제 겨울은 끝물이라 해도 설산의 추위는 만만치 않아, 몸이 얼었을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만 돌아다닌다.

“사부!”

드디어 눈사람 꾸미기가 끝난 연연이 나를 불렀다. 나를 보며 웃는 얼굴이 해사하다. 그 뒤로 보이는 눈사람은 그럭저럭 봐줄 만한 수준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느긋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곤 먼저 천천히 돌아섰다. 비스듬히 돌아서는 내 옷 끝자락이 가볍게 펄럭이며 진기가 공력이 되어 무형의 힘을 띤다.

그 힘은 주변 나무의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공교롭게도 동백나무였다. 가지에 핀 새빨간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며 허공에 붉은 꽃잎이 흩날렸다.

그 결과 동백의 꽃잎은 막 완성된 눈사람 위로 내려앉을 터였다. 지금 내 어깨 위로 내려앉은 것처럼 말이다. 어깨에 앉은 꽃잎을 가벼이 떨쳐 냈다.

내리는 꽃비 아래에서 유유히 걷는 내 걸음 아래로 꽃과 꽃잎이 짓밟힌다. 짓뭉개진 붉은 잔흔이 마치 새하얀 천에 놓인 자수 같다. 뭐를 수놓은 거냐면, …그냥, 내 마음이다.

이처럼 눈사람도 꽃과 꽃잎으로 꾸며졌을 테니 보기엔 썩 괜찮겠지.

눈사람에게서 완전히 등을 지고 선 나는 그 모습을 보지 않았다. 왠지 기분이 싱숭생숭해 눈을 굴렸다가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이고 말았다.

이제 여긴 됐으니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

여기서 가장 먼 곳이면서도 동동들을 흩뿌린 몇몇 장소 중에서 가장 물이 좋은 곳으로 말이다. 일이 지지부진해지고 있으니 거기에선 직접 움직여야겠다.

“사부!”

눈사람 구경이 끝났는지 연연이 나를 부르며 따라붙어 온다. 내 옆에 바투 붙어서 걷는 연연을 흘긋 내려다봤다. 연연은 나를 빤히 올려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

원래 안 물으려고 했는데 그냥 물어봤다. 기쁜 얼굴로 날 보고 있었으니까.

“응!”

연연이 대답했다.

예상했던 반응에 나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연연을 보았다.

“뭐, 그렇겠지.”

그 말만 툭 내뱉곤 씩 웃어 버렸다.

나는 동백꽃이 내려앉은 눈사람을 끝끝내 보지 않았지만, 분명 제법이었을 거다.

-04

곤륜산에서 동쪽으로 가면 한 지역을 비호하는 산문이 있는데, 연화산문이다.

연화산문은 대부분이 약소하고 개파조사인 여타 선문세가와 달리 유서 깊은 명문이었다. 그 유명세는 당연하거니와 위세 또한 대단했다. 들려오는 소문은 그야말로 수선계의 모범이었다.

연화산문이 터 잡은 일대 지역 ‘낙주’는 연화산문의 비호 아래 있었다. 오래전부터 연화산문이 낙주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일대를 지키고 사이한 것으로부터 보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지역 백성들은 연화산문을 하늘과 같이 생각하며 마음 깊이 따랐다. 자신들이 연화산문 비호 아래에 있다는 것을 무척 기꺼워했다.

연화산문은 하나의 선문세가를 중심으로 수많은 고수와 문하생들이 결집해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 선문세가의 가주가 곧 연화산문의 문주인 것은 아니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가주와 문주는 따로 존재했으며, 세가의 직계만이 될 수 있는 가주직과 달리 문주는 철저히 실력 위주였다.

그래서 당대 문주들은 모두 막대한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내공으로 연화산문과 낙주를 비호하며 남은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낙주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때문에 낙주의 백성들은 경애를 담아 연화산문 문주를 ‘연화경[敬]’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소문이 암암리에 퍼졌다.

이번 대 ‘연화경’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다 살아난 뒤로 사람이 달라졌단 소문이었다.

* * *

‘낙주’는 곤륜산에서 동쪽으로 가면 나온다.

낙주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강을 하나 건너야 하는데, 이 강을 ‘유수’라 한다. 유수강은 수심이 깊고 끝없이 망망[茫茫]해서 소해([小海], 작은 바다)라고도 불린다.

낙주는 유수강의 가파른 협곡을 지나서 있었다. 이 깎아지른 협곡은 곳곳에 세찬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뿌연 물안개가 사방에 끼어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실력의 뱃사공들도 고개를 내저으며 건너기를 저어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낙주에 다다르려면 반드시 이 협곡을 지나야만 했다. 그래서 낙주로 들어가는 배는 드물었지만,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나룻배는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나는 낙주로 들어가는 유수강 초입에서 나룻배를 하나 구입했다. 뱃사공은 따로 구하지 않고 내가 직접 노를 들었다. 기실, 순간이동을 쓰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긴 하지만, 나름의 풍류였다.

한 번쯤은 이렇게 직접 배를 모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연연도 배를 타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말이다.

그렇게 술법을 쓰지 않고 직접 서서 노를 저었다. 거센 물살에 가끔 나룻배가 크게 흔들리며 물이 튈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연연은 튀는 물방울에 손을 내뻗었다.

장엄한 협곡을 지나치자 물살이 점점 잔잔해졌다. 노질도 점점 느긋해져 간다. 머잖아 물안개마저 걷혔다. 나는 두 손으로 쥔 노 끝에 턱을 괸 채 주변 경광을 바라보았다.

겨울의 냉기를 품은 강바람이 기분 좋게 밀려든다. 흔들리는 멱리 너울 사이로 저 멀리 저물어 가는 석양을 보았다. 그 주변으로 그려진 흐린 능선과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철새 한 무리.

코끝을 스치는 물비린내와 그 풍경이 어우러지며 제법 운치 있다. 유람하는 느낌도 나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이 느긋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숨 가쁠 일도 아니다. 좀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감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의 한 점 여유는 괜찮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나서면 되니까.

석양에서 시선을 돌려 전방의 낙주를 보았다. 곳곳에 색색의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 그 번화함이 한 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전각 사이로 떠들썩함이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뱃머리가 향하고 있는 강둑의 나루터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아치형 수교가 있었다. 수교는 나루터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 그 아래로 지나가야만 했다.

수교 위에는 순찰 중인 선사들이 서 있었다. 낙주는 연화산문의 권역이니, 저들은 ‘연화도([徒], 단원을 가리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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