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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97화 (97/141)

<97화>

제법 삼엄한 경비를 보며 내 기운으로 연연의 희미한 기척을 덮었다. 지금의 연연은 살아 있는 것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생기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내 진기는 진작부터 인간들의 내공으로 꾸며 낸 상태긴 하지만, 지금은 곤륜산에 있었을 때보다 더 철저하게 감췄다. 그에 검은색이었던 내 손톱은 자연스럽게 여린 분홍색으로 바뀌었고, 요요한 기운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젠 누가 봐도 고고한 선사로 보일 것이다. 여간해선, 아니 아예 나보다 본원진기가 더 강하지 않은 이상 내 본질을 파악해 내지 못할 거다.

그 말은 즉, 내 이 속임수를 간파해 낼 정도의 선사는 아주 드물 거란 뜻이다.

인계[人界, (속계)]에 서너 명 정도일까. 그런 인재가 낙주에 있다면 그 또한 기꺼운 일이다. 지지부진해지고 있는 일을 한 번에 끝낼 수 있을 테니까.

오래전, 나는 오연이 피목욕을 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우사를 구하기 위해 그를 죽였다. …이제 나는 오연을 소생시키기 위해 그 피목욕을 다시 재현할 생각이다.

오연의 광기는 내 부탁을 들어주느라 생긴 ‘원멸’에 대한 대가이고, …그건 우사가 나를 망쳤기 때문이다.

내 삶을 망치고, 나를 농락하고 내 생을 산지옥으로 만들었다.

나는 역시 우사를 용서할 수 없다.

나로 하여금 너를 죽게 만든 것도, 마지막 유언으로 내 약지를 자르라 한 것도, …전부 다.

‘형이 나한테 둔 의미, 형이 내게 가지고 있는 감정들. 그것들이 형을 괴롭힌다면 나는…….’

‘백아. 난 지금 행복해.’

귓전에 울리는, 언젠가 네 말에 대한 내 대답이 낙주의 강바람에 쓸려 멀어진다.

나는 계속 노를 저었다.

노에 물살이 밀리며 배는 수교에 다다랐다.

그런 우리에게 연화도[徒]의 감시 어린 눈길이 짧게 닿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무사통과다.

나룻배를 몰아 곧장 수교 아래로 들어갔다. 수교의 그림자가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며 저 앞에 나루터가 보였다.

나는 수월히 노를 저어 나루터에 정박했다. 연연이 먼저 나룻배에서 내리고, 그다음에 내가 내려서며 주위를 가볍게 둘러봤다.

멀리서 수십 개의 빛나는 등불을 봤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느껴지는 분위기 자체에 활기가 녹아들어 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음과 사위에서 풍겨 오는 맛있는 냄새들.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에서 환하게 발하고 있는 등불과 그 주변의 높고 낮은 전각들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거리 안쪽, 골목 사이사이에서 전해져 오는 활력들이 참 번잡하다.

가벼운 숨을 내쉬며 시선을 바로 했다. 그러곤 한 손을 등 뒤로 뒷짐을 진 채 비스듬히 몸을 돌려 여기까지 타고 온 나룻배를 힐끔 봤다.

당장은 마땅히 처리할 곳이 없으니 저 나룻배는 일단 여기에 정박해 두고, 우선 할 일은…….

생각을 이으며 나루터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걸개(거지)를 보았다. 여기저기 부산스럽게 흘끗대던 걸개 놈이 내 시선을 눈치채곤 이쪽을 본다.

나는 걸개의 허리춤을 유심히 살피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현 낙주의 동향 정세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참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내 눈에 띈 걸개 놈이라.

썩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다.

여기 낙주는 연화산문이 꽉 잡고 있다. 그러니 다른 분타는 들어서지도 못했을 테지만, ‘거지는 어디에나 있다.’ 바로 그게 개방이 말하는 그들의 정체성을 축약한 문장이다. 또, 개방이 몸집을 부풀릴 수 있었던 비법이기도 하고 말이다.

걸개는 날 안 본 척하며 바로 눈을 돌려 버렸다. 그 작태가 대놓고 의뭉스럽다. 그래서 개방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허리춤의 매듭이 안 보여도 일단 저놈으로 정했다. 털어 보면 뭐든 나오겠지.

부디 저 걸개가 내게 옷을 갈아입을 수고를 끼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흰옷에 묻은 핏자국만큼 거슬리는 건 없으니까.

혼자 속으로 결정을 내린 뒤 걸개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이쪽을 안 보는 척하면서도 내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걸개가 곧바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다.

경계심을 어리석게 표출하는 것도 가지가지다. 저런다고 날 정말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걸개를 향해 까닥이던 손을 느긋이 오므려 쥐었다. 머잖아 완전히 주먹 쥔 내 손안에는 걸개의 멱살이 움켜쥐어져 있었다. 허공섭물에 의해 단번에 내 앞으로 끌려온 것이다.

내게 멱살이 잡힌 걸개가 헛숨을 들이 삼켰다.

“힉!”

내 얼굴과 걸개의 면상을 가르고 있는 멱리의 얇은 너울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나는 멱리 너울 너머, 코앞의 그 멍청한 면상을 보며 비소했다.

이제 걸개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잡고 있던 걸개의 멱살을 천천히 놓아 줬다. 내가 움켜쥔 탓에 옷깃에 난 주름도 대충 털어 준 뒤, 한쪽 어깨를 지그시 잡아 눌렀다. 날 보는 걸개의 동공이 마구 흔들린다. 안색도 아까보다 더 안 좋아진 게 여차하면 기절이라도 할 것 같다.

“걸개 선생.”

일단 다짜고짜 말문을 텄다.

“…! …네.”

걸개가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내게 잡혀 있는 몸에도 뻣뻣하게 힘이 들어 간다.

너무 겁에 질려 있는 게 보기에 썩 좋지 않다. 누가 보면 귀족(귀신)이라도 마주한 줄 알겠네.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어딜 봐도 아정한 군자인데.

…게다가 지금 옆에 연연도 있는데 애 정서에도 안 좋게 말이다.

따지고 들면 들수록 걸개 놈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든다. 그리고 그럴수록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게 잡혀 있는 것 자체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어깨도 놔줬다. 그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주니,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몰아 내쉰다.

“…저, 귀공께선 누구신지…….”

아까보단 조금 진정한 낯으로 내 눈치를 보며 걸개가 물었다.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말끝은,

“이 미천한 종자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헤헤…….”

내 눈치를 보며 다른 화제로 전환되었다. 끝에 덧붙인 웃음은 비굴하기 짝이 없다.

나는 그런 걸개와 마주 서선 오른손으로 왼 주먹을 가볍게 감싸며 포권을 취했다. 그 상태로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나는, …선사 진연입니다. 곤륜에서 막 낙주로 온 참인데, 낙주는 처음이라 선생께 도움을 청할까 하여.”

자기소개와 더불어 내 목적을 밝히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까닥였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순순히 협조하란 뜻이 담긴 턱짓이었다.

걸개는 내가 자기소개를 시작했을 때부터 놀란 눈치였다. 내가 자신과 말을 섞을 줄 몰랐단 얼굴이다.

“소인은 개…, 개아무개입니다요. 편하신 대로 아무렇게나 불러도 됩니다.”

황급히 마주 포권하며 걸개, 개아무개가 말했다.

“한데 소인은 보시는 바와 같이 그저 낙주를 떠도는 한낱 거지 신세일 뿐입니다요. 그런 하잘것없는 제가 어떻게 귀공께 도움을, 분명 민폐만 끼칠 겁니다. 소인은 척 보기에도 고강하신 대인과는 애초에 격도 맞지 않을뿐더러,”

“선생.”

걸개의 횡설수설을 도중에 끊으며 불렀다. 내 부름에 걸개, 개아무개가 바로 입을 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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