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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106화 (106/141)

<106화>

안가[安家] 근처에선 법술을 쓰지 말아달라던 무본의 당부가 잠깐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 때문에 재고하기엔 이미 지난밤에 기운을 써 목욕까지 한 나다. 이번에도 미세한 기운만 운기할 거니 그 문제는 됐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면을 가볍게 박차며 허공으로 훅- 도약했다. 죽순대의 마디를 발끝으로 디디며 뛰어올라 꼭대기에 다다랐다.

시야가 한층 넓어졌다. 대나무 위에 서선 주위를 오시했다.

상공의 바람은 더 거칠고 세차 옷자락이 사납게 펄럭인다. 비녀관을 쓰지 않아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어지러이 흐트러졌다.

연연이 땋은 머리칼 끝의 단색 머리끈만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나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초옥에 연연만 남겨 두고 왔으니 잠시간만 명상을 할 생각이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깊게 골랐다.

다시 마음 한구석에 심마가 떠오른다.

‘심마[心魔]’이자 ‘그’인 그것이 내 심상을 휘저으며 어지럽혔다.

무시하면 그만인데 ‘그’의 곁에 두고 온 동동이 자꾸만 궁금해진다.

시야 공유만 하면…….

“…….”

양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힘주어 꽉 주먹 쥐었다.

‘아니. 절대 안 봐.’

단호히 마음을 다잡으며 감았던 눈을 도로 떴다.

마음 정양은커녕 명상도 제대로 안 된다.

내 정양을 보좌하기엔 이 대나무 숲이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속 편하게 그렇게 결론 내린 뒤 가부좌를 튼 오른 다리에 팔꿈치를 대며 거기에 머리를 기댔다. 시선은 내리뜬 채 아무 데나 초점을 맞췄다.

“…….”

다른 한쪽 다리에 아무렇게나 걸쳐 둔 팔의 손끝을 까닥거리다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아래로 훌쩍 뛰어내려 지면에 가뿐히 착지했다.

먼지조차 일지 않은 가벼운 착지였다. 그새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한데 모아 한쪽 어깨 아래로 늘어트렸다.

산보는 이걸로 끝이다. 그만 돌아가자.

방금까지 가부좌를 틀고 앉았던 대나무를 다신 일별하지 않고 앞만 보며 걸었다.

초옥으로 돌아가는 길가에는 들꽃이 아무렇게나 피어 있었다. 별생각 없이 손이 가는대로 몇 송이 꺾었다.

기분이 몹시 침잠한 상태였지만 되는대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안의 꽃을 살펴봤다.

노란색, 푸른색, 주황색. 얼굴에 가까이 가져가 향을 맡아 봤다.

생각보다 더 짙은 향은 제대로 꽃냄새였다. 이렇게 작고 소박한 생김새인데도 꽃향기가 물씬 난다.

“넌 이름이 뭐야?”

꽃에게 말을 걸며 검지와 중지로 꽃줄기를 집고 빙글빙글 돌렸다.

“내 이름은 진연인데.”

하릴없이 중얼거리며 꽃에서 시선을 들어 앞을 보았다. 벌써 대나무 숲을 빠져나와 초옥이 바로 코앞이었다. 문득 초옥 안의 탑상 위 책상에서 봤던 게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빈 화병 하나가 놓여 있었지.

짧은 산보를 끝내고 돌아간 초옥 안에는 연연이 아직 잠들어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뒤척이지도 않았는지 내가 나갔을 때 그 자세 그대로였다.

나는 아까 생각해 뒀던 화병에 꽃을 꽂았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찰나에 연석[硏席, 글을 읽거나 공부하는 자리]의 좌식 방석과 팔걸이 사이에 껴 있는 나뭇조각을 발견했다. 어젯밤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거였다.

꺼내 보니 목독[木牘, 글을 적는 나뭇조각]이었다. 판에 쓰인 글자를 대충 훑어본 뒤 한 손에 챙겨 들었다.

뭔지 몰라도 마침 한가하니 밖에 가지고 나가서 읽어 봐야겠다.

잠들어 있는 연연을 일별한 뒤 목독만 들고 도로 마당으로 나갔다. 멀리 갈 생각은 없었다. 마당 뒤편에 있는 널따란 바위가 적당해 보여 그리로 향했다.

대충 평평해 보이는 쪽을 눈대중으로 골라 그 위에 앉았다.

‘…흠. 나쁘지 않네.’

읽기 편한 자세를 잡으며 한쪽 무릎을 세웠다. 그리고 그 위에 목독을 든 팔을 걸쳤다.

선선한 바람에 옷 끝자락이 사락사락 흔들린다.

‘어디 보자…….’

한 손에 쥔 목독은 중간중간 서도[書刀]로 글자를 깎은 흔적이 있어서 완전하진 않았다.

일단 남은 글자만이라도 읽어 봤다. 잘만 추론하면 서도로 깎여 나간 글자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다.

[혼돈은 ■■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은원을 어지럽혀, ■■■■에 살라 먹혀 재만 남을지니. 그 잿더미 아래 남은 인연은 ■■■■이 유일무이하게 구한 목숨이요, 그에 진 빚은 구원에서 구원으로 ■■■■■.]

[이제 잿더미 아래엔 더는 아무것도 없다.

남은 것은 심마[心魔]뿐.]

“…이제 잿더미 아래엔 더는 아무것도 없다. 남은 것은 …심마[心魔]뿐.”

목독의 마지막 두 줄은 비교적 최근에 적은 것 같았다.

앞의 글자와 글씨체가 미묘하게 다르기도 하고, 글자의 색이 앞의 것보다 진했다.

“…….”

서도로 깎여 나간 글자를 추론하며 목독을 만지작거렸다.

이 목독은 누가 쓴 거고, 누구의 것일까.

일단 이 목독이 발견된 장소부터 따져 보기로 했다.

개방 안가인 저 초옥은 무본이 말하길, 방치된 지 오래된 곳이라 했다. 과연, 오래 방치된 초가 특유의 퀴퀴함으로 가득했지만 곳곳에 생활감이 남아 있었다. 이는 이전에 누군가가 오래 머물렀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지금으로썬 그 이전에 살았던 이가 이 목독을 두고 간 이일 확률이 높다. 그러니 일단은 무본에게 물어 누구인지 알아내 볼까.

운이 따라 준다면야, 멀리 돌아갈 것 없이 바로 이 목독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땐 서도로 깎여 나간 글자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겠지.

“혼돈은 …‘공멸’의 힘을 가지고 있다.”

처음의 지워진 글자가 뭔지는 알겠는데, 나머지 부분은 계속 들여다봐도 모르겠다.

‘은원을 어지럽혀’라는 구절이 몽경에서 비천정이 말해 준 우사의 천명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뿐이었다.

설마하니 우사가 혼돈일 리는 없을 테고.

“유일무이하게 구한 목숨, 빚, 구원에서 구원으로…, 남은 것은 ‘심마’뿐이라….”

목독의 구절들을 띄엄띄엄 소리 내 읽어 보았다. 읽을수록 뭔가 묘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일반적인 내용 같지 않다 생각했지만, 이건…….

“…천기누설? 천명? 흠. 뭐, 그런 것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쪽 눈썹을 까닥- 치켜올렸다. 그러곤 다시 힐끔 목독을 내려다봤다.

보통 물건이 아니란 건 알겠다. 일단 챙겨 둘까.

목독을 소매 안으로 챙겨 넣기 무섭게 기감을 통해 계속 주시하고 있던 초옥 안의 기척이 움직였다.

초옥 안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걸로 보아 이제야 잠에서 깼나 보다.

마침 독서도 끝난 참이다. 연연이 나쁘지 않게 적기를 맞췄다.

나는 두 팔을 가볍게 휘둘러 소매를 떨치며 일어서선 바위에서 내려갔다. 그러곤 그대로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뒷짐 졌다.

곧장 이리로 달려오는 연연의 기척을 등진 채 멀리 숲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는 새와 그 새의 부리에 물려 있는 꽃송이 따위를 보고 있는데,

“사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연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연.”

그에 답하며 나는 비스듬히 몸을 돌려 연연을 돌아봤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연연의 낯이 해사해진다. 두 손에는 내가 책상에 두고 온 멱리가 쥐여져 있다.

용케 멱리 너울이 땅에 끌리지 않게 잘 잡았다.

“사부 주려고 챙겨온 거야?”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응!”

돌아오는 대답은 한 치 머뭇거림 없이 씩씩하기만 했다. 나는 그런 연연에게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장난감들은?”

침상 위에 한 아름 두고 온 걸 못 봤을 리는 없고. 장난감은 두고 내 멱리만 챙겨 들고 왔나?

내 물음에 연연이 한 손을 들어 초옥을 가리켰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한 거다. 문제는 그 바람에 잡고 있던 멱리 너울을 놓쳐 버렸다.

새하얀 너울이 땅에 끌려 더럽혀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더럽혀지는 정도에서 끝났다면 대충 흙먼지만 털어 내면 그만이었을 텐데, 이리로 오려던 연연이 발로 밟는 바람에 찢어져 버렸다.

연연의 발아래에서 찢어져 넝마가 된 너울을 보았다.

이래서야 못 쓰겠네.

술법을 쓴다면야 망가진 물건을 못 고칠 것도 아니지만…….

“사부….”

연연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눈치를 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순순히 고쳐 쓰고 싶지가 않다.

삐죽 튀어나오려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곤혹스런 표정 아래로 감췄다.

“아…….”

그리고 일부러 소리 내 침음을 흘렸다.

“사부…….”

그런 날 보는 연연의 얼굴에 낭패감이 짙게 서린다.

두 손으로 찢어진 멱리 너울을 모아 든 연연을 내려다봤다.

“사부가 멱리를 쓰는 것이 싫었느냐?”

분위기를 잡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깔았다. 자연히 주변 공기가 가라앉으며 무거운 분위기가 조성됐다.

연연이 울상을 짓는다. 완벽히 속아 넘어간 그 모습에 결국 입매를 허물어트리며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그래서 보란 듯이 망가트렸어, 연연?”

어투에도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배였다. 아까의 심란한 목소리와는 천지 차이였다.

연연도 그 차이를 알고는 내리깔았던 눈을 바로 치켜떴다. 똑바로 맞닿는 시선에 씩 웃어 버렸다. 이제야 자신이 놀림당한 걸 안 연연의 표정이 불퉁해진다.

“사부!”

따지듯 날 부르는 연연에 작게 소리 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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