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아침이나 사 먹으러 가자.”
웃음기가 묻어 나는 목소리로 말하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곤 뾰로통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이는 연연에게서 멱리를 가져왔다.
“멱리는 이제 됐어.”
손안에서 삼매진화를 일으켜 멱리를 그대로 태워 버렸다.
“사부?”
연연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그에 나는 가벼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처음, 멱리를 쓰게 된 이유는 날 보는 눈들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내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인 것도 있었다. 그런데 어제 야시장에서 사혈귀존을 그린 초상화를 봤다.
내 걱정이 쓸모없는 거였단 걸 그 초상화가 알려 주었다.
현재 널리 알려진 사혈귀존의 외향은 지금의 내 모습과 아예 달랐다. 털끝만큼도 안 닮았으니, 바로 코앞에서 두 눈 똑바로 뜨고 날 봐도 내가 누구인지 모를 거다. 어제 무본이 날 못 알아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정체를 들킬 염려는 없고…, 무엇보다도 현재 연연이 가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이다. 불의의 사고로 무슨 일이라도 터지게 된다면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연연이 특징 잡히게 된다.
연연의 얼굴이 특정되느니 내가 멱리를 벗을 생각이다. 그러면 반대로 연연의 인상이 흐릿해지겠지.
일종의 시선끌기인 셈이다.
멱리는 흔적도 안 남고 전부 타 버렸다.
무려 삼매진화로 태운 거다. 그 잔해가 남았을 리 만무하겠지만 나는 부러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연연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럼 갈까?”
의관을 갖추고 도착한 저잣거리는 한산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의 몇 안 되는 이들의 시선이 한 번씩 내게 꽂혔다. 어떤 이는 멈춰 서서 잠시간 넋을 놨고, 어떤 이는 일부러 돌아와선 한 번 더 내 얼굴을 보고 가기도 했다. 참 가관이다.
나는 그 모든 잡음들을 무시했다. 그리고 싸늘하게 굳으려는 표정에 의식적으로 미소를 그려 넣었다.
얼굴까지 드러낸 이상,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한동안은 잘, 좋게 있어야 한다.
인내를 발휘하며 코끝으로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곁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연연을 내려다봤다.
연연은 좌우로 줄지은 객점과 상점을 번갈아 가며 구경하고 있었다. 객잔과 주루를 제외하곤 대부분 일찌감치 문을 열었다. 작은 노점들도 드문드문 길가에 나와 있었다.
어떤 부지런한 상인은 벌써부터 유조(튀긴 빵)를 한 아름 쌓아 놨다. 그 향긋하고 기름진 냄새가 사방에 퍼졌다. 몇몇 사람들이 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유조를 사 갔다.
나는 그보단 만두와 묽은 죽을 먹고 싶었다. 짠지와 함께 먹으면 아침 식사로 적당할 거다.
연연도 유조는 그리 구미가 안 당기는지 스치듯 일별했다.
우리는 대로의 중심부에 있는 분수 근처까지 갔다. 식당이 그 근방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가게로 들어갈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처음 눈에 띈 가게로 곧장 향했다.
입구에 길게 늘어트려진 대나무 발을 젖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선객이 몇 명 있었다.
입구에서 가까운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 곧 점원이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왔다.
둥근 쟁반에 다기를 받치고 온 점원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넋을 놨다.
“조, 좋은 아침입니다!”
곧 요란하게 인사해 온다.
나는 속으로 깊은숨을 내쉰 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점원을 마주 보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그러자 점원의 얼굴에 화색이 감돈다.
“무엇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손님? 오늘 주방장 추천 요리는,”
들뜬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을 이으려는 걸 한 손을 들어 저지했다.
“만두와 묽은 죽을 각각 두 그릇씩. 그리고 곁들어 먹을 짠지도. …연연, 뭐 따로 먹고 싶은 거 있어?”
내 말에 연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그것들만 준비해 주면 되겠습니다.”
“아, 네!”
주문을 받은 점원은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무심히 일별한 뒤 자연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월수점[留樾秀]’이란 이름의 이 식당은 특이하게도 창에 창살이 없었다. 원[圓]의 형태로 난 창은 공창[空窓]이었다. 그래서 바깥의 자연풍이 무엇에도 가로막히지 않고 건물 안으로 밀려들었다.
오늘은 날이 좋아, 덕분에 풍광도 나쁘지 않다. 바깥으로 보이는 분수에 잠시 시선을 주고 있는데 때마침 그 앞을 지나치고 있던 이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반사적으로 숨을 짧게 삼켰다.
느슨하게 반 묶음한 머리에 면사로 가렸음에도 수려함이 보이는 아정한 용모, 그리고 훤칠하면서 늘씬한 체형을 돋보이게 해주는 검은색 장포까지.
날 직시해 오는 남자의 눈가엔 역린이 없었다.
그, ‘심마’다.
나만 바라보는 시선이 집요하기까지 하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한 채 설핏 미간을 좁혔다. 이 상태에서 눈을 떼자니, 한 수 접는 느낌이라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끝까지 쳐다보자니 뭔가 긍정적인 신호로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괜한 착각을 심어 줄 건 없지.’
속으로 생각을 마치고 나는 살짝 시선을 내리떴다. 내가 먼저 이 공방을 끝내 줬으니 눈치가 있으면 제 갈 길 가겠지.
상 위의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 입술만 축였다. 그리고 슬쩍 눈을 굴려 다시 창밖을 힐끔 봤다. 이만하면 갔겠거니 하는, 단순한 확인 차원에서였다.
그런데 다시 눈이 딱- 마주쳤다. 그걸로도 모자라 거리가 성큼 좁혀지고 있었다. 순간 당황해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쟤가 왜 안 가고 여기로 오고 있는 거야?
아니, 애초에 왜 여기 있는 거야?!
낙주가 그렇게 좁은 지역도 아닌데. 이렇게 아침 댓바람부터 마주치다니. 탐탁지 않은 우연이다.
심마는 이쪽으로 걸어오며 한 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공창[空窓]을 사이에 두고 심마와 마주했다.
창 바로 바깥에 선 심마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날 보며 웃고 있는 눈매가 얇게 휘어진다.
“식사 나왔습니다!”
때마침 점원이 둥근 쟁반에 만두와 묽은 죽, 그리고 짠지를 담아 가져왔다.
심마는 상에 차려지는 음식들을 가볍게 훑어보곤 이내 옆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점원의 우렁찬 인사 소리가 식당 내에 울려 퍼졌다.
“…….”
내 이럴 줄 알았다.
목이 타는 기분이다. 찻잔을 든 손의 손목을 단번에 꺾어 단숨에 마셔 버렸다.
문을 등지고 앉은 터라 방금 식당에 들어온 이의 행방을 쫓을 방법은 기척 잡기뿐이다.
슬며시 기감을 열어 이리로 다가오는 기척을 예의주시했다. 펼친 감각이 점점 예민해지며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손안의 찻잔을 매만지다가 내려놓았다.
“사부?”
그새 만두 하나를 집어 든 연연이 의아해하며 나를 부른다. 보아하니 이미 한 입 베어 먹었다.
잇자국이 선명하게 난 만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연연-”
타이르듯 부르며 내 몫의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식사 때는 사부가 먼저 먹은 다음에 먹으라고,”
말을 잇다가 잠시 멈췄다. 내 바로 옆에 선 기척이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 앉았기 때문이다.
“…했을 텐데.”
아까 하다 만 뒷말을 천천히 읊조리며 힐끗 시선을 돌려 내 옆에 앉은 이를 보았다.
설마 합석을 할 줄이야. 그것도 먼저 양해를 구하지 않고 원래 일행인 것처럼 앉아 버렸다.
나는 심마를 마뜩잖게 쳐다봤다.
“자리를 잘못 찾은 듯한데.”
내가 먼저 나직이 운을 뗐다. 적당히 눈치 줘서 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심마는 요지부동이었다.
“아. 제대로 찾은 거 맞소.”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모습에 표정을 싸늘히 굳혔다.
내가 지금 너와 농이나 주고받자는 것 같아?
“그럴 리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응대하며 빈 찻잔의 뚜껑을 닫았다.
달칵.
다음 순간, 옆에 앉아 있던 심마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
놀란 연연이 짤막한 소리를 냈다. 손에 들고 있던 만두는 얌전히 내려놓은 채였다. 내가 가르친 식사 예절이 떠오른 모양이다.
나는 가벼이 어깨를 으쓱여 보인 뒤 찻잔에서 손을 뗐다. 찻잔 뚜껑이 조금씩 들썩인다. ‘공간 전이술’을 이용해 찻잔 안으로 옮겨 넣은 심마가 움직이고 있는 거다.
“이제 먹자.”
연연의 어리둥절한 얼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묽은 죽을 들어 그릇째 호탕하게 마셨다. 건더기가 거의 없고 밍밍해 삼키기 쉬웠다.
깨끗이 비운 그릇을 내려놓으며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런데 그때 눈앞에서 손수건 한 장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손수건이 떨어지는 궤적을 눈으로 좇다가 심마와 눈이 마주쳤다. 그새 찻잔 뚜껑은 뒤로 조금 열려 있었다. 그 약간의 틈으로 심마가 머리를 내민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때마침 손수건이 다시 팔랑- 위로 올라갔다. 선력으로 조종하고 있는 거였다.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손수건을 한 손으로 낚아채 잡았다.
“내 것이오.”
기다렸단 듯 심마가 말했다.
“가져도 좋소.”
이어 말하는 심마의 두 눈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그에 나는 보란 듯이 심마가 보는 앞에서 손수건을 찢었다.
부욱-
정확히 반으로 등분된 손수건을 미련 없이 손에서 놨다. 그러곤 비소를 지으며 도로 찻잔 뚜껑을 닫았다.
“…사부…?”
그리고 그제야 연연이 눈에 들어왔다. 날 부르는 연연의 눈이 찻잔과 찢어진 손수건을 바쁘게 오간다. 이런. 연연의 앞에선 가급적 참된 스승의 모습만 보이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보다 그…, 만두는 어때? 맛있어?”
이어 뒤늦게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연연의 흥미는 찻잔에 가 있었다. 자리에 앉은 채 엉덩이를 꿈질대는 걸 보아, 여차하면 찻잔을 가져가 들여다볼 심산인 게 분명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 찻잔을 사수하며 상 위의 음식들을 눈짓했다.
“더 안 먹어? 이제 다 먹었어?”
한 손으로 찻잔을 들며 다른 한 손으론 찻잔 뚜껑을 꽉 내리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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