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입구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주렴이 바람이 불 때마다 서로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안에는 선객이 몇 있었지만 대체로 한산했다.
나는 곧장 연연을 찾아 눈을 굴렸다.
연연은 장신구가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 가판대 근처에 서 있었다. 점원이 그 곁에 붙어선 말을 걸고 있었다.
“공자, 누구랑 오셨나요?”
퍽 정중한 어투였는데, 현재 연연의 차림새가 단정한 걸 보곤 눈치껏 구는 모양새였다.
반면 연연은 그런 점원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처음부터 내가 들어올 입구만 보고 있었던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연연과 딱 눈이 마주칠 리 없으니까.
내가 곧 저를 뒤따라 올 거라고 확신한 모양이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연연은 곧장 내 곁으로 달려와 섰다.
“아. 어서 오세요, ‘유연재’입니다.”
날 본 점원이 바로 공손히 인사해 왔다. 그에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받았다. 이제 점원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선사님 쪽의 자제분이셨군요. 혹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신지요?”
“물건을 고르는 건 내가 아니라서.”
한 손으로 연연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그러자 점원이 눈치껏 바로 타깃을 연연으로 바꾼다.
“공자님, 마땅히 생각해 둔 물건이 없다면 소인과 함께 한 번 둘러보시겠어요?”
“…….”
연연은 내 옷자락을 한 번 꼭 잡았다가 놓은 뒤 점원에게 가 버렸다. 점원은 그런 연연을 아이들의 흥미를 끌 만한 물건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 모습을 얼마간 지켜보다가 나도 주위로 신경을 돌렸다.
주변의 잡다한 물건들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여태 옆구리에 끼고 있던 화본이 문득 생각났다.
생각난 김에 나는 가게의 가장 구석진 가장자리로 가서 화본을 대충 펼쳐 들었다.
[물가에 달그림자].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휘리릭 넘겨 보니 간간히 삽화도 보였다.
‘삽화도 있네.’
우선 삽화부터 볼 생각에 처음으로 돌아왔다.
한 남자가 벼랑 위에서 등을 진 채 서 있는 장면이었다. 펄럭이는 옷자락이며 흔들리는 머리카락까지, 제법 유려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다음 삽화가 그려져 있는 쪽수로 넘어가려는데, 주렴이 한 차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들어왔나 보다. 그리고 익숙한 기운도 느껴졌다. 나와 파동 되는 기운이라 자연히 끌림을 받았다.
이건 내가 심마에게 붙여둔 동동의 기운이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다가오는 기척에 최대한 그쪽으로 시선을 안 주려 애썼다. 화본에 눈을 고정한 채 아무 감흥 없이 쪽수만 팔랑팔랑 넘겼다.
기척은 나를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안도감보다는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당연히 아는 척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의 전적도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식당에서 불미스런 일이 있었지.
찻잔에 들어 있는 심마를 그대로 창밖으로 던져 버렸으니까.
나는 화본을 얼굴께까지 올리며 곁눈으로 방금 지나쳐 간 심마를 보았다.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선 심마는 옥팔찌, 비취반지, 홍옥이 달린 비녀 따위를 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여인들이 착용할 법한 장신구들이다. 누군가에게 선물해 줄 생각인 건가.
어찌나 심도 깊게 고르는지 이쪽엔 눈길도 안 준다. 어느새 훔쳐보던 것도 잊고 대놓고 심마를 쳐다봤다. 마침 심마는 제 앞의 작은 보석함을 들고 있었다. 수려한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함을 살피는 그 옆얼굴을 보았다.
날 못 본 척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못 본 건가?
이렇게까지 보고 있는데 내 시선을 못 느낄 정도면 저 함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 거야?
그나저나 여기에서 또 마주치다니. 우연치곤 잦다.
어느새 나는 한쪽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속의 동요가 겉으로 드러난 거다. 그걸 뒤늦게 알아채곤 황급히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그리고 인상을 구기며 억지로 시선을 돌려 다시 화본을 봤다. 심드렁하게 팔랑팔랑 넘겨 봤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입안 여린 살을 짓씹으며 속으로 깊이 숨을 내쉬었다.
이미 내 모든 신경은 옆의 심마에게 쏠려 있었다.
심마가 점차 내 쪽으로 다가온다. 앞의 물건들을 둘러보느라 저도 모르는 새 다가오는 듯했다.
좁혀지는 거리가 신경 쓰여서 다시 힐끔 시선을 돌려 심마를 살폈다. 이쪽에 누가 서 있건 말건 관심도 없는 눈치다.
상대가 저렇게 무심하게 나오니, 과하게 신경 쓰는 것 자체가 바보같이 느껴진다. 눈 바로 아래까지 올렸던 화본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아까보단 경계가 덜한 상태로 이번엔 좀 더 여유 있게 심마를 살펴봤다. 아까 식당에서 너무 냅다 던졌었는데.
심마의 어깨와 팔, 다리 부근을 중심적으로 보고 있는데 심마가 미묘하게 절뚝였다. 아깐 몰랐는데 이제 보니 거동이 약간 불편해 보인다.
식당에서의 일 때문에 다친 건가.
코끝으로 무거운 숨을 내쉬며 보고 있던 화본을 덮어 소매 안 아공간에 넣었다. 그러면서 안에 넣어 둔 고약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고약이 든 병을 집었다 놓기를 반복하다가 툭, 미끄러트렸다. 작은 병이 소매에서 떨어져 심마에게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심마의 목화(신발)에 부딪치고서야 멈춘 병을 아주 찰나만 일별한 뒤 바로 돌아섰다.
한시바삐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 내 심정을 연연이 기적처럼 알아채고 내게 여기서 나가자고 말해 주길 바랐다.
“이것, 떨어트렸소.”
그런데 들려온 목소리는 심마였다.
나는 심마에게서 돌아선 채 서선 마른침을 삼켰다.
…목소리를 내면 들킬 것 같은데.
그냥 대답하지 않기로 하고 최대한 초연함을 가장하며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 나를 심마가 붙잡은 건 다음 순간이었다.
“이보시오. 물건 흘렸다니까. 자, 고약이오.”
등 뒤에서 내 팔을 붙잡고선 내 손에 직접 고약을 도로 쥐여 준다.
“…….”
나는 속으로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필요 없소.”
이를 악물고 말하며 손에 쥐여 준 고약을 도로 놓으려 했다. 그러자 심마가 내 손을 제 손으로 감싸며 고약을 꼭 쥐게 한다.
미칠 것 같다.
“하지만 고가의 상품[上品]에 새것이잖소. 물건은 아껴야지.”
“…….”
말하지 않아도 고가에 새것이란 건 내가 더 잘 안다.
“…난 한 번 놓은 건 다신 거두지 않으니, 정 아까우면 당신이 가지시오.”
정체를 들키지 않게 최대한 목소리를 깔며 답했다.
그 말에 등 뒤의 심마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내 손을 감싸 쥔 손에 약간의 힘만 더해졌다.
“…그렇다 하여도 고약은 이미 당신의 손안에 있소. 이렇게 다시 돌아왔는데 내치는 건 너무 가엾지 않소?”
“…….”
“이 고약, 분명 엉엉 울 거요.”
고약이 엉엉 운다니.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이죽거렸다.
“자-, 아껴 주시오.”
고약을 쥔 내 손을 토닥이며 심마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윽고 내 손을 쥐고 있던 심마의 손이 떨어졌다. 나는 심마가 고약을 쥐여 준 그대로 주먹 쥔 채 소매 안으로 넣었다.
고약을 도로 가져가는 건 심마의 바보 같은 말에 감화되어서가 아니다.
…바보 같긴. 정말 바보 같다.
고약이 우는 걸 신경 쓰기 이전에 자기 몸이나 돌볼 것이지.
소매 안 아공간에 고약을 대충 던져 넣은 뒤, 앞으로 나아갔다.
심마는 다시 날 붙잡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걸음걸이가 거칠어진다.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유연재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뒤늦게 연연이 아직 유연재 안에 있단 걸 떠올렸다.
‘전이술’을 써 단번에 내 옆으로 데려오려다가 관두었다. 아까 언뜻 봤을 때 연연이 가게 구경에 푹 빠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이 자리부터 피하기로 했다. 계속 유연재 입구에 있다간 자칫 심마와 마주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연연이 심마보다 먼저 나올 거란 보장도 없으니까.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러니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해서 어디가 좋을지 가늠해 보다가 유연재 전각 위 지붕으로 결정했다.
지붕 위면 안의 용태를 살피기에도 수월할 거다.
가볍게 지면을 박차고 올라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유연재 지붕을 딛고 섰다. 부는 바람에 옷자락이 크게 너풀거린다.
이제 여기서 연연의 가게 구경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바로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편하게 앉았다. 그리고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한쪽 무릎에 팔을 대고선 그 손에 턱을 괬다.
한껏 느슨해진 자세였지만 마음은 도통 그러질 못했다. 이 지붕 아래에 있을 이 때문이란 걸 스스로도 잘 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나 자신을 제대로 속이지 못한다.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늘 어설프다.
그러니까,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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