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미간을 구기며 눈까지 아예 감아 버렸다. 유유히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과 옷 끝자락을 흔든다. 감은 눈꺼풀 안쪽,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은 건 절뚝거리는 심마였다.
“…….”
턱을 괴지 않은 다른 손으로 나머지 한쪽 무릎을 간헐적으로 두드렸다. 그러다 감고 있던 눈을 느리게 다시 떴다. 때마침 내 발치를 지나가고 있던 개미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나는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하며 개미를 쫓아 눈을 굴렸다.
“개미야.”
코끝으로 짧게 숨을 내쉰 뒤 개미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가? 가족한테 가는 거야?”
개미를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허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받쳤다.
“너…, 지금 누구 앞을 지나가는 줄 알아?”
제 갈 길 열심히 가는 개미를 눈으로 좇으며 중얼거렸다.
“이 몸은 말이지, 아주 무시무시한 악질…,”
말을 끝맺기도 전에 개미가 전각 지붕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제집으로 간 거다.
나는 개미가 사라진 곳을 보다가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숙였던 허리를 펴며 한 손으로 목 뒤를 매만졌다.
그러다 소매 안에서 아까의 고약을 꺼내 손안에서 굴렸다.
“…….”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손안의 고약을 던졌다 받길 반복하며 손장난하다가 어느 순간 곁에 내려놨다.
…이건 여기에 두고 가자. 그가 갖든, 갖지 않든.
생각 정리는 끝났다.
마침 지붕 아래 연연의 기척도 입구의 문으로 향하고 있다. 조만간 가게 밖으로 나올 거다.
나는 양손을 탁탁 털며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그리고 연연이 가게 밖으로 나오는 것에 맞춰 아래로 뛰어내렸다. 낙하에 넓게 펄럭이며 너울진 옷자락은 땅에 착지함과 동시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한 손을 뒷짐 지며 문을 향해 돌아섰다.
막 문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나와 마주했다.
‘…응?’
나도 모르게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연연과 심마였다.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설마 둘이 같이 나올 줄은 몰랐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심마가 미소 짓는다. 양 입꼬리가 위로 싱긋 올라가며 웃는 그 얼굴이 몹시 수려하다. 일순 심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형’
환영과 같은 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원멸’ 이전의 기억이다.
‘우리 내일은 호수에 가 뱃놀이하자. 분명 즐거울 거야.’
지금 이 순간 왜 그 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나빴던 기억보다 좋았던 기억이 더 불쑥불쑥 치밀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때인 걸까.
‘그렇지?’
내게 묻는 그 목소리를 끝으로 환청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내 앞의 심마뿐이다.
“귀존.”
“사부!”
심마가 나를 부르는 것과 동시에 연연이 버럭 외치며 내게 안겨 들었다.
두 손으로 내 옷자락을 꼭 잡는 연연의 등을 한 손으로 토닥여 줬다.
연연이 그런 나를 올려다본다. 먼저 가게 밖으로 나간 것에 대해 따져 묻는 눈초리다. 불퉁한 얼굴은 날 힐난하는 기색으로 가득했다.
“사부…!”
칭얼대는 연연을 번쩍 안아 들어 왼팔 위에 앉혔다. 연연은 곧장 두 팔을 뻗어 내 목을 꼭 끌어안아 왔다.
“그래, 그래.”
대충 달래 주며 바로 몸을 틀었다. 이만 이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제자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런 내 뒤로 심마가 말을 걸어 왔다.
“일전에 정기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게 그것 때문이오?”
상대 자체를 안 할 생각이었는데,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어째서?”
심마가 되물었다. 덤덤한 어투였지만, 그 이면엔 당혹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고집스레 정면만 응시했다.
“…후회하니까.”
그리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내가 만들었고, 내가 완성시킬 거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코끝으로 가는 숨을 내쉬며 턱 끝을 살짝 치켜들었다.
“…정기는 어떤 방식으로 취할 생각이오?”
“왜, 이번엔 네가 날 저지하고 죽이려고?”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불쑥 나왔다.
혀끝을 세게 깨문 뒤 일부러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이제야 마주 본 심마는 창백한 무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심마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저건 내원근이 없지 않소?”
한참 후에 심마가 물었다.
“내가 있으니 상관없어. 그리고 네가 상관할 일도 아니고.”
내원근이 없는 연연 대신 내가 직접 선인들의 피에 몸을 담글 생각이다. 그렇게 정기를 모은 뒤 정화해서 연연에게 전해 줄 계획이었다.
“…….”
심마는 말이 없었다. 내 속내를 알아챈 눈치였다.
날 보는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진연.”
짧은 침묵 끝에 심마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제까지의 ‘귀존’이란 호칭이 아닌, 분명한 명칭에 순간 놀랐다. 예상치 못한 부름이었다.
낯익은 목소리로 불린 내 이름에 일순 미간을 찡그렸다. 이름 정도 불린 걸로 동요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짜증 난다.
기실, 심마가 내 이름을 알고 부르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오연의 제자가 진연이란 건 알 만한 선사들은 다 아는 이야기니까. 게다가 비교적 흔한 이름이기도 해서 특정 지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니 무본도 내 이름을 듣고서도 나와 사혈귀존을 연관 짓지 못한 거고.
“…그래, 알았어.”
잠깐의 정적 끝에 심마가 말했다. 이제까지의 경어며 하오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말투였다.
이름 부르기에 이어 반말이라.
…그래, 뭐.
마음을 정리한 뒤 양 눈썹을 추켜올리며 심마를 보았다. 어디까지 하나 볼 심산이었다. 품 안의 연연이 그런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도와줄게.”
오래지 않아 심마가 이어 말했다.
…뭐?
순간 속으로 반문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해서 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심마는 사뭇 심각한 얼굴로 그런 날 보기만 했다.
나는 귀를 후비던 손을 내리며 인상을 썼다.
“정신이 나갔군.”
한 마디로 일축하며 일갈했다.
“꺼져.”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뒤돌아서려는 찰나,
“그럴 순 없소.”
심마의 말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에 헛웃음을 내비치며 비소를 지었다. 역시 아까 돕겠다는 그 말은 허튼 개수작이었던 거다. 진심이었을 리가 없지. 그는 마도를 걷는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선사니까.
그러니 지금 나를 저지하려는 거고.
“…그러면? 괜한 헛소리 말고, 날 저지하겠다면 상대 못 해 줄 것도 없지.”
“아니. 날 상대할 것 없소. 저지하지 않을뿐더러 지난 후회를 청산하는 걸 도울 거니까.”
심마가 다시 아까의 그 헛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방금 당신이 말한 그런 방식으론 안 되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역시나 본색이 따로 있었다.
날 선도라도 할 셈인가.
“내가 싫다면?”
삐딱하게 굴며 말했다.
“괜한 참견 말고 네 갈 길 가.”
“이게 내 길이오.”
“…사부.”
내 말에 심마의 말대꾸와 연연의 칭얼거림이 잇따라 뒤따른다.
한쪽 입매를 비틀며 속으로 크게 숨을 삼켰다.
상대가 안 꺼지겠다면 내가 가면 그만이다. 소맷자락을 매섭게 떨치며 냉랭히 돌아서선 앞으로 저벅저벅 걸음을 내디뎠다.
“진연!”
그런 내 뒤로 심마가 크게 나를 불렀다.
물론 나는 돌아서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혀로 볼 안쪽을 누르며 인상을 썼다. 지금 속이 답답한 건 성가심 때문일 거다.
“내가 다른 방도를 알고 있소!”
“…….”
그냥 무시하기로 결정하고 발을 놀리는데 머릿속으로 전음이 들려왔다. 심마다.
[신당의 신상[神像]에는 정기가 담겨 있어, 신상을 부수면 정기를 얻을 수 있소.]
전음의 내용에 놀라,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어떻게 ‘선사’면서, 귀신(귀족)인 내게 저런 제안을 할 수 있는 거지?
본인이 누군지 잊은 게 아니고서야.
돌아본 등 뒤에는 여전히 심마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극악한 길로는 가지 마시오.]
“…….”
본인이 누구인지도 잊고, 내가 누구인지도 잊은 것 같은 모습으로 심마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에 나는 화답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속에 늪과 같은 무언가가 고인 것처럼 답답하다.
의식적으로 앞으로만 내딛던 걸음이 멈춘 것은 그로부터 한참 걸어온 뒤였다.
뒤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
“사부-”
품 안의 연연이 이만 내려달라고 해서 내려줬다. 그러고도 잠시 멈춰 섰다.
“사부~”
내가 움직이질 않으니 연연이 내 옷 끝자락을 붙들고 흔든다. 그에 나는 손을 들어 언제부턴가 인상을 쓰고 있던 미간을 꾹꾹 눌러 폈다.
‘…심마.’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건 기만에 가까운 ‘눈 가리고 아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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